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상자님을 비롯하여 알라딘의 젊은 주인장들이 설날 귀향기를 실어놓으셨다.  고향집, 늙은 부모, 오랜만에 눕는 내 방의 낯섦과 정처없는 마음......나 또한 이십대 후반에 극적으로 취직이 되어 서울에 상경, 근 10여 년을 추석과 설날 선물보따리를 손에 들고 고향 가는 열차에 올랐었다. 그리고 항상 혼자였다.

어느 해 설인가는 엄마와 싸우고 맨발에 슬리퍼 바람으로 뛰어나와 골목길에 서서 울고 있었다. 엄마를 용서하지 않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런데 지금은 무슨 일로 싸웠던 것인지 기억도 못한다. 엄마를 용서하지 않겠다는 생각을 했다는 것만......맨발보다도 그 마음이 더 나를 얼어붙게 했다는 것만 희미하게 기억한다.

어느 해 추석인가는 아버지와 엄마가 한판 붙으셨다. 찔끔찔끔 우는 엄마를 모시고 나와 동네 재개봉관에서 철이 지나도 한참 지난 영화 <자유부인>을 보았다. 내 딴에는 엄마를 위로한답시고 매점에서 먹을것도 사서 나르고 곰살맞게 굴었는데 어느 순간 이상해서 옆을 보니 코를 골고 주무시던 엄마. 엄마의 상심이 그리 깊지 않은 것에 안심이 되는 한편으로 같은 여성으로서 묘한 배신감도 느꼈다.

영화 <초록물고기>를 보면 가족이 모처럼 야유회에 가서 싸움이 붙는다. 이상하게 가족이란 게 그렇다. 모처럼 만나 그럭저럭 화기애애하게 잘 놀다가 그래서 아아, 오늘은 무사했구나 마음을 쓸어내리는 순간,  꼭 누군가가 상을 뒤엎는다.

어느 해 나는 직장을 그만두고 집으로 다시 내려와야겠다는 말을 하려고 했는데 부모님 앞에 차마 하지 못하고 새 이불만 하나 얻어 서울행 기차에 올랐다. 짐도 있고 하니 딴에는 머리를 써서 택시를 쉽게 잡아보겠다고 영등포역에 내렸는데 한 시간 동안 택시를 잡을 수가 없었다.  솜이불 보따리는 얼마나 무겁고 부피가 큰지 차라리 서울역에 내렸으면 순서대로 택시에 오를 수 있었는데......안 그래도 올라오기 싫었던 서울이 나를 막 가라고 밀쳐내는 것만 같았다.

겨우겨우 택시에 오른 나는 기사 아저씨에게 택시 잡느라고 한 시간을 길에서 떨었다고 하소연했다. 무거운 이불보따리를 보고는 차들이 다 피해 가더라고. 그런데 이 아저씨 한마디 대꾸도 안하시는 거다. 택시가 양화대교를 지날 때 나도 모르게 눈물이 막 흘러내렸다.  '내 다시는 세상에 대고 하소연 같은 것 하나봐라. 엄살은 여기서 끝이다. 썅!'

나는 정말 그 결심을 지켰다. 농담의 형식을 빌어 "저 고독해요!"라는 소리는 했지만 어느 질펀한 술자리에서도 아무리 힘들어도 나의 슬픔과 문제를 깊이 토로하거나 하지는 않았다. 잘한 짓인지 잘못한 짓인지 아무튼 친구들을 많이 잃었다. 어찌 생각하면 친구란 자신의 슬픔을 과장하여 하소연해야만 유지되는 관계인 것 같기도 하다.

나는 나를 그토록 민망하고 무참하게 했던 그 택시 기사를 잊을 수 없다. 심지어는 그를 만난 걸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내가 그토록 싫어하는 엄살을 하루아침에 딱 끊게 했으니! 

명절 무렵 귀성 인파를 보여주는 역전만 보면 생각나는 그 아저씨. 그런데 얼마 전부터 이런 생각이 드는 거다. 그 아저씨는 내가 모르는 무슨 힘든 일이 있었는지도 모른다고. 이불보따리를 들고 택시를 잡지 못해 길에서 한 시간을 헤맨 아가씨의 하소연이 하나도 귀에 들어오지 않을 정도로 심각한 고민이......

누가 알겠는가? 각 처소의 각자의 사연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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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개 2005-02-11 21: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가끔은 위로를 하고 싶지만, 적당한 말이 떠오르지 않을때가 있어요.. 글로 쓸 때는 그나마 시간을 두고 생각해서 뭐라고 써놓기도 하지만, 말로는 더 힘들어요.. 저같은 경우에 그렇더라구요..^^
그래서, 저는 그냥 조용히 들어주기만 할 때가 많답니다.. 그 아저씨도 속으로는 "에구 저런...."이라고 하셨을지도 몰라요..
그렇게 생각하시고, 이제는 하소연을 마음껏 해 보시어요..^^* 혹, 위로의 말을 제대로 써 주지 못하는 경우라도, 마음으로 항상 위로를 전하는 저를 기억하시구요..ㅎㅎ

2005-02-11 21:34   URL
비밀 댓글입니다.

미완성 2005-02-11 21: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산다는 게 참, 사연이 있는 것도 슬픈 일이요 사연이 없는 것도 무미건조하여 슬픈 일인데, 생각해보면 사연이 없다는 것 또한 하나의 사연일테니 각자에게 사연 없는 사람 하나 없이 우리 모두 다른 냄새의 슬픔을 갖고 각자의 인생사를 써내려가고 있는 거겠지요?
정말로, 그 택시기사 아저씨는 그날 무슨 일이 있으셨던 걸까요. 하지만 넓은 치마폭으로 이제는 그 아저씨의 숨겨진 사연까지 감싸 안는 로드무비님의 푸짐한 마음씨가 부러운걸요. 연륜이란 그런 건가 봅니다. 님은 엄살이라 생각하고 꾹 참으실지 모르겠지만 이제는 그 사연을 푹푹 떠서 두꺼운 사기그릇에 담아 나눠주셔요. 저희는 님이 엄살이라 생각하시는 그 사연조차 맛있고 감사하게 받아먹을테니까요. :)

Laika 2005-02-11 21: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을 읽는데, 코끝이 찡해지네요....

줄리 2005-02-11 22: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영화속의 장면처럼 살아 펼쳐지는 로드무비님의 회상같네요. 사연과 회상은 늘 함께 동반하는것 같아요. 현재의 우리를 이루는 사연들에 대해서 따뜻하게 바라볼수 있는 로드무비님은 지금 행복하신 분이시라구요. 안그런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데요. 그 택시 기사 아저씨도 이제 남의 작은 어려움에 따뜻한 말한마디를 건넬 만큼의 온화함이 생기셨으면 좋겠네요.

비연 2005-02-11 23: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음 찡한 글이네요...그 아저씨, 지금쯤 어디에서 무얼 할까요..
로드무비님. 각 처소에 저마다의 사연이 있다는 말씀, 잊지 않으렵니다..

숨은아이 2005-02-11 23: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지금도 엄살 많이 부리는데요... ^^ "용서하지 않겠어"란 말을 보니 생각나네요. 결혼하고 얼마 안 되어서였는데, 옆지기랑 싸우고 "오늘 일 절대 잊지 않을 거야"라고 말했어요. 그런데 무슨 일이었는지 지금은 전혀 기억 안 납니다. +_+ "절대 잊지 않을 거야" 하고 내가 뇌었던 것만 기억나고. 하핫.

플레져 2005-02-11 23: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내안에 아픔이 제일 클 수 밖에 없지요.
그 무심한 택시운전사 아저씨를 이해하게 된 로드무비님처럼,
그 아저씨도 어느날의 아가씨를 떠올리며 무심할 수 밖에 없었던 사연을 마음속으로나마 변명하고 계실 것 같아요... 찡해요.

urblue 2005-02-12 09: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제 저녁에 돌아왔습니다.
이번 설은, 엄마가 몸이 안 좋으셔서 차례도 안 지내고, 실컷 놀기만 했네요.
오늘은 늦잠자려고 했는데, 어쩐 일인지 8시에 깨버렸습니다.
피곤하기는한데 다시 잠은 안 오고, 뭘 해야 할까 궁리중이에요.
여러 페이퍼 보니 잘 지내신 듯 합니다. ^^

조선인 2005-02-12 09: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아직 한참 멀었군요. 용서하지 않겠어, 절대 잊지 않을 거야, 라고 내뱉었던 날들을 너무나 또록이 기억하고 있는걸요. -.ㅜ

2005-02-12 12:05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드무비 2005-02-12 17: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많은 분이 추천 누르고 댓글 달아주셨네요.
제가 어제오늘 바쁘게 일하는 게 있어 조금 전에야 들어왔습니다.
알라딘 청년들 귀향기 읽고 문득 생각나서 쓴 글인데 좋아해주시니 고맙습니다.
다정한 댓글 남겨주신 분들 고맙습니다.
귓속말 남겨주신 청년 두 분, 감격입니다.^^

2005-02-14 10:19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드무비 2005-02-14 12: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속삭이신 님, 님도 그 우울한 추억 중 한 개 털어놓아보시죠.^^

하루(春) 2005-02-15 00: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흐흐~ 머칠 전 저도(?) 집에서 스트레스 왕창 받아서 우울하게 있는데, 친구가 나오라고 전화하는 바람에 술 마시며 서로 화난 얘기 다 풀었는데... 전 집에서 화나는 일 생기면 친구한테 말하고 풀게 되더라구요. 그렇게 제 얘기를 하면 그 친구도 자기집 얘기를 하니까 더 친해지는 것 같아요. 며칠 전 일로 인해 저 스스로 이제는 마음을 좀 키워야 겠다고 다짐했는데 그렇게 하니까 확실히 맘이 편한 것 같아요. 어젠 제가 엄마한테 '말아톤' 보고 엄청 울었다고 하니까 엄마가 "넌 착한 거니? 바보니?" 하시길래 제가 "난 바보야. 그런 것 같아."라고 했어요. ^^; 어쩔 땐 제 감정을 주체할 수 없어서 서로의 관계를 최악으로 만들 수도 있는 말을 내뱉기도 하지만, 결국 돌아갈 곳은 집이라는 걸 이제야 깨달았어요.

하루(春) 2005-02-15 00: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랜만에 댓글질을 하니 참 할 말이 많군요. ^^ 이창동 감독의 영화에는 주인공의 주변인물들이 다 모이는 장면이 꼭 있습니다. 초록물고기에서는 가족들의 야유회, 박하사탕에서는 옛 직장 동료들과의 야유회, 오아시스에서는 부모님의 회갑잔치. 하지만, 그렇게 사람들이 많이 모인 자리에서 이창동은 꼭 싸움을 붙이죠. 제가 심심해서 생각해 봤는데, 너무 오랜만에 만났기 때문이 아닐까 싶어요. 물론 종종 연락은 하지만, 이미 처소는 다 달리 하고 있고 따라서 서로의 맘을 예전처럼 알 수 없기 때문에 그만큼의 거리를 포용하지 못해서 그런 게 아닐까 싶어요. 그냥.. 그런 생각이 들었는데...

로드무비 2005-02-15 11: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루님, 엄마와 딸, 참 묘한 관계죠?
이창동 감독의 영화에는 정말 님 말씀처럼 잔치 끝에 싸움박질하는
광경이 꼭 나오네요.
잘해보겠다고 어색한 노력을 기울이다가 문득 폭발하는 화.
그 속에 짠한 뭔가가 있는 것 같습니다.^^

쎈연필 2005-03-16 00: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쩐 일인지 이 글을 이제야 읽었네요. 히잉...

검둥개 2005-08-07 14: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드무비님, 이렇게 저를 울리시는군요. ㅠ.ㅠ (추천은 그래도 절대 잊지 않고 꾸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