랑과 나의 사막 현대문학 핀 시리즈 소설선 43
천선란 지음 / 현대문학 / 2022년 10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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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봇이 등장하는 소설은 익숙함을 떠나 그것들이 추구하는 게 무엇인지 알 수 있을 정도로 충분하게 많다. 인간을 도와주는 단순함을 넘어 인간의 마음을 헤아리고 감정을 나누는 존재의 역할 말이다. 어쩌면 미래의 로봇은 그 이상의 기능을 충분히 발휘하고도 남을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우리가 여전히 로봇을 기대하는 일은 유토피아의 미래가 아닌 디스토피아의 미래와 마주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천선란의 장편소설 『랑과 나의 사막』의 미래도 그러하다. 


황량한 사막으로 배경을 펼쳐진 로봇과 인간의 이야기. 정확하게 말하자면 죽은 인간을 향한 로봇의 애도라고 해야 맞겠다. 로봇 ‘고고’는 자신을 발견하고 함께 살았던 인간 ‘랑’의 죽음을 지켜본다. 고고와 함께 랑을 묻은 ‘지카’는 떠났다. 고고도 길을 나선다. 그곳은 랑이 원했던 곳이다. 과거로 갈 수 있다는 땅을 찾아 떠난다. 생명의 흔적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사막을 걸어가는 로봇 고고. 그리고 그가 만나는 사람들. 그들을 만나면서 랑과의 시간을 추억하고 그리워한다. 미래엔 분명 반려 로봇이 등장할 것이다. 내가 그 미래에 속할 것 같지 않지만 이런 소설을 읽을 때마다 그것에 대해 상상하곤 한다. 고고와 랑의 대화처럼 목적이 아닌 존재 자체의 의미를 찾는 시간을 보내게 될까. 


‘마음은 중요해.’

랑의 말에 나는 마음이 없다고 대답했고, 랑은 아니라고 고개를 저었다.

‘마음은 목적이야. 네 목적에 가장 빨리 닿으려고 애쓰는 게 마음이야.’

내게는 랑을 행복하게 해줘야 한다는 목적이 있다. 행복을 웃음과 편안함과 숙면 정도로만 추측할 수 있으면서 감히 그런 목적을 가지고 있다. (44쪽)


고고는 랑에 대해 더 많은 것을 알고 싶었다. 자신을 구한 랑, 랑이야말로 자신을 가장 완벽하게 아는 인간이라고 믿었는지도 모른다. 랑이 그토록 가고 싶었던 과거로 갈 수 있는 땅은 존재하는 것일까. 고고가 그곳을 바라는 건 그곳에서는 다시 랑을 만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고고에겐 랑을 만나는 일이 간절하다. 


사막에서 랑이 만난 이들은 저마다의 생각을 랑에게 전한다. 마치 세상의 모든 진리를 다 아는 것 같은 버진,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 수 없지만 푸른 스카프를 두르고 죽은 시체, 어디로 가는지 방향을 잃었지만 주인의 명령에 따라 길을 만드느라 트랙터에 몸을 부딪히는 로봇 알아이아이, 눈부신 황금빛 머리카락을 지닌 외계인 살리. 모두 처음 만나는 이들이지만 그들은 서로를 경계하지 않고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랑의 이야기를 듣는다. 


고고에게는 전쟁으로 멸망에 가까운 미래의 사막에서 혼자가 아닌 것만으로도 충분한 위로가 된다. 그럼에도 여전히 고고를 지배하는 건 랑이다. 전쟁을 위해 만들어졌을지도 모를 자신의 존재를 아끼고 사랑해 준 랑. 자신이 인간을 죽이고 지구를 망하게 했을지도 모르는데 말이다. 랑은 고고를 만난 순간부터 그 자체를 인정했다. 


고고는 자신이 로봇이라 인간인 랑을 이해하지 못하고 랑의 감정을 느끼지 못한다고 여겨 그 사실을 무척 안타까워한다. 로봇 알아이아이를 도와주느라 망가진 몸으로 언어 전달이 제대로 되지 않는 상태로 외계에서 온 살리와 대화를 이어가는데 살리는 랑을 향한 고고의 마음을 아는 것 같다. 살리는 고고가 닿고자 하는 과거의 땅을 알고 있었고 랑과 고고가 어떤 사이였는데 서로에게 어떤 존재였는지 알게 해준다. 


“너도 감정이 있다는 말처럼 들려. 너는 아쉬워하고 슬퍼하는 것처럼 느껴져. 감정을 가질 수 없다는 사실에.”

“그렇게 느끼…… 네가 감정을 느끼는 존재……기 때문이다.”

“감정은 교류야. 흐르는 거야. 옮겨지는 거고, 오해하는 거야.” (132~133쪽)


우리가 마주할 미래는 인간은 적고 로봇이 더 많을지도 모른다. 인간을 도와주며 함께 살아가는 실용적인 존재가 아닌 인간의 친구가 되어줄 로봇을 생각한다. 마음이나 감성을 인지하고 작동하는 대신 소설 속 살리의 말처럼 자연스럽게 서로에게 스며드는 로봇을 말이다. 


랑을 다시 만나면 이야기해주고 싶다. 내가 만난 사막에 대해. 너를 만나기 위해 걸어온 나의 사막에 대해. 그렇게 늙어가는 랑의 곁에서, 조금씩 망가져 가는 내 몸으로 이야기하겠지. 나쁘지 않다고 생각한다. 비로소 랑과 시간이 맞는 것 같다는 착각을 한다. 이번에는 너와 함께 늙어갈 수 있겠다는 헛된 희망을 품고 랑을 떠올리며, 더 깊은 어둠으로 내려간다. 간절하게. (144쪽)


얼핏 ‘오즈의 마법사’ 속 도로시의 여정을 떠올리게 만드는 소설이다. 그런 이유로 사막에서 만난 이들은 고고가 아니라 독자에게 말을 건네는 듯하다. 세상에서 중요한 게 무엇인지, 우리가 무엇을 향해 살아가고 있는지를. 그러나 이 소설에서 아름답고 감동적인 건 랑을 그리워하는 고고의 마음이다. 랑과의 모든 순간이 기쁘고 행복했다는 걸 느끼는 고고. 고고의 여정은 이제 랑을 향해 나간다. 그 끝에 있다는 걸 알기에 두려움은 없을 것이다. 설령 디스토피아의 혹독한 미래라 할지라도 고고 같은 로봇이 있다면 괜찮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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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문장을 만나면 설레고 좋다. 울림이 있는 문장을 만나면 마음이 뜨거워진다. 내가 알지 못했던 것들을 알게 되면 신기하고 기쁘다. 그게 아주 사소하고 미미한 것일지라도. 읽다만 에세이의 다음이 궁금하고, 친구처럼 대화를 건네는 작가의 문장을 따라 나도 뭔가 답장을 쓰고 싶어진다. 책에 빠져들 수 있는 시간이 있다는 게 감사하다. 정리된 책들 때문에 집안이 좀 지저분하지만 그 안에서도 나는 책을 잘 읽을 수 있다. 


소설도 많이 읽고 좋아하지만 에세이가 주는 매력도 놓칠 수 없다. 최근에는 소설보다 에세이가 강세라는 걸 느낀다. 편안하면서도 색다른 주제를 다룬 에세이, 훔치고 싶은 문장, 나도 따라 쓰고 싶은 문장까지 에세이가 줄 수 있는 느낌들.


좋았던 에세이를 꼽자면 당연 황정은의 『일기 日記』다. 추천 사유엔 사적인 애정도 부인할 수 없다. 소설가의 첫 산문이라는 기대를 충분히 만족시켰다. 한정원의 『시와 산책』 과 여러 소설가의 쓰기에 대한 이야기 『소설엔 마진이 얼마나 남을까』도 만족도가 큰 책이다.













빠져드는 글들이 있다면 반성하고 각성시키는 글들도 있다. 정희진의 책이 그러하다. 『새로운 언어를 위해서 쓴다』는 공부에 대한 개념을 일깨워주었다. 나를 아는 일, 나를 찾는 일에 대해 읽고 쓰는 일이 주는 위안과 깨닮음이라고 할까. 황정은의 “기억하고, 기억은 그 자리에 돌아온다. 기록으로, 질문으로.”란 말과 통하는 무언가가 있다. 











쓰기가 최고의 공부이자 지식 생산 방법인 이유는 쓰는 과정에서 내가 무엇을 모르는지 알게 되기 때문이다. (본문 중에서)


한나 아렌트에 대해 조금이나마 알 수 있었던 『한나 아렌트 평전』도 좋았다. 한나 아렌트를 처음 만나는 책으로도 나쁘지 않다. 철학이나 사상에 대해 잘 몰라고 쉽게 읽을 수 있고 그것에 대해 앞으로 나갈 수 있도록 인도하는 책이다. 현재를 사는 우리를 위한 가르침보다는 스스로 발견하고 느낄 수 있도록 이끌어준다고 말해도 좋을까.











죽음은 어디에나 있고 그 죽음을 피할 수 있는 없다. 좋았던 책을 고르고 보니 죽음에 대해 말하는 두 권의 책. 『당신이 살았던 날들』과 『자유죽음』. 무거울 수도 있고 우울할 수도 있는 주제지만 우리가 살아가면서 마주하고 받아들여야 하는 것들. 상실과 애도, 살아가는 것에 대한 책임과 의무를 생각한다.













『어떻게 물리학을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을까?』물리학에 관한 이야기지만 친근하게 읽을 수 있는 책이다. 우주, 지구, 에너지, 이 세상을 이해하기 위해 물리학이 존재한다고 느껴졌다. 사울 레이터의 사진집 『영원히 사울 레이터』, 눈 오는 날, 비 오는 날에 펼치며 사색에 빠진다.












어쩌면 놓치고 만 책들도 있을 것이다. 놓쳐서 더 궁금한 책, 나중으로 미뤄서 조금 천천히 만날 책, 책도 사람과 같아서 만나게 될 책은 반드시 만나게 되는 것 같다. 2022년에 만나지 못한 책들은 2023년에 만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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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amoo 2023-01-03 10:0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좋지 않은 문장을 만나면 기분이 안좋아지면서 이걸 기록해 놓고 싶어진다. 특히 한국어 문장구조를 초월해 있는 번역 문장을 만나면 신경질이 도진다. 거기에다가 비약이 심한 문장들의 나열이 나오면 경기를 일으키며 책을 집어 던진다. 이런 글이 책으로 나온다는 거에 심한 실망감을 느낀다. 이런 안 좋은 감정들은 철학 번역서를 읽을 때 종종 느껴지는 기분이고, 코맥 매카시의 글을 읽을 때 만나게 되는 감정이다. 이럴 때면 책을 읽기가 싫어진다..

첫 문단을 읽으면서 든 느낌을 바로 덧글로 달아봤습니다..ㅎㅎ

자목련 2023-01-03 17:15   좋아요 1 | URL
야무 님의 센스 댓글 감사합니다.
올 연말에는 좋은 책과 더불어 그렇지 못한 책에 대한 이야기를 해봐도 좋을 것 같습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 건강하고 평온한 날들 이어가세요^^

mini74 2023-01-03 17: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일기 좋았어요 자목련님 ~ 한나 아렌트 평전은 읽고 있는 중입니다 ~ 답장을 쓰고 싶어진다는 마음 어떤 마음인지 알 것 같아요 ~

자목련 2023-01-04 14:57   좋아요 0 | URL
한나 아렌트 평전를 만날 수 있어 좋았어요. 기회가 되면 조금 더 그에 대해 읽고 싶어요.
미니 님, 따뜻하고 평온한 오후 보내세요^^

책읽는나무 2023-01-04 07: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겹치는 책이 있어 좋네요^^
사울 레이터는 사다 놓곤 읽지도 않았는데 그래도 반갑고 좋네요.
작년에 책 제목을 자주 봤었던 책이 많아요.
역시 좋은 책이었나보다! 싶어 더 눈에 담게 됩니다.^^

자목련 2023-01-04 14:58   좋아요 1 | URL
읽지 않아도 책이라는 이유만으로 충분히 좋은 것 같아요.
알라딘을 통해 눈으로 마주하는 책들이 다 궁금한 건 마찬가지고요!
 

연말에 이런 시간을 갖는 건 좋다. 의미 있는 시간이라 해도 무방하다. 내가 읽은 소설을 정리하는 시간. 1년이라는 한정된 시간에 만난 책들. 올해 출판된 책은 아니고 내가 읽은 책 가운데 좋았던 책을 골랐다. 몇 권을 읽었을까, 그 숫자에 매몰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그렇다고 너무 적은 양의 책을 읽는 일도 곤란하다. 일정한 패턴, 일정한 독서의 시간은 중요하니까.


기다린 만큼 만족도도 높았다고 하면 너무 지나칠까. 아니다, 개인적으로 너무 좋았던 단편집. 김연수의 『이토록 평범한 미래』는 그런 소설이었다. 단편 하나하나를 읽는 시간이 참 좋았다. 예전의 소설과 다르게 뭔가 특별한 변화가 있거나 하지는 않았다. 제목처럼 이토록 평범한 소설이지만 그게 가장 김연수 다운 소설이다. 가만가만하면서도 툭하고 가슴을 치는 순간과 마주할 때면 잠시 숨을 고르게 된다.


우리가 기억해야 하는 것은 과거가 아니라 오히려 미래입니다. (『이토록 평범한 미래』 중에서)


장편소설로는 최근에 읽은 김혜진의 『경청』과 이주혜의 『자두』다. 김혜진은 이번 소설에서 말에 대한 이야기를 건넨다. 너무도 쉽게 내뱉는 말들과 글들에 무게를 생각한다. 우리에게 침묵이 아닌 듣기의 시간이 왜 중요한지. 상대가 원하는 바를 깊이 생각하고 그것을 공감하는 것. 설령 공감하지 못하더라고 인정하는 일이 필요하다. 이주혜의 『자두』는 돌봄에 대한 소설이다. 노동으로 인정받지 못하는 일 가운데 하나가 돌봄이다. 가족의 부양과 돌봄, 이제는 사회가 적극적으로 제도를 만들고 개입해야 하지 않을까. 


아줌마, 근데요. 그럼 그냥 듣기만 할 수 있어요? 아무 말도 안 하고요.

아이가 묻고 그녀가 답한다.

그럼, 그냥 듣기만 할 수 있지.

대화는 조금씩 더 깊어지고 넓어진다. 불신과 두려움 같은 것을 밀어내며 스스로 반경을 넓힌다. 이렇게 말해도 좋다면 그녀는 아이의 마음속에 불이 켜진 것 같다고 느낀다. (『경청』 중에서)













새로운 작가의 소설도 좋았다. 처음 읽은 안윤의 단편집 『방어가 제철』에서 느껴지는 쓸쓸함과 상실은 충분한 애도란 무엇인가 생각하게 만든다. 모든 감정은 고유한 것이니 우리는 함부로 그것에 대해 말할 수 없다. 그건 감정을 떠나 삶에 대해서도 다르지 않다. 김지연의 『마음에 없는 소리』를 읽다 보면 우리는 자신의 삶보다는 타인의 삶에 충실하려 애쓰고 있구나 느낀다. 취업, 결혼, 그 무엇을 선택함에 있어 가장 중요한 건 바로 자신이라는 걸 알면서도...













일상의 어려움을 탈피하거나 고통을 달래기 위한 방법으로 환상은 때때로 적절한 처방이 된다. 이유리의 『브로콜리 펀치』에서 죽은 아버지가 화분이 되거나 마음이 힘들고 아플 때 신체이 일부가 무언가로 변하는 일, 그로 인해 고통은 말이 아닌 몸으로 표현된다. 확고한 SF가 아니더라도 독자를 상상의 그곳으로 초대한다. 그런가 하면 김초엽의 『방금 떠나온 세계』에서는 SF 소설로 미래를 보여준다. 나와 다른 존재와 공존하고 연대하며 살아가야 하는 세상을 말한다. 활발하게 작품활동을 한 김초엽의 장편보다 이 소설집에 오래 마음에 남았다. 


소설을 좋아하지만 한국소설에 비해 외국소설은 애정의 크기가 조금 작다. 그래도 이런저런 통로로 알게 된 외국 작가와 그의 소설을 읽는 기쁨은 크다. 내 맘대로 골라본 외국소설. 올해의 최고 소설이라면 내게는 단연 크리스티앙 보뱅의 『가벼운 마음』을 꼽겠다. 최근에 작가의 사망 소식을 들었다. 그가 더 많은 글을 써주기를 바라는 마음에 안타까웠지만 고통에서 벗어나 평온하기를 바란다. 한 소녀의 성장소설이라 할 수도 있지만 그것에 국한시킬 수 없는 소설이다. 우선, 너무 아름다운 소설이고 빠져나올 수 없는 문장. 미혹의 시간이었다. 행복한 미혹이라고 할까. 황홀한 늪이라고 해도 좋겠다. 처음 크리스티앙 보뱅의 글을 접했을 때에는 여성작가라고 확신했다. 부드럽고 감성적인 따뜻함이 있다고 할까. 아무튼 요즘 나는 누가 책을 추천하라고 하면 『가벼운 마음』을 가장 먼저 말한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과 함께 성장할 수 없다. 우리는 그들이 우리에게 품은 사랑, 우리를 충분히 안다고 믿는 사랑에서 벗어나야만 성장할 수 있다. 우리는 그들에게 말하지 않을 것들을 할 때야 비로소 성장할 수 있다. 설사 그들에게 말한다 해도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그런 것들은 보이지 않고, 붙잡을 수 없고, 그들이 던져준 사랑의 망토로 덮을 수 없으며, 우리 속에 머물러 우리의 일부를 이루기 때문이다. (『가벼운 마음』 중에서)














발레리 페랭의 『비올레트, 묘지지기』도 아름답고 좋은 소설이었다. 죽음을 통해 돌아보는 생애, 인간의 삶이란 무엇으로 채워지고 가장 찬란한 순간의 무엇인가 생각하게 만든다. 상실과 상처와 애도의 조각들이 모여 우리의 생을 만드는 게 아닐까. 빅토리아 토카레바의 『티끌 같은 나』는 막장 드라마의 한 장면을 떠올리게 만드는 소설이 맞다. 그럼에도 그들의 삶이 결코 타인의 그것이 아니면 우리의 것이라는 묘한 울림을 안겨준다. 여성으로의 시간과 존재, 삶에 대해서 말이다.


레이먼드 카버의 『대성당』은 늦게 만난 편이다. 그러나 늦게 만나서 내게는 더 좋았던 단편집이다. 인생이라는 것에 대해 우리가 겪는 슬픔과 좌절에 대해 그것을 위로하고 견디며 나가는 방식에 대해 생각한다. 우리에게 주어진 같거나 다른 풍경들의 삶. 카렐 차페크의 『평범한 인생』도 그런 의미에서 상통한다. 특별한 것 없는 평범한 인생, 저마다의 생에서 욕망하고 갈등하며 살아온 시간들.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의 『오, 윌리엄! 』에서도 그렇다. 가장 소중했던 시간, 지우고 싶은 순간, 그 모든 게 나를 구성하는 삶이었다. 산다는 건 그런 거구나 싶다.













벵하민 라바투트의 『우리가 세상을 이해하길 멈출 때』는 어렵지만 매력적인 단편집이다. 역사적 실존 과학자들의 연구가 세계를 어떤 방향으로 이끌었는지 들려준다. 그 과정에서 인간의 존재와 가치에 대한 질문을 자연스럽게 던진다. 지금의 세상이 오기까지 우리가 알지 못했던 일들은 얼마나 많을까. 충돌과 이해가 어떤 쪽으로 편승해서 현재를 만들었을까. 히가시야마 아키라의 『류』는 전쟁에 대한 기억을 소환한다. 여전히 전쟁이 멈추지 않는 세상, 전쟁의 승패를 떠나 그것이 남긴 지울 수 없는 상처는 어디서도 치유될 수 없다.













내가 알지 못하는 좋은 소설은 많고 그것을 다 읽기란 어렵다. 그저 닿는 대로 마음이 가는 대로 읽게 된다면 좋은 인연이 될 것이다. 그렇게 시작된 작가와의 만남, 책과의 인연은 오래도록 유지되고 삶의 한순간을 지탱한다.


올해 소설을 읽으면서 약간의 변화가 생겼다. 그것은 별점에 관한 것이다. 조금 인색해졌다고 할까. 많은 이들이 별점 5개를 주는 소설에는 나는 별 하나를 빼고 주변에 더 알리고 싶은 소설의 경우에는 별점 4개에서 하나를 더 추가한다. 특별한 울림이 없는 소설에는 재미를 떠나 별점 3개를 준다. 근데 확고한 기준이 있는 건 아니다. 그때 그때 기분에 따라 다르다. 소설의 좋고 나쁨은 어디까지나 취향의 문제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별점에서 자유로워지면 홀가분하면서 훨씬 즐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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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파랑 2022-12-27 12:3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올해의 책들을 벌써 고르셨군요. 선택하신 작품들이 모두 차분해 보입니다 ㅋ 강추하신 <가벼운 마음>은 꼭 읽어보고 싶네요~!!

자목련 2022-12-28 07:50   좋아요 2 | URL
새파랑 님이 만나실 <가벼운 마음>이 벌써 기대가 됩니다. 연말 따뜻하게 보내세요^^

공쟝쟝 2022-12-27 12:4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오랫동안 한국소설을 애정가지고 읽어온 자목련님만의 향이 담긴 올해의 페이퍼 잘 읽었습니다. 제게는 자목련님이 추천하신 <내가 되는 꿈>이 올해의 한국소설였답니다 ^_^ 경청과 자두를 도서관에서 발견하면 꺼내와야겠습니다. 보뱅의 소식은 이 페이퍼를 통해서 알게외었네요. 고통에서 벗어나 영면하시기를.
제게 ‘좋은 독자‘라는 훌륭한 위치성을 알려주신 자목련님, 올 한해 촘촘히 잘 읽어오시는 모습을 지켜보았답니다. 비록 제가 소설은 좀 못 읽는 사람이지만 ^^;;;; 내년에도 페이퍼 참고해서 잘 읽어보도록 할게요. 2023년에도 잘 읽고 쓰실 수 있도록 눈 건강 안녕하시기를!

자목련 2022-12-28 07:53   좋아요 2 | URL
저만이 향이 어떤 향일까, 잠깐 상상합니다. 최진영과의 만남을 축하해요. ㅎㅎ
이주혜와 김혜진의 소설도 쟝쟝님이 좋아하면 좋겠습니다. 쟝쟝 님의 건강하고 아름다운 글을 내년에도 기대합니다. 좋은 이웃이 되어주셔서 감사하고요!

미미 2022-12-27 13:0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자목련님이 꼽아주신 책들 중 제게 올해 감동을 준 목록들이 있어 반가워요.
특히 <가벼운 마음>은 저에게도 특별한 책이었답니다. 바흐의 칸타타 피아노연주를 들으며 읽어서 더 좋았어요^^

자목련 2022-12-28 07:54   좋아요 2 | URL
같은 책을 읽었다는 것만으로도 조금 가까워진 느낌입니다. 보뱅의 글은 묘한 슬픔과 더불어 아름다운 기운이 있는 듯해요. 미미 님, 따뜻한 하루 이어가세요^^

거리의화가 2022-12-27 13:1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원래 별점을 좀 짜게 주는 편인데 5점을 주는 경우 말씀하신대로 추천하고 싶은 책인 경우가 많은 것 같아요. 물론 개인적으로 공부가 되었다 생각하는 책에도 5점을 주긴 합니다.
올해 읽으신 소설 중 읽은 책은 거의 없으나 저도 읽었고 좋았던 소설이 있어서 반갑습니다. 항상 올려주시는 이야기들 보며 감사해하고 있어요. 내년에도 이곳에서 좋은 책 만날 수 있기를 바라며^^

자목련 2022-12-28 07:55   좋아요 1 | URL
별점에 후했는데 어느 순간 별점이 무슨 의미가 있나 싶더라고요. ㅎ
그래서 내 맘대로 느낌대로 주기로 했어요. 화가 님이 만나고 들려주시는 역사 이야기, 저도 잘 보고 있습니다. 좋은 책과 좋은 이웃과의 만남, 좋아요!!

blanca 2022-12-27 13:2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 김연수 소설 저도 생각보다 더 좋아서 오히려 의아했어요. 작가를 원래도 좋아하지만 한동안 ˝내가 쓰는 게 읽힐까?˝ 회의에 빠지셨던 모양이더라고요. 이렇게 진화하는 작가라니...울컥 했어요. 보뱅 소설만 안 읽었는데 당장 읽어야겠네요. 저도 <류> 참 좋았어요. <대성당>은 아, 김연수 작가 번역까지 완벽하죠!!

자목련 2022-12-28 08:02   좋아요 1 | URL
네, 저도 이 소설집을 통해 더욱 좋아졌어요. 미래을 이렇게 표현할 수 있구나 놀랍고 아름다웠어요. 보뱅 소설은 강추해요. 블랑카 님도 반하실 거라 믿어요. 김연수로 시작해 김연수로 끝나는 댓글이야말로 완벽합니다!
포근한 하루 이어가세요^^

페넬로페 2022-12-27 15:1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자목련님께서 올려주신 책, 다 좋을 것 같아요.티끌 같은 나와 대성당만 읽었어요.
아직 읽지 않아도, 아직 하지 않아도 오직 여기서만은 기쁩니다.
앞으로 읽을것이 넘치니까 행복해서요^^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자목련 2022-12-28 08:03   좋아요 2 | URL
맞아요, 우리에게는 앞으로 읽어야 할 책들이 있으니까요.
여기서, 함께 이야기하고 나눌 책들이 있으니까요.
건강하고 향기로운 연말 보내세요^^

라로 2022-12-27 16:4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랑 자주 안 겹치시는데 이번 페이퍼에 올려주신 책은 겹치는 책이 꽤 되네요. 내년에도 좋은 책 소개기대할게요.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자목련 2022-12-28 08:04   좋아요 1 | URL
라로 님의 일상과 멋진 사진, 감사하다고 말씀드려요. 꾸준하게 공부하는 모습도 멋지고요.
건강하고 즐거운 연말 보내시고 책과도 좋은 시간 이어가세요^^

레삭매냐 2023-01-02 10:0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 애정의 크기가 조금 작다.

저도 그런 것 같습니다.
예전에는 제법 읽었는데 갈수록
애정의 절대량이 줄어든다는.

별점 주기의 압박 그리고 매김
이 저와 상당히 유사하셔서 기부
니가 좋았습니다.

전 <방어가 제철>이 궁금해지네요.
이렇게 해서 또 연쇄독서의 올가미
에 걸리게 되는 건가요.

자목련 2022-12-30 11:09   좋아요 1 | URL
이 모든 게 나이가 드는 탓일까 싶어서 살짝 슬퍼요. ㅎ
그래도 책은 여전히 좋고 읽고 있으니 괜찮겠죠?

매냐 님이 읽은 <방어가 체절> 기다리겠습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요!

구단씨 2022-12-29 21:3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목록이 대부분 문학인데, 그 문학이 또 정말 다양하네요. ^^
<자두> 정말 인상적이었요. 많이 공감했고요. <평범한 인생>은 저도 이제 펼쳐봅니다.
옆에 두고도 안 읽은 책 목록이 이 페이퍼에 많이 담겨 있어서 부끄럽네요. 게으름의 최고치가 연일 갱신이라서요. ㅎㅎ

연말 따숩게 보내세요~

자목련 2022-12-30 11:13   좋아요 0 | URL
<자두>로 만난 이주혜의 소설들을 계속 기대하고 있어요. 딘편집도 나쁘지 않았고요.
<평범한 인생> 즐겁게 읽으시길 바라요.
책 목록 가운데 안 읽은 목록이 제일 길지 않을까 싶어요. 그럼에도 또 사들이고 사고 싶은 책은 늘어나고요. ㅎ
포근한 연말 보내시고,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서니데이 2022-12-31 18: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읽은 책들도 조금 보여서 반갑네요.
저도 올해의 책 중에서 김연수 작가의 <이토록 평범한 미래>와 <류>가 참 좋았어요.^^

자목련님, 오늘은 올해의 마지막 날이예요.
따뜻한 연말 보내시고, 새해에도 건강하고 행복한 시간 되세요.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자목련 2023-01-02 09:05   좋아요 1 | URL
김연수의 단편집, 오랜만에 만나도 참 좋구나 생각했어요.
서니데이 님,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 올해도 건강하고 평온한 일상 이어가세요^^

2023-01-02 11:1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3-01-03 09:08   URL
비밀 댓글입니다.

독서괭 2023-01-03 13: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반갑습니다, 가벼운 마음! 추천해주신 책들 다 읽어보고 싶은데, 올해는 책을 안 살 예정이라ㅠㅠ 집에 이미 있는 <평범한 인생>은 꼭 읽어야겠어요. 자목련님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자목련 2023-01-03 17:18   좋아요 1 | URL
가벼운 마음은 정말 좋았어요! 평범한 인생도 좋았던 소설인데 독서괭 님도 즐겁게 만나실 거라 생각해요.
책을 안 살 예정, 저도 그러 목표를 세우고 싶습니다. 읽을 만큼만 책을 들이는 태도가 필요합니다.
따뜻한 오후 이어가세요^^

서니데이 2023-01-06 23: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달의 당선작 축하합니다.
따뜻한 주말 보내세요.^^

자목련 2023-01-09 09:06   좋아요 1 | URL
서니데이 님, 감사합니다. 따뜻한 한 주 이어가세요^^
 
경청
김혜진 지음 / 민음사 / 202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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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닷없이 발생하는 사고에 대처하는 일은 어렵다. 예상했더라도 마찬가지다. 사고의 방향은 의도했던 대로 흘러가지 않고 해결책은 보이지 않는 경우가 많다. 논란의 중심에 선 인물이라면 어떤 선택을 해야 할까. 그 선택은 과연 옳다고 말할 수 있을까. 세상의 모든 일은 사람을 가라지 않고 일어나지만 그것이 내일이 되었을 때 차분하고 현명하게 대처할 수 있는 이는 거의 없다. 그 일로 삶의 기반이 무너지고 관계가 깨지고 고립된 지경에 이른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아니, 할 수 있는 일이란 게 있을까. 김혜진의 장편 소설 『경청』 속 임해수가 그런 인물이다.


상담사로 방송에 출연해 대본을 보고 한 배우에 대해 자신의 의견을 말했을 뿐이다. 자신의 일을 한 것이다. 얼마 후 그 배우가 자살을 했고 언론과 방송에서 그 이유를 그녀의 말 때문이라 쏟아냈다. 자신과 전혀 상관없는 한 사람의 삶에 그녀는 개입되고 말았다. 아니 그의 죽음이 그녀의 삶에 개입된 것이다. 이후의 삶은 나락 그 자체였다. 상담사로 일했던 자신의 자존감과 가치는 어디서도 찾을 수 없었고 센터는 휴직과 퇴사를 통보했다. 결혼생활도 끝났다. 한 마디로 그녀의 모든 게 망가졌다. 일상을 유지할 수 없는 상황에 놓였다. 


소설은 그녀가 쓴 기자에게 쓴 편지로 시작한다. 해명이라 여길 수 없는 너무도 절박한 반박이다. 편지는 기자뿐 아니라 센터에서 함께 일했던 동료, 상사, 변호사, 죽은 배우의 아내, 친구에게로 이어진다. 그러니까 자신의 입장을 설명하려고 애쓴다. 그러나 무례하지 않은 말들을 골라 최선을 다해 쓴 편지는 전달되지 않는다. 하루 종일 매달린 편지를 그녀는 태우고 만다. 그녀가 하는 일이라곤 편지 쓰기와 동네 산책 정도가 전부다. 산책은 그마저도 쉽지 않다. 동네에서 그녀를 아는 이들이 있기 때문이다. 그 일 이후로 그녀는 어떤 일에도 의견을 내거나 관여하지 않으려 애쓴다. 그러다 길고양이 순무를 만났고 고양이를 돌보는 아이 세이를 만났다.


순무는 경계심이 강했지만 그녀를 외면하지 않았고 세이는 경계심은 없었지만 그녀에게 모든 걸 말하지는 않았다. 순무 밥을 주고 간식을 주면서 세이를 자주 보게 되었고 조금씩 친해졌다. 순무가 아프다는 것과 길고양이로 인해 동네의 작은 다툼과 사소한 분쟁에 대해서도 알게 되었다. 그녀는 그저 세이의 말을 들었다. 말을 거드는 일은 할 수 없었다. 그건 세이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한 번씩 마주치는 세이의 모습은 자연스럽게 왕따를 떠올리기에 충분했다. 아빠와 단둘이 사는 또래보다 덩치가 큰 아이, 피구 연습을 하면서 아이들이 세이를 위협하고 따돌리고 있었다. 그러나 세이는 단 한 번도 그 이야기를 그녀에게 하지 않았다.


학교생활이나 집에서 어떻게 지내는지 그녀는 물을 수 없었고 세이는 말하지 않았다. 세이는 순무를 구조하는 일에 대해서는 눈을 반짝였고 생각을 말했다. 순무를 구조하는 과정에 다친 그녀는 어쩔 수 없이 동네 병원에서 진료를 받았다. 자신을 아는 이들, 혹시라도 자신을 기억하고 말을 거는 이가 있을까 두려운 공간에 가야 했다. 치료를 위해 찾은 병원에서 그녀를 알아보는 이의 조언을 들어야 했다. 사고에 대해 일부만 아는 사람들, 전체를 모르고 그녀를 위한다고 조언을 하거나 비난을 하는 사람들. 


그러니 이 순간은 이 순간일 뿐이다. 그녀가 과거에 겪은 어떤 일의 결과도, 원인도, 이유도 아니다. 시간은 곧게 나아가지 않는다. 삶의 모든 순간들이 인과의 직선을 따라가지 않는 것처럼. 그녀 자신이 단 하나의 얼굴로만 살아갈 수 없는 것처럼. (185쪽)


그런 말들을 그녀는 묵묵히 들었다. 일상으로 돌아올 수 있다고, 자신의 자리에서 일을 할 수 있다고 버티고 견뎠다. 하고 싶은 말은 여전히 쌓였고 차올랐다. 그래서 편지를 쓰는 일은 멈출 수 없었고 자살한 배우의 아내를 만나고 그녀와 비슷한 상황에 놓인 이들을 만나 고소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다. 하지만 뭔가 달라지고 해결되는 일은 없었다. 그녀는 멈춤 상태였고 도저히 움직일 수 없었다. 그런 그녀를 움직이게 만든 건 순무와 세이였다. 


구조를 시도할 때마다 상처를 주던 순무를 쉽게 구조한 건 세이였다. 치료를 할 병원을 찾아 입원시키고 그 과정을 지켜보면서 그녀는 세이가 말해주기를 기다렸다. 그러니까 학교에서 친구들과 어떤 일이 있었는지 왜 그렇게 당하고 있는지 말이다. 세이와 함께 보낸 시간을 통해 과거 그 방송에서 했던 말들의 의미를 돌아본다. 일부를 보고 전체를 판단하는 일, 정확한 전후 사정을 살피려 노력하지 않았던 부분에 대해서. 


피구 대회에서 결국 터져버린 세이의 감정들, 친구와 싸우고 전학을 가야 할 위기에 놓였다. 세이와 친하게 지내고 상담사라는 걸 알고 찾아온 세이의 아빠에게 사과하면 정리될 문제라고 말하는 그녀. 세이가 힘든 시간을 보내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 있었을 것이다. 어쩌면 그녀는 세이에게 자신을 대입시켰는지도 모른다. 순무가 사람들에게 다가오기를 기다렸던 것처럼, 어떤 일에는 그에 합당한 시간이 필요한지도 모른다. 그 시간을 기다려는 주는 일도 말을 경청의 일부일 것이다. 그러니 누군가의 말을 경청할 태도엔 그런 기다림도 필요하다. 회복된 순무를 세이가 키우고 해수의 집에 찾아와 자신의 이야기를 꺼낼 수 있을 때까지의 기다림.


그러나 이 순간에도 시간은 흐르고 있다. 막바지에 이른 더위가 물러가면 서늘한 바람이 불고 눈이 내리는 겨울이 올 것이다. 시간은 쉬지 않고 앞으로 나아갈 것이다. 그건 막을 수 없다. 그녀 역시 마찬가지다. 살아 있는 모든 것들이 그렇듯 지금의 시간을 지나 다음의 시간으로, 그다음의 시간으로 나가갈 의무가 그녀에게도 있다. (301쪽)


해수와 세이 모두 지금의 시간을 지나 다음의 시간으로 나가갈 때가 온 것이다. 편지를 쓰는 일 대신 누군가의 말을 들어주고 정성을 다해 상담을 하는 일. 이제까지 말하지 못했던 마음의 말을 하나씩 건네는 시간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소설 속 인물 ‘세이(say)’란 이름은 무척 상징적이다. 함부로 말하고 대충 듣는 일, 말의 무게를 생각하고 진심을 다하는 말을 고르는 일, 소설 속 인물을 떠나 우리 모두가 취해야 할 태도다. 


차분하고 단단한 문장으로 들려주는 김혜진의 글을 읽는 일, 귀를 기울여 듣는 경청과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쉽게 말과 글로 상처를 주고 잊어버리는 너무도 편리하고 익숙한 사회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경각심을 불러일으킨다. 고였던 말들이 천천히 움직여 흐르는 느낌이라고 할까. 그 말들이 누군가를 움직이는 아름다운 동력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전해지는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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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니데이 2023-01-06 23:4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달의 당선작 축하합니다.
따뜻한 주말 보내세요.^^

자목련 2023-01-09 09:06   좋아요 1 | URL
^^*

thkang1001 2023-01-08 10:2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자목련님! 이달의 당선작 선정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 항상 건강하시길 기원합니다! 행복한 하루 보내세요! 감사합니다!

자목련 2023-01-09 09:07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 즐겁고 행복한 날들 이어가세요^^

thkang1001 2023-01-09 09: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자목련님!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행복한 한 주 되시길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모든 것들의 세계 트리플 15
이유리 지음 / 자음과모음 / 202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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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이 좋은 이유 중 하나는 내가 상상하지 못한 세계로 나를 이끌기 때문이다. 명확하게 장르를 구분할 수 있는 SF나 판타지가 아니더라도 말이다. 누구나 한 번쯤은 상상했으나 확장되지 못하고 사그라든 이야기를 만날 수 있어 좋다. 이유리의 소설엔 그런 게 있다. 그러니까 뭐냐, 이 황당한 상상이 아니라 나도 그 상상을 경험하고 싶다는 막연한 바람을 품게 된다고 할까.


『브로콜리 펀치』에서 그랬듯 『모든 것들의 세계』에 수록된 세 편의 단편도 다르지 않다. 그런 기운 때문이었을까. 이유리의 소설에는 모든 것들이 가능한 세계가 숨겨진 것만 같다. 트리플 시리즈인 이 소설집을 ‘모든 것들의 가능한 세계’로 부르게 만든다. 


표제작 「모든 것들의 세계」의 화자 ‘고양미’는 죽은 사람이다. 귀신이라고 해야 맞겠다. 그러나 무섭거나 두려운 존재가 아니다. 그녀는 저승차사를 부모가 ‘천주안’이란 남자와 영혼결혼식을 올렸다는 소식을 듣는다. 그리고 곧 천주안을 만나 서로의 죽음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다. 고양미는 취직과 결혼을 하라는 부모님의 소망과는 다르게 게임을 하다 옆집에 난 불로 죽었다. 게임에 빠져 불이 난 줄도 모르고 죽은 거다. 천주안은 부모님과 결혼 문제로 다투다 20층에서 떨어져 죽었다. 자신이 게이라는 사실을 알리지도 못하고 죽기를 작정한 건 아닌데 그렇게 되고 말았다.


이승에 먼저 온 고양미는 천주안에게 사후 세계에 대해 설명한다. 부모나 가족이 아닌 누군가가 자신을 그리워하면 소멸하지 않는다는 사실도. 그래서 PC방에서 게임 동호회에 접속해 자신의 닉네임을 검색한다고. 천주안의 애인이 사는 곳까지 동행한다. 고양미는 이승의 게임에서 힐러였던 것처럼 저승에서도 천주안을 달래고 위로해 준다. 


다만 잊히고 싶지 않았다. 왠지 모르겠지만 그건 싫고 무서웠다. 꼭 즐겁고 행복한 기억으로가 아니어도 좋으니, 내 세계는 끝나 없어지더라도 다른 누군가의 세계 어느 한구석에는 끝내 남아 있고 싶었다. (「모든 것들의 세계」, 30쪽)


소설을 읽으면서 존재하지도 않을 양미가 잊히지 않기를 바랐다. 발랄한 귀신으로 여전히 좋아하는 카페에서 빵 냄새를 흠씬 맡으며 지내기를. 이런 마음을 갖게 만드는 게 이유리 소설의 힘이다. 허구의 존재에 대한 동경과 응원을 하게 되니까 말이다. 자신의 마음을 소리를 들을 수 있는 기발한 설정의 「마음소라」에서도 마찬가지다. 


일차성징처럼 때가 되면 누구나 ‘마음소라’를 갖게 되는데 만약 누군가에게 주게 된다면 그 한 사람만이 유일하게 자신의 진심을 고스란히 들을 수 있다. 그러니 고미는 도일의 마음소라를 선뜻 받을 수 없다. 결국 그것을 받으면서 둘은 7년의 연애를 시작한다. 고미와 도일의 사랑이 결혼으로 이어졌으면 문제가 없게지만 둘은 헤어졌다. 각자 다른 이과 결혼을 했다. 시간이 지나 도일의 아내 양희는 고미에게 마음소라를 돌려달라고 한다. 가출한 상태의 양희는 자신은 들을 수 없는 도일의 마음을 알려달라고 부탁한다. 고미는 도일의 마음에 양희에 대한 생각과 걱정이 없음에도 그녀를 걱정하고 있다며 집으로 돌아가라고 말한다. 누군가의 진심을 안다는 건 마냥 기쁠 수만은 없는 일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간절하게 사랑하는 이의 마음이 궁금하고 알고 싶다. 


마지막 「페어리 코인」에는 요정이 등장한다. 솔직히 말하자면 이름이 요정인 반려동물인 줄 알았다. 전세사기를 당한 ‘나’와 ‘우진’과 함께 산다. 말 그대로 요정이라 늙지도 죽지도 않는 존재로 키우는 데 어려움은 없다. 요정은 고조모가 발견하고 그 뒤로 증조모, 할머니, 엄마, ‘나’가 물려받은 가족으로 언제나 곁에 있었다. 법적으로는 문제가 없어 전세금을 돌려받을 수 없는 상황에 우진의 친구 ‘현철’은 요정으로 ‘페어리 코인’ 사기극을 벌이자고 제안한다. 현철의 계획대로라면 모든 게 완벽했다. 사기를 친 집주인과 부동산, 아무것도 찾을 수 없다는 변호사와 세상 모두에게 복수할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과거 현철이 우진을 배신한 일이 떠오르며 흔들린다. 요정의 존재를 제외하면 너무도 현실적인 설정이다. 어떤 방법으로 가상화폐가 많은 이들의 관심을 받는지, 작정하고 전세 사기를 치는 이들의 모습까지. 


현실에서 요정처럼 우리를 지켜주는 존재는 누구일까. 어쩌면 이유리는 힘들고 지친 우리네 삶에 소설로나마 그런 존재를 보여주고 싶었던 건 아닐까. 위로하는 귀신 양미, 때로 상대를 위해 가짜 마음소리를 전달하는 고미, 존재만으로 든든한 요정처럼. 이유리는 비현실적인 판타지를 통해 현실의 우리가 서로를 기억하고, 사랑하고, 지지하며 살아가기를 바라는 마음을 전한다. 그리하여 모든 것들의 가능한 세계를 꿈꿀 수 있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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