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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절한 복희씨
박완서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7년 10월
평점 :
설마설마 우려하던 일은 기어이 현실로 닥치고, 기대하던 일은 좀체로 일어나지 않는 것이
인생이라는 걸 깨달은 건 얼마 되지 않는다.
비록 냉소주의의 팻말을 내걸고 있으나 나의 낙관주의는 품 속 깊이 감춘 암행어사의
마패 같은 것이었다. 그런데 모처럼 써볼 요량으로 더듬어 봤더니 그 마패가 온데간데 없다.
그 사실이 별로 놀랍지도 않다.
맛있는 음식에 달려들 듯 게걸스럽게 9년 만에 나온 박완서의 소설집을 읽어치웠다.
내 안의 허위의식과 이중성에 대해서 구체적인 사례를 들어 떠들라면
2박 3일로 밤을 새울 자신이 있다.
예전엔 내가 잘하고 남들이 내게 못한 것만 새록새록 생각나더니
지금은 밥솥의 밥을 퍼다가도, 슈퍼 진열대에서 두부 한 모를 집어올리다가도
얼굴이 뜨뜻해지는 순간이 자주 있다.
잊고 있던 나의 과오가 문득 떠올라서.
중풍으로 운신 못하는 시아버지의 팬티를 손으로 집지 못하고 집게로 집어설랑
오만상을 찡그리며 세탁기가 있는 다용도실로 가다가 마침 잠기지 않은 현관문을
열고 들어오던 친구에게 딱 걸렸다.
친구는 독거노인 목욕 봉사단의 멤버고, 소설 '마흔아홉 살'의 주인공 카타리나(세례명)는
그 봉사단의 실질적인 리더이다.
"어떻게 사람이 그렇게 겉다르고 속 다를 수가 있는지, 완전히 딴사람이야."
"세상에, 세상에 ......그 점잖은 노인네가 아들네 집에서 그런 구박을 받다니.
나는 카타리나가 그런 독종인 줄은 꿈에도 몰랐네."(83쪽)
모임에 좀 늦게 도착한 날, 무의탁이나 거동이 불편한 노인들 목욕 봉사를 해보자고
힘을 모았을 당시의 주동자가 카타리나라고, 천사 같은 얼굴 뒤에
뭐가 있는지 모르겠다는 친구들의 뒷담화를 닫힌 문 앞에서 듣고 그녀는 뛰쳐나간다.
애초에 회장을 맡겠다고 한 것은 권력욕으로, 그동안 노인들을 위해 바리바리
남편 회사의 도움을 받은 것은 목적을 가진 사업상의 PR로 치부된다.
인간의 이중성과 허위의식을 눙치고 까발리는 작가의 솜씨는 여전하다.
아니, 더욱 깊어지고 예리해졌다.
눈치를 채고 따라 나온 절친한 친구와 찻집에 마주앉아 카타리나는
김밥이며 순대를 아구아구 맛있게 먹는다.
그렇게 지독한 소리를 듣고도 모임을 깰 생각이 없는 그녀다.
목욕봉사를 헌신적으로 하는 것도 정의감의 찌꺼기일 뿐이고
그 날 그 친구에게 자신을 간파당했다고 카타리나는 스스럼없이 털어놓는다.
--(...) 내 이중성은 용서받지 못할 거야. 난 왜 이렇게 겉다르고 속 다를까.
어디까지가 진실이고 어디서부터 가짜인지 나도 모르겠는 거 있지."(105쪽)
집게로 집어들고 오만상을 찡그렸던 팬티 같은 것이 누구에게나 있을 것이다.
누군가 나를 간절히 필요로 하고 이 세상에 없어서는 안 되는 사람이
되고 싶었던 적이 있었다.
'누군가의 도움이 되기는커녕 네 앞가림이나 잘해. 그게 세상을 도와주는 거거든.'
내가 똑똑해서 일찌감치 그런 결론을 얻은 걸로 알았더니
이 책을 읽으며 불현듯 나는 깨달았다.
어릴 때부터 닥치는 대로 읽어왔던 박완서 소설의 영향이 적지 않았음을.
2005년, 한 문예지에 발표했다는 '거저나 마찬가지'는 읽으며 배꼽을 잡았다.
어제 오전 한 통의 전화를 받고 구체적인 아주 묵직한 상심이 있었는데도
잠시 그 뻐근함을 잊을 정도였다.
'마흔아홉 살'과 '거저나 마찬가지' 이 두 편 외에는 김병익 씨의 표현처럼
(작자와 해설자의 나이를 합하면 147세라고 소개하고 있다) 노년문학에 해당하는
작품들이 수록되어 있다.
우리나라 작가 중에 최일남의 소설 외에는 노년을 본격적으로 다룬 작품을
만나기 어려워 적잖이 아쉬웠는데 얼마나 반가운 일인지......
--나를 위로해준 것들이 당신에게도 위로가 되었으면 합니다.
책 앞장의 예쁜 메모지에 적힌 작가의 글과 단아한 친필사인을 들여다보는데
몇 번을 봐도 싫증이 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