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호프 단편선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70
안톤 파블로비치 체홉 지음, 박현섭 옮김 / 민음사 / 2002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언제부터인지  컴퓨터 한 대를 놓고 남편과 신경전을 벌이게 되었다. 나는 당연히 알라딘 서재, 남편은 포커 게임. 갑자기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포커 게임에 재미를 붙인 남편, 서재활동에 매진중인 아내를 구박하기 시작한 것이다.

"중독이야, 중독!" 내 뒤통수를 겨냥한 남편의 질타는 계속되고 나는 타의에 의해 컴을 꺼야 하는 수모를 견딜 수 없다. 급기야 열흘 전쯤 세 시간째 포커 게임을 하고 있는 남편에게 울화통을 터뜨렸다. "사람이 변해도 너무 변했어. 예전엔 나에게 안 그랬잖아!" 냉장고에 있는 소주 한 병을 들고 와 콸콸콸콸 소리도 요란하게 따르며 투덜거렸더니 그제서야 눈이 동그래진 남편이 달려나왔다.

다음날, 아침에 출근하는데 일어나보지도 않았다. 최소한 비타500한 병과 차 안에서 마시라고 생수통에 담은 녹차 한 병은 건네는데 말이다. 컨디션이 좋으면 생과일주스를 만들어 한 컵 가득 대령하기도 하는데......그 비율은 반반이다. 아무튼 싸우고 출근하는 데 코빼기도 안 보인 건 결혼하고 처음 있는 일이었다. 남편도 화가 났는지 현관문을 쾅 닫고 나가버린다.

그날 저녁 술자리가 있어 늦겠다는 전화가 걸려왔는데도 "그러든지 말든지......"하고 모지락스럽게 전화를 끊어버렸다. 남편은 다음날 토요일 정오경 폐인에 가까운 모습으로 집에 돌아왔다.

어디 있다가 이제 오느냐고 물었더니 경찰서란다. "혹시 음주운전?" 나의 물음은 비명에 가까웠다. 남편은 침통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아아,  면허취소에 1년간 운전을 할 수 없다니!

"도대체 어쩌다가!" 하고 등짝을 한 대 패주려다가 나도 모르게 그의 등을 토닥여 주었다. "많이 놀랐겠네. 그래도 차라리 다행이다. 잡힌 거. 술마시고 운전하다가 사고라도 났으면 어쩔 뻔했어!" 굳어 있던 남편의 얼굴이 그제서야 풀어지는 듯했다.

딱 하루,  출근하는 남편에게 "운전 조심해!" 하는 인사를 빼먹었더니 지랄맞게 이 모양이다. 아무튼 이왕 벌어진 일이니 속을 끓여봤자 나만 손해 아닌가!(벌금은 얼마나 나오려는지.)

무슨 리뷰가 이 모양이냐고?

오늘 하루종일 <체호프 단편선>을 읽었다. 최근 우리 부부의 애정 이상전선과 투닥거림과 사건사고와 어쩔 수 없이 해야 하는 화해와 그러고도 남는 앙금과 뭐 그런 것과 다를 바 없는 소소한 이야기들이 대부분이었다.

오페라를 보다가 느닷없이 터진 재채기로 앞좌석 장군에게 침을 튀기는 바람에 며칠 동안 그를 찾아 사죄하러 다니는 등  전전긍긍하다가 배속에서 뭔가가 터져 죽어버린('관리의 죽음') 사람 이야기를 필두로 하여. 한마디로 체호프 단편의 주인공들은 부자거나 가난하거나 잘났거나 못났거나 간에 겉으로 보여지는 모습과는 다르게 쩔쩔매며 살고 있다. 그리고 그건 나의 사는 모습과 별반 다르지 않다.

이 책 뒤표지에 실린  "체호프의 단편들은 한없이 차갑지만 따뜻하고, 단호하지만 부드럽다. 그의 익살 뒤에는 천근같은 우수가 기대어 있다"는 서울대 노문학과 박현섭 교수의 짧은 글은  체호프의 문학을 사정없이 관통하고 있다.

 

 

 


댓글(20) 먼댓글(0) 좋아요(1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플레져 2004-12-28 18: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너무 반가워서 한달음에 달려왔음...^^

날씨가 추워졌어요. 목감기에 걸렸다가 나았다가 다시 또 걸렸네요.

주사를 맞고 몸을 비비 꼬았어요. 20분쯤 지나니 괜찮아져서 열심히 하던 일을 하였지요. 무슨 댓글이 이모양이냐구요? 헤헤....^^ 레이몬드 카버의 소설 중에 체홉의 집 단편이 떠올라요. 체홉이 죽음을 맞이하던 순간을 그린 소설인데, 요샌 체홉 하면 그 소설이 제일 먼저 떠오르네요.

물만두 2004-12-28 19: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체홉의 골짜기를 조사한 차에 이 글을 만나다니... 저랑 친하지는 않은 작가지만요^^

urblue 2004-12-28 19: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 열심히 보시는군요! 전 아직도 놀기만 하는데..

책장수님은, 님 말씀대로 사고 안난게 다행이지요. 울 회사 사람 몇 년 전에 만취 상태로 운전하다 사고내서 여간 고생한게 아니거든요.


날개 2004-12-28 19: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분명히 리뷰를 보러 들어왔는데, 이건 페이퍼잖아요!! 로드무비님은 어쩔수가 없단 말이야~ 흐흐~ 리뷰를 이리도 와닿게 쓰시다니 능력입니다요..

제 옆지기가 작년 딱 이맘때에 음주운전으로 면허취소를 당했답니다.. 벌금 한 200만원쯤 나옵니다..ㅜ.ㅠ 희안하게도 면허취소라고 바로 다음날부터 운전 못하는게 아니더군요.. 한달의 유예기간후에 취소더라구요.. 아마 생계형 운전자 때문인 듯..

아무튼, 벌금 내려면...ㅠ.ㅠ

poptrash 2004-12-28 20: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아요 체호프. 간결하면서도 따뜻한... 마치 손으로 짠 스웨터처럼.

로드무비 2004-12-28 20: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플레져님, 그 단편 제목이 뭐죠?

레이몬드 카버라면 저도 두어 권 가지고 있는데......

(빨랑 알려주오. 책제목이랑)

물만두님, 체호프랑 친해두면 좋을 텐데요?^^

블루님, 그렇게 생각해야지 우짜겠어요?

얼마 전엔 또 족구하다가 다쳐 피를 철철 흘리고 들어오더니 내참.

날개님, 어머 그런 일이 있었어요?

지금은 면허 다시 획득했겠네요?

산골짜기에 살면서 차까지 없는 1년을 보내야 한다니 공포스럽습니다.

poptrash님, 님도 언제 리뷰 쓰셨죠?

기억에 남아 있습니다.^^

비로그인 2004-12-28 20: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런 리뷰는 처음입니다. 역시, 추천 안 할 수가 없네요. 대체...이런 내공은 어디서 나오는 건지.

깍두기 2004-12-28 20: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으하하하 아주 재미있는 리뷰입니다^^ 리뷰가 아니라 체홉 단편선 다음 이야기를 쓰셨다고나 할까?^^

2004-12-28 20:53   URL
비밀 댓글입니다.

플레져 2004-12-28 20: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숏컷 (집사재) 에 있는 심부름이어요 ^^

하얀마녀 2004-12-28 22: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스포일러는 절대로 안 하시면서 어떤 책인지는 확실하게 알려주셨네요. ^^

내가없는 이 안 2004-12-29 07: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등짝을 한 대 패주려다가 나도 모르게 그의 등을 토닥여 주었다! 로드무비님, 멋지게 화해하셨어요. 물론 사단은 벌어졌지만 큰 사고 안 난 걸 다행으로 여기시니 그 마음도 멋집니다. ^^

kleinsusun 2004-12-29 09: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리뷰가 정말....리얼해요.

다시 한번 느껴요. " 솔직한 글은 힘이 세다!"

추천하고 갑니당.

2004-12-29 09:48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드무비 2004-12-29 10: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속삭이신 님, 남편의 구박에도 아랑곳없이 꿋꿋하게 서재활동에 매진하자고요?

그러문요, 그래야죠.^^

수선님, '리얼 리뷰'로 계속 나가려고요.

님의 칭찬 힘이 됩니다.^^

이 안님, 마음같아선 한 대가 아니라 수십 대 패주고 싶죠.

그래도 다독이며 살아야지 우짜겠습니까.^^;;

하얀마녀님, 컴퓨터 서로 차지하려고 신경전 벌이고 급기야 싸우고

그게 바로 체호프 단편의 소재들이거든요. 물론 당시에 컴퓨터는 없었겠지만...

플레져님, 숏컷은 없는데. 혹 가지고 계시면 나중에 빌려주세요.

빌려주실 거죠?^^

깍두기님의 호탕한 웃음소리로 시작되는 댓글이 안 보이면 허전해요.

추천 고맙슴다.^^

노웨이브님, 이것도 리뷰냐고 욕 안하시고 내공이라고 말씀해 주시니

얼마나 고마운지......^^

니르바나 2004-12-29 11: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드무비님의 글을 대할 적 마다 갖게 되는 상상은 기품있는 삶과 격조있는 사고를 하며 사시는 분으로 그려집니다. 지금 여기에서 사시구요("도대체 어쩌다가!"/ "많이 놀랐겠네. 그래도 차라리 다행이다. 잡힌 거. 술마시고 운전하다가 사고라도 났으면 어쩔 뻔했어!" ), 그렇다고 虛가 없다면 삭막한 生일텐데(냉장고에 있는 소주 한 병을 들고 와 콸콸콸콸 소리도 요란하게 따르며 투덜거렸더니) 낭만에 확실히 초를 치며 사시는군요. 로드무비님

부럽습니다.

어제 오늘 이 글만 5번째 읽고 있습니다.

요즘 이상한 버릇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추천과 댓글을 따로 따로 하는 습관이 들었어요.

추천은 어제 댓글은 오늘.

별로 좋은 습관은 아니지요. 로드무비님

로드무비 2004-12-29 11: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니르바나님, 기품과 격조는 저랑 영 상관이 없는 단어인데요.^^;;;

소주 '크라스'에 콸콸콸 따르는 사나운 면이 가끔 제게 있답니다.

아무튼 너무 잘봐주셔서 고맙기 그지없고요.

추천과 댓글은 마음 내키시는 대로 아무렇게나 하셔야지요.

저는 그저 이렇게 한마디 남겨주시는 것만도 감사할 뿐이랍니다.^^

숨은아이 2005-01-03 17: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니 저런! 아무도 안 다친 게 다행이네요, 정말. 로드무비님이 운전 면허를 따심이...

michelle 2005-03-14 21: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루끼가 여행할 때 가장 선호하는 책이 <체호프 전집>이라죠. 그 이유를 일곱가지나 나열했던 것 같은데 제일 재밌었던 건, 누가 표지를 보게 되어도 체호프를 읽는 사람은 대개 이상하게 보지 않는다는 이유였죠. 그래서 저도 이번 여행에는 체호프를 넣어가려고요.

로드무비 2005-04-13 16: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미쉘님, 너무 늦게 봤어요.
맞아요, 여행길에 체호프 딱이에요.^^
숨은아이님, 항상 보면 뒤에 숨어서 댓글을 남겨놓으셔서.....
운전면허는 안 딸랍니다.(님은 운전자인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