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것들의 세계 트리플 15
이유리 지음 / 자음과모음 / 202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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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이 좋은 이유 중 하나는 내가 상상하지 못한 세계로 나를 이끌기 때문이다. 명확하게 장르를 구분할 수 있는 SF나 판타지가 아니더라도 말이다. 누구나 한 번쯤은 상상했으나 확장되지 못하고 사그라든 이야기를 만날 수 있어 좋다. 이유리의 소설엔 그런 게 있다. 그러니까 뭐냐, 이 황당한 상상이 아니라 나도 그 상상을 경험하고 싶다는 막연한 바람을 품게 된다고 할까.


『브로콜리 펀치』에서 그랬듯 『모든 것들의 세계』에 수록된 세 편의 단편도 다르지 않다. 그런 기운 때문이었을까. 이유리의 소설에는 모든 것들이 가능한 세계가 숨겨진 것만 같다. 트리플 시리즈인 이 소설집을 ‘모든 것들의 가능한 세계’로 부르게 만든다. 


표제작 「모든 것들의 세계」의 화자 ‘고양미’는 죽은 사람이다. 귀신이라고 해야 맞겠다. 그러나 무섭거나 두려운 존재가 아니다. 그녀는 저승차사를 부모가 ‘천주안’이란 남자와 영혼결혼식을 올렸다는 소식을 듣는다. 그리고 곧 천주안을 만나 서로의 죽음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다. 고양미는 취직과 결혼을 하라는 부모님의 소망과는 다르게 게임을 하다 옆집에 난 불로 죽었다. 게임에 빠져 불이 난 줄도 모르고 죽은 거다. 천주안은 부모님과 결혼 문제로 다투다 20층에서 떨어져 죽었다. 자신이 게이라는 사실을 알리지도 못하고 죽기를 작정한 건 아닌데 그렇게 되고 말았다.


이승에 먼저 온 고양미는 천주안에게 사후 세계에 대해 설명한다. 부모나 가족이 아닌 누군가가 자신을 그리워하면 소멸하지 않는다는 사실도. 그래서 PC방에서 게임 동호회에 접속해 자신의 닉네임을 검색한다고. 천주안의 애인이 사는 곳까지 동행한다. 고양미는 이승의 게임에서 힐러였던 것처럼 저승에서도 천주안을 달래고 위로해 준다. 


다만 잊히고 싶지 않았다. 왠지 모르겠지만 그건 싫고 무서웠다. 꼭 즐겁고 행복한 기억으로가 아니어도 좋으니, 내 세계는 끝나 없어지더라도 다른 누군가의 세계 어느 한구석에는 끝내 남아 있고 싶었다. (「모든 것들의 세계」, 30쪽)


소설을 읽으면서 존재하지도 않을 양미가 잊히지 않기를 바랐다. 발랄한 귀신으로 여전히 좋아하는 카페에서 빵 냄새를 흠씬 맡으며 지내기를. 이런 마음을 갖게 만드는 게 이유리 소설의 힘이다. 허구의 존재에 대한 동경과 응원을 하게 되니까 말이다. 자신의 마음을 소리를 들을 수 있는 기발한 설정의 「마음소라」에서도 마찬가지다. 


일차성징처럼 때가 되면 누구나 ‘마음소라’를 갖게 되는데 만약 누군가에게 주게 된다면 그 한 사람만이 유일하게 자신의 진심을 고스란히 들을 수 있다. 그러니 고미는 도일의 마음소라를 선뜻 받을 수 없다. 결국 그것을 받으면서 둘은 7년의 연애를 시작한다. 고미와 도일의 사랑이 결혼으로 이어졌으면 문제가 없게지만 둘은 헤어졌다. 각자 다른 이과 결혼을 했다. 시간이 지나 도일의 아내 양희는 고미에게 마음소라를 돌려달라고 한다. 가출한 상태의 양희는 자신은 들을 수 없는 도일의 마음을 알려달라고 부탁한다. 고미는 도일의 마음에 양희에 대한 생각과 걱정이 없음에도 그녀를 걱정하고 있다며 집으로 돌아가라고 말한다. 누군가의 진심을 안다는 건 마냥 기쁠 수만은 없는 일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간절하게 사랑하는 이의 마음이 궁금하고 알고 싶다. 


마지막 「페어리 코인」에는 요정이 등장한다. 솔직히 말하자면 이름이 요정인 반려동물인 줄 알았다. 전세사기를 당한 ‘나’와 ‘우진’과 함께 산다. 말 그대로 요정이라 늙지도 죽지도 않는 존재로 키우는 데 어려움은 없다. 요정은 고조모가 발견하고 그 뒤로 증조모, 할머니, 엄마, ‘나’가 물려받은 가족으로 언제나 곁에 있었다. 법적으로는 문제가 없어 전세금을 돌려받을 수 없는 상황에 우진의 친구 ‘현철’은 요정으로 ‘페어리 코인’ 사기극을 벌이자고 제안한다. 현철의 계획대로라면 모든 게 완벽했다. 사기를 친 집주인과 부동산, 아무것도 찾을 수 없다는 변호사와 세상 모두에게 복수할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과거 현철이 우진을 배신한 일이 떠오르며 흔들린다. 요정의 존재를 제외하면 너무도 현실적인 설정이다. 어떤 방법으로 가상화폐가 많은 이들의 관심을 받는지, 작정하고 전세 사기를 치는 이들의 모습까지. 


현실에서 요정처럼 우리를 지켜주는 존재는 누구일까. 어쩌면 이유리는 힘들고 지친 우리네 삶에 소설로나마 그런 존재를 보여주고 싶었던 건 아닐까. 위로하는 귀신 양미, 때로 상대를 위해 가짜 마음소리를 전달하는 고미, 존재만으로 든든한 요정처럼. 이유리는 비현실적인 판타지를 통해 현실의 우리가 서로를 기억하고, 사랑하고, 지지하며 살아가기를 바라는 마음을 전한다. 그리하여 모든 것들의 가능한 세계를 꿈꿀 수 있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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