지금 이대로도 괜찮아 - 유쾌한 정신장애인들의 공동체 '베델의 집' 이야기
사이토 미치오 지음, 송태욱 옮김 / 삼인 / 200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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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주 전 1박 2일의 바닷가 여행중 새해 축하 메시지를 받았다.

--로드무비야, 악운은 내가 전부 가져갈 테니까, 너는 행복하기만 해야 해!

오래 전 꽤나 가깝게 지냈던  분에게서 온 문자였다.
공교롭게도 내 결혼 무렵, 환청을 듣기 시작해 어느 해인가는 증상이 꽤 심각해져서
병원과 산사를 오가며 치료를 하고 계시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환청을 그대로 기록한 장편소설을 써서 내게 한 번 보아달라고 속달로 보내온 적도 있었다.

나도 만나본 적 있는, 믿음직한 남편과 공부 잘하는 자식이 둘이나 있고, 소설도 쓰시고
도대체 무엇이 문제인 거냐고 속으로 투덜거리면서도 마음이 쓰였다.
그런 증상이 나타나기 전에도 도무지 남의 눈치 같은 것 볼 줄 모르고,
내키는 대로 말하고 행동해서, 사람들의 이상한 시선을 자주 받았던 그였다.
그런데 나는 그때 이미 알고 있었던 것이다.
자신의 이익에 따라 말과 표정을 꾸밀 줄 모르고, 사실은 너무나 순수하고 마음이 여려서
보통사람보다 몇 배 크게 받았던 억압과 상처들이, 그때 한꺼번에 분출된 것이라는 것을.
(베델의 집을 시작하고 오늘날을 가능하게 했던 사회복지사의 생각도 이와 같다.
그러니 그렇게 한결같은 믿음과 사랑을 나누며 살고 있는 거겠지!)

악운을 내 대신 전부 가져가겠다는 말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인사말이 아니다.
바닥의 바닥, 더이상 내려갈 수 없는 인간의 심연을 들여다보고 온 이라도
하기 어려운 말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가슴이 찌르르해져서 당장 전화를 걸었다.
다행히 전화를 받는 목소리가 밝고 차분해서 얼마나 다행이었는지 모른다.


일본 북해도의 우라카와 마을에는, 우울증, 알코올 중독, 정신분열증 등을 앓고 있는 사람들이
'베델의 집'이라는 문패를 달고 공동작업으로 다시마를 포장해 팔아 생활하고 있다.
그들은 자신을 처음 소개할 때, "정신분열병자인 마쓰모토입니다" 혹은,
"정신이 흐트러진 상태에 있는 하야사카입니다"라는 식으로 스스럼없이 말한다.
"제가 가끔 이상해져도 잘 부탁합니다!"라고 천진난만하게 소개하는 사람들이라니,
얼굴을 한 번 보고 싶을 정도다.(사진이 나와 있다.)

그들은 자신의 병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있으며, 하루빨리 나아서 사회에 복귀하겠다는
그런 꿈은 꾸지 않는다. 인생에 대해 포기한 결과가 아니라 납득한 결과이다.
세상에 적응할 수 없었던 자기 자신과 제대로 화해를 한 결과이고, 그뿐 아니라
이제는  병을 앓는 동료들과 마음 깊이 연결이 되어 있다.
어느 날 '당신의 병이 하루빨리 치유되기를 기도합니다'하는 편지를 받은 베델의 집 식구
마쓰모토 씨는 입을 삐죽이며 이렇게 말한다.

"나으면 곤란해요. 병이 나아서 예전처럼 끝까지 견디며 노력이라도 하면 어떻게 해요?"
예전처럼 힘껏 노력하면 자신의 이 인생은 사라지고 만다. 일찍이 그렇게 견디며 버티던 나날이
얼마나 황량한 풍경을 낳았는지 아직도 기억에 생생한 것이다.(199쪽)

있는 그대로의 자신으로 살고, 약한 그대로의 자신을 드러내놓고 사는 그들의 이야기에
이런저런 인연으로 방문을 했던 사람들은 매료당한다.
저널리스트로 베델의 집을 취재하게 된 이 책의 저자 사이토 미치오도 마찬가지!

--저널리스트가 취재대상에 동화되어 사로잡힌다는 것은 보통은 역부족의 증거다.
(...)그런데 취재를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나는 거기서 저널리스트로서의 윤리라든가 역량,
그런 것이 아무 의미가 없을 정도로 자기 자신이 질문 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정신장애를 알고 이해하려고 시작된 취재는어느새 애초의 주제에서 동떨어져,
인간이란 무엇인가, 산다는 것은 어떤 것인가, 하는 것들을 생각하는 나날들로 바뀌어 있었다.(284쪽)


'모든 겉치장을 없앤 뒤에 나타나는 인간의 원초적인 모습'으로 때로는 치고박고 문제투성이의
삶을 그대로 살아가는 베델의 집 사람들, 이 세상에 정말 그런 곳이 있다니 책을 읽는 것만으로도
뭔가 안심이 되는 기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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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dan 2006-02-06 00: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쇼생크탈출]에서의 한 장면이 생각나요. 갇혀지내는데 익숙해진 웬 할아버지-젊어서 감옥에 들어왔음직한-가 감옥을 벗어나야 하니까 스트레스를 못 이기고 자살하던가요?
우울증, 알콜중독, 정신분열. 그래도 병은 병이고, 병은 나아야해요.(너무 매정한 소린가)

sudan 2006-02-06 00: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앗. 제목을 지금 봤어요. 제목부터 읽었으면, 저런 매정한 댓글 다는게 아니었는데!

로드무비 2006-02-06 00: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병이 안 나아도 좋다,가 아니라, 병은 꼭 나아야 한다는 강박에서
자유로운 것이라고 해석해 주세요, 수단님!^^

로드무비 2006-02-06 00: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역시 수단님!ㅎㅎ

sudan 2006-02-06 00: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헤헤헷. 리뷰 쓰기에 적당치 않으신 상황이라면, 지금 일하시는 중인가봐요. 밤늦게 로드무비님 보는 건 흔한 일이 아닌데.

프레이야 2006-02-06 00: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나름대로 사는 맛이죠. 통쾌하게요^^ 이상해진다 생각말고 행복하세요~

로드무비 2006-02-06 00: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1시 10분까지만 놀고 커피 한잔 마시고 밤 새워야 할까 봐요. 수단님!
(야밤에 님을 딱 만나니 우찌 이리 반가운지...ㅎㅎ)

로드무비 2006-02-06 00: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배혜경님, 저 제목, 책 속의 말 그대로 인용한 거예요.ㅎㅎ
아니 뭐 저 말이 제가 하고 싶은 말이기도 하군요.^^

서연사랑 2006-02-06 01: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있어요. 지금 이현우의 '슬픔속에 그댈 지워야만 해' 들으면서 알라딘해요. 며칠 안 남은 방학을 아까워하면서....
근데 노래때문인지 이상하게 감상적이 되어서는 자꾸 눈물이 나려고 하네요. 참 주책이죠..

라주미힌 2006-02-06 01: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k-pax라는 영화가 생각나용.

로드무비 2006-02-06 01: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커피 타온 사이에 서연사랑님이......
눈물이 나는 건 괜찮은 거라 생각해요.
좀 감상적이면 어때요. 전 눈물이 메말라버릴까봐 걱정인데요.
며칠 남은 방학 신나게 보내세요!^^

로드무비 2006-02-06 01: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무슨 영환지 나중에 찾아볼게요, 라주미힌님.^^

바람돌이 2006-02-06 02: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방금 혼자서 <너는 내 운명>보고 눈물을 바가지로 퍼붓다가 들어왔어요. 방금 본 영화랑 이 글이 어울린다는 생각이... ^^

urblue 2006-02-06 09: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각자 본 것과 이 글을 연결시키시는군요. 전 <메종 드 히미코>의 인물들이 떠오르는데 말이죠. 음. 역시 좋은 리뷰의 힘? ^^

로드무비 2006-02-06 09: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블루님, 그렇네요. 메종 드 히미코랑 뭔가 만나는 지점이 있어요.^^

바람돌이님, 방학이라고 야밤에 새벽에 불타오르는 생활이로군요.ㅎㅎ

새벽별님, 덕분에 일단 약속한 일은 아침에 넘겼습니다요.^^

mong 2006-02-06 09: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늘 이상한 저도 잘 부탁합니다!
=3=3=3

로드무비 2006-02-06 09: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mong님, me too!=3=3=3

플레져 2006-02-06 12: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소설가 김연수씨가 어느 소설에서 그런 말을 했어요.
인생은 납득하는 것이다 (이등박문과 관련된 소설이었던듯...)
전 아직 안 이상하죠? 이상하지 않아도 잘 부탁해요...캬캬~

blowup 2006-02-06 12: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뭔가 울컥하게 만드는 글이군요. 로드무비 님. 그런데 이렇게 고개를 끄덕이는 제 자신도 좀 못마땅해요. 이렇게 쉽게 납득해서는 안 될 것도 같아요. 그럼, 그래서, 그들은 자기들끼리 모여 살아야 하는 건가, 싶기도 하고. 로드무비 님이 뽑아주신 모든 문장에 '그렇구나' 싶으면서도, 어쩐지 제 자신이 교활하다는 생각이 드네요.

숨은아이 2006-02-06 14: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가끔 이상해져도 잘 부탁합니다!" 제목 참 기막히게 뽑으셨네요. 역시... ^^b
나무님, 베델의 집 사람들은 고립되어 있지 않답니다. 어떤 "보호" 아래에서 자기들끼리만 살지 않아요. 베델의 집에는 보호와 관리가 없다고 하지요. 여기 사람들은 마을의 사람들 속으로 들어가 직접 부딪쳐 일하고, 사업체도 운영한답니다.

산사춘 2006-02-06 14: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차에 치이고 나서 니 악운 내가 다 가져갈께라고 울먹이던 차운전자에게 말씀하셨던 그 분이 갑자기 떠오르네요. 연락을 해봐야 겠음다. 고맙, 꾸벅~

blowup 2006-02-06 15: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숨은아이 님. 그렇군요. 아무래도 저 책을 읽어봐야겠어요. 숨은아이 님이 저 책의 '전파사' 혹은 '전도사'인 것 같은데. 무슨 관련이 있으신 건지, 여쭤봐도 되나요?

숨은아이 2006-02-06 15: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무님/저 책과 직접 관련은 없고요, 저 책 낸 출판사와 관련이 있긴 해요. ^^a 그래서라기보다 올해 들어 처음 읽은 책인데, 참 좋았거든요. 제게 진한 느낌을 전해준 책이 잘 알려지지 않은 게 안타까워서요.

2006-02-07 05: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가끔 이상해져도 잘 부탁합니다! 제가 종종 사용해야 할 말일 듯^^

로드무비 2006-02-07 08: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참나님, 저도요. 우리 서로!^^

숨은아이님과 나무님, 얘기 나누고 계셨군요.
숨은아이님, 제가 생각해도 제목 하나는 잘 뽑아요.(잘난척)ㅎㅎ
나무님, '교활'이라는 단어에 대해서라면 저도 할 말이 많습니다만.
천천히 얘기 나누기로 하고요. 아무튼, 이 책 꼭 읽어보셔요.^^

산사춘님, 저도 님의 그분께 감사를!^^
(아이구, 큰일날 뻔! 그런 일이 있으셨군요. 궁금해요, 페이퍼로 좀.)

플레져님, 김연수 씨 책도 사놓고 못 읽고 있습니다.
납득, 이라는 단어 묘하죠?
용납, 이라는 단어에 대해 페이퍼 쓴 적도 있지만.ㅎㅎ




Mephistopheles 2006-02-07 11: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런 분과 가깝게 지내시는 로드무비님과 로드무비님과 가깝게 지내시는 저 분이 부럽기 그지 없네요..^^

로드무비 2006-02-07 12: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메피스토님, 심히 찔립니다.
제가 아주 매정한 인간이거든요.
앞으로 좋은 사람이 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니르바나 2006-02-07 20: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드무비님은 참 인덕이 많으신 분이십니다.
좋은 글을 쓰시고, 좋은 말씀 주시고...

로드무비 2006-02-08 11: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니르바나님, 아이참, 부끄럽게.
아닙니다. 요즘은 끈 떨어진 뭐 같은 심사로 삽니다.
이 책 읽어보실래요?

2006-02-12 16:30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드무비 2006-02-12 17: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속삭이신 님, 저 말은 저도 사람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에요.
기분이 좋아지셨다니 다행입니다.^^

icaru 2006-05-12 11: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님 리뷰 보고... 이 책 읽기 시작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