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당 얼마를 받기로 하고 요식업체의 종업원 신분으로 새마을연수원에 2박 3일 ,
위장취업을 한 적이 있었다.
그러니까 가설라무네 내가 대학을 졸업하고 3년째 시립도서관이나 오가며 주야장창 놀던 때의 일이다.
세상에 얼마나 돈이 궁했으면 그런 아르바이트 자리를 수락했을까!
여기서 '그런 아르바이트'의 방점은 요식업체 종업원 신분의 위장취업이 아니고 ,
24시간 풀 근무의 단체생활에 찍힌다는 것 정도는 아시죠?

지금 생각하면 그 당시 내겐 두 가지 마음이 있었다.
내가 이런 데 와서 일당 얼마에 품을 팔 인간은 아닌데, 하는 오만.
그리고 두 번째는 정말 그들이 부러웠다.
요식업체에 근무하는 종업원, 그 고단한 생활을 내 짐작 못하는 바 아니었으나,
어딘가에 소속되어 하루종일 일을 하고, 월말이면 월급봉투를 받고, 회식에도 참석하고.
나는 정말 그런 것이  얼마나 부러웠는지 모른다.

그 두 가지 마음은 지금도 그대로 내 속에 살아 있다.
오만과 열등감의 교차와 난립으로......

아무튼 2박 3일 몇 푼 되지도 않는 돈을 벌기 위해,  영도구 남항동인가?
산꼭대기의 새마을연수원 에서  금쪽같은 청춘의 사흘을 보냈다.

그 시간들은 대부분 수상한 강의들로 채워져 있었다.
강당에 모여 이런저런 강사들의 정신교육 쪽 강의를 하루종일 들어야 했는데,
어느 날, 내 옆자리에 앉은, 불면 날아갈 것 같은 얇은 몸피의 내 또래 아가씨가 눈에 띄었다.
그녀의 날깃날깃한 하늘색 청바지 허벅지 쪽(오른쪽인지 왼쪽인지는 모르겠고) 에는 
생떽쥐베리의 <어린 왕자>의 한 삽화(지평선을 상징하는  가로 선과,  그 위를 지나가 만나는
비스듬한  각도의 선, 그리고 별 하나)가  볼펜으로 그려져 있었고,
'나는 슬프다'라고 예쁜 글씨로 적혀 있었다.

 그 청바지의 볼펜으로 그린 삽화와 한마디 말은 이상하게도 지금까지 또렷하게
내 머리속에  각인되어 있다. 주근깨가 많았던 창백한 그녀의 옆모습도!

두 번째 잊을 수 없는 일은, 둘째 날인가 어느 강사의 정신개조 강의에
그만 내가 홀딱 넘어가 버린 일이다.
그는 역경을 뚫고 성공한 사람들의 사례를  일일이 열거했는데,
나는 그 중 한 사례에 얼마나 감동을 했던지 내 주머니 속의 전재산(!)을
그 강의 속 주인공에게 전해달라고 하기 위해 복도에 나가 그를 기다리고 서 있었다.
부흥사경회에서 파워풀한 부흥사의 설교에 감동하여 돈은 없고, 손가락의 금반지를 빼어
헌금 주머니에 넣는, 바로 그 심리였다.
다행히 그 양심적인 강사는 내가 내미는 돈을 받지 않았다.
나중에 생각하니  얼마나 쪽팔리던지......

뻔한 내용의 강의에 감동하여 전재산을 바치려고 복도에 서있던 그녀가 가끔 그립다.
해운대 무슨 복집 종업원의 명찰을 달고 초조하게 강사를 기다리던 그 상기된 얼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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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06-02-04 00: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무슨 얘긴데 그리 홀딱 넘어가셨을까 궁금하네요. ^^

조선인 2006-02-04 07: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보기엔 그녀는 아직도 여기 있는데요?

반딧불,, 2006-02-04 09: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ㅎㅎ
(여전히 귀여우신 님^^)

Mephistopheles 2006-02-04 10: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만과 열등감 뒤에 순수와 열정을 넣으셔도 될 것 같아요..^^

mong 2006-02-04 09: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랜만에 읽는 로드무비님의 가볍지 않은 페이퍼를 읽으니 너무 좋아요
흐흐

비로그인 2006-02-04 11: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드무비님의 인생 구석 구석엔 어찌나 따뜻한 이야기가 많이 숨어있는지..^^
저 어제 드디어(!) 로드무비님 꿈을 꾸었어요 어찌나 웃기던지
그리고 그 자그마한 사진 속 모습이 그대로 살아났더랍니다..하하
잠시 안부 전하고 갑니다..^^

혜덕화 2006-02-04 13: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지막 두 문장에 눈물이 나려고 했습니다.
뻔한 내용의 강의에 감동하는 것, 그게 청춘의 아름다움 아닐까요?
너무 뻔하다는 걸 미리 알아버린 요즘 아이들, 무서울 때가 있으니까요.

로드무비 2006-02-04 14: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혜덕화님, 제가 좀 단순무식한 인간입니다.
그래서 뭐든 1차 관문이 필요해요. 이게 충동인가 아닌가...ㅎㅎ

사야님, 그 조그만 사진 속의 얼굴이 사야님 꿈에
어떤 모습으로 나왔는지 궁금하네요.
나중에 주하에게 엄마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생각하고
생각날 때마다 하나씩 쓰고 있습니다.^^
(아직 보따리가 불룩해요.)

endo님, 조금 전 어느 님이 쓰신 정태춘 음반 리뷰에도
연대 노천극장이 나왔는데.

마이페이퍼 링크 주소 : http://www.aladdin.co.kr/blog/mypaper/812348

한번 읽어보시라고 주소 긁어왔습니다.
저도 강의실에서 그 강의 듣고 얼마나 울었는지
지금 생각하면 우스워 죽겠습니다.
몇 푼 벌러갔다가 하마터면 비상금 전부 탕진할 뻔했습니다.
비쩍 마른 젊은이 만나게 되면 술 한잔 하실 거죠?
따귀를 한 대 때릴지도 모르겠다는 표현이 재미있습니다.^^



로드무비 2006-02-04 15: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mong님, 너무 좋으시다니 저도 너무 좋네요.^^

메피스토펠레스님, 그 당시엔 그게 좀 있었던 것 같은데,
어디다 흘려버리고 왔는지 지금은 없네요. 아무것도!^^

반딧불님, 제가 생각해도 좀 귀여웠어요.ㅎㅎㅎ

조선인님, 그렇게 말씀해 주셔서 정말 고맙습니다.^^

바람돌이님, 새벽별님, 가난하고 병들고 아무튼
기가 막힌 사연을 가진 사람의 이야기를 들었던 것 같아요.
그럼에도 뭐 꿈을 잃지 않고 살아간다, 그런 이야기가 아니었을까요?ㅎㅎ





하루(春) 2006-02-04 17: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수상한 강의 ㅋㅋ

로드무비 2006-02-05 15: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루님, 정말 수상했다니까요.^^

숨은아이 2006-02-05 21: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요식업체 종업원들이 그런 "정신 개조" 연수 같은 것도 받았군요. 의무사항이었던가 봐요. 그러니까 대신 내보낼 아르바이트까지 구했겠죠. 그 "양심적인" 강사, 참 뿌듯했겠어요. 그렇게 열심히 들어준 사람이 있어서.

날개 2006-02-06 15: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다른거엔 잘 안그러다가도, TV에서 애들이 아파 고생하고 있는것만 보면 눈물 펑펑 쏟으며 거금(?)을 확 송금 해버리고 만다는.......
로드무비님이 복도에서 서 있을 당시의 심정이 상상이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