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는 게 거짓말 같을 때
공선옥 지음 / 당대 / 2005년 4월
평점 :
품절


 

어제 낮 모처럼 서울 나들이를 하면서 공선옥의 산문집 <사는 게 거짓말 같을 때>를 장바구니와 함께 가방 속에 집어넣었다. 만삭일 때도 딱 맞았던 단벌 청바지 허리가 꽉 끼어 눈을 부릅뜨고 심호흡을 하고 지퍼를 올리고 단추를 잠갔다. 공선옥 작가에겐 미안한 말이지만 이럴 때 나는 사는 게 딱 거짓말 같다.


마을버스 속에서  장애가 있는 내 또래 여성에게 신호를 보내어 내 자리까지 오게 해서 자리를 양보했다. 그렇게까지 하기는 드문 일이다. 그건 순전히 내 손에 들려 있던 책 때문이었으니 공선옥의 책을 읽으며 노인이나 아이, 임산부, 장애가 있는 사람을 외면하고 천연덕스런 표정으로 자기 자리를 사수하기란 불가능한 일이다. 


그리고 전철을 갈아타고 나는 두 건의 선행(?)을 더 했는데 여기 일일이 적지는 않겠다. 그녀가 울며 읽었다는 김성칠 선생의 <역사 앞에서>에는 이런 구절이 나온다.


- 겸손하고 너그러우며 제 잘한 일을 입 밖에 내거나 붓 끝에 올리지 말 일.


십몇 년 전 나도 이 대목을 읽으며 마음속으로 밑줄을 쳤다. 그러니 어떻게 전철 안에서의 그 소소한 일을 선행이라고 차마 내 입으로 떠벌릴 수 있겠는가!


‘내 이웃의 통곡 소리가 그치지 않는데 밤이면 밤마다 휘황한 네온 십자가가 다 무엇이며 따뜻한 구들방에서의 선(禪)이 다 무엇이냐’(25쪽)고 작가는 묻는다.  또 서울 어느 대학 수학교수님이 정말 좋은 수학교수법을 가지고 아이들을 가르치는 모습을 텔레비전으로 보며 어릴 때부터 나처럼 수학 노이로제가 있는 듯한 그녀는 생각한다. ‘저렇게 좋은 것은 지금도 좋은 저 아이들한테보다 지금 나쁜, 지금 아주 힘든 상황에 있는 아이들에게 먼저 가게 했으면.’ (29쪽)


소설이고 산문이고 간에 그녀의 글들을 읽으면 나는 너무 많이 가진 자이고 그것도 깨닫지 못하고 사는 게 힘들다고 징징거리는 유한부인으로 전락하는 느낌이다. 나는 태어나서 단 한 번도 부자로 살아본 적은 없지만 그렇게 가난뱅이였던 적도 없는 것 같다. 3만 원이 넘는 호머 심슨 라디오 같은 장난감도 사고, 갖고 싶은 만화 전집도 큰맘먹고 사는 걸 보면 돈 쓰는 데 크게 구애받지 않는 것 같지만 그 대신 10년째 청바지 하나로 사계절을 버티며 돈 아까워서 ‘빠마’도 하지 않는다. 나는 내가 누리는 호사가 최소한의 것이고 정당한 것이라고 강변하는데(누가 뭐라지도 않는데 말이지) ‘내 배가 부르면 꼭 누군가에게 죄를 짓고 있는 것만 같다’고 말하는그녀 앞에서 나는 뭔지 좀 부끄러운 기분이 든다. 그렇다고 해서 그녀의 글 읽기를 중단할 생각은 없다.  앞으로 좀 더 부지런해져 억울한 죽음을 당한 이들의 소식을 먼 풍문처럼 듣지 말고 작가처럼 장례식장에 직접  조문도 가고,  좀 더 바람직한 인간이 되기를 바랄 뿐.(그럴 가능성은 희박하지만......)


오래 전 아현동 민족문학작가회의의 독서교실인가 창작교실인가에 등록해 두어 달 드나든 적이 있다. 창작을 직접 해보겠다는 생각에서는 결코 아니었고 직장인이랍시고 회사엔 다니지만 그때 당시 하도 사는 게 사는 것 같지 않아 어딘가에 소속되어 보고 싶었던 것이다. 천승세, 김영현, 김남일 등 작가들의 리얼리즘 문학 강의는 무척 재밌었고 그 중 마음 맞는 사람끼리 ‘풀무’라는 이름의 독서 모임을 꾸려 신촌의 주막을 전전하며 책을 읽은 소감을 나누었다. 주로 월북 작가들의 소설을 구해 읽었으며 그 무렵 자주 있었던 시위 현장에도 꽤 열심히 참가했다. 1년쯤 지났을까?  우리 다음 기로 본격적인 창작반이 구성되었다는데 아이를 등에 업은 아줌마가 아주 열심히 참석하고 있다고 들었다. 거기다 그녀는 공장 노동자라고 했다. 창작은 고사하고 독서는커녕 사람들과 어울려 술 마시는 재미로 가끔 그곳을 드나들던 나는 내 또래의 그런 여인이 있다는 얘기를 귓등으로 흘려들었다. 그녀가 바로 소설가 공선옥이다.


이 땅에 어느 정도 가진 자의 자식으로 태어나 배울 만큼 배우고 누릴 만큼 혜택을 누린 인간들, 작가의 표현대로 하면 ‘사는 게 사는 것 같은’ 사람들은 오염된 공기가 어떻고 교육문제가 어떻고 닫힌 의식이 어쩌고 하며 못살겠다고 이 땅을 속속 떠나든가 그것이 여의치 않으면 자식들을 조기유학으로 빼돌린다. 그러면서 나라 걱정은 혼자 다 하지. 그런 이야기를 흥분하는 기색도 없이 이 작가는 조용히 읊조린다. 다 좋은데 떠나려면 조용히 떠나라고, 괜한 분란 일으키지 말고 ......이 대목에서 나는 짝짝짝~ 박수를 쳤다.  그녀의 독서일기와 나의 독서일기가 100프로(!) 겹치는 걸 알게 된 것도 유쾌했고.


하도 많은 분들이 리뷰를 올려 과연 이 책을 읽고 나도 할 말이 남아 있을까, 생각했는데 역시 공선옥은 공선옥이다.  이 신새벽에 나를 책상 앞에 앉게 하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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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rky 2005-05-20 06: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공선옥씨도 대단하지만, 로드무비님도 정말 대단하세요. 회사다니면서 창작교실에 등록도하고, 모임도 갖고 했다는 것 자체가 너무 멋져 보입니다.

호랑녀 2005-05-20 07: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바로 추천하고... 장바구니 들어갑니다.
공선옥의 책... 자꾸만 피하고 있었습니다. 왜였을까... 한번 잡으면 빠져버릴 것 같아서 그랬을까...

서연사랑 2005-05-20 08: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런 글은 추천받으셔야 마땅할 리뷰라고 생각해요^^

바람돌이 2005-05-20 09: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예전에 읽었던 공선옥의 글이 참 좋았음에도 그 후로 그녀의 글은 저를 피해간것 같아요. 아님 제가 피했었던가....
오늘 님의 글 읽고 그리고 그동안 많은 알라디너들도 이 책을 칭찬하고...
역시 봐야겠네요.

로드무비 2005-05-20 09: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바람돌이님, 리뷰가 많이 올라오고 그걸 읽다보면 그 책을 안 읽었음에도
다 읽은 것처럼 생각이 될 때가 있잖아요.
그런데도 재밌게 읽었으니 말 다했죠, 뭐.^^
서연사랑님, 미누리님 방에서 가끔 뵌 분이네요.
고맙습니다. 그렇게 말씀해 주셔서......
호랑녀님, 한번 잡고 푹 빠져보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그동안 왜 피하셨을까요?^^
퍼키님, 제가 속한 제1기는 독서 모임의 성격이 짙었어요.
사람이 그리워서 기어들어간 거였으니 멋있다는 말은
취소해 주실래요?
듣기 영 거북해서.;;

비로그인 2005-05-20 09: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공선옥..작가와의 만남 같은 모임이 마련된다면 멀리서라도 함 봤으면 좋겠습니다. 로드무비님만의 소소한 일상의 풍경, 잼나게 잘 읽었어요.

urblue 2005-05-20 09: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출근길에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은행가>를 들고 나왔어요.
이것도 이제 읽기 시작했고, 공선옥의 글은 하나도 보지 않았지만,
로드무비님의 리뷰와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어쨌거나, 주말을 앞에 둔 아침인데 너무 무겁다구요~~

perky 2005-05-20 09: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멋있게보여서 멋있다고 말했던 것 뿐인데, 듣기 거북했다고 하니까, 제가 더 당황스럽네요. ^^;

로드무비 2005-05-20 09: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퍼키님, 그런 말을 들어본 적이 없어서요.
말씀은 무지 고마웠지만 괜히. 헤헤^^
블루님, 전 그 책 예전에 읽었어요.(오랜만에 블루님 앞에서 잘난척=3)
아이구, 주말을 앞두고 가배얍게 시집이나 한 권 들고 나오잖고...
복돌이님, 재밌게 읽으셨다니 기분좋습니다.
청바지 터져나간다는 이야기가 특히 재밌었죠?ㅎㅎ

부리 2005-05-20 10: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드무비님, 멋진 리뷰십니다. 민족문학창작교실 같은 곳에도 가시고... 아아, 존경스럽습니다. 님의 빛나는 내공은 그 몇달 탓도 있지요?

stella.K 2005-05-20 11: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창작 교실 다니셨군요. 저도 예전에 잠깐 다녔었는데...그때 마음 고생을 하고 있었던 중이라 정말 사는 게 사는 거 같지 않아서 다녔는데 다니다보니 정말 사는 게 사는 것 같아 좋아지더라구요. 근데 다니다 말았죠. 지금 생각하니 살만해서 그만 두었나 봅니다. 그렇지 않았으면 더 다녔을지도...그땐 뭔가의 끈이 필요했었거든요.

로드무비 2005-05-20 11: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부리님, 칭찬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예 저의 내공(ㅎㅎ)은 그 당시 신촌 술집 모임에서 키워졌답니다.^^

로드무비 2005-05-20 11: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새 스텔라님이.^^
창작교실이 아니고 독서교실이었다니까요.
그때 사람들과 친해져서 한동안 꽤 잘 지냈답니다.
님은 계속 다니지 그러셨어요. 끈을 확실히 잡게...^^

stella.K 2005-05-20 11: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쎄요. 글쓰는 게 점점 자신이 없네요. 흐흐.

숨은아이 2005-05-20 14: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추천 수가 너무 많아 안 할라 그랬는데, 에잇!

로드무비 2005-05-20 15: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숨은 아이님, 그러심 섭하죠.;;
고마워요.^^
스텔라님 글쓰는 데 항상 자신있는 사람도 있을까요?^^;

히피드림~ 2005-05-20 16: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항상 느끼는 거지만 로드무비님은 페이퍼건 리뷰건 적당히 자신의 경험도 섞어가면서 참 맛깔나게 씁니다. 재밌게 잘 읽었어요.

날개 2005-05-20 17: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마트면 못보고 지나갈 뻔 했어요..^^;;

로드무비 2005-05-20 18: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알뜰하게 챙겨서 봐주시는 날개님, 고맙습니다.^^
punk님, 제 리뷰가 좀 껄렁껄렁하죠?;;
재밌게 잘 읽으셨다니 기쁩니다.^^

내가없는 이 안 2005-05-20 18: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 책 읽었어요. 전 공선옥 작가만의 소설가의 각오, 같은 게 만져지더라구요. 다른 글들도 좋았지만 맨 마지막 북풍이 휘적 하고 지나가는 것 같은 느낌의 글요, 가슴이 다 아파오던데요. 로드무비님 리뷰는 안 껄렁껄렁해요. 진심이 담겨 있어서 온기가 느껴지는걸요. ^^ 추천도 해요!

2005-05-21 10:00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드무비 2005-05-21 11: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내가 없는 이안님, 그런데 왜 리뷰는 안 올리셨을까요?
전 님의 공선옥 리뷰가 무지 궁금하답니다.
추천 고맙습니다.^^

비로그인 2005-05-21 20: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여보야, 봤지? 리뷰 특강은 무비 언니한테 받아야 한당께! 술 한 병 들고. 그, 근데, 소, 소개료는? =3=3
무비 언니 리뷰는 정말 안 보고 싶어요. 왜냐면, 지금 읽고 있는 책을 던져버릴까 하는 갈등을 하게 만들 거든요!

kleinsusun 2005-05-22 13: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공선옥 소설을 딱 한권 읽었어요.<피어라 수선화>.
책을 읽다가 다 못읽고 덮어 버렸어요. 너무.....불편했어요.
읽으면서 계속 죄책감이 들었거든요. 또 너무 무거웠고.....

공선옥 소설을 읽으면
저의 모든 고민들이 너무 사치스러운 것 같고,
자꾸만 움츠리게 되고 그래요.

그런데....
로드무비님의 리뷰를 읽으니 이 산문집을 꼭 읽어보고 싶네요.
보관함에 넣었어요.

로드무비 2005-05-22 14: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수선님, 정말 부끄러워해야 할 사람은 따로 있답니다.
수선님의 화사하고 경쾌한 글쓰기도 얼마나 좋은데요.
아무튼 이 책 읽어보시는 건 찬성이에요.^^
노파님, 리뷰 특강은 마태우스님이 잡고 계시잖아요.
그런데 정말 언제 두 분이 손 꼭 잡고 우리집에 술 몇 병 사들고
오는 것 아니우?^^

2005-05-24 09:14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드무비 2005-05-24 09: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속삭이신 님, 어머 당연히 그러셔야죠오.=3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