닭털 같은 나날
류진운 지음, 김영철 옮김 / 소나무 / 2004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새벽 여섯 시에 일어나 국영상점에 가 줄을 서서 두부 한 근(다섯 모)을 집에 사다놓고 출근하는 중년의 사내가 있다. 성은 임(林)이고 말단관리. 그의 하루 운수는 두부를 무사히 사고 통근버스를 놓치지 않는 그런 것으로 점쳐지고 최악의 상황은 바로 자기 차례가 왔는데 출근시간이 딱 걸려 빈손으로 통근버스에 올라야 할 때이다.  그럴 때 그는 길게 늘어선 대열에 대고 욕을 퍼붓고는 떠난다.  "젠장, 세상에 가난뱅이도 더럽게 많네."

그의 아내는 처녀 시절 얌전하고 참한 규수였다. 그런데 결혼 몇 년이 지나자 그 조용하고 시적인 아가씨가 잔소리를 좋아하고 머리도 빗지 않고 밤에 몰래 수도물을 훔치는 주부가 되리라고 누가 상상할 수 있었겠는가?  '닭털같은 나날' 은 어느 날 바쁜 나머지 두부를 현관 앞에 봉지째 던져놓고 갔다가 가정부가 그것을 냉장고에 넣지 않는 바람에 그 두부가 상하여 퇴근 후 싸움이 벌어지는 임(林)씨 부부의 이야기로 시작된다.

당신도 두부를 사고 출퇴근을 하고(... ) 빨래를 하고 말 무지하게 안 듣는 가정부까지 다루고 아이를 돌보다보면, 저녁이 되어도 책 한 장 뒤적이고 싶지 않게 되고, 웅장한 꿈이나 이상이라는 것은 개방귀 같은 소리고 철없던 때의 일이 되어버리고 만다.

'닭털같은 나날'(一地鷄毛: 원제)은 번역자의 말에 따르면 여러 가지 해석이 가능하여 닭을 잡은 뒤에 닭의 피와 털이 난무한 곳을 가리키는 말도 된다니 그처럼 냄새나고 비루한 일상을 말하는 것이 아닐까.

나는 이 일화가 가장 인상깊었다. 아내가 매일밤 조르는 바람에 그녀의 새 직장을  구하기 위해 이 사내 어느 날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억지로 옮겨 아는 사람을 찾아간다. 그런데 부탁을 해놓고 가만히 있었으면 좀 좋아?  일이 쉽게 풀려서 아내의 이직은 거의 성사 직전이었는데, 이 어리석은 부부 좀더 만전을 기한다고 먼저 부탁을 한 사람보다 한 계급 높은 사람을 또 찾아가는 것이다. 그리하여 먼저번에 부탁한 사람의 심사를 건드리는 바람에 그들의 꿈은 물거품이 되고 만다.

돈 몇 푼 때문에 부부싸움이 벌어지고, 또 생각지도 않은 돈  몇푼이 생기는 바람에 맥주 한병을 사다마시며 희희낙락 가정부 몰래 뜨거운 밤을 보내기도 하는 이 부부. 언뜻 보면 자존심도 뭣도 아무것도 남지 않고 생존본능만으로 살아가는 것 같으나 그게 그렇지 않다. 집앞 정류소까지 통근버스가 새로 배차된 것이 자신에 대한 사장의 배려인 줄 알았다가 사실은 사장 처제 때문이란 것을 알고 아내는 자존심이 무너져 가슴을 쥐어뜯기도 한다.

이웃의 배려로 그집 아이가 다니는 조건 좋은 유아원에 이 부부의 아이도 다니게 됐는데, 나중에 알고봤더니 너무 내성적인 그집 아이의 수행원 역할쯤을 기대하고 '빽'이 되어준 걸 알고는 임은 자다가 일어나 자기의 따귀를 때린다. 이런 대목에서는 어이없기도 하고 짠하기도 하여  웃을 수도 울 수도 없다. 

우리와 진배없는 한 소시민 가족의 우유부단하고 고단한 일상을 다룬 것이 '닭털 같은 나날'이라면,  꽤 묵직한 중편  '관리들 만세'는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자신의 말과 얼굴을 열두 번도 바꿀 수 있는 정년퇴임 직전의 연령대인 국장과 7인의 부국장의 이전투구를 다루었다.

어느 날 이 고위간부들의 사무실이 밀집해 있는 2층 복도  화장실의  변기가 고장나고 구더기들이 기어다닌다. 도대체 어찌 된 일일까?  얼굴에 칼자국이 난 청소부 영감이 국장 이하 부국장들도 모두 경질될 것으로 알고 청소를 태만히 했기 때문이다. 작가의 이 능청과 입담이라니!

이 책의 마지막에 실린 '1942년을 돌아보라'는 르포르타주 형식의 독특한 소설이다. 그해 중국 하남성에 발생, 3백 만 명이 굶어죽었다는 혹심한 기근에 대한 추적 보고서이다. 장개석 위원장은 인민들이 수없이 굶어죽고 나중엔 사람이 사람을 잡아먹는 지경에까지 이르러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다. 그 보고서를 믿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가 먼저 신경을 써야 할 것은 따로 있었기 때문이다.

통치자는 언제나 통치자이다. 통치자가 되기만 하면 피부색과 민족에 관계없이 세계 일류의 의식주와 교통수단을 누릴 수 있다. 통치하는 민중과 전혀 동떨어져 있더라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나는 예전부터 각국의 통치자들이 악수하고 환담하는 것에 찬성한다. 왜냐하면 그들이야말로 진정한 동일한 계급의 형제들이기 때문이다. 각국의 민중들은 서로 연합할 필요도 없고 할 말도 없다. 통치자들은 전쟁이 발발해도 전혀 겁낼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지상에 있는 마지막 폭탄만이 통치자의 머리에 떨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소설가 황석영이 이 책에 붙이는 글도 아주 재미있다. 소설가 이문구가 위화의 어느 소설 뒤에 '허름해서 좋은 위화의 사람들'이란 빼어난 해설을 붙였는데. 그가 류진운의 이 소설집 뒤에 붙인 글의 제목은 '인민으로서 살아내기'이다. 아닌게 아니라 이 책에 실린 세 편의 소설을 읽고나면 '살아낸다'  혹은  '버틴다'라는 단어말고는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는다. 그런데 신기한 것은 그것이 사람의 힘을 빼는 것이 아니라 뭔가 힘을 보탠다는 것이다. 그것이 안간힘인지 오기인지는 잘 모르겠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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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르바나 2005-03-12 11: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 두부이야기를 길게 늘어 놓으셨네요.
원제를 보니까 뜻은 다르지만 '한 모'드린 일이 그리 틀린 일 만은 아니네요.
오늘드리면 두 毛째 되나요.
저는 언제나 로드무비님처럼 소설읽고 리뷰를 쓸 수 있으려나 모르겠습니다.
아, 부러워라 '명편소설 리뷰'

릴케 현상 2005-03-12 11: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젠장, 세상에 가난뱅이도 더럽게 많네" 이거 우리 아부지를 영판 닮았네요 함 읽어보고 싶어 졌음^^

깍두기 2005-03-12 11: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당장 사보겠습니다. 살 때 땡스투를 누르지요^^
근데 왜 저는 이 좋은 글을 보고는 '어, 저렇게 가난한 집에 가정부가 웬말이야?'란 생각을 한참 하다 가는 걸까요?
우리집은 가난합니다. 우리집 운전수도 가난하고 가정부도 가난합니다.....^^

암리타 2005-03-12 11: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잘 읽었습니다. 한편의 서평이 아니라 한권의 책을 몰래 엿보듯한 느낌이네요
계속해서 좋은 글 부탁드립니다.

PS: 모 회원제 인터넷서점에서는 반값으로 세일을 하더군요
단, 약정기간 좀 긴게 불만이지만,
참고하시면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kleinsusun 2005-03-12 14: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살아 내기" , "버티기". 적확하고 또 적나라하네요.
제목이 정말 리얼해요. 웃을 수도 울 수도 없는...
저도 읽어볼래요. 추천!

로드무비 2005-03-12 19: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수선님, 주말 잘 보내고 계세요?
이 책 재밌어요. 작가의 능청이 우습고 내6용은 또 인간심리를
적나라하게 파헤쳐놓아 끔찍한 부분도 있고......
(위의 6은 주하가 장난쳤음. 지우지 못하게 하네요.^^;;;)
암리타님, 모 회원제 인터넷 서점이 어딘지 가르쳐주실래요?
제가 이따가 님 방에 건너가겠습니다. 반가워요.^^
깍두기님 중국에서는 가난한 사람도 아주 헐값으로 가정부를 쓴다고 알고 있습니다.
인건비가 워낙 싸니까요.(맞벌이를 하는 경우, 아이를 맡겨야 하니까.)
이 책 깍두기님도 좋아하시지 않을까 읽으면서 생각했다오.
특히 '관리들 만세'를......(읽어보면 알게 됨!)
자명한 산책님 꼭 한번 읽어보세요.
아주 재밌어요.^^
니르바나님, 뜨끈뜨끈한 두부를 두 모씩이나......
고맙습니다.
그리고 명편소설 리뷰~는 과찬이십니다.^^

icaru 2005-03-12 23: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아...이것이로군요...닭털같은 나날~ 음냐... 님의 리뷰를 뵈니, 작가의 능청이 만져질 듯 합니다..^^ 근데..님의 답글에서 주하가 6을 지우지 못하게 한다는 부분... 재밌어요...흐... 참 독특한 마인드를 갖고 있는 친구입니다 ^^

하루(春) 2005-03-12 23: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랜만에 독후감 올리셨네요. 올해 읽을 책들 목록에 넣어야 겠어요.

perky 2005-03-13 00: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이 책 보관함에 담긴지 벌써 몇개월째인 책이에요. 님 리뷰 읽고나니 막 사고 싶어져요. ^^

플레져 2005-03-13 00: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위화의 소설인 줄 알았는데... 님의 정서를 흔들어 놓았군요.
얼마나 재미난 소설일지는 안봐도 훤하네요.
두부 한 모처럼 딱 필요한 양, 딱 필요한 이야기들...훌륭한 리뷰여요!

내가없는 이 안 2005-03-13 04: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리뷰 너무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로드무비님 쓰시는 글 같은 소설인가 봅니다. ^^ 의도적으로 가볍게 처리한 듯도 싶고, 겉으로는 재치와 유머가 난무하는데 속으로는 아픔이 서려 있는 듯도 싶고...

로드무비 2005-03-13 08: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내가 없는 이 안님, 항상 고마워요.
님이 말씀하시는 글과 제 쪼가리 글들은 상관이 없지만
제가 좋아하는 건 그런 글들입니다.
재밌게 읽으셨다니 기분이 좋습니다.^^
플레져님, 오랜만에 본격정통리뷰(?)를 하나 써보려고 했는데
쓰다만 것 같아요.
두부 이야기도 쓰고해서 어제 저녁엔 아예 두부전골 해먹었답니다.^^

로드무비 2005-03-13 08: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퍼키님, 요즘 책 주문 많이 하신 걸로 아는데...
호호 지른 김에 한번만 더 지르시죠, 뭐. 정말 좋거든요.
하루님, 오랜만에 독후감, 맞아요.
이제 책 좀 읽으려고요.
감흥이 생기면 독후감도 올리고요.^^
복순이 언니님, 전 능청스러운 글이 좋더군요.
면전에서 울고불고하는 건 딱 질색이에요.^^

잉크냄새 2005-03-13 20: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리뷰를 읽으면서 위화의 소설인줄 알았네요. 님의 리뷰로 판단컨대 상당한 공통점이 있는것 같아요. "허름해서 좋은 사람들" 이 이 작가에게도 통용되는듯 하네요.

balmas 2005-03-13 20: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이 참, 무비님,
이렇게 리뷰를 잘 쓰시면 다른 분들이 리뷰쓰기가 어렵지 않을까요?
리뷰를 읽었더니 책이 너무 보고싶네.
출판사에서 스카웃 제의 안오던가요?? ^^
ㅋㅋ 너무 아부 모드인가?
농담이고, 정말 리뷰 재미있게 잘 읽었습니다. 실제로 소설 보면 리뷰만큼 재미없을
것 같은 불길한 예감 ... ^^;;;

로드무비 2005-03-14 07: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발마스님, 너무 과찬하시니 놀리는 것 같잖아요.
저 예전에 스카웃되어 출판사에서 일했어요.(ㅎㅎ농담)
도서관에서 빌려서 읽으시죠?
꼭 한번 읽어보시라는 뜻이에요.^^
잉크냄새님, 그게 비슷한 것 같으면서도 어딘가 분위기가 달라요.
위화의 사람들은 행색부터 허름하잖아요.
그런데 이 소설 속의 사람들은 마음이 그럴 수 없이 꾀죄죄하답니다.^^

파란여우 2005-03-13 23: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소설을 읽어야 하나 말아야 하나요?
왠지 서평이 너무 재밌으면 소설을 막상 대했을 때 실망할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이...
저 그래도 땡스투 눌렀다구요....

암리타 2005-03-14 10: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요청하신 대로 이 책을 50% 싸게 파는 곳은
베텔스만(대교)북클럽입니다.
http://www.thebookclub.co.kr/가 싸이트 주소입니다.
단, 2년동안 분기별로 책 한권을 꼭 봐야되는 의무사항이 있는 인터넷서점이죠
꼭 싸이트 홍보하는 것 같아서 그렇지만
이렇게 특정 책을 싸게 파는 곳도 있다는 것을 말씀드립니다.

로드무비 2005-03-14 17: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암리타님, 유용한 정보 고맙습니다.
꼭 한번 들러볼게요.^^
파란여우님, 글쎄, 제가 영화나 책 줄거리를 소개하면 보고 온 사람들이
그런 말을 하던데요(잘난척ㅎㅎ) 이 책은 안 그럴 것 같은데요?
마음이 땡기는 대로 하셔요.^^
(고맙습니다, 사게 되면 꼭 땡스투 눌러주시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