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500원에 학교 앞 문방구에서 파는 꼭두각시 의상에 뭐 멋진 색감이나 꼼꼼한 바느질까지 기대하지는 않는다.  나도 그 정도는 알고 있는 사람이다. 그런데 이건 정말 심했다. 전체적으로 한복을 흉내만 내었달 뿐 앞섶에 고름 달려 있고 저고리 동정이랍시고 목부분에 있으니 한복이라고 짐작하는 정도다. 저고리에도 치마에도 단추나 호크가 하나씩은 있어야 옷을 입었을 때 매무새가 정리된다. 그런데 어떻게 된 셈인지 단추가  하나도 달려있지 않다.(장난감이든 학용품이든 어린이용 제품을 만드는 사람들, 제발 대오각성 좀 하길! 아이들이 어려서부터 뭘 보고 배우라고 그렇게 조잡하게 엉터리로 만드는지......)

급기야 선생님은 알림장에 '꼭두각시 의상 아래위에 단추를 달아서 다시 보내세요!'하는 메모를 붙여 보내셨다. 마침 바지 수선 맡길 게 있어 그걸 갖다주고 단추 좀 달아달라고 슬그머니 엉겨붙을 속셈으로 세탁소에 갔다. 그런데 내가 우리집 겨울옷 드라이크리닝을 몽땅  다른 데 맡긴 걸 눈치챈 것일까? 세탁소 안주인은 쌀쌀맞게 똑딱이 단추와 호크만 내밀며 나보고 직접 달아주라고 한다. (가슴 철렁.)

하기 싫은 일은 끝까지 미루다가 더이상 버틸 수 없을 정도가 되어야 마지못해 하는 못된 버릇을 아직도 가지고 있는 나. 마이 도러가 바느질 언제 할 거냐고 몇 번이나 채근하는데도 모른척하고 있다가 밤 아홉시경 드디어 바늘과 실을 찾아 손에 들었다. 얼마만에  만져보는 바늘과 실이냐!  그런데 충격적인 건 눈이 침침해진 건지 형광등이 침침한 건지 실을 바늘에 꿰는 데만 10분쯤 걸렸다는 사실이다.

똑딱이 단추가 그 중 좀 만만해 보여 대강 눈치로 위치를 잡고 저고리에 꿰맨 것까진 좋았는데 볼록부분과 오목부분을 바꾸어서 다는 바람에 뜯어내고 다시 바늘에 실을 꿰고 단추를 맞춰보니 저고리가 심하게 울어서 다시 뜯어내고......그렇게 해서 간신히 치마와 저고리 단추를 다 달고 나니 열시 반.  무려 한 시간 반이 걸렸다.

그 시간까지 엄마가 제대로 단추를 달고 있나 책을 읽으며 감시하느라 마이 도러는 안 자고 있었다.  단추 다 달았다고 의기양양하게 아이를 불렀더니 아이의 얼굴이 흐려지며 너무나 의아하다는 표정으로 묻는다.

"엄마, 왜 빨간 치마에 흰실로 달았어? 빨간 실 놔두고......"

그 순간 든 생각. ' 아아아, 나는 죽어야 돼!  여덟 살 아이도 하는 생각을 왜 못했단 말인가!'

하지만 나는 시치미를 뚝 뗐다.

"그대신(?) 엄마가 절대 안 떨어지게 엄청 튼튼하게 달았거든. 엄마 허리 아파 죽겠다!"

이렇게 얼렁뚱땅 달래며 옷을 입혀봤더니 뭐가 잘못됐는가 저고리와 치마 사이에 10센티미터 정도 벌어지며 내복이 허옇게  드러난다.

오늘아침 엉망으로 단추를 단  꼭두각시 의상을 그대로 아이 손에 들려보냈다.  저고리와 치마 사이가 왜 그렇게 벌어지는지 원인을 규명하지 못했기 때문에......

조금 전 아이가 학교에서 돌아왔는데 세상에나 꼭두각시 의상을 다시 들고 왔다.

"엄마, 선생님이 치마 옆을 '꼬매어' 오래!"

'도대체 치마 옆 어디를 어떻게...날더러 어쩌라고???'  나도 모르게 아이에게  고래고래 소리를 지를 뻔했다.

그놈의 꼭두각시 의상 하나 때문에 인생이 이렇게 고달플 줄이야......대낮부터 맥주를 한 캔 따려다가 꾹 참고 바느질 못하는 비애를 페이퍼로 올린다.

 

 


 내성적인 성격의 세일즈맨. 집집마다 현관에서 문전박대를 당하고 대낮의 공원에서 우두망찰, 맥주를 한 캔 마시는.(내맘대로 캡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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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nda78 2005-04-28 16: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이고.... ;;; 정말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십니다. ;;;;
(로드무비님의 내맘대로 캡션은 정말 딱! 인 거 같아요. ^^)

icaru 2005-04-28 16: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내맘대로 캡션!! 훌륭하옵니다 ^^

BRINY 2005-04-28 16: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놀다가 치마 튿어졌다고, 교복 단추 뜯어졌다고 담임에게 와서 꿔매달라는 여중생들도 많이 봤지요. 엄마는 바쁘셔서 그런 거 못해주신다나요.

미누리 2005-04-28 16: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드무비님, 아닌 밤중에 왠 꼭두각시 의상이예요? 학교 학예회인가...
그나저나 고생하셨네요. 그런데 저는 읽으면서 왜 그렇게 웃음이 나는지.죄송.
대신 추천 누르고 가는 거 맞지요?

하루(春) 2005-04-28 16: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래도 꿋꿋하게... 그런 일로 좌절하시면 주하가 얼마나 서럽겠어요

깍두기 2005-04-28 16: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한테 보내요. 나 작년 1년동안 애들 바느질 가르쳤어^^(똑딱단추도 포함되어 있지요)
오늘 조선인님 번개에 실이랑 바늘이랑 가져오면 해드릴텐데....

난티나무 2005-04-28 16: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또 웃고 갑니다... (저도 죄송... 추천...^^;;)

클리오 2005-04-28 16: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러게요. 초등용 애들 대상으로 파는 것은 정말 1회용이예요.. 왜들 그러는지..

마냐 2005-04-28 17: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미안. 로드무비님...남의 불행에 이렇게 웃음이 나오다니, 저 못된거 맞죠? 으하하(흠, 하지만...님의 위기가 곧 제 상황이겠군요. -,.-)

날개 2005-04-28 17: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로 웃으면 안되는데...ㅎㅎㅎ 주하를 빨리 가르치는 수밖에 없겠군요..^^

인터라겐 2005-04-28 18: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러고 보면 울 언니는 참 행복한 사람이란 생각이 들어요...꿰멜것은 온통다 엄마가 해주시거든요..조카들도 으레 실밥이 뜯어지거나 하면 엄마네로 들고 오거든요..
고생많으셨어요...가까이 살면 저희 엄마한테 부탁해서 멋지게 해드릴텐데.. 앤드 저두 재봉틀질좀 하는데... 안타까워요...

로드무비 2005-04-28 18: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인터라겐님 언니가 부럽군요. 전 미니 재봉틀 장식용(?)으로 사긴 했습니다.^^
날개님, 저도 그 수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마냐님, 2,3 년 뒤 로드무비의 이 페이퍼를 떠올리며 미안해 하시기를...
클리오님, 심각합니다. 정말...
난티나무님 추천해 주셔서 용서해 드릴게요.^^
깍두기님, 오늘 재밌는 시간 되시길.
어쩐지 수상해서 님께 부탁하고 싶은 생각은 안 드네요.=3=3

로드무비 2005-04-28 19: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루님, 예! 꿋꿋하게 잘난척하겠습니다.^^
미누리님, 저랑 처지가 같은 것 아니신가요?^^
(추천은 고마워요.)
브리니님, 제 딸은 기필코 그렇게 안 만들게요.^^;;;
복순이 언니님, 판다님, 저 내성적인 세일즈맨에게 추천 좀 해주고 가시지
그러셨어요.^^

어룸 2005-04-28 22: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쩝니까...저도 우,웃음이...^^:;;;;;;;;;;;;;;;
(얼른 분위기바꾸며) 내맘대로 캡션에 감동했어요!!! 추천도 했어요!!! ^^

로드무비 2005-04-28 22: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투풀님, 고마워요.
내맘대로 캡션 좋아해 주셔서 얼마나 기분좋은지......
새벽별님, 좋으시겠어요.
그것도 위로라고.=3=3=3

nrim 2005-04-28 23: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이런 사연이 있었던거로군요. ^^

하얀마녀 2005-04-29 00: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역시 어머니는 위대합니다. ㅜㅜ

2005-04-29 00:16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드무비 2005-04-29 00: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속삭님, 그렇게 말씀하시니 제가 미안해지잖아요.^^;;;;
하얀마녀님, 그렇게 말씀하실 것까지야.....술 드셨남유?^^
느림님, 사연이라고 말씀하시니 슬픔이 복받쳐오르는 느낌이...^^

nemuko 2005-04-29 11: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후후..새벽별님도 저랑 비슷하시군요. 저도 단추 다는데 1시간씩 잡아 먹기 땜에 떨어진 단추들은 맨날 주워서 통안에 담아 두었다가 시어머니께 내밀거든요. 그러는 와중에 대부분 잃어버리구요.
로드무비님 수고하셨습니다^^

딸기 2005-04-29 12: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 꼭두각시 무용은... 제가 국민학교 2학년 때 운동회에서 했던 건데,
요즘도 하나보군요.
로드무비님, 그런 일 있으면 택배로 저한테 보내세요. 제가 또 한 바느질 하거든요.ㅋㅋ

로드무비 2005-04-29 16: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4월의 딸기님 나중에 딴소리하시기 없기예요.
5월 4일에 운동회를 한답니다.^^
네무코님, 반가워요. 바느질 못하신다니!
동지를 만난 것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