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도 출판사에서 대지(책의 페이지와 똑같이 인화지를 오려붙여 레이아웃한 용지) 작업을 하는가
잘 모르겠지만 내가 모 출판사에 갓 입사하여 일하던  무렵엔 일일이 담당자가 그런 작업을 해야 했다.
틀린 글자를 따로 인화하여 오려 붙이는 걸 '따부치기'라고 하는데 꽤 세심한 손길이 요구되는 일이었다.

내가 처음 맡은 책이 신방과 학생들을 대상으로 한 광고실무 관련 교재.  평소 말귀를 잘 못 알아듣고
아둔한 편인 나는 그 작업을 마칠 때까지 온갖 고생을 다했다.
아무튼 마침내 완성하여 그것을 보자기에 싸서 품에 안고 다음 공정을 위하여 충무로로 가는데
아뿔싸, 충무로 역 에스컬레이터 중간 지점에서 뭔 일로 휘청하다가 보자기를 떨어트렸고 보자기는
풀어헤쳐져 대지가 몽땅 공중에 휘날렸다.  세상에 그 황당함이라니!

눈에 보이는 대지들을 주섬주섬 모아서 아래로 다시 내려왔는데 공교롭게 두세 장이 에스컬레이터의
홈 사이로 끼어 말려들어가 버렸다. 
주운 대지들은 구겨지고 구둣발에 밟히고 먼지가 묻어 엉망이 되었고.
나는 그만 얼이 빠졌다.
하루이틀을 다투는 긴급한 작업이었는데 나의 실수로 일이 그만 그렇게 되고 만 것이다.
(지금 생각하면 내 아이가 눈앞에서 넘어져 다치는 장면을 목격하는 것과 비슷한 강도의 큰 일이었다.)


딱 죽고 싶었다.
사장님껜 뭐라고 변명을 하고 저자에겐 또 뭐라고 해야 하나!

얼굴이 노래져서 서초동의 출판사까지 다시 전철을 갈아타고 갔다.
사장실에 들어가 자초지종을 고했다.
다행히 사장님은 분기탱천하지는 않고 이왕 그렇게 된 것 필요한 부분 빨리 작업을 새로 하고
단 책임은 물어야겠으니 망친 대지값 5만 원 (1989년 당시)을 월급에서 제하는 게 어떠냐고 말씀하셨다.

"제 월급 다 가져가셔도 돼요!"

그때 내 입에서 나온 말이다.  5만 원을 제하는 것으로 끔찍한 실수가 어느 정도 상쇄된다는 게
나는 너무 반가웠던 것이다.
그렇게 출판사에서 내가 처음  맡았던 일은 온갖 우여곡절을 겪은 끝에 한 권의 책으로 나왔다.

이후 한참 지나서 내가 과다한 업무에 지쳐 사표를 냈을 때 사장님은 나를 근처 대구탕집으로
불러내어 앞으로 내가 꼭 맡아서 해줘야 할 문학 쪽 일을 구상하고 있으니 그만두지 말아달라는
말과 함께  내 여동생이 결혼을 하는 사실을 몰랐다며 두툼한 축의금을 내밀었다.
그는 내가 여동생의 결혼 소식에 이것저것 심란해서 직장까지 때려치우려는 줄
잘못 알고 있었던 것이다.  사람을 뭘로 보고!

사장님이 나가는 직원 잡은 게 처음 있는 일이라는 주변의 말에 고무되어 그때 다시 주저앉았는데
몇 달을 더 버티지는 못했다.

이후 몇 년 동안은 충무로 부근을 지날 때마다 그날의 악몽이 떠올라 나도 모르게 고개를 내젓게
되었다.  그렇게 황당했던 일은 정말 처음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뭐 그럴 수도 있는 일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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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ng 2005-10-22 13: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 연차 어릴때는 제가 도면 실수해서 공사 잘못되면
아무도 모르는 그 부분만 눈에 들어와
쥐구멍에 숨고 싶어지더라구요 ~ ^^

로드무비 2005-10-22 14: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mong님, 제가 그날 바로 그랬다니까요.
그냥 세상에서 감쪽같이 사라져버리고 싶은 그런...^^;;

kleinsusun 2005-10-22 14: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하....로드무비님, 넘 순진하시다...."제 월급 다 가져가셔도 돼요!"
신입사원 땐 누구나 다 이런거봐요.
저도 참...어리버리했었는데....별것 아닌 실수에도 며칠을 걱정하고...
오늘도 로드무비님의 글을 읽으며 방긋 미소짓습니다. 님의 글은 항상 넘....따뜻해요.^^

로드무비 2005-10-22 14: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수선님, 출장 잘 다녀오셨나요?
가끔 떠오르는 이야기 하나씩 써놓을까봐요.^,.~
(님이 좋다고 해주시니...)

플레져 2005-10-22 14: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 대지작업! 잡지사에 잠깐 다닐때 의뢰한 디자인 사무실에 들르면 그 따부치기 하느라고, 로트링 펜으로 섬세하게 작업하던 거... 저두 잠깐 해봤지만...보통 일이 아녔어요. 금세 컴으로 작업이 옮겨가버렸지만, 그 대지작업이야말로 인간의 손길이 필요한 거였죠 ㅎㅎ 충무로의 그 긴~ 에스컬레이터에서... 우리 아버지는 쓰러지신 적 있으세요. 역무실에서 연락와서 황급히 달려갔던 기억이 나네요.

로드무비 2005-10-22 14: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플레져님, 그러니까요.
섬세하고는 담 쌓은 인간이 부들부들 떨면서......
아! 그런데 아버님이 그곳에서 쓰러지신 적 있다고요?
을마나 놀라셨을까!
지금 들어도 가슴 철렁합니다.

플레져 2005-10-22 14: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지금도 충무로역에 가면 그 긴 에스컬레이터는 안타요. 못 타겠어요...;;;
다행히 아버지는 피로 탓이라 금세 회복하시긴 했지만, 기억은 참 오래남아요.

로드무비 2005-10-22 14: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그 주변 지나가면 가슴이 몹시 두근거려요.
지금은 지나갈 일도 별로 없지만......
아버지는 금세 회복하셨군요. 다행입니다, 플레져님.

히나 2005-10-22 14: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람을 뭘로 보고! ㅋㅋ

mong 2005-10-22 14: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충무로하면 인쇄소에서 아저씨들
눈총 받으면서 인쇄 잘 나오나 감시하던 기억이...
로트링펜.....캬오 저 1학년때 2절지에 바코드 그리던
기억 납니다.....밤을 꼬박 새워서~

미완성 2005-10-22 15: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요즘 들어 로드무비님 글에 많이 위로받고 있답니다.
흐흐. 저도 빠짝 얼어서 눈치보며 일했던 때가 생각이 나네요. 그때는 참 뭣도 모르고 무식하게 성실했건만...

히피드림~ 2005-10-22 15: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 무슨 드라마같아요.^^ 그렇게 애쓰시면서 첫 책이 나왔을땐 정말 뿌듯하셨겠어요.

sudan 2005-10-22 16: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핫. 서류봉투가 아니라 '보자기'에요?

릴케 현상 2005-10-22 17: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ㅋㅋ 저는 그렇게 굵직한 실수는 해본 적이 없는데^^ 더 나쁜 게 암만 세월이 가도 일이 안 느네요~

stella.K 2005-10-22 19: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 그때 돈 5만원이면 지금의 10만원 돈쯤 되나요? 그래도 사장님이 좋으신 분 같네요. 출판사 일이 굉장히 고된 일이군요. 하기사 쉬운 일이 어딨겠습니까? 그래도 저 같을까요? 요즘 버벅거리는 제꼴이라니...그런데 아직 힘든 건 없어요. 쉬엄 쉬엄 하지요.^^

조선인 2005-10-22 19: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헉, 스텔라님, 좋으신 분이라뇨. 전 월급에서 제하겠다는 말 보자마자 그분의 '명성' 그대로라고 생각했는데. -.-;;

stella.K 2005-10-22 20: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런가요, 조선인님? 그래도 화 안 내셨잖아요. 무비님 동생 결혼할 때 축의금도 주셨다고 하고...저는 화내는 사람이 젤 무서워요.
하지만 조선인님 말씀들으니 그도 그렇네요.ㅜ.ㅜ

날개 2005-10-23 10: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아~ 저도 회사다닐때 실수한 기억이 떠오릅니다...ㅠ.ㅠ
저때 로드무비님 심정이 어떠했을지 알것 같아요..

로드무비 2005-10-23 11: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날개님, 실수 한 번도 안하는 게 이상한 일 아닐까요?
그런데 저 실수는 정말 끔찍했어요.^^;;

스텔라님, 그 당시엔 고마웠는데 지나놓고 보니 거시기하더군요.
그때 그런 제안을 해놓고 저를 빤히 바라보던 눈길이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납니다.^^

조선인님, 어디서 뭔 소문을 들으셨길래...ㅎㅎㅎ

자명한 산책님, 다행이네요.
일 안 느는 건 저랑 똑같으시구만요.^^*

수단님, 부피도 꽤 되고 묵직해서요.
나일론 보자기로 싸야 했답니다.^^;;

펑크님, 뿌듯하진 않았고 무슨 큰 산을 하나 넘은 기분이었어요.^^

멍든사과님, 제 글이 누군가 더구나 멍든사과님에게 위로가 된다니 기뻐요!^^
(그리고 전 무식했지만 처음에도 별로 안 성실했어요.;;)

몽님, 바코드 하니까 옛 추억이!^^
인쇄소 골목도 나름대로 정겨웠죠?^^

스노드랍님, 저런 말 안 나오게 됐어요?^^


비로그인 2005-10-23 21: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쿠쿠쿠..아, 이거 오해하지 말아주십쇼. 제가 웃는 이유는 '사람을 뭘로 보고!'에서 터져나온 거니깐요. 글두 참..곤란하셨겠어요. 상상만 해두 아찔!!

로드무비 2005-10-23 21: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복돌이님 뒤 졸졸 따라다니기.ㅎㅎ
저 말 해놓고 보니 저도 좀 우스웠어요.
사실 심란했던 데는 그 이유도 아주 쪼끔은 있었거등요.
딱 잡아떼려니 원, 양심에 찔려서...^^

야클 2005-10-24 13: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헤헤 그때 그 심정 이해가 가네요. 저도 급한 보고서 파일 다 써 놓고 날린적이 있어봐서... ^^

로드무비 2005-10-24 15: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야클님, 요즘은 '날리는 거' 그게 문제죠. 네네.
그 순간의 가슴 철렁도 저런 일만 못지 않죠.^^;;

검둥개 2005-10-31 00: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호호 그걸 대지작업이고 따부치기라고 하는군요. 저두 해봤어여 ~ ^_____________^* 컴퓨터 조판이 도입되면서 곧 없어지긴 했지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