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너에게 가면
설재인 지음 / 자이언트북스 / 202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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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봄은 돌봄을 받는 이와 돌보는 이 모두를 성장시킨다. 돌보는 동안 상대를 지켜보고 사랑을 주기 때문이다. 의도하지 않았더라고 사랑을 주게 된다. 내 손길, 내 말, 내 마음에 따라 상대가 변화하는 걸 느끼는데 어떻게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상대도 마찬가지다. 관심을 갖고 지켜보는 이가 있다면 올바르고 좋은 쪽으로 나가려고 하니까. 관성처럼 말이다. 처음 만나는 설재인의 장편소설 『내가 너에게 가면』 은 그런 따뜻하고 애틋한 돌봄의 마음과 시선을 말하는 소설이다. 


죽은 할머니가 혼자 남은 손녀딸을 지켜보기 위해 사물에 깃드는 장면으로 시작하는 이 소설은 SF 인가 싶었지만 아니었다. 할머니 종옥이 떠나지 못하고 지켜보는 손녀 성주는 작은 항만군의 초등학교 돌봄반 교사로 일하며 복싱을 한다. 그러니까 성인 여자다. 평생을 사랑하며 키운 성주가 밥을 안 먹어서 빵이라도 먹게 해달라고 저승사자에게 부탁해 남은 것이다. 그러나 성주에게는 그만한 사정이 있다. 복싱을 하려면 체중이 중요한데 밥과 빵은 절대 피해야 할 음식이라는 걸 할머니는 받아들일 수 없었다. 주먹을 날리며 싸우고 받아온 트로피를 던져버렸으니까. 그 목이 나간 트로피에 할머니의 영혼이 깃든 것이다. 


할머니의 영혼이 성주를 지켜보듯 것처럼 성주는 돌봄반에서 만난 초등학교 1학년 애린이를 지켜본다. 할머니의 장례식장에서 엄마를 잃은 어린 소녀. 외국인 엄마와 한국인 아빠를 둔 애린. 아빠는 일하느라 외국에 있고 웹툰을 그리는 삼촌 도연이 애린을 키우고 돌봤다. 도연은 애린이 친구와 싸운 일로 미안한지 빵을 만들어왔다. 빵을 먹을 계획이 없었는데 애린의 집요한 권유에 어쩔 수 없이 먹었다. 한국말도 잘 하고 똑 부러지는 애린은 성주를 잘 따랐고 성주가 복싱을 한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다.


우연히 성주 집에 오게 된 애린이 목이 부러진 트로피를 가져가고 체육관에 등록할 줄은 몰랐다. 그 속에 깃든 종옥을 볼 수 있을 줄이야. 덕분에 종옥은 체육관으로 옮겨져고 그곳에서 매일 성주를 볼 수 있었다. 규칙적인 운동과 식단을 지키고 있던 성주였는데 애린과 도연의 등장으로 자꾸만 그게 무너졌다. 이상하게 싫지 않았다. 운동이 끝난 후 도연이 만든 빵을 맛있게 먹고 함께 달리기를 하고 애린에 대해 이야기를 했다. 성주는 애린을 통해 어린 자신의 모습을 발견했다. 친구의 손녀를 키운 할머니와 자신을 향하던 수많은 시선과 편견들, 부모도 아닌 삼촌이 키우는 애린에게는 어떤 말들이 오갈지 잘 알고 있었다. 


소설은 성주가 일하는 돌봄반을 통해 여전한 사회적 차별을 말한다. 외국인 노동자를 바라보는 한국인의 시선, 돌봄 교사인 성주를 정규직과 다르게 대하는 교장의 태도, 부모가 아닌 이들과 가족으로 살아가는 이들을 향한 참견의 모습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동시에 그 반대의 시선도 들려준다. 성주를 키운 종옥, 애린을 돌보는 삼촌, 성주를 응원하는 교사들. 서로가 서로를 돌보는 모습이다. 어린이만 돌봄이 필요한 게 아니라는 걸 알려준다. 애린을 통해 성주와 삼촌도 돌봄을 받고 있었다. 


아이의 작았던 세계에 낯선 사람들이 생겨난다. 땅에서 솟아나고, 하늘에서 떨어지고, 강을 헤엄쳐 흠뻑 젖은 채로 기어오르기도 하고, 또 어딘가에서 발을 구르며 전속력으로 달려오기도 한다. 작았던 아이를 그 사람들이 키운다. 점차 이 사람과 저 사람을, 그 사람과 또다른 사람들을 동시에 마음에 심어 사랑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누구도 가르쳐주지 않았지만 태생에서부터 내재된 본능의 씨앗이 발아하여 알게 된다. 소중히 여기는 사람들이 많아질수록 더 많은 씨앗을 심고, 더 많은 꽃을 피우고, 벌과 나비를 불러오고, 꿀을 슬그머니 맛볼 수 있다는 것도 조금 더 크면 알게 될 것이다. (229~230쪽)


소설은 대단할 것 없는 평범한 일상에서 혼자가 아닌 함께 살아가고 있음을 알려준다. 성주가 도연과 애린을 만나면서 “웃는 일이 많고 싶었다.”(244쪽)고 느끼는 것처럼. 한 사람의 생에 누군가 들어오는 일이 얼마나 대단한 일이지 확인시킨다. 누군가 돌보는 일은 돌봄을 받는 일이라는 걸 말이다. 나를 키우고 돌본 이들을 떠올리게 만든다. 그들의 존재가 얼마나 감사한지 알게 한다. 봄날의 햇살처럼 따뜻하고 소설 속 도연이 만드는 빵처럼 맛있고 부드러운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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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행복하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이병률 지음 / 달 / 202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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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을 읽는 일은 모든 감각을 깨우는 일이다. 설령 내 사랑이 끝났을지라도 사랑과는 멀리 떨어져 나온 삶이라도 사랑을 읽는 동안 나를 휘몰아졌던 사랑 속으로 진입하기 때문이다. 아픈 줄 알면서도 사랑의 불구덩이 속으로 걸어 들어가던 시간, 이별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며 스스로를 갉아먹던 침잠의 시간. 어느 날 이유 없이 서러워 아무도 모르게 울음을 쏟아내던 그 쓰라린 시간과 마주한다. 사라졌다고 믿었던 설렘의 순간, 무엇 때문에 헤어져야 하는지 납득할 수 없어 잠들지 못하던 밤이 고스란히 밀려온다.


이병률의 에세이 『그리고 행복하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를 읽으면서 누군가 여전히 사랑의 조각을 붙잡고 있음을 인식하거나 소식을 모르는 그의 안부나 행복을 바라는 마음을 발견하게 될지도 모른다. 사랑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말할 수 없음에도 시인이 들려주는 사랑에 나도 모르게 빠져든다. 당신이라 부를 수 있는 이가 지금은 곁에 없어도 어느 시절 당신과 보냈던 짧은 시간, 스치든 지나간 계절, 그리고 가슴에 남은 기억들은 누군가의 사랑이고 감정이다.


사랑을 배운 적이 없어서, 사랑을 하지 못하는 당신이 사랑을 하지 못하고 있을 때도, 세상은 사랑의 풍경을 보여주며 페이지를 남긴다. 그러니까 당신아, 우리는 그 페이지를 따라 여행해야 하고, 그 길에서 나 자신을 에워싼 모두를 괴롭혀서라도 영혼을 다 소모할 수 있을 때만 이번 생의 주인이 될 수 있다. 주인공 말고 주인이.(49쪽)


친구라도 될 걸 그랬다는 노랫말처럼 때로 사랑의 고백은 발화되어서는 안 되는 침묵으로 남아야 했다. 정성껏 써 내려간 치밀한 프러포즈가 그러하듯 상대에게 부담으로 남을 뿐이다. 여행을 하고 시를 쓰고 강의를 하고 꽃집을 운영하는 그가 말하는 사랑은 지극히 개인적인 사랑이자 모두의 사랑에 해당된다. 어떤 사랑은 시로, 어떤 사랑은 일기로, 어떤 사랑은 하나의 사연으로, 어떤 사랑은 편지의 형태로 쓰일 뿐이다. 그러니 이 책은 사랑에 대한 담론이며 사랑과 이별에 대한 고백이자 누구나 공감하는 애틋한 사랑이자 사랑을 기다리는 이의 마음이다.


그래서 하나하나 사랑의 조각을 소개하는 건 무의미할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어떤 글에는 오래 머물게 된다. 생일에 꼭 장갑을 선물하고 싶다는 글, 비 오는 날 연인이 저 멀리서 우산을 들고 있는 걸 발견하고 냉큼 쓰고 있던 우산을 쓰레기통에 버리는 여자에 대한 글, 사귀는 걸 주변에 알리지 못해 둘만이 아닌 여럿이 보낸 크리스마스에서 사다리 게임으로 선물이 다른 사람에게 돌아갔다는 글이 그랬다. 어느 시절 매만지던 약지 손가락의 감각이 되살아나서, 비가 오던 날 우산을 하나만 사 오던 모습이 좋아서 심장이 뛰던 순간, 어느 해 크리스마스 선물로 준비한 장갑이 떠올라서다.


내가 사랑했던 사람들이 번복자가 되어 나를 떠날 수밖에 없었던 순간들을 되돌린다면 어떨까. 당신이라는 세계가 놓치고 만 것들을 붙잡는 것. 그것은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일이라서, 있는 힘껏 몸을 돌리고 관점을 되돌려 ‘그때의 나는 내가 아니었다’고 말하면서 두 팔 벌려 안을 수 있다면.(98쪽)


과거가 돼버린 이야기다. 시인은 모든 걸 번복할 수 있다면 어떨까 하며 지나간 사랑을 후회하지만 어떤 사랑은 우주의 의지를 끓어 모아도 결국 이별의 수순을 밟게 된다는 걸 알기에 그저 담담하다. 어쩌면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시간이 지났기 때문에 가능한 담담함일지도 모른다. 사랑은 둘이어야 가능한 일이고 둘이어야 만들 수 있는 것이라서 그렇다. 


한 사람이 혼자서 하는 게 사랑은 아니기에, 한 사람이 할 수 있다 하더라도 그건 사랑이 아니기에, 우리는 사랑하다가고 어긋나고, 이어보려 해도 고스란히 해진 자국을 남긴다.(124쪽)


그럼에도 책에서 만난 사랑은 한 편의 영화 같고 음악 같다. 그건 사랑이 우리를 살게 하고 지탱하는 힘이라는 걸 알기 때문이다. 심지어 이별을 견디는 시간조차도 사랑의 기억이 있기에 버틸 수 있는 시기가 있다. 좋았던 기억이 왜 이별로 이어지나 분노하면서도 훗날 그 모든 것들은 아름다움에 아름다움으로 남는다. 아련해지고 흐릿해진 아름다움으로 말이다.


우리가 사는 삶이란 그저, 사랑하는 모두가 빠져나간 자리의 뒷전을 자주 느끼는 일이며, 사랑이 사랑의 힘만으로 도달할 수 없다는 불가능을 여러 번 체험하는 일이며, 도무지 막으려 해도 막을 수 없는 신산한 시절을 그저 견디고 견뎌야만 하는 일, 피할 수 없어서 우리는 그 모든 것들의 쓸쓸함을 삼키고 또 삼키며 삽니다.(160쪽)


『그리고 행복하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는 사랑을 하는 이들에게는 찬란한 사랑으로 나가는 격려가 될 것이고 혼자만의 사랑을 하는 이들에게는 사랑이 주는 기쁨과 힘을 확인하며 용기를 북돋을 것이고 사랑이 끝났다고 여기는 이에게도 결국 삶이란 사랑에 속한 것이라는 걸 깨닫게 될 것이다.


사랑을 읽는 일은 가만히 내 사랑을 헤아려 보는 일이다. 서툴고 아팠던 사랑부터 전부를 걸어도 아깝지 않았던 사랑과 이제는 그의 이름을 들어도 덤덤해진 가슴이 서럽기도 한 사랑까지. 그 모든 사랑으로 받은 것들로 인해 내가 살았던 날들과 부디 내가 주었던 것들로 그 사랑도 살았던 날들이 있기를 바라는 마음을 꺼내보는 일이다. 사랑이 얼마나 눈부시고 소중한 것인지 나만의 공간에 새기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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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보는 사과하지 않는다 - 제2회 넥서스 경장편 작가상 우수상 수상작 넥서스 경장편 작가상
한요나 지음 / &(앤드) / 202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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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범했던 일상을 의심하는 순간은 사소함에서 시작된다. 누군가 거드는 한 마디로 이상하다는 생각이 싹튼다. 과거와 달리 쉽게 정보에 접근할 수 있는 시대라면 파급력은 크다. 반대로 지금보다 과학이 발전된 미래라면 의심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관리할지도 모른다. 조지오웰의 『1984』 속 빅 브라더 같은 존재가 아니더라도 말이다. 거대한 시스템이 사회를 통제하고 있다면 어떨까? 


한요나의 『오보는 사과하지 않는다』에 등장하는 세상이 그렇다. 그러니까 인구 부족으로 국가가 인구 출생을 계획하고 관리한다. 1월에 임신해 10월에 태어난 아이는 국가가 부모인 셈이다. 일반적인 가정이 아닌 기관에서 자라고 교육을 받고 사회로 나온다. 기상관측소 분석실에서 근무하는 주인공 김도브도 10월의 아이들 2세대다. 도브는 자신이 10월의 아이라는 게 이상하지 않았다. 생물학적 아버지가 자신의 임종을 지켜달라고 부탁하면서 마음이 달라졌다. 아버지라는 존재, 아버지가 보고 싶어 하는 파트너, 가족이 아니지만 존재의 시작인 그들이 등장하며 도브의 일상은 예전과 다르게 흘러간다. 도브에게 아버지는 의심이자 궁금증이었다. 


아버지가 남긴 숫자와 알파벳을 여러 방법으로 추리를 시작하다 찾은 곳이 술집 ‘NO-LITER’였다. 도브와 다르게 그곳을 단골 술집으로 여긴 이들이 많았다. 아버지의 파트너에 대한 정보를 찾으려 노리터에 갔지만 도브는 그곳에서 점점 그들과 어울리게 된다. 연인이 떠나고 혼자 아들을 키웠지만 아들마저 떠나버린 사장, 정상 가족을 원했던 엄마의 인형이 아닌 자신의 삶을 찾아 가출한 소미, 항상 같은 자리에 앉아 술을 마시는 방랑자, 맥주를 마시러 온 노년의 부부 파와 엠, 기계처럼 대화하는 지지를 통해 도브는 인간이 무엇이며 가족은 무엇인가 진지하게 고민한다. 


도브는 특히 방랑자에게 아버지 같은 느낌을 받는다. 기억을 잃은 방랑자도 도브에게 비슷한 감정을 느꼈는데 방랑자가 10월의 아이들 1세대였기 때문이다. 도브는 떠난 아들을 그리워하는 사장과 한 번도 부모를 그리워하지 않는 소미를 통해 혈연으로 맺어진 관계는 무엇이며 자신과 다른 가족은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알게 된다. 거기다 지지와 방랑자의 대화를 통해 10월의 아이들인 자신의 삶에 대해 돌아보게 된다. 항상 정보를 수집하고 기록하던 방랑자가 김이고 박사라는 걸 알려주면서 잃어버렸던 기억을 하나씩 되찾을 때 사장의 아들 노원이 돌아온다. 노원이 돌아오고 소미는 사라진다. 노원은 아버지가 소미를 자신을 대신해 돌보고 있다는 걸 알았다.


국가의 유전자 공학으로 태어난 10월의 아이들, 국가가 관리하고 필요한 곳에 배치하여 살아간다는 게 전혀 이상하지 않는 세상에서 가족이란 아무런 의미가 없다.이고 박사의 외침처럼 DNA 같은 건 이제 인간에게 정복당한 나사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우리가 꿈꾸는 미래는 어떨까? DNA를 통해 더 나은 인간의 삶을 이루려는 노력은 결국 허사가 되는 것일까. 말할 수 없이 복잡한 마음이다.


인간은 너무 멍청해요. 왜 자신이 태어났는지 알 수 없잖아요. 누가 알려 준다고 해도, 그게 진실인지는 알 수 없고요. 믿을 수 있을까요? 끝까지 믿을 수 있는 게 있을까요? 나는 당신에게 무언가를 묻기엔 아무것도 준비된 게 없었어요. 조금만 더 일찍 찾거나 아예 날 찾지 말았어야 했어요. (124쪽)


도브는 정체성의 혼란을 느끼지만 지금껏 잘 살아왔기에 가족이 무슨 의미일까 싶다. 다른 방식으로 살아온 이들과 시간을 보낼수록 아버지의 흔적을 찾는 일은 중요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도브는 노리터에서 자신이 알지 못하고 느끼지 못한 가족을 경험한다. 그들에게 맛있는 요리를 대접하고 연락이 끊긴 소미에게 소식을 전하고 세상을 떠난 파를 애도하고 남겨진 엠을 걱정한다. 어쩌면 노리터를 중심으로 연결되는 이들의 모습이야말로 미래의 가족상은 아닐는지. 


노리터에 있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아버지에 대한 생각은 줄어든다. 사람들과 엮일수록 내가 그 사람에 대해 더 알 필요가 있는지 의구심이 생긴다. 그러니까 아버지의 파트너를 찾을 필요도 없는 게 아닐까. 노리터 사람들과 친해질수록 아버지도, 아버지의 파트너 찾기도 점점 잊게 된다. 가족. 가족이라는 단어는 어디에서 왔을까? (127쪽)


이런 상황속에서 10월의 아이들 1세대인 이고는 자신이 찾으려는 게 무엇인지 도브에게 설명한다. 국가나 정부가 숨기고 있는 진실을 세상에 알리려 했던 것이다. 도브는 이고를 돕기로 결정한다. 신분증을 복사하고 위험을 무릅쓰고 이고가 일했던 곳으로 향한다. 돌아온 이고의 기억이 찾아낸 곳에는 사람이 아닌 거대한 시스템만이 존재했다. 국가 권력은 결국 시스템에 불과했던 것일까.


나는 시스템 오보에. 인간의 목소리를 닮은 악기의 이름을 따왔습니다. 이제 나는 파괴합니다. 인간의 목소리를 내야 합니다. 인간 같은 것은 없습니다. (246쪽)


누가 누구에게 미안해야 하는 걸까. 사과해야 할 대상도 없고, 사과해야 할 사람도 없는 곳에서 우리는 누구에게 미안해하고 있는 걸까. 시스템은 누구에게 미안해하고, 또 왜 미안한 걸까. (246쪽)


이고가 그토록 밝히고 싶었던 10월의 아이들 1세대의 진실, 그로 인해 상처를 받고 피해를 당한 자신과 같은 이들에게 진심으로 사과할 이는 어디에도 없었다. 인간 같은 것은 없다고 말하는 시스템 오보에. 어쩌면 미래엔 시스템의 일부로 인간은 사라지고 인간과 같은 존재들만 남는 건 아닐까. 유전자 덩어리로 만들어진 인간이라면 가족의 돌봄이나 사랑은 배제된 채 양육되는 사회라면 그럴지도 모른다. 


『오보는 사과하지 않는다』는 얼핏 기상 이변에 대한 두려운 미래의 모습을 상상하게 만드는 멋진 트릭으로 시작해 정상가족이라는 범주에서 탈피한 미래의 다양한 가족 구성원과 형태를 제시한다. 인간이라는 존재, 생명의 소중함에 대해 생각하게 만든다. 한요나가 그려낸 소설은 허구가 아닌 현실로 다가올지도 모른다. 그래서 앞으로 어떤 유전 공학 기술이 우리 앞에 도래할지 모르지만 인간의 존엄성을 지키고 각자의 방식으로 가족을 만들고 삶을 이어가는 이들의 단호함이 위대하고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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므레모사 현대문학 핀 시리즈 소설선 38
김초엽 지음 / 현대문학 / 202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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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고로 한 쪽 다리를 잃고 의족을 사용하는 무용수였던 유안은 유독성 화학물질의 대규모 유출과 화재로 페쇄가 된 이르슐의 한 도시 므레모사 투어에 참가한다. 세상과 단절된 므레모사를 떠났던 이들이 다시 돌아오고 외부인의 출입을 허용하고 첫번째 방문객으로 투어에 당첨된 것이다. 유안을 제외한 다섯 명은 저마다의 이유로 므레모사에 기대가 가득하다. 관광학을 연구원생 이시카와, 다크 투어리스트 헬렌, 여행기자 탄, 여행 유튜브 운영자 유진, 펍을 운영했다 망한 레오. 


므레모사에 대해 알려진 게 없었지만 귀환자들이 유령과 좀비로 살고 있다는 소문이 많았다. 엄격한 검문으로 통과하는 것을 시작으로 투어가 진행된다. 그 과정에서 유안의 의족을 한 사람이라는 게 일행에게 알려진다. 유안은 사고 후 재활을 하면서도 잃어버린 다리가 있다고 믿는 환지통에 시달렸다. 무용을 그만 두기 전에도 세 개의 다리로 춤을 추는 고통을 느꼈다. 므레모사 탐방 하루 전 숙소에서 유안은 레오에게 비밀스러운 이야기를 듣는다. 그리고 레오의 계획에 동참하기로 한다.


소문과 다르게 므레모사 귀환자들은 유령이나 좀비처럼 보이지 않았고 투어에 참가한 일행을 반겼다. 므레모사 전체를 감싸는 향과 묘한 분위기를 느꼈다. 그런데 이상한 건 귀환자들이라고 여기기엔 너무 젊었다. 폐쇄된 시간을 생각하면 이상한 일이었다. 유안을 제외한 나머지 사람들은 므레모사에 매혹되었고 그곳에 남겠다고 말했다. 어젯밤 레오가 들려준 그대로 였다. 므레모사는 한 번 들어오면 빠져나올 수 없는 곳이었다. 기둥으로 남은 귀환자들의 조종이든 아니든 말이다.


레오는 그런 진실을 세상에 밝혀야 한다고 말했지만 유안은 조금 달랐다. 므레모사에 본 풍경은 유안에게 있는 그대로의 삶이었다. 유안의 재활을 도와주며 연인이 된 한나는 유안의 다리를 향해 상실을 딛고 나가야 한다고 말할 뿐 환지통을 인정하지 않았다. 므레모사에서 유안은 오히려 평온해질 수 있었다. 누군가 므레모사를 죽음의 땅이라 부를지라도 그곳이 디스토피아의 모습일지라도 그 안에도 존재하는 삶이 있다는 사실이 중요했다. 하나의 방식이 아닌 유안의 그것을 인정해 주는 이들이 필요했다. 


내가 바라는 건 죽음이 아니었다. 나는 삶을 원했다. 누구보다도 삶을 갈망했다. 단지 다른 방식의 삶을 원할 뿐이었다. (175쪽)


김초엽의 첫 단편집 『우리가 빛으로 갈 수 없다면』을 읽었을 때 느꼈던 감동을 기억한다. 나에게 SF는 어렵고 난해한 분야였는데 김초엽의 소설은 SF나 판타지가 인간의 이야기라는 걸 말해주었다. 어떤 미래가 와도 어떤 상황에 처해도 결국엔 인간이 함께 살아갈 수 있다는 희망, 그것이 작고 희미할지라도 말이다. 두 권의 단편집과 장편소설과 짧은 소설을 읽으면서 그가 삶을 하나의 기준으로만 생각해서는 안 된다고 말하고 있다고 느꼈다. 


현대문학 핀 시리즈 『므레모사』에서도 다르지 않았다. 다만 아쉬운 부분이 있다면 이 소설에서 기존에 만난 김초엽의 단편과 장편의 일부를 녹아냈다는 점이다. 그 모든 게 김초엽이라는 소설가의 일부이니 잘못되었다는 건 아니다. 말 그대로 살짝 아쉽다는 말이다.


『므레모사』는 SF 소설, 재난 소설, 공포소설이라 불릴 수 있다. 전쟁과 재난의 역사를 통해 교훈을 안겨주는 소설로도 충분하다. 소설을 읽으면서 후쿠시마 원자력 발전소 사고를 떠올리는 이도 많을 것이다. 그러나 내게는 한없이 외롭고 쓸쓸한 존재가 자신과 같은 존재를 인식하는 이야기로 다가왔다. 유안이 느끼는 환지통을 누군가에게 이해받고 있었을 생각에 마음이 아프다. 현재 우리가 겪는 불안과 전쟁은 어떤 형식으로 기록되고 보존될까. 언제부턴가 SF나 판타지를 통해서도 현실을 돌아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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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 폴리스맨
베선 로버츠 지음, 민은영 옮김 / 엘리 / 202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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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가 사랑하는 걸 숨겨야 한다면 그 사랑은 빛이 없는 그림자에 불과할 것이다. 그림자여도 상관없다면 둘 사이의 사랑은 빛으로 충만하다. 누가 뭐라든 내가 당신을 사랑하고 당신이 나를 사랑하면 그것으로 충분하니까. 그가 존재한다는 사실로도 하루하루 기쁘고 떨리는 삶 그 자체가 된다. 하지만 사랑에 빠지는 순간 내 사랑을 자랑하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여기 이 아름다운 사람이 나의 연인이라고 말이다. 그 숨 막히는 떨림을 감추고 심지어 연인을 누군가와 공유해야 어떨까. 성인이 된 자식을 떼어놓지 못하는 홀어머니와의 삼각관계가 아니라 내가 아닌 다른 연인과 사랑을 나누어야 한다면 그게 가능할까.


베선 로버츠의 장편소설 『마이 폴리스맨』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상황에 놓인 세 사람의 이야기다. 톰을 사랑하는 아내 매리언과 톰의 연인 패트릭의 묘하고도 위태로운 사랑과 파국에 관한 소설이라고 하면 맞을까. 어쩌다 그들은 그리되었을까. 어디서부터 잘못되었을까. 


소설은 1999년 현재 피스헤이븐에 살고 있는 매리언이 패트릭 한 사람을 특정한 일종의 고백이라는 글로 시작된다. 패트릭은 누구인지 알 수 없다. 두 번의 뇌졸중으로 생의 끝자락에 있는 남자다. 돌봄이 필요한 환자를 무시하고 방치하는 톰의 태도로 메리언의 시아버지일까 짐작했다. 그러나 매리언이 친구 실비의 오빠인 톰과 만나고 사귀는 과정을 시간순으로 천천히 묘사하면서 패트릭은 아버지가 아니라는 걸 알았다. 그러니까 패트릭은 톰의 연인이었다. 톰과 사귀면서 소개받은 학예사, 음악과 미술뿐 아니라 예술적 조예가 깊은 사람이다. 


매리언이 서술하는 톰에 대한 부분은 형언할 수 없을 정도로 순수하고 아름답다. 첫사랑에 빠졌던 어린 소녀가 스무 살 선생님이 되어 만난 경찰관 톰. 수영을 배우는 걸 계기로 주말마다 톰과 시간을 보내는 매리언은 달콤하고도 은밀하다. 톰의 사랑을 수 확신할 수 없지만 톰이 모든 것을 자신에게 말하고 나누는 것으로 사랑이라 느꼈다. 패트릭을 친구가 소개하는 톰의 눈빛은 거짓이 없어 보였다.


패트릭이 등장하면서 소설은 1957년 해변도시 브라이턴의 패트릭 일기로 이어진다. 경찰인 톰과 패트릭이 처음 만난 날, 패트릭도 첫눈에 톰에게 반했다. 톰을 향한 끌림을 멈출 수 없었다. 어떻게 해서든 그와 연결되기를 원했다. 그림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고 자연스럽게 모델이 되어 달라고 부탁했다. 지적 호기심이 많았던 톰은 흔쾌히 수락했다. 패트릭의 아파트에서 톰은 자신도 패트릭과 같은 성향의 사람이라는 걸 알았다. 그러나 1950년대 영국에서 동성애는 죄로 분류되었다.


소설은 1999년과 1957년을 오가며 매리언과 패트릭의 시선으로 사랑하는 톰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사회적인 위치나 경제적으로 자유로운 패트릭에 비해 톰은 그들의 사랑이 세상에 알려질까 두렵다. 매리언에게 패트릭을 소개한 후 셋은 자주 시간을 보내지만 그가 사랑하는 건 패트릭이었다. 패트릭과의 사랑을 위해 톰은 매리언과 결혼을 선택한다. 일종의 사회적 위장인 셈이다. 바라고 바라던 톰과의 결혼, 매리언은 행복한 미래를 꿈꾼다. 결혼식에서 둘이 맞춤양복을 입고 신혼여행 중 일부는 패트릭과 함께 보내도 문제가 되지 않았다. 패트릭은 좋은 친구였고 톰과 매리언보다 어른이었으니까. 사랑에 서툴다는 톰의 고백도 감미로웠다. 톰을 사랑하는 일에 패트릭도 포함된 거라는 걸 알지 못했다.


그러나 둘 사이에 흐르는 사랑의 기류를 매리언이 포착하고 말았다. 부정할 수 없는 진실 앞에 매리언은 무너졌다. 그가 바라보고 마주한 건 톰의 외부에 불과했다. 끝내 열리지 않을 문을 바라보며 하염없이 기다리는 사람이었다. 패트릭의 베네치아 출장에 톰이 동행하면서 매리언의 배신과 절망은 폭발했다. 패트릭의 상사에게 익명의 고발 편지를 보낸 것이다. 그저 패트릭만 톰에게서 멀어지면 괜찮아질 거라 여겼다. 패트릭의 성향이 세상에 공개되는 순간 톰도 안전하지 못하다는 걸 계산하지 못했다. 패트릭만 없다면 새롭게 시작할 수 있다고 믿었다. 사랑이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는 걸 매리언은 몰랐던 것이다.


패트릭은 모든 걸 인정할 수 있었지만 톰은 자신을 향한 비난의 화살이 두려웠다. 경찰관을 사직하고 경비 일을 택했다. 그 일로 패트릭은 감옥에 가고 톰과는 돌이킬 수 없는 사이가 되었다. 톰은 매리언에게 벽과 같은 존재였다. 공식적으로 결혼생활을 유지했지만 톰과 매리언의 시간은 고통으로 채워졌다. 그리고 40여 년이 흐른 현재 매리언이 패트릭을 찾은 것이다. 혼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패트릭을 집으로 데려와 돌보는 매리언의 마음은 무엇일까. 톰의 곁에 있는 건 자신이라고 보여주고 싶었던 걸까. 서로를 사랑했을 뿐인데 그 사랑이 서로에게 비수가 되었다. 톰을 온전히 소유하고 싶었던 매리언의 잘못일까, 욕망을 다스리지 못하고 톰에게 직진한 패트릭의 잘못일까. 사회적 시선을 감당하지 못하고 도망친 톰의 잘못일까. 그 누구의 잘못도 아니라는 걸 안다. 


패트릭, 이 모든 얘기를 털어놓는 건 나와 톰 사이가 어땠는지 알려주기 위해서다. 우리 사이에 고통만이 아니라 다정함도 있었다는 걸 당신이 알도록. 우리 둘 다 실패했지만 우리 둘 다 노력했다는 걸 알도록. (321쪽)


어쩌면 매리언이 패트릭에게 알려주고 싶었던 건 그가 모르는 둘 사이의 시간이었을지도 모른다. 매리언과 톰이 함께 보낸 작고 소소한 일상의 기쁨과 즐거움. 완벽할 거라 믿었던 기대가 무너져 내린 순간까지, 오직 매리언만이 볼 수 있었던 톰의 몸짓과 표정 같은 것들 말이다.


그런 면에서 매리언의 글과 패트릭의 일기에 등장하는 톰은 눈부시고 아름다운 존재다. 순수하면서도 지적이고 탄탄하고 매끄러운 몸매를 지닌 매력적인 사람이다. 톰으로 인해 매리언과 패트릭의 삶은 환희와 감동으로 가득했다. 그러나 톰의 이야기는 들을 수 없기에 매리언이 데려온 패트릭을 보고 그가 느꼈을 감정이 무엇인지 그의 내면을 채운 사랑이 어떠했는지 알 수 없다. 


우리의 터무니없고 맹목적이고 순진하고 용감하고 낭만적인 갈망이 우리를 하나로 묶은 것 같다. 우리 둘 다 실패를 온전히 받아들이지 못했다고 나는 생각하니까. 텔레비전에서 맨날 나오는 그 말이 뭐였더라? 그래도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우리 둘 다 그걸 해내지 못했다. (485쪽)


여전히 패트릭과 매리언 사이에 그가 있을 뿐이다. 톰을 향한 자신과 패트릭의 사랑과 실패를 인정하는 매리언의 글에서 쓸쓸함과 서글픔이 묻어난다. 한 사람을 사랑한다는 이유로, 평생 동안 그 사랑을 짊어지고 살아야 했던 매리언과 패트릭.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다고 말하는 노랫말 따위는 들이댈 수 없는 사랑이다. 쓰라린 상처와 고통을 고스란히 감당하고야 마는 그런 사랑이다. 


*베선 로버츠는 영국 소설가 E.M. 포스터(1879~1970)의 연인이었던 경찰관 밥 버킹엄과 그의 아내 메이 버킹엄의 이야기에 영감을 얻어 소설을 썼다고 한다. 곧 영화로 개봉된다고 하니 그들의 사랑을 어떻게 그려냈을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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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10-18 11:1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2-10-18 14:14   URL
비밀 댓글입니다.

blanca 2022-10-18 12:5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안 그래도 이 책 궁금했어요. 모델이 포스터였군요. 그가 동성애자인 건 알고 있었는데 결혼했었다는 건 몰랐어요. 잘 읽고 갑니다. 영화 꼭 봐야겠어요.

자목련 2022-10-18 14:17   좋아요 1 | URL
소설도 아름답지만 영화로 보면 더 좋을 것 같습니다. 아, E.M. 포스터가 결혼 한 건 아니고요. 결혼은 그의 애인이 했다고 합니다. 소설 속 톰이 매리언과 결혼한 것처럼요.

서니데이 2022-11-09 15: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달의 당선작 축하합니다.
따뜻한 하루 보내세요.^^

자목련 2022-11-10 09:33   좋아요 1 | URL
서니데이 님, 감사합니다. 건강한 하루 이어가세요^^

거리의화가 2022-11-09 15: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자목련님 이달의상 축하드려요^^
제가 직접 고르지 못할 작품들을 항상 자목련님 덕분에 대리만족하게 되는 것 같아요^^ 고맙습니다.

자목련 2022-11-10 09:35   좋아요 0 | URL
거리의화가 님, 감사드리며 저도 축하드립니다.
편협한 책읽기에 대리만족이라니요. 덕분에 신나는 아침입니다. ㅎ

thkang1001 2022-11-09 18: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자목련님! 이달의 당선작 선정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행복한 한 주 되시길 바랍니다.

자목련 2022-11-10 09:35   좋아요 0 | URL
항상 응원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따뜻하고 평온한 하루 이어가세요^^

강나루 2022-11-10 04: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자목련님, 이달의 당선작 서정을 축하드려요.
행복한 하루 보내세요.

자목련 2022-11-10 09:35   좋아요 1 | URL
강나루 님, 저도 축하드립니다. 좋은 하루 보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