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이 폴리스맨
베선 로버츠 지음, 민은영 옮김 / 엘리 / 2022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서로가 사랑하는 걸 숨겨야 한다면 그 사랑은 빛이 없는 그림자에 불과할 것이다. 그림자여도 상관없다면 둘 사이의 사랑은 빛으로 충만하다. 누가 뭐라든 내가 당신을 사랑하고 당신이 나를 사랑하면 그것으로 충분하니까. 그가 존재한다는 사실로도 하루하루 기쁘고 떨리는 삶 그 자체가 된다. 하지만 사랑에 빠지는 순간 내 사랑을 자랑하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여기 이 아름다운 사람이 나의 연인이라고 말이다. 그 숨 막히는 떨림을 감추고 심지어 연인을 누군가와 공유해야 어떨까. 성인이 된 자식을 떼어놓지 못하는 홀어머니와의 삼각관계가 아니라 내가 아닌 다른 연인과 사랑을 나누어야 한다면 그게 가능할까.


베선 로버츠의 장편소설 『마이 폴리스맨』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상황에 놓인 세 사람의 이야기다. 톰을 사랑하는 아내 매리언과 톰의 연인 패트릭의 묘하고도 위태로운 사랑과 파국에 관한 소설이라고 하면 맞을까. 어쩌다 그들은 그리되었을까. 어디서부터 잘못되었을까. 


소설은 1999년 현재 피스헤이븐에 살고 있는 매리언이 패트릭 한 사람을 특정한 일종의 고백이라는 글로 시작된다. 패트릭은 누구인지 알 수 없다. 두 번의 뇌졸중으로 생의 끝자락에 있는 남자다. 돌봄이 필요한 환자를 무시하고 방치하는 톰의 태도로 메리언의 시아버지일까 짐작했다. 그러나 매리언이 친구 실비의 오빠인 톰과 만나고 사귀는 과정을 시간순으로 천천히 묘사하면서 패트릭은 아버지가 아니라는 걸 알았다. 그러니까 패트릭은 톰의 연인이었다. 톰과 사귀면서 소개받은 학예사, 음악과 미술뿐 아니라 예술적 조예가 깊은 사람이다. 


매리언이 서술하는 톰에 대한 부분은 형언할 수 없을 정도로 순수하고 아름답다. 첫사랑에 빠졌던 어린 소녀가 스무 살 선생님이 되어 만난 경찰관 톰. 수영을 배우는 걸 계기로 주말마다 톰과 시간을 보내는 매리언은 달콤하고도 은밀하다. 톰의 사랑을 수 확신할 수 없지만 톰이 모든 것을 자신에게 말하고 나누는 것으로 사랑이라 느꼈다. 패트릭을 친구가 소개하는 톰의 눈빛은 거짓이 없어 보였다.


패트릭이 등장하면서 소설은 1957년 해변도시 브라이턴의 패트릭 일기로 이어진다. 경찰인 톰과 패트릭이 처음 만난 날, 패트릭도 첫눈에 톰에게 반했다. 톰을 향한 끌림을 멈출 수 없었다. 어떻게 해서든 그와 연결되기를 원했다. 그림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고 자연스럽게 모델이 되어 달라고 부탁했다. 지적 호기심이 많았던 톰은 흔쾌히 수락했다. 패트릭의 아파트에서 톰은 자신도 패트릭과 같은 성향의 사람이라는 걸 알았다. 그러나 1950년대 영국에서 동성애는 죄로 분류되었다.


소설은 1999년과 1957년을 오가며 매리언과 패트릭의 시선으로 사랑하는 톰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사회적인 위치나 경제적으로 자유로운 패트릭에 비해 톰은 그들의 사랑이 세상에 알려질까 두렵다. 매리언에게 패트릭을 소개한 후 셋은 자주 시간을 보내지만 그가 사랑하는 건 패트릭이었다. 패트릭과의 사랑을 위해 톰은 매리언과 결혼을 선택한다. 일종의 사회적 위장인 셈이다. 바라고 바라던 톰과의 결혼, 매리언은 행복한 미래를 꿈꾼다. 결혼식에서 둘이 맞춤양복을 입고 신혼여행 중 일부는 패트릭과 함께 보내도 문제가 되지 않았다. 패트릭은 좋은 친구였고 톰과 매리언보다 어른이었으니까. 사랑에 서툴다는 톰의 고백도 감미로웠다. 톰을 사랑하는 일에 패트릭도 포함된 거라는 걸 알지 못했다.


그러나 둘 사이에 흐르는 사랑의 기류를 매리언이 포착하고 말았다. 부정할 수 없는 진실 앞에 매리언은 무너졌다. 그가 바라보고 마주한 건 톰의 외부에 불과했다. 끝내 열리지 않을 문을 바라보며 하염없이 기다리는 사람이었다. 패트릭의 베네치아 출장에 톰이 동행하면서 매리언의 배신과 절망은 폭발했다. 패트릭의 상사에게 익명의 고발 편지를 보낸 것이다. 그저 패트릭만 톰에게서 멀어지면 괜찮아질 거라 여겼다. 패트릭의 성향이 세상에 공개되는 순간 톰도 안전하지 못하다는 걸 계산하지 못했다. 패트릭만 없다면 새롭게 시작할 수 있다고 믿었다. 사랑이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는 걸 매리언은 몰랐던 것이다.


패트릭은 모든 걸 인정할 수 있었지만 톰은 자신을 향한 비난의 화살이 두려웠다. 경찰관을 사직하고 경비 일을 택했다. 그 일로 패트릭은 감옥에 가고 톰과는 돌이킬 수 없는 사이가 되었다. 톰은 매리언에게 벽과 같은 존재였다. 공식적으로 결혼생활을 유지했지만 톰과 매리언의 시간은 고통으로 채워졌다. 그리고 40여 년이 흐른 현재 매리언이 패트릭을 찾은 것이다. 혼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패트릭을 집으로 데려와 돌보는 매리언의 마음은 무엇일까. 톰의 곁에 있는 건 자신이라고 보여주고 싶었던 걸까. 서로를 사랑했을 뿐인데 그 사랑이 서로에게 비수가 되었다. 톰을 온전히 소유하고 싶었던 매리언의 잘못일까, 욕망을 다스리지 못하고 톰에게 직진한 패트릭의 잘못일까. 사회적 시선을 감당하지 못하고 도망친 톰의 잘못일까. 그 누구의 잘못도 아니라는 걸 안다. 


패트릭, 이 모든 얘기를 털어놓는 건 나와 톰 사이가 어땠는지 알려주기 위해서다. 우리 사이에 고통만이 아니라 다정함도 있었다는 걸 당신이 알도록. 우리 둘 다 실패했지만 우리 둘 다 노력했다는 걸 알도록. (321쪽)


어쩌면 매리언이 패트릭에게 알려주고 싶었던 건 그가 모르는 둘 사이의 시간이었을지도 모른다. 매리언과 톰이 함께 보낸 작고 소소한 일상의 기쁨과 즐거움. 완벽할 거라 믿었던 기대가 무너져 내린 순간까지, 오직 매리언만이 볼 수 있었던 톰의 몸짓과 표정 같은 것들 말이다.


그런 면에서 매리언의 글과 패트릭의 일기에 등장하는 톰은 눈부시고 아름다운 존재다. 순수하면서도 지적이고 탄탄하고 매끄러운 몸매를 지닌 매력적인 사람이다. 톰으로 인해 매리언과 패트릭의 삶은 환희와 감동으로 가득했다. 그러나 톰의 이야기는 들을 수 없기에 매리언이 데려온 패트릭을 보고 그가 느꼈을 감정이 무엇인지 그의 내면을 채운 사랑이 어떠했는지 알 수 없다. 


우리의 터무니없고 맹목적이고 순진하고 용감하고 낭만적인 갈망이 우리를 하나로 묶은 것 같다. 우리 둘 다 실패를 온전히 받아들이지 못했다고 나는 생각하니까. 텔레비전에서 맨날 나오는 그 말이 뭐였더라? 그래도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우리 둘 다 그걸 해내지 못했다. (485쪽)


여전히 패트릭과 매리언 사이에 그가 있을 뿐이다. 톰을 향한 자신과 패트릭의 사랑과 실패를 인정하는 매리언의 글에서 쓸쓸함과 서글픔이 묻어난다. 한 사람을 사랑한다는 이유로, 평생 동안 그 사랑을 짊어지고 살아야 했던 매리언과 패트릭.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다고 말하는 노랫말 따위는 들이댈 수 없는 사랑이다. 쓰라린 상처와 고통을 고스란히 감당하고야 마는 그런 사랑이다. 


*베선 로버츠는 영국 소설가 E.M. 포스터(1879~1970)의 연인이었던 경찰관 밥 버킹엄과 그의 아내 메이 버킹엄의 이야기에 영감을 얻어 소설을 썼다고 한다. 곧 영화로 개봉된다고 하니 그들의 사랑을 어떻게 그려냈을지 궁금하다.



댓글(12) 먼댓글(0) 좋아요(3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022-10-18 11:1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2-10-18 14:14   URL
비밀 댓글입니다.

blanca 2022-10-18 12:5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안 그래도 이 책 궁금했어요. 모델이 포스터였군요. 그가 동성애자인 건 알고 있었는데 결혼했었다는 건 몰랐어요. 잘 읽고 갑니다. 영화 꼭 봐야겠어요.

자목련 2022-10-18 14:17   좋아요 1 | URL
소설도 아름답지만 영화로 보면 더 좋을 것 같습니다. 아, E.M. 포스터가 결혼 한 건 아니고요. 결혼은 그의 애인이 했다고 합니다. 소설 속 톰이 매리언과 결혼한 것처럼요.

서니데이 2022-11-09 15: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달의 당선작 축하합니다.
따뜻한 하루 보내세요.^^

자목련 2022-11-10 09:33   좋아요 1 | URL
서니데이 님, 감사합니다. 건강한 하루 이어가세요^^

거리의화가 2022-11-09 15: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자목련님 이달의상 축하드려요^^
제가 직접 고르지 못할 작품들을 항상 자목련님 덕분에 대리만족하게 되는 것 같아요^^ 고맙습니다.

자목련 2022-11-10 09:35   좋아요 0 | URL
거리의화가 님, 감사드리며 저도 축하드립니다.
편협한 책읽기에 대리만족이라니요. 덕분에 신나는 아침입니다. ㅎ

thkang1001 2022-11-09 18: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자목련님! 이달의 당선작 선정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행복한 한 주 되시길 바랍니다.

자목련 2022-11-10 09:35   좋아요 0 | URL
항상 응원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따뜻하고 평온한 하루 이어가세요^^

강나루 2022-11-10 04: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자목련님, 이달의 당선작 서정을 축하드려요.
행복한 하루 보내세요.

자목련 2022-11-10 09:35   좋아요 1 | URL
강나루 님, 저도 축하드립니다. 좋은 하루 보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