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저녁 바둑학원 앞에서 기다렸다가 아이를 이비인후과로 데리고 가는데
엘리베이터 앞에서 내리던 소녀가 이효리라도 만난 듯 화들짝 놀라며
친구의 옆구리를 찌른다.
"저 언니 오늘 학교에서 상 받았다. 최우수상!"

아까 내게 상장 쪼가리를 보여주긴 했는데 그게 다른 학년 아이들도 알 정도로
대단한 상이었나?
물어보니 방송실에서 교장선생님이 상장을 주셨고 
그 장면을 아이들은 교실에서 지켜봤다고 한다.

금쪽 같은 상장을 내가 상장 쪼가리라고 부른 데는 이유가 있다.
지난주, 고운말 사용하기와 관련한 자신의 생각을 200자 원고지 다섯 장으로 써오라는
숙제가 있었는데, 딸아이가 쓴 걸 보니 가관이었다.
원고지 쓰는 법도 엉망이고, 틀린 글자도 많고, 내용도 너무나 형식적이었다.
어린이집 다닐 때 제법 독창적인 글을 써낸다고 생각했는데,
2학년, 3학년으로 올라와  숙제로 간신히 쓰는 일기와 독후감을 보니 영 아니었다.

예전에도, "주하는 어제 받아쓰기 다 맞았죠?"라고  남자친구 엄마가 물으면,
"엥? 어제 받아쓰기 했나요?" 되묻지 않나, 나중에 확인해 보면 두세 개 틀린 건 보통이었다.
학교 행사의 하나로  담임 선생님이 그렇게 기대하셨던 가족신문도 결국 못 만들어서 못 냈다.
2년 연속.
그런 주제에 한 달에 두 번 가는 학급청소와 급식당번으로 엄마의 희생과 은공(?)을 들먹였다. 

'아이고, 딴 건 몰라도 이 숙제만은!' 하는 생각이 비로소 들었다.
그리고 이 기회에 글을 쓰는 자세와 마음가짐도. 불끈!

우선 눈물이 쏙 빠지도록 야단을 쳤다.
일기며 독후감이며 읽어보면 아무 생각이 없고 도무지 성의가 없다고.
사준 책들은 내몰라라 하고 메이플스토리만 계속 읽어대니 갖다버릴 거라고.

그 날 나는 딸아이가 초등학교에 입학한 이후 거의 처음으로 진지하게 숙제 지도를 했다.
아이도 그 동안 심하다 싶었는지 끽 소리 없이 나의 열강을 경청했다.
그리고 끙끙대며 새 원고지 앞에 앉았는데.
어제 상장은 그 결과물인 것이다.
이자, 혹은 사은품이 너무 많이 붙은......

"엄마라면 이 문장을 이렇게 이렇게 풀어서 자세히 쓰겠다.
하고 싶은 말을 곰곰 생각해봐! 줄줄이 사탕이지!"

등등 잔소리를 해댔지만 사실 고운말 사용에 대하여 평소 진지하게 고민하는 어린이가
몇 명이나 되겠는가.
나조차도 아무 생각 없는데.

아무튼 그 숙제는 둘의 합작품이나 마찬가지라 상 받았다고 내놓고 기뻐할 일은 아니다만,
토리도 떠나고 요즘  많이 의기소침했던 우리 모녀는 그냥 뻔뻔하게 즐거워하기로 했다.

조그만 케이크를 사서 '파뤼(말이 파뤼지......)'를 하기로 하고
책장수님께 전화를 걸었다.
동네 입구 횟집에서 주하가 좋아하는 산낙지 사가지고 빨리 오라고.

마침 단골 빵집에서는 포인트로 절반 가격에 몇몇 종류의 빵을 살 수 있는 행사를 하고 있었는데
한 번쯤  먹어보고 싶었던 티라미수 케이크가 딱 하나 남아 있지 않은가.
그리하여 축하 케이크는 포인트로 샀다.
산낙지와 티라미수 케이크는 꽤 잘 어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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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수맘 2007-06-05 12: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축하드려요. 갑자기 지난주 홍이네 학교 숙제였던 "우리학교 자랑"관련 글짓기가 생각나네요. '초등1학년 보고 글짓기를 하라니 원' 이렇게 투덜거리면서 "우리 학교는 하안우유가 나와서 좋아요로 시작해, ㅇㅇㅇ 해서 좋아요"를 반복, 8줄 완성하고 가었지요. 결과는 아무 소식이 없는 걸로 봐서 땡! 한 것 같아요.
그래도 축하드려요. ^ ^. "상 쪼가리(?)"를 핑계로 근사한 파티도 하셨잖아요. ^ ^.

로드무비 2007-06-05 12: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홍수맘 님, 상 쪼가리뿐 아닙니다.
걸핏하면, 온갖 핑계를 다 갖다붙이죠.ㅎㅎ
축하 받을 일은 아니고요.
차리고 보니 두 메뉴가 참 잘 어울리더군요.=3=3=3
그래서 썼답니다.^^

비로그인 2007-06-05 12: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하핫, 제목이 세 번이나 바뀌길래. 어떤 내용인가 했더니.
정말 축하할 일이군요. 앞으로도 작은 상이라도 받아오면, 아낌없이 칭찬해주고
다음에 더 높이 튕겨 오를 수 있는 스프링같은 자신감을 주십시오...
아무리 상장을 많이 받아와도 칭찬 한번 제대로 못 받아본 아이는.. 자신의 재능이
재능인지도 모르고 엉뚱한 곳에서 배회하고 다니게 됩니다. 바로 저처럼.

로드무비 2007-06-05 12: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L- SHIN 님, 하하, 결과는 신통찮지만,
제가 제목에 좀 심혈을 기울이는 편이라.=3=3=3
못 받은 칭찬 제가 앞으로 다 해드릴랍니다.
사랑스러운 L-SHIN 님.^^

조선인 2007-06-05 13: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티라미스와 산낙지라니, 정말 기가 막힌 조합입니다. *^^*

날개 2007-06-05 13: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포인트 200점이 모자라서 저는 티라미스를 못살것 같아요...^^
그나저나 주하에게 축하한다고 전해주세요~ 원래 첨에는 다 엄마랑 합작품으로 시작하지만 좀 더 지나면 아마 저 혼자서도 최우수상 받을 겁니다.^^
울 성재는 물사랑 캠페인용 글을 써가겠다고 하고서 초안을 잡아왔는데 무슨 환타지 소설을 써놨더라구요.. 얼마나 웃기던지...ㅎㅎ

치니 2007-06-05 13: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루 열강한다고 아무나 최우수상 타겠습니까.
주하가 원래 기본이 되는게죠. 아시다시피 글이란 건 그래도 어느 정도의 재능을 타고나야하잖아요. 축하드립니다 ~ !

비로그인 2007-06-05 13: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감사합니다. ^^

에로이카 2007-06-05 13: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떻게 그 많은 얘기들이 이 짧은 글 속에 녹아들어있는지... 늘 느끼는거지만 참 대단하시네요. 한석봉에게 신사임당이 있었다면, 주하 양에게는 로드무비님이 계시군요.. 산낙지와 티라미스 조합은 시도해볼 엄두는 나지 않습니다.. ^^

로드무비 2007-06-05 13: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L-SHIN 님, 아직 시작도 안했는디요?^^

치니 님, 아무나 최우수상 탑니다.=3
요즘 아이의 일기나 독후감을 읽다보면
말씀하신 그 기본이 없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다행히 요즘 조금씩 나아지는 듯합니다.)

날개 님, 헤헤~ 합작품을 너무 늦게 시작했죠?
성재의 물사랑 캠페인 글 궁금하네요.
판타지 소설처럼 썼다니 더더욱.^^

FTA 반대 조선인 님, 정말 환상적인 조합이었답니다.
촛불도 켜고 사진 한 장 찍었는데 못 올려서 섭섭.^^


BRINY 2007-06-05 13: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원래 초등학생 숙제는 다 엄마 숙제라고 하지 않나요.
그래도 주하가 이제 상타는 기쁨을 알고 앞으로 스스로 노력하면 좋잖아요.

2007-06-05 15:13   URL
비밀 댓글입니다.

마노아 2007-06-05 16: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진을 올렸어야죠^^ 산낙지와 티라미수 케이크라니, 묘하게 조합이 되는군요! 아이의 성장을 기대할게요^^

진달래 2007-06-05 16: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축하할 일이네요. ^^
상 쪼가리, 그래도 아닌 것 같아요. ^^*

마냐 2007-06-05 16: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흠...로드무비님, 초빙해서 어린이 논술학원이나 하나 차려봐야 하나....

로드무비 2007-06-05 21: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냐 님, 만화방이나 하나 차려주신다면 점원으로 뛸 생각 있습니다.^^

진달래 님, 쪼가리라고 표현은 했지만 감지덕지,
스카치테이프로 아이 방 벽에 잘 붙여두었습니다.^^

마노아 님, 컴이 지랄이라.ㅎㅎ
하도 자주 다운이 되어 리뷰 한 편 쓰는 것도 거시기합니다.
다음에도 상장 받아오면 달려와 페이퍼 올릴게요.^^

달도 예쁘고 족발도 맛있고 님, 한 편의 시네요.
3학년이라곤 하나 다른 아이들보다 정신연령이 좀 어려서
귀여운 부분이 제법 남아 있습니다.
이런 페이퍼를 남기는 것도 추억 보관 차원이라고 할까요.
나중에 아이와 함께 읽으며 낄낄거리고 싶어서요.
따님 얼굴이 너무 궁금한 것 있죠?
이상하게......^^

브리니 님, 전 그 사실을 몰랐어요.
아이 혼자 숙제 하게 해놓고 매일 딴짓만 했으니......
상의 기쁨을 만끽했으니 앞으론 저도 좀 달라질까요?ㅎㅎ

에로이카 님, 댓글을 빠트렸어요. 님의 댓글이 꽁꽁 숨어 있어서.ㅎㅎ
신사임당이라뇨, 그런 어마무쌍한 말씀을.
전 뺑덕어미 과인데요.^^

perky 2007-06-06 14: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 축하드려요. ^^
로드무비님 닮아서 주하도 글 잘 쓸 것 같아요. 그 피가 어디가나요? ^^
근데, 어린 주하가 산낙지를 좋아하다니!! 신통방통 합니다. (전 아직도 잘 못먹거든요. -_-;;)

2007-06-06 15:37   URL
비밀 댓글입니다.

건우와 연우 2007-06-07 14: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 딴청부리며 숙제를 개겼을(?) 주하가 귀여워요.^^
연우도 요즘 앞니가 빠진 얼굴로 얼마나 개기는지요.
눈앞에서 보고 있으면 속이 뒤집어지구요, 돌아서서 생각하면 웃음이 실금실금 비어져 나와요.^^

2007-06-07 16:36   URL
비밀 댓글입니다.

아키타이프 2007-06-08 10: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 빵집 파리바게트.
주하한테 축하한다고 전해주세요.
산낙지 좋아하는 주하는 잘 상상이 안가네요.

로드무비 2007-06-11 18: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키타이프 님, 빵 좋아하시는군요.ㅋㅋ
주하는 돼갈녀에 낙지 같은 소녀랍니다.^^

한국소설 님, 기대하겠습니다.^^

건우와 연우 님, 개기는 데 도가 텄습니다.
연우도 그렇다니 너무 웃겨요.^^

상자 챙기면서 님, 그 엽서 버리지 마시고, 아시죠?^,.~

차우차우 님, 저를 닮았으면 대강 써도 잘 쓸 텐데.=3=3=3=3
산낙지가 그렇게 맛있다네요. 저도 신기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