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주 일요일 우리 가족은 1박 2일로 동해 쪽 나들이를 했다.
차 안에서 <바보들의 행진>과 <별들의 고향> 음반을 번갈아가며 틀었는데,
서너 차례 반복하여 듣다보니  '한잔의 추억'이나 '고래사냥'이 나오면
아이가 고래고래 큰 목청으로 따라 부를 정도가 되었다.

"자, 떠어나자, 고래 자압으러어! 삼등사암등 완행열차 기차르을 타고오오오오~~"

대포항에 가서 우선 회를 한 접시 해치우고,  저녁에는 더욱 본격적으로 회를 먹었다.
그것으로 모자라 다음 날은 강구로 대게를 먹으러 차를 달렸다.
서너 시간 거리.
7번 국도를 달리자니 창밖으로 시퍼런 바다가 계속 대령해 있어서 너무 좋았다.
깊고 푸른 겨울바다를 보면서 번잡한 마음을 씻고, 흐린 눈을 좀 씻고 해야 하는데
나는 오로지 처음부터 끝까지 먹을 궁리뿐이었다.

차 안에서 읽으려고 한 권 달랑 가지고 간 것도 <사는 게 맛있다>라는 제목의 책.
가볍게 읽을 수 있는 산문집이었다.

강구항에 내려 익숙한 대게 시장을 한 바퀴 돌고난 후 제일 좋아보이는 대게 무더기 앞에서
흥정을 시작했다.
평소 내 꿈 중의 하나는 대게를 실컷 먹어보는 것이었다.
자잘한 놈으로 말고, 제대로 속이 꽉찬 영덕대게로.
더구나 대게 값은 남편이 내기로 했으니 이 얼마나 기쁠소냐!

킹크랩 두 마리와 큰  대게 여섯 마리를 합해  남편은 떨리는 손으로 10만 원을 지불했다.
안내해 주는 식당으로 가서 찜통에 들어가는 우리 대게들을 흐뭇한 눈으로 보는데
다른 사람의 찜통이 눈에 띄었다.
그 찜통 속의 대게 두 마리는 집게발에 초록색 표찰을 달고 있었다.
찜통 담당 청년에게 물으니 진짜 영덕대게라고 했다.
아니 그럼 우리가 사온 대게는 가짜 영덕대게라는 말인가!

"사오신 것 전부 합해도 한 마리 값이 안 돼요."

그렇게 말하는 청년의 얼굴이 묘하게 교만했다.
백화점 명품 코너의 콧대 높은 판매원처럼.

바닷가 조그만 식당 안은 손님들로 꽉 찼다.
우리 옆자리는 50대 후반의 능글능글한 남자 둘과 젊은 아가씨 둘이 마주보고 앉아 있었는데
그녀들은 대게를 별로 안 좋아하는지 대게의 살을 발라 자기 남자의 입에 넣어주느라 여념이 없었다.
별꼴이야!

우리 뒷자리엔 옷차림이 세련된 청춘남녀가 역시 짝을 이루어 앉아 있었는데
여자들끼리 나란히 앉고 남자들끼리 나란히 앉아 수군수군 하는 것이
미팅에서 만난 지 얼마 안 되는 것 같았다.
남자들끼리 나가 계산을 하고 그의 파트너들은 수북한 게껍질 앞에서 화장을 고치는데
그 청춘의 미묘한 설렘이 고스란히 내게 전해져 왔다.
'정말 좋을 때야!'

우리 가족 오른쪽 옆 테이블이 알고봤더니 초록 표찰을 단 진짜 영덕대게의 주인이었다.
30대 중반의 부부.
그들은 12만 원짜리 게를 각각 한 마리씩 차지하고 앉아 30분도 안 되어 박살을 냈다.
게를 먹는 중 남자는 주인을 불러 적당한 대게를 10만 원어치 서울 장모에게 택배로 보내달라며
수표를 내밀었다.

찜통 속의 킹크랩과 대게들이 큰 알루미늄 쟁반에 수북히 나왔다.
우리는 킹크랩 한 마리와 대게 두 마리를 먹기로 합의하고 나머지는 포장해 달라고 했다.
속살이 80프로 정도밖에 차지 않아 초록색 표찰을 달지 못한 대게였지만
너무너무 맛있었다.
남편은 운전 때문에 술을 마시지 못하고 소주 한 병을 내가 다 비웠다.

손님에게 대게를 판 아줌마가 식당에 들러 주인과 무슨 말을 하던 중 우리 뒷자리의
세련된 옷차림의 젊은이들이 대게 값을 나중에 지불하기로 했는데 대게 값은 내지 않고
자릿값과 술값만 내고 간 사실이 드러났다.
'거참, 인물들이 아깝다!'

조그만 대게 식당 안에서 우리 가족이 머무른 시간이 약 한 시간 20분.
그 짧은 시간 동안 인생에서 일어날 수 있는 온갖 일들(불륜, 사기, 빈부 격차)이
주변에서 벌어지는 것을 보았다.

밤 열한 시, 남동생의 집에서 쪄온 게를 안주로 술을 마셨다.
그 시간까지 퇴근하지 않은 올케 몫으로 한 마리를 남겨두고 실컷 먹었으나
초록 표찰에 약간의 미련이 있었던 나는 술김에 남편에게 호기를 부렸다.

"나중에 내가 돈 많이 벌면 초록 표찰 달린 게 사줄게!"

물론 남편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우리가 누릴 수 있는 호사는 거기까지라는 뜻일까?



차유리에 쌓인 눈 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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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6-01-15 13: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 진짜 멋진 이야기입니다.
그까이꺼..ㅎㅎ 초록표 못 먹으면 어때요? 그보다 더 맛있는 가족들과의 정이 섞여 있는 맛있는 게를 드셨으니..^^

로드무비 2006-01-15 13: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야님, 당분간은 게 생각 나지 않을 것 같습니다.
우리 동네 간이횟집에서 한 마리 3만5천 원 하는 킹크랩이
거기선 1만5천 원 하더군요.
그것만으로도 너무나 흐뭇했습니다.^^

mong 2006-01-15 13: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불륜, 사기, 빈부 격차...그 까이꺼
세식구 단란하게 잘 드시고 오셨음 된거죠~
ㅎㅎㅎ

라주미힌 2006-01-15 13: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게보다는 가족나들이 자주 하시는게 부럽삼!! ㅎㅎㅎ

로드무비 2006-01-15 14: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라주미힌님, 빨리 결혼하시라요.^^

mong님,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인생의 소원 한 가지를 풀었으니 된 거고요.ㅎㅎ

깍두기 2006-01-15 14: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드무비님은 진짜 엄청 잘 드시는 것 같애!
부럽삼^^

hnine 2006-01-15 17: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대게가 지금이 제철이라고 작년 여름 동해 여행갔을때 식당 주인아저씨께서 그러시던데, 제철의 대게를 드셨군요~

하루(春) 2006-01-15 17: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진정한 웰빙가족이군요.

urblue 2006-01-15 18: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우, 잘 놀러다니시고 잘 드시고, 정말 잘 사는 가족이에요.
7번 국도, 좋죠? 그러고보니 그런 제목의 소설도 있었던 것 같은데.

혜덕화 2006-01-15 18: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재미있어요, 글이. 짧은 시간동안 본 여러가지 사건들.
싱싱한 영덕 대게 맛이 그립습니다. _()_

히피드림~ 2006-01-16 00: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재밌게 잘 읽었어요. 저도 가고 싶네요.^^

로드무비 2006-01-16 07: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펑크님, 꼭 다녀오세요.^^

혜덕화님, 뭐 사건이랄 것까진 없겠지만 그 다양한 인간군상이
제게 꽤 깊은 인상을 남겼길래.^^
(영덕대게, 방학 동안 드실 수 있지 않나요? 마음만 먹으면...^^)

블루님, 작년엔 차가 없어 못 다니고 딱 1년 만인데?^^
그리고 7번 국도, 윤대녕!^^

하루님, 진짜 웰빙 가족을 못 보셨군요.ㅎㅎ

hnine님, 제철의 대게 맞아요.
그 정도의 맛에 저는 만족합니다.^^

깍두기님, 그래서 이 모양이잖소!=3=3=3

2006-01-16 10:24   URL
비밀 댓글입니다.

니르바나 2006-01-16 18: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드무비님, 그래 예쁜 고래 한마리 잡으셨나요.
아무래도 영덕 대게만 잡으신 모양입니다. ㅎㅎ

2006-01-17 02:02   URL
비밀 댓글입니다.

balmas 2006-01-17 02: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 영덕대게!!! 부럽삼. 침 질질~~
직접 가지는 못하고 주문이나 한번 해볼까??

로드무비 2006-01-17 08: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발마스님, 명함 두 장 가지고 왔는데 갈챠드릴까요?^^

속삭이신 님, 올리신 리뷰 보고 왔습니다.
좋아하시니 흐뭇하네요.^^

니르바나님, 해양경비대에 걸려서 그만!=3
대게만 배 터지게 먹고 왔습니다.^^

속삭이신 님, ㅎㅎ 책을 보는 순간 님을 떠올렸다지요.
세상 모든 것에는 임자가 따로 있다는 생각을 합니다.
잘 보관하고 있을게요.^^

산사춘 2006-01-17 08: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같으면 먹느라고 주변은 살펴보지도 못했을 터인데... 참 정겨분 가족 풍경이어요.

로드무비 2006-01-17 09: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산사춘님, 대게 쪄지길 기다리는 동안(30분)의 일이랍니다.
마이 도러는 게딱지에 비빈 밥 차지하여 먹느라고 정신없었고
책장수님은 가위 들고 게살 발라주고 저는 아구아구 먹고
정겨분 풍경이긴 했지요.ㅎㅎ

2006-01-17 12:44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드무비 2006-01-17 13: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속삭이신 님, 그 소원 조만간 이루어지길 기도드릴게요.ㅎㅎ
고맙습니다.
좀 있다 님 방에 가볼게요.

따우님, 대게 냄시가 좀 꼬숩지요. 며칠이 지나도......
그런데 두 분이 대게 드시면 산사춘님이 가위 잡으시는가요?
버럭=3 교대로 잡으시라요!=3=3=3
(저도 양심이 있는 인간이라 대게 사진은 안 올렸습니다.^^)

2006-01-17 13:1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6-01-17 13:25   URL
비밀 댓글입니다.

플레져 2006-01-17 14: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디만 가면 온통 관심이 전후좌우로 쏠려요.
그 안에서 모든 걸 다 보셨으니 세상은 정말 요지경,
로드무비님은 움직이는 잠망경 ^^

로드무비 2006-01-17 14: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플레져님, 저 자신에게만 집중하고 싶어요.^^;;

따우님, 그러는 님은...흥=3=3=3
(이렇게 써 버릇하니 재밌지 않아요?ㅎㅎ)

로드무비 2006-01-17 16: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소녀라니 그냥 좋아서...배시시^^

로드무비 2006-01-25 07: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소년이라니, 이기이기 무시기 소리입니까!(''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