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벼운 마음
크리스티앙 보뱅 지음, 김도연 옮김 / 1984Books / 202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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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밀을 간직한 삶을 아름답다. 누구나 비밀이 존재한다. 그러니 누구나 아름다운 삶을 살 수 있다. 다만 그 비밀의 무게에 짓눌리면 헤어 나올 수 없다. 아름다운 비밀은 산뜻하고 가볍다. 크리스티앙 보뱅의 『가벼운 마음』 속 ‘뤼시’의 삶은 그 자체가 비밀이다. 뤼시의 비밀은 신비롭고 아름답지만 어른의 시선에서는 그저 속임수나 거짓말에 불과하다. 하지만 그건 중요하지 않다. 뤼시에게는 뤼시만의 삶이 있고 그 삶을 사는 건 뤼시뿐이니까.


산문으로 이미 그 아름다움을 증명한 크리스티앙 보뱅은 소설에서 한층 더 빛을 발하는 문장으로 우리를 유혹한다. 부모와 함께 서커스 단에서 태어나 이곳저곳을 떠돌며 자란 소녀 뤼시의 첫사랑은 늑대다. “내 첫사랑은 누런 이빨을 가지고 있다.” 이런 문장의 주인공이 늑대라고 누가 상상할 수 있을까. 나는 감히 짐작하지 못했다. 서커스 단원을 포함한 모든 사람에게 늑대는 위험한 존재였지만 소녀에게는 가장 안전하고 포근한 존재였다. 어느 누구도 늑대와 소녀만의 거리, 그들 사이에 흐르는 감정과 비밀을 알지 못한다. 아니, 알려고 하지 않았다.


그런 늑대가 죽고 여덟 살 소녀는 가출을 감행했다. 서커스 단의 트레일러에서 벗어나 돌봐야 할 쌍둥이 동생에게서 벗어나 세상으로 나간다. 길을 잃은 척, 부모를 잃어버린 척, 소녀는 뤼시가 아닌 다른 아이가 된다. 그런 연기는 너무 쉽다. 어른에게 아이들은 순수한 존재, 보호와 돌봄의 대상이니까. 가출 때마다 스스로 이름을 부여한 소녀는 이전과는 다른 삶을 살고 경찰을 통해 부모에게 돌아오면 새로운 이름을 찾아 집을 나선다. 내가 아닌 나로 존재하는 것, 그것은 비밀이자 자유였다.


부모님이 서커스 단에서 나와 무덤을 파는 묘지 일을 하고 중학생이 된 소녀는 기숙사 생활을 한다. 자유를 갈망하는 소녀는 기숙사에서 새로운 관계를 형성한다. 거리가 멀어 집으로 돌아갈 수 없는 주말에 소녀는 하숙을 하면서 그 과정에서 ‘로망’을 만나 결혼을 한다. 뤼시에게 결혼은 안전보다는 비밀과 자유에 대한 갈망을 안겨주고 그녀가 괴물이라 부르는 ‘알망’과 사랑에 빠진다. 그러나 그들의 사랑은 서로 달랐다. 서로에게 비밀스럽고 은밀한 대상이 아니었다. 


진정한 삶은 비밀스럽고, 은밀하고, 훔치는 거야. 이슬비를 맞으며 걷고, 포장도로 위에 울리는 구두 굽 소리에 기뻐하고, 책에서 문장 하나를 뽑아내 잠시 마음에 담고, 창밖을 바라보며 과일을 먹는 것, 그것 역시 속이는 거야. (133쪽)


어쩌면 괴물과 헤어지는 게 뤼시에게 당연한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누군가에게 속한 관계가 아니라 그녀는 자신에게만 속할 수 있는 존재였다. 그 후 우연한 계기로 배우가 되었고 성공을 했지만 뤼시에게 배우란 직업은 거짓과 비밀을 표현하기에 적절하지 않았다. 뤼시가 발견한 가장 아름다운 비밀과 자유를 느끼는 일은 글쓰기였다. 


그러니까 『가벼운 마음』 은 호텔에 머물며 뤼시가 쓴 글이라 할 수 있다. 늑대를 사랑했던 소녀가 자라온 이야기, 어떤 이름으로 불리느냐에 따라 달라지는 삶의 비밀과 관계들. 그녀가 붙인 이름으로 불렸을 때 이전과는 다른 존재가 되는 사물들과 사람들이 된다. 맨 처음 관계를 맺은 늑대가 그러하듯이. 


내게는 더 이상 아버지든 어머니든 남편이든 필요하지 않다. 그런 건 너무나 충분히 가지고 있었다. 내게 필요한 건 단지 목덜미로, 피부와 블라우스 사이로 스미는 시원한 바람을 느끼는 것이며, 내 눈을 전나무의 짙디짙은 초록색으로 물들이는 것뿐이다. (141쪽)


소설 속 뤼시는 누구나 될 수 있지만 누구도 될 수 없는 존재다. 가벼이 날아서 사뿐 내려앉아 다시 날아갈 준비를 하는 나비 같은 삶. 잡을 수 없고 잡히지 않는 삶. 그래서 더 매혹적이고 흠뻑 빠져든다. 그저 잔망스러운 소녀가 부르는 이름의 존재, 그 안에 담긴 사랑을 흠모할 뿐이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과 함께 성장할 수 없다. 우리는 그들이 우리에게 품은 사랑, 우리를 충분히 안다고 믿는 사랑에서 벗어나야만 성장할 수 있다. 우리는 그들에게 말하지 않을 것들을 할 때야 비로소 성장할 수 있다. 설사 그들에게 말한다 해도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그런 것들은 보이지 않고, 붙잡을 수 없고, 그들이 던져준 사랑의 망토로 덮을 수 없으며, 우리 속에 머물러 우리의 일부를 이루기 때문이다. (177쪽)


그녀는 그녀의 방식대로 성장하는 삶을 택했다. 누군가 그것을 자유, 방탕, 방랑, 미성숙, 무책임이라 부를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녀의 삶의 이름은 정해진 게 없다. 오직 그녀만이 자신의 삶에 이름을 붙일 수 있다. 나는 아름답고 내밀한 가벼움이라 부르고 싶다. 


어떤 형식으로든 그 아름다움에 대해 말하는 게 어려운 소설이다. 그러니까 직접 읽어야만 알 수 있는 아름다움이다. 뤼시가 간직했던 비밀들, 그 아름다운 비밀의 알갱이를 직접 줍는 게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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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오 2023-07-05 04:3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하......... 가벼운 마음 진짜 너무 좋고 자목련님 리뷰도 너무 좋네요. 가벼운 마음 진짜 너무 좋아요 자목련님도 진짜 너무 좋고 뤼시도 너무 좋고 ㅠㅠㅠㅠㅠㅠ 가벼운마음 아직 안읽은 사람 뇌 사고싶따....

자목련 2023-07-05 11:52   좋아요 1 | URL
가벼운 마음 진짜 좋아요, 물론 은오 님의 리뷰도 좋고, 은오 님도 좋아요!!
 
헬프 미 시스터
이서수 지음 / 은행나무 / 202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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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땅에서 여성으로 사는 게 두렵기 시작한 때는 언제일까. 뉴스나 언론 보도를 통해 피해자로 등장하는 여성들이 남 같지 않다고 느낄 때. 택배나 배달 주문을 할 때 이름을 남자 이름으로 입력한다는 글을 보고 나도 이렇게 해야지 싶을 때. 돌이켜보면 학창 시절 공중 화장실에 가를 걸 주저하던 때가 아닐까 싶다. 모든 남성을 잠재적 범죄자로 여겨지는 않지만 그래도 한 번씩 무서울 때가 있다. 어쩌다 우리는 이런 사회에 살게 되었을까.


이서수의 장편소설 『헬프 미 시스터』 속 주인공 수경도 자신이 성범죄를 당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한 번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 직장동료가 건넨 음료수를 마시고 위험한 일을 당한 뻔했다. 다행스럽게 피해를 면했지만 수경은 그 일로 직장을 그만두어야 했다. 가해자가 아닌 피해자가 직장을 그만두어야 하는지 이해할 수 없지만 나라도 그 동료를 계속 볼 수 없을 것이다. 수경은 한동안 집 밖에 나갈 수 없었고 그 누구도 믿을 수 없었다. 


그러나 수경이 마냥 집에서 쉴 수만은 없었다. 15평 빌라에 여섯 명의 가장 역할을 하던 수경이었다. 남편은 투자 전문가지만 수익을 낸 적이 없고 아버지가 사기를 당해 부모님은 수경의 집으로 왔다. 엄마는 큰일을 당한 수경을 돌보려 청소 일을 그만둔 상태다. 거기다 남편의 조카 둘까지. 조금 색다른 가족 구성원이다.


수경은 다시 세상으로 나가야 했다. 예전처럼 직장에 나가 동료들과 일할 자신은 없었다. 수경에게는 사람이 제일 무서운 존재였고 그래서 선택한 일이 택배였다. 택배 일은 생각만큼 쉽지 않았다. 노동자인데 소속된 곳이 없어 노동자의 대우를 받지 못했고 이상한 사업자 신분이 되었다. 수경의 택배 일을 엄마가 도왔고 남편과 아버지도 일을 찾았다. 가족이 할 수 있는 일은 모두 수경과 같이 플랫폼 노동자였다. 수경의 일을 계기로 가족은 조금 더 단단해졌다. 아무리 가족이라 해도 수경 자신이 시간을 견디고 앞으로 나가는 동안의 마음을 알 수 없을 것이다. 그러니 수경의 다짐을 응원하면서도 속상한 마음을 감추기가 어렵다.


스스로 일어서는 것. 상처를 지닌 채로 걸어가는 것. 다시 사회에 뛰어들어 생계와 보람을 위해 살아가는, 사회와 가족의 일원이 되는 것. 그러게 해보고 싶었다. (256쪽)


소설의 제목 ‘헬프 미 시스터’는 아마도 수경의 마음일지도 모른다. 소설 속 서비스 앱 ‘헬프 미 시스터’는 일을 구하는 이도 일을 의뢰하는 이도 모두 여자다. 수경은 엄마 여숙과 함께 택배 배송을 그만두고 이 앱에 등록하여 일을 시작한다. 여성이 사용하는 앱이므로 여성의 마음을 대면하고 도와주는 일이 많았다. 동성 연인과의 결혼식을 축제처럼 즐기고 참석하는 일, 제사 음식을 대신하는 자리에서 이제는 음식 하러 오지 않겠다고 말하는 일은 속이 뻥 뚫리는 기분이 들 정도였다. 그 외에도 다양한 의뢰가 많았고 수경과 여숙은 흔쾌히 즐겁게 일할 수 있었다. 


‘헬프 미 시스터’에서 요구사항은 다양하다. 그 모든 것의 핵심은 남편 우재의 말처럼 “나는 누군가 필요합니다”이다. 그 누군가가 절실히 필요함을 수경은 누구보다 잘 알았다. 반드시 여자여야만 하는 절박함을 말이다. 어쩌면 수많은 앱 가운데 이런 앱이 곧 등장할지도 모른다. 아니 이미 사용자가 있을지도. 그만큼 무서운 세상이라는 게 안타깝지만 한편으로는 마음 놓고 모든 걸 부탁할 수 있는 존재가 있다는 게 든든하다.


설 속 수경의 가족은 어려움에 처했지만 그것에 굴복하지 않는다. ‘헬프 미 시스터’처럼 서로가 돕는다. 그게 참 좋았다. 그러니까 유머와 격려를 잃지 않는 것. 끝없이 무겁게 빠져들 수도 있는 상황을 타개하는 힘을 키운다. 서로가 서로에게 구원이 될 수 있는 가족, 도움이 필요한 이들의 서툴지만 따뜻한 연대가 만들어내는 작은 변화가 불러온 기적. 이서수 작가의 특징이 아닐까 싶다.


그들 모두 이렇게 한마음으로 함께 있다는 것이 기적. 그들 모두 포기하지 않고 다시 해보기로 결심했다는 것이 기적. 그들 모두 웃고 있다는 것이 기적. 기적이라고 생각하면 정말로 모든 게 기적이 되는 건지도 모른다. (338쪽)


상처와 아픔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면서도 부정이 아닌 긍정을 선택하는 일. 어렵고 힘든 현실을 바꿀 수 있는 시작이 바로 그런 것이라고 말한다. 어쩌다 이런 세상이 되었나 하는 한탄은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아픈 마음을 공감하고 연대하며 나가는 일이 중요하다. 소설이 아닌 현실이 아름다운 기적으로 채워질지도 모른다는 기대를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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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고양이의 이름은 길다
이주혜 지음 / 창비 / 202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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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을 읽을 때 어느 순간 글에 나를 대입하고 있다는 걸 발견할 때가 있다. 소설이든 에세이든 상관없이 공감하기 때문이다. 인물이 처한 상황과 쉽게 바꿀 수 없는 환경을 경험했을 때 모든 이야기는 내 이야기가 된다. 소설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수도 있지만 그것에 가려 다른 것은 제대로 보지 못할 수도 있다. 물론 독자는 비평가가 아니기에 그저 작가가 원하는 바를 읽지 않아도 상관없다. 어쩌면 그게 더 나은 독서 일지도 모른다. 모든 책의 마지막에는 독자가 있으니까.


이주혜의 단편집 『그 고양이의 이름은 길다』를 읽으면서 여성 독자이기에 공감할 수 있는 부분이 많다. 같은 시대를 살아가는 여성의 입장에서 소설 속 인물이 놓인 어려움이 고스란히 내 것처럼 여겨졌기 때문이다. 이주혜는 장편소설 『자두』에서도 간병이라는 소재를 통해 그림자 노동의 현실을 보여주고 돌봄의 주체인 여성이 얼마나 부당한 대우를 받고 있는지 여전히 차별적인 여성의 지위에 대해 들려준다. 첫 단편집에서 수록된 9편의 단편에서도 여성의 삶을 다룬다.


가족 안에서 딸, 아내, 어머니라는 자격을 부여받은 여성의 위치와 감당해야 하는 역할은 여전히 불편하다. 세 자매가 아버지의 사십구재를 치르고 모인 「오늘의 할 일」에서 자매는 저마다의 방식으로 아버지를 기억한다. 그 기억은 세 딸을 둔 아버지가 밖에서 낳아 온 아들로 이어진다. 어린 동생을 향한 자매의 감정을 충분히 알 것 같은 건 오빠를 두고고 아들 하나를 더 낳기 위해 딸 셋을 낳은 엄마가 생각나서다. 엄마는 내 밑으로 남동생을 낳았다. 우리 자매에게도 남동생을 돌봄과 동시에 미움의 대상이었다. 아들만 대우를 받았던 시대는 지났지만 많은 여성이 그 상처와 함께 살아간다. 


여성은 결혼과 동시에 엄마 되기를 강요받는다. 「아무도 없는 집」에서 해부학자 ‘녕’과 결혼한 산부인과 의사 ‘규’도 다르지 않다. 산부인과 의사이기에 낙태를 선택할 수 없었다. ‘규’는‘원’을 출산 후 엄마라는 자신의 존재와 역할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집을 떠나 아프리카 난민 봉사활동에 전념한다. 친정엄마가 있었기에 가능했을지도 모른다. 열여섯 ‘원’이 스스로 목숨을 끊어버렸을 때에도 곁에 없었다. ‘원’의 죽음을 두고 ‘녕’이 ‘규’를 비난하는 건 옳은 것일까. 누가 엄마의 역할을 규정할 수 있는가. 


「우리가 파주에 가면 꼭 날이 흐리지」에서 한 번 더 묻는 질문이다. 코로나19 바이러스가 시작된 시점, 아이들을 통해 맺어진 세 엄마의 우정이 흔들리는 과정을 통해 엄마란 무엇인가 생각한다. ‘나’,‘수라 언니’,‘미예’는 엄마라는 이유로 친해졌다. 기혼 여성이 학부모로 만나 이어지는 유대관계는 친밀 그 이상을 지닌다. 셋 역시 그러했다. 팬데믹의 상황에 아버지가 돌아가신 미예를 위로하는 자리가 코로나 확진으로 이어졌다. ‘수라 언니’의 확진으로 밀접 접촉자인 나’와 ‘미예’는 물론 가족까지 검사를 받는다. 가족 일부가 확진되고 치료를 위해 생활치료센터로 떠나거나 자가 격리를 한다. 코로나 확진의 모든 책임은 엄마에게도 쏟아진다. 아이를 키우는 고충에 대해 알지도 못하는 이들에게 ‘맘충’이나 ‘유한부인’이라 비난을 받아야 했다. 3년 차인 현재 그건 어쩔 수 없는 상황이고, 누구나 걸릴 수 있다는 걸 알지만 3년 전으로 돌아가면 사회 전반의 시선이 소설과 다르지 않다.


무엇이 자꾸 우리를 겁쟁이로 만들까? 우릴 자꾸 고립시키고, 왜 저러고 사나 싶게 만들고, 경멸하기 좋은 얼굴로 변모시키고, 끊임없는 자기 증명의 압박을 가하는 이 병의 이름은 무엇일까? 우리는 언제부터 재난의 한복판에서 천근만근이 되어버린 아이를 업고 달리는 (그러나 달리지 못하는) 꿈을 반복해서 꾸는 걸까? 이 바이러스의 진짜 이름은 무엇일까? ( 「우리가 파주에 가면 꼭 날이 흐리지」, 120~121쪽)


우리 사회에서 여성은 엄마의 역할뿐 아니라 가장의 역할도 맡았다. 표제작인 「그 고양이의 이름은 길다」 속 주인공 ‘은정’이 그러했다. 자궁 적출을 위한 수술대 위에 오른 몸에서 유체이탈한 영혼이 지난 삶을 돌아보는 이야기는 쓸쓸하다. 결혼하지 않은 않고 일하는 여성을 향한 온간 소문과 추문은 한결같다는 게 창피할 정도다. 


이주혜가 보여준 소설 속 인물은 허구가 아니다. 우리 주변에 실재하기에 생생하게 담을 수 있었다. 그런 의미에서 새로운 엄마와 다양한 가족 형태에 대해 제시하는 「봄의 왈츠」는 가까운 미래에 만날 수 있을 것 같아 반갑다. 봄이 여자친구인 ‘나’에게 세 명의 엄마를 소개한다. 혼자 봄이를 낳은 ‘선남’, 선남의 오랜 친구 ‘리온’, 리온의 연인 ‘미호’는 모두 봄의 엄마다. 그들은 각자 딸이라는 이유로 제대로 된 사랑을 받지 못했고 무시와 학대를 받았다. 선남, 리온 , 미호는 봄의 가족으로 자신이 잘 하는 일로 봄을 돌보며 봄의 엄마가 된다.


사랑하는 사람이 사랑하는 사람을 보고 싶어한, 사랑하는 사람이 사랑하는 사람들. 오래전 한 어린 사람을 이 세상에 환대해주어 내가 사랑할 수 있게 해준 여자들을 만나서, 내가 오히려 고마웠다는 말은 하지 못했다. 다만 봄을 한번 와락 안아주었다. (「봄의 왈츠」, 243쪽)


「그 시계는 밤새 한번 윙크한다」 속 ‘나’와 ‘온’과 ‘율’도 다르지 않다. 이혼한 ‘나’가 딸인 ‘율’에게 미처 챙기지 못하고 알려주지 못하는 부분을 나의 친구인 ‘온’이 채워준다. 과거 ‘나’와 ‘온’이 각자의 엄마에게서 받지 못하 애정과 사랑을 ‘율’에게 전하는 것이다. 그리고 엄마가 되어서야 자신이 알지 못한 엄마의 상실과 외로움을 알게 된다. 


이주혜의 단편집은 여성의 이야기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엄마나 아내가 아닌 여성으로 사는 일은 결국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의 이야기다. 여성이든 남성이든 상관없이 우리 사회에 필요한 따뜻한 배려와 연대에 대해 말한다. 다양한 가족 형태, 과거의 상처를 안아줄 수 있는 다정한 시선, 나가 아닌 우리가 살아가야 할 미래에 대한 구체적인 대안이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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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어가 제철 트리플 14
안윤 지음 / 자음과모음 / 202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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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여 있는 슬픔을 덜어낼 수 있는 가장 큰 그릇은 존재할까. 아무리 찾아도 찾을 수 없을 것이다. 그저 그 슬픔이 다 마르거나 증발해버려서 덜어낼 필요가 없는 순간을 기다리는 일이 현명하다. 애도도 마찬가지다. 정해진 시간은 없다. 일정 기간이 지났다고 해서 상실과 애도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게 아니다. 그것들과 함께 살아갈 뿐이다. 처음 만나는 작가 안윤의 『방어가 제철』 은 그런 애도의 기록이다. 그래서 수록된 세 편의 소설에 등장하는 죽음은 낯설지 않다. 


우리 생에는 발작처럼 대응할 수 없는 죽음이 찾아온다. 사랑하는 이의 죽음은 후회를 몰고 온다. 뭔가 나의 잘못으로 기인한 일이 아닐까 싶은 마음과 상대를 향한 애정이 부족했다는 안타까움에 책망의 시간이 시작된다. 화자가 ‘소애’의 생일상을 차리는 장면을 천천히 묘사하면서 그 모든 과정을 ‘은주’ 언니에게 들려주는 형식의 「달밤」 속에서 그녀의 부재를 직감할 수 있다. ‘소애’의 생일과 ‘은주’의 기일이 같은 날이라는 게 애석하지만 누군가 죽는 날 누군가 태어나는 게 삶이라는 자명한 사실이다. ‘은주’의 장례식장에서 돌아와 화자가 수첩에 쓴 것처럼 결국 남겨진 이들의 몫은 살아가는 일이다.


살아 있는, 살아 있으니 살아. 살아서 기억해. 네 몫의 삶이 실은 다른 삶의 여분이라는 걸 똑똑히 기억해. 그렇다고 너무 아끼지도 말고 너무 아까워도 말고, 살아 있는 나를 아끼지 말고 살아. (「달밤」, 30쪽)


알고 있지만 나를 아끼지 말고 살아가는 게 불가항력으로 다가올 때가 있다. 오빠의 친구인 ‘정오’를 만나는 장면으로 시작하는 「방어가 제철」 속 ‘나’가 그러하다. 미대에 가고 싶어 하던 나를 위해, 학원비를 마련하기 위해 대학에 들어간 오빠가 아르바이트를 하던 공사 현장에서 사고를 당했기 때문이다. 삼십 대가 된 ‘나’는 지병으로 돌아가신 엄마의 반찬가게를 하고 있다. 오랫동안 연락이 끊겼던 ‘정오’는 엄마의 죽음을 통해 재회했다. 그리고 방어가 제철인 계절에 둘은 만난다. 오빠 ‘재영’과 ‘정오’, 화자까지 셋이서 하나처럼 지냈던 시절, 이제는 남은 둘이 의식처럼 ‘재영’을 기억한다. 그러나 시시콜콜 일상을 나누면서도 ‘재영’을 언급하는 일은 없다. 서로를 통해 ‘재영’의 부재를 확인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어쩌면 것을 모른 척 위장하며 살아가는지도 모른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나는 더는 내게 묻지 않는다. 언제부터 묻지 않게 되었는지조차 묻지 않는다. (「방어가 제철」, 70쪽)


「달밤」과 「방어가 제철」이 가까운 이를 애도하는 기록이라면 「만화경」은 우리 주변의 고독사에 대한 애도라 할 수 있다. 이혼 후 한 빌라의 세입자로 들어온 ‘나경’은 집주인 ‘숙분’ 때문에 불편하다. ‘나경’의 일거수일투족을 관찰하기 때문이다. 이상한 할머니라 여기고 거리를 두었는데 ‘숙분’의 친구 ‘단심’이 빌라로 이사를 오면서 오해가 풀렸다. ‘나경’이 살던 집의 전 세입자가 혼자 외롭게 생을 마감한 일이 있어 ‘숙분’이 그렇게 살폈던 것이다. ‘미리내’란 이름을 알게 된 후 그녀를 애도한다. 


나와는 전혀 상관없다고 여겼던 사람의 죽음과 그 이름을 알게 되었을 때 일상에서 스치듯 그 이름과 마주했을 때 그 이름이 갖는 슬픔까지 마주할 수밖에 없다. 알게 된 이상 그 이전으로 돌이킬 수 없는 것이다. 그것은 우리가 불행한 사고로 안타깝게 세상을 떠난 모든 이들을 애도하는 방식이다. 소설은 우리를 그 죽음을 기억해야 한다고 말한다. 차오르는 분노와 함께 신당역 역무원의 죽음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우리는 소설에 등장하는 화자처럼 저마다 담담하면서도 차분하게 일상을 살아가면서 죽음을 기억하고 애도하며 살아가려고 애쓴다. 때로는 그리움에 울부짖고 때로는 부정하며 곁에 있는 것처럼 행동하고 생활한다. 특정한 물건을 볼 때, 맛있는 음식을 먹을 때, 선명하게 확보된 부재에 절망한다. 하나같이 차분한 안윤의 소설은 에세이까지 한결같다. 나는 소설보다 에세이에 마음이 기운다. 애도는 구멍이 뚫린 가슴으로 살아가는 일이다. 걷잡을 수 없이 점점 커지는 구멍을 그저 내버려 두는 일인지도 모른다. 한없이 쓸쓸하고도 다정한 애도가 나를 떠난 이들의 이름을 불러온다.


당신에게는 더는 대답을 들을 수 없는 이름들이 있다. 서서히 멀어졌거나 뒤돌아 떠났거나, 결코 돌아올 수 없는 이름들. 대답을 들을 수 없다고 부르지 않는 것은 아니다. 당신은 자주 그 이름들을 부른다. 묵독을 할 때처럼, 자신도 모르게 감탄사를 내뱉을 때처럼 호명한다. 그 이름들은 아무런 대답이 없지만 당신은 선명하게 듣는다. 고유한 말투, 희미한 미소, 가만가만히 고갯짓을 본다. 때때로 그 이름들이 당신들의 일상에 출몰하기도 한다. (「없는 것들이 있는 자리」, 12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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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ni74 2022-09-23 19:21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한없이 쓸끌하고 다정한 애도가 나를 떠난 이들의 이름을 불러온다. ㅠㅠ 자목련님이 소개해주시는 책내용도 좋지만 자목련님이 쓰신 문장에 눈시울이 붉어지네요. 쓸쓸하고 다정한 이름들을 가끔 꺼내보고 쓰다듬으며 그렇게 사는거겠지요.

자목련 2022-09-25 15:39   좋아요 2 | URL
나도 어떤 이들에게 그런 이름이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미니 님, 맑고 빛나는 오후 보내세요^^*

그레이스 2022-09-24 08:4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방어회 맛있지...
하고 보다가, 다시 방어가 제철이란 제목에 쓸쓸함으로 다가오네요

자목련 2022-09-25 15:38   좋아요 2 | URL
전체적으로 쓸쓸한 소설이었는데 이상하게도 그 쓸쓸함이 좋았습니다.
그레이스 님, 맛있는 가을 이어가세요^^
 
고독한 얼굴
제임스 설터 지음, 서창렬 옮김 / 마음산책 / 202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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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만의 분명한 목표가 있는 사람을 행복하다. 삶 전반에 자신만이 아는 기쁨이 가득하기 때문이다. 타인의 시선에는 고통으로 점철된 삶으로 비칠지라도 상관없다. 나만의 기쁨을 누리고 그것을 채우는 일에 만족하고 집중할 수 있으니까. 누구도 그 삶을 온전히 이해할 수는 없다. 이해하려는 노력을 하다가 지칠 게 뻔하다. 우리는 그가 아니고 그도 자신의 삶에 대해 설명하거나 이해받기를 원하지 않기 때문이다. 제임스 설터의 장편소설 『고독한 얼굴』의 주인공 ‘랜드’도 다르지 않았다. 그저 자신이 원하는 삶을 향해 나갈 뿐이다. 그에게 삶은 그런 것이다. 랜드에게 산을 오르는 일, 고산 등반은 그 자체가 삶이었다. 어떻게 등반을 시작했고 무엇 때문에 산에 매료되었는지 소설은 자세하게 설명하지 않는다. 


그저 오르는 일에 기쁨을 두는 것일까. 아니다. 랜드의 욕망은 산 정상을 오르는 정복에 있다. 그렇지 않고서야 프랑스의 알프스 ‘샤모니’의 드뤼까지 죽음의 여정을 시도할 필요가 없다. 그곳에서 친구 캐벗과 드뤼 서벽을 오르는 과정에서 등반에 대해 전혀 모르는 나는 너무 두려웠고 조바심이 났다. 부상을 당한 캐벗이 죽을까 봐, 그런 친구를 홀로 남겨두고 랜드가 혼자 암벽을 끝낼까 무서웠다. 동시에 도대체 산악 등반에 성공했을 때 느끼는 감정이 무엇이길래 그것을 놓지 못하는 것일까, 궁금했다. 물론 소설을 다 읽고서 나는 끝내 알지 못했다. 솔직히 말하자면 알고 싶지 않았다. 랜드만의 기쁨은 그에게 속하는 것이니까.


물론 설터가 구사한 등반의 과정은 섬세하고 아름답다. 그가 그려낸 문장을 통해 나는 눈앞에 설경의 알프스를 오르는 두 남자를 상상할 수 있었다. 그런 면에서 등반 소설이라는 건,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어 느끼는 전율을 만끽하는 스포츠 정신을 알려주는 것은 아닌가 싶다. 어쩌면 삶이라는 건 알 수 없는 길을 찾아 등반하는 과정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동화될 수도 있다. 수없이 마주하는 돌방상황, 그때마다 달라지는 선택지와 그에 따른 책임들. 소설 속 ‘산’처럼 우리도 저마다의 ‘산’에 대해 알아야 한다는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 


산악인은 산을 알아야 한다. 속도와 판단은 필수적이다. 계속 오르든 하산하든 고전적인 결정은 언제나 같다. 계속 오르는 것이 더 쉬운 때가, 사실상 정상에 이르는 것이 유일한 출구인 때가 온다. 그 순간에도 여전히 힘이 있어야 한다. (93쪽)


등반 과정 중에는 산이 무엇도 허락하지 않는 가장 어렵고 힘든 피치가 있다. 그 지점에서 산은 조그만 움직임도, 아주 작은 희망도 허락하지 않는다. 머리카락 한 올보다도 가는 선 하나만 있을 뿐인 그곳을 어떻게든 넘어가야 하는 것이다. (109쪽)


랜드가 드뤼에서 고립된 조난자를 구조한 후에는 그 기쁨은 걷잡을 수 없이 커졌다. 언론이 주목은 물론이고 산악계에서 새로운 영웅이 탄생한 것이다. 그러나 랜드는 자신이 무엇을 했고 무엇을 할 것인지 세상이 알기를 원하지 않았다. 그는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혼자만의 길을 원했다. 스스로 고독을 자처한 젊은 청년은 삶을 사랑한다고 말하지만 도무지 잘 모르겠다. 그러기엔 뭔가 부족하다. 랜드에게 산이 왜 유일한지 와닿지 않는다. 거기 산이 있어 오른다는 진부한 설명보다는 절실한 무언가가 느껴지지 않는다. 랜드가 어떤 사람인지, 그의 지난 삶이 어떠했는지 소설을 통해서는 명확하게 알 수 없다. 대학에 실패하고 군대에서도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한 쓸쓸한 낙오자 정도로 짐작할 뿐이다.


정착하는 대신 떠돌이처럼 유랑의 삶을 즐기는 방랑자란 표현을 쓸 수도 있다. 그것은 무책임의 다른 말이다. 그가 만나고 관계를 맺은 후 떠나버린 여자들은 마치 하나의 소모품처럼 여겨진다. 왜 떠나야 하는지 그가 산으로 향하는 맹목적인 이유에 대해 단 한 번도 상대에게 진심을 다해 설명하거나 설득하지 않는다. 랜드와 마찬가지로 소설 속 랜드가 만나는 등반가들도 비슷하다. 때문에 산은 거대한 남성성을 상징하고 하나의 안전한 도피처로 여겨진다. 물론 도피처에는 위안, 위로, 안식, 휴식의 뜻이 있다. 삶에 지친 현대인들이 산을 찾는 이유처럼 소설 속 랜드도 그 안에서 편안하고 자유로웠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등반을 통해 나는 경험할 수 없는 다양한 감정과 마주했을지도 모른다.


랜드를 변화시킨 것은 고독뿐만이 아니었다. 또 다른 깨달음도 그를 변화시켰다. 중요한 것은 존재의 일부가 되는 것이지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는 깨달음이었다. 그는 여전히 위험한 등반의 고통을 잘 알고 있었는데, 다른 식으로도 그걸 알게 되었다. 그것은 경의였다. 그는 기꺼이 등반에 경의를 표했다. 은밀한 기쁨이 그를 채웠다. 누구도 질투하지 않았다. 거만하지도 수줍어하지도 않았다. (174쪽)


『고독한 얼굴』 은 제임스 설터가 실존 인물인 한 산악인에 대해 조사하고 자료를 찾아 읽은 후 완성한 소설이다. 때문에 등반의 고통과 기쁨을 아는 이들에게는 하나의 고전이나 교과서처럼 생각할지도 모른다. 생생하게 전달되는 등반 과정과 산을 오르는 동안 랜드의 심적 변화에 공감하며 함께 산을 타는 기분을 느낄 수도 있다. 그러나 자연을 대하는 숙엄한 분위기나 경건한 태도는 찾을 수 없어 아쉽다. 인간이 지닌 절대적 고독을 랜드를 통해 보여주려는 설터의 의도는 충분히 알겠지만 아름다운 울림으로 기억하기엔 그 파동이 너무 짧고 약하다. 


그럼에도 랜드의 고독과 산을 올랐을 때 그가 맛본 기쁨은 인정한다. 우리가 저마다 삶을 사랑하는 것처럼 랜드는 산을 사랑하는 게 아니라 자신의 삶을 사랑했다. 삶이라는 게 항상 산의 정상인 꼭대기에 있는 게 아니라는 걸 그도 느꼈을 것이다. 삶과 고독은 어디에나 있다. 산의 초입에도 산의 중반에도 산의 꼭대기에서 내려오는 길에도 그 산을 바라보는 지점에도. 누구나 자신만이 아는 고독과 기쁨이 있으니까. 랜드는 그것을 혼자만 간직하려 했고 설터는 함께 나누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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