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지 못한 몸으로 잠이 들었다
김미월 외 지음 / 다람 / 202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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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로 태어나고 존재하지만 어느 순간 나는 사라지고 나를 부르는 이름, 사회적 위치와 역할에 충실하게 된다. 아이였을 때에도 학생이었을 때에도 나는 조금씩 사라지고 만다. 그러다 사회인이 되고 결혼이라고 하게 되면 누군의 남편, 아내, 아빠, 엄마, 며느리, 사위로 완전히 변한다. 자의가 아닌 타의 혹은 강제적으로 말이다. 누군가 선택했으니 그만큼의 책임이 따른다고 할지도 모른다. 여성의 경우 아이를 낳으면 모성애까지 부여된다. 그러나 모성애는 준비땅 하면 바로 완성되는 게 아니다. 그러니 출산과 양육에 대해 함부로 말할 수 없고 관여할 수도 없다. 구체적인 도움이 무엇일까 고민하고 그에 맞는 도움을 주기까지, 사회적으로 제도를 마련하기 전까지는 말이다. 

일하는 여성에게 육아는 이전과는 다른 생의 최고 어려움이다. 조력자가 있다 하더라도 마찬가지다. 엄마라는 역할을 어떻게 해나가야 하는지 알 수 없다. 정확한 방법, 노하우는 존재하지 않는다. 교과서나 선배가 있더라도 아이는 저마다 기질이 다르고 양육 환경도 다르니까. 그저 누군가 아이를 키우고 돌보는 경험을 하고 있다는 사실만으로 정신적 위안을 준다. 맘 카페의 위력을 설명하지 않아도 알 것이다. 


여기 글을 쓰는 직업으로 삼은 엄마들의 이야기 『쓰지 못한 몸으로 잠이 들었다』는 전업주부 혹은 일을 하는 엄마들에게 공감을 얻을 수도 있고 반대일 수도 있다. 왜냐하면 양육과 일을 하는 건 같지만 글을 쓰는 일의 어려움은 일하는 엄마의 그것과는 조금 다른 성질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책은 엄마라는 공통분모를 지닌 모두에게 공통적인 고충에는 고개를 끄덕이고 나도 그랬어 하고 말을 덧붙이고 지금 그 과정에 있는 여성에게 일종의 동지애를 전할 것이다. 그에 반해 글 쓰는 일이 아닌 다른 직업의 엄마에게는 다른 일에 대한 이해 정도가 되지 않을까 싶다. 물론 독자에게는 좋아하는 작가의 근황이나 한동안 작품을 발표하지 않았던 이유가 출산과 양육이었다는 걸 알게 되는 시간이다.


김미월, 김이설, 백은선, 안미옥, 이근화, 조혜은 여섯 여성 작가는 모두 엄마이며 글을 쓰는 작가다. 엄마와 작가로 살아가는 이야기는 아이에 대한 미안함과 글쓰기에 대한 절박함과 작가란 정체성의 고민과 삶에 대한 이야기는 때로 눈물겹고 때로 가슴이 저리고 때로 답답하다. 이혼을 하고 혼자 아들을 키우는 백은선은 닥치는 대로 글을 쓰고 시인이지만 학교에서 학생을 가르친다. 시를 쓰는 것만으로는 생활을 유지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에게 아들은 전부다. 그러니 글에서도 밝힌 것처럼 좋은 엄마여야 하고 좋은 엄마로 보여야 한다. 왜냐면 아이의 아빠에게 양육권을 빼앗기면 안 되니까. 


나는 지금 잠든 아이 곁을 몰래 빠져나와 책상에 앉아 이 글을 쓰고 있다. 어두운 새벽에 혼자 깨어 있는 이런 시간이 없다면 낮 시간을 견딜 수 없을 것이다. 어떤 관계에서든 함께 있기 위해서는 홀로인 시간이 반드시 필요하다. (백은선, 15쪽)





누군가 그럴지도 모른다. 그럼 글이 아닌 다른 일을 선택하라고 말이다. 쓰는 일이 아닌 다른 직업을 찾으라고. 어느 작가 가족에게 아직도 소설을 쓰냐는 질문을 받는다는 글을 읽은 기억이 있다. 당시에도 유명한 작가였고 지금도 그러하다. 글을 쓰는 일은 돈벌이도 안 되고 살림과 육아를 잘 하면 그만이라는 숨겨진 의미를 독자인 나도 알 수 있었다. 그만큼 글은(문학포함 모든 예술) 엄마보다 우위 할 수 없는 일로 치부되었다. 


글을 쓰는 사람이 아니기에 나는 작가들의 마음과 고뇌를 알 수 없다. 그러나 이 책을 통해 전해지는 그 간절함에는 조금 다가갈 수 있었다. 아이를 낳고 아이에게 최선을 다하려 노력하면서도 소설 쓰는 일에 대한 갈망은 당연하다. 그 과정에서 순간순간 엄마로의 역할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게 아니가 수없이 자책하는 마음, 당사자가 아니면 아무도 모른다. 어떻게든 소설을 쓰고 싶어서 주말마다 서울에서 친정인 춘천으로 갔다는 김미월 작가, 아이를 낳고 키우면서 느끼는 감정들을 솔직하고 담담하게 전하며 그로 인한 기쁨과 함께 시를 쓸 시간이 나지 않지만 아이로 인해 배우고 성장하고 있다는 안미옥 시인.


아이가 잠들기만을 기다리며 그 이후의 시간에 무엇 쓸지 차곡차곡 새겨 넣다가 아이와 함께 잠들고 속상해하는 마음, 한 손에 아이를 안고 한 손으로 자판을 두드리는 일쯤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그들의 모습을 상상하는 일은 어렵지 않다. 아이가 유아기를 지났다고 해서 수월할까. 그건 아니다. 엄마라면 모두 알 것이다. 어린이집에 가고 학교에 들어가고 새 학년을 맞을 때마다 챙겨야 할 것들은 늘어난다. 소설 쓰는 엄마를 둔 덕에 자신의 책장까지 침범하는 엄마의 책, 소설 쓰느라, 마감에 시달리느라 아이들에게 이해를 구했던 모든 것들이 미안한 김이설 작가. 그가 두 딸들에게 전하는 말은 세상의 모든 딸과 여성에게 건네는 말 같아 이 부분에서 한참을 머물렀다.


큰아이 희원아. “너는 네가 되렴.” 작은아이 효명아. “너도 네가 되렴.” 나도 이렇게 말하고 싶어진다. 김이설은 ‘김이설’이 되고, 김지연은 ‘김지연’이 되렴. (김이설, 114쪽)


엄마로의 삶과 글 쓰는 삶, 둘 중에 하나만 선택할 수 없다. 그 두 가지 모두 ‘나’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모두를 잘 해낼 수 있다는 건 아니다. 엄마로도 최선을 다하고 글 쓰는 이로도 최선을 다할 뿐이다. 그저 그들이 바라는 건 그 자신으로 살기를 바라봐 달라는 것, 어떤 강요도 어떤 책임도 전가하지 말라는 것이 아닐까 싶다. 사실 이 책에서 가장 오래 남은 저자는 바로 시인 조혜은이다. 


나는 엄마로서도 시인으로서도 자주 실패한 하루를 산다. (조혜은, 152쪽)


두 아이를 낳고 양육하며 시를 쓰는 시인. 조금이라도 엄마가 더 같이 있기를 원하는 아이들, 엄마와 시인이 아닌 아내 역할을 해주기를 원하는 남편. 솔직하게 자신의 하루 일과를 낱낱이 드러내며 쓴 글은 뽀족한 송곳이 되어 가슴에 박힌다. 시를 쓰는 삶을 꿈꾸며 문학 안에서 만난 이와 꾸린 가정에서 어떤 순간 어떻게 자신을 잃어버리는지 들려주는 그 글에서 나는 그와 함께 절망하며 한없이 무너지는 기분이다. 그럼에도 그는 계속 쓸 거라는 걸 알기에 나는 독자로 그를 응원하고 싶다. 그리고 그의 시를 찾아 더 자주 더 꼼꼼하게 읽어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유일한 사랑을 묻는 아이에게, 온전한 사랑을 바라는 아이에게 언젠가 말해주고 싶다. 모든 사랑은 불안을 껴앉고 사는 거라고, 불안하니까 서로를 꼭 껴안는 거라고. 오늘도 아이를 꼭 껴안은 가슴으로, 당신과 잡았던 손으로, 아프고 망가진 몸으로 쓴다. 나에게도 내가 필요해서, 나는 나를 데리고 가는 중이다. (조혜은, 185쪽)


어디 글 쓰는 엄마에게만 엄마로 사는 게 어려울까. 결코 아니라는 걸 안다. 쓰지 못한 몸으로 잠든 엄마들, 해야 할 일들을 하지 못하고 잠든 모든 엄마들, 나만을 위한 시간이 간절한 엄마들. 더 좋은 엄마가 되지 못해 자책하는 엄마들은 잠들어도 잠들지 못할 것이다. 엄마가 아닌 ‘나’로 살아가는 시간에 그들이 더 행복하면 좋겠다. ‘나’로 사는 일이 건강하고 행복해야 엄마로 살아가는 일도 가능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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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천천히 오래오래 소설, 잇다 1
백신애.최진영 지음 / 작가정신 / 202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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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시대를 쓰는 일은 어렵다. 그럼에도 그것은 필요하다. 문학의 역할 중 하나로 생각한다. 문학, 예술을 통해서 시대를 읽기 때문이다. 시간이 지나면 잊히고 마는 일들, 시의성 있는 소설로 우리는 기억하기도 한다. 그런 의미에서 작가정신의 ‘소설, 잇다’의 첫 번째 백신애, 최진영의 『우리는 천천히 오래오래』는 남다르게 다가온다. 이 시리즈는 근대 여성 작가의 소설을 현대 여성 작가가 이어 쓰는 형식을 지녔다. 근대와 현대라는 시대 차이를 생각하면 어떻게 이어 쓸까 의문이 들기도 한다. 그러나 백신애의 단편을 읽고 그런 의문은 사라졌다.


시대가 지나도 여전한 우리 사회의 문제(여성을 향한 차별적 시선, 폭력, 부당한 대우, 가부장제)는 근대를 지나 현대까지 이어지고 있었다. 그것은 서글픈 현실이다. 우선 백신애(1908~1939)가 쓴 세 편의 단편을 보자. 1938년 발표한 「광인수기」부터 「혼명에서」, 유작인 「아름다운 노을」까지 주인공 여성의 삶은 시대상을 반영하다. 


열일곱 살에 혼례를 치른 「광인수기」의 ‘나’의 남편은 일본으로 공부를 하러 떠났고 시누이와 시어머니와 살게 된다. 사사건건 트집을 잡는 그들에게 내쫓기는 신세가 되었다. 남편은 편지를 보내고 대학교를 그만두고 남편이 돌아오자 시댁으로 들어온다. 남편은 가정을 돌보지 않고 ‘주의자’에 빠져 맘 고생을 시키고 나중에는 바람까지 피우고 ‘나’를 정신병원에 가둔다. 어느 누구 자신의 말을 들어줄 이가 없는 ‘나’가 하느님께 고하는 독백 형식의 이야기. 


나를 영 사람으로 여기지 않더라. 내가 모두 팔자로 돌리고 좋으나 궂으나 좋다고만 하니까 아주 나를 바보로 아는 모양이지, 이 지경으로 만드는 것을 보면…… (「광인수기」, 17쪽)


당시에 이런 소설을 쓸 수 있었던 백신애가 대단하다. 어디 소설뿐이었을까. 모든 잘못은 아내의 탓으로 돌리는 일이 흔했던 시대. 그러니 이혼 후 돌아온 「혼명에서」 속 ‘나’의 어머니가 눈물을 흘리는 건 당연한 일 아니겠는가. 그런 어머니를 지켜보며 ‘나’는 아플 수밖에 없지 않을까. 이혼이 뭐 대수라고 말이다. 그런 ‘나’를 위로하고 앞으로 나갈 방향을 제시한 이가 있었으니 우연하게 만난 ‘S’였다. 운명처럼 세 번의 만남과 대화를 통해 ‘나’는 건강을 회복하고 먼 앞날을 검토하라며 다음 만남을 기약하고 일본으로 떠났다. 하지만 돌아온 건 ‘S’의 사망 소식이다. 소설에서 ‘나’와 ‘S’가 연애 감정을 지녔거나 호감을 표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둘 사이에 흐르는 감정은 분명 사랑이다. 


당신은 살아서 나에게 ‘힘’을 가르쳐주었으면 죽어서 나에게 희망을 가르쳐주었습니다. (「혼명에서」, 107쪽)


백신애의 단편 중 가장 아름답고 여운을 남긴 건 「아름다운 노을」이다. 남편이 죽고 아들 하나를 둔 삼십 대 여성 ‘순희’는 재혼을 해야만 했다. 시집의 대는 아들이 잇고 재혼으로 친정의 자산을 받기 위해서다. 의사인 재혼 상대는 순희의 마음에 들지 않지만 그 자리에서 그의 동생 ‘정규’를 본다. 자신이 원했던 이상향의 모습, 그림을 그리는 순희가 절실하게 원했던 모습이다. 집으로 돌아와 단숨에 화폭에 그릴 수 있는 얼굴. 단지 모델로 반한 거라고 다짐하지만 그게 아니었다. 순희를 향한 정규의 마음도 마찬가지였다. 둘 사이의 감정은 진정 사랑이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이뤄지는 건 불가능하다. 아들보다 세 살 많은 정규를 어찌 사랑하고 받아들일 수 있단 말인가. 


최진영이 이어 쓴 「우리는 천천히 오래오래」은 백신애의 「아름다운 노을」 변주한 소설이다. 이혼 후 십 대 딸을 키우는 사십 대 ‘순희’와 낮에는 공부를 하고 밤에는 아르바이트를 하는 이십 대 여성 ‘정규’의 이야기. 소설은 화자인 ‘나’ 정규의 불안으로 시작된다. 여자 혼자 일하는 공간에서 벌어질 수 있는 사건, 귀갓길의 위험, 데이트 폭력과 스토킹. 여성이 조심해야 할 문제가 아닌 범죄. 현재를 살아가는 여성이라면 누구나 공감할 불안. 그 안에서 사랑은 가능할까. 최진영은 순희와 정규를 통해 가능성을 제시한다. 


정규가 일하는 편의점에서 순희를 처음 만났다. 여학생 사진을 보여주며 본 적이 있냐고 묻는 순희에게 정규는 본 적이 있지만 없다고 말한다. 그 뒤 정규가 일하는 펍에서 순희를 다시 만난다. 자연스럽게 친해진 둘은 서로가 좋아하는 것들과 고민을 나눈다. 비 오는 날 달리기를 좋아하는 일, 퇴근하고 집이 아닌 다른 방향으로 걷는 일. 


따뜻한 바람이 우리 뺨을 어루만졌다. 천천히 다가갈 것이다. 오래오래 바라볼 것이다. 정성을 다해서 내 마음을 전할 것이다. 당신이 빗속을 달릴 때 나도 그 빗속에 있어요. 어딘가에서 나도 당신처럼 혼자 달리고 있어요. 홀로 달리고 있는 당신을 걱정하고 있어요. 심심하고 외로운 당신이 그 사실을 기억해주면 좋겠어요. ( 「우리는 천천히 오래오래」, 229쪽)


더 나은 쪽을 향하여 시대가 변한다고 믿는데 왜 여성에 대한 사회적 인식은 변하지 않는 것일까. 여성을 대상으로 한 범죄는 나날이 늘어나고 세상은 혐오와 증오가 가득하다. ‘소설, 잇다’에 참여하고 에세이 「절반의 가능성, 절반의 희망」에서 최진영이 “백 년을 사이에 두고 선생과 나는 같은 생각을 품고 소설을 쓰는 것만 같다. 여성을 비롯하여 소수자를 억압하는 가부장적 사회에 대한 분노와 공포”(240쪽)라고 말하는 이 사회가 참으로 갑갑하고 답답하다. 그러나 이 현실을 바꾸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이런 소설을 읽고 응원하고 함께 나가야 한다. 앞으로 여성이 살아갈 시대에는 이런 주제가 아닌 다른 이야기로 이어갈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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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리의화가 2023-01-06 09:4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근대 여성의 문학을 현대 여성 작가가 이어서 쓴 이야기라니 흥미가 생기네요. 자목련님 책 소개 감사합니다.

자목련 2023-01-06 10:02   좋아요 2 | URL
네, 풍성한 이야기와 생각을 안겨주는 책이었어요. 근대 여성 작가의 소설을 통해 그때의 실상도 마주하고요.

책읽는나무 2023-01-06 11:1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백신애 작가가 근대 여성작가였군요?
그래서 제목이 더 와 닿네요^^

자목련 2023-01-09 09:00   좋아요 2 | URL
말씀처럼 그래서 더 남다르게 다가오기도 했어요^^
 
랑과 나의 사막 현대문학 핀 시리즈 소설선 43
천선란 지음 / 현대문학 / 202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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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봇이 등장하는 소설은 익숙함을 떠나 그것들이 추구하는 게 무엇인지 알 수 있을 정도로 충분하게 많다. 인간을 도와주는 단순함을 넘어 인간의 마음을 헤아리고 감정을 나누는 존재의 역할 말이다. 어쩌면 미래의 로봇은 그 이상의 기능을 충분히 발휘하고도 남을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우리가 여전히 로봇을 기대하는 일은 유토피아의 미래가 아닌 디스토피아의 미래와 마주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천선란의 장편소설 『랑과 나의 사막』의 미래도 그러하다. 


황량한 사막으로 배경을 펼쳐진 로봇과 인간의 이야기. 정확하게 말하자면 죽은 인간을 향한 로봇의 애도라고 해야 맞겠다. 로봇 ‘고고’는 자신을 발견하고 함께 살았던 인간 ‘랑’의 죽음을 지켜본다. 고고와 함께 랑을 묻은 ‘지카’는 떠났다. 고고도 길을 나선다. 그곳은 랑이 원했던 곳이다. 과거로 갈 수 있다는 땅을 찾아 떠난다. 생명의 흔적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사막을 걸어가는 로봇 고고. 그리고 그가 만나는 사람들. 그들을 만나면서 랑과의 시간을 추억하고 그리워한다. 미래엔 분명 반려 로봇이 등장할 것이다. 내가 그 미래에 속할 것 같지 않지만 이런 소설을 읽을 때마다 그것에 대해 상상하곤 한다. 고고와 랑의 대화처럼 목적이 아닌 존재 자체의 의미를 찾는 시간을 보내게 될까. 


‘마음은 중요해.’

랑의 말에 나는 마음이 없다고 대답했고, 랑은 아니라고 고개를 저었다.

‘마음은 목적이야. 네 목적에 가장 빨리 닿으려고 애쓰는 게 마음이야.’

내게는 랑을 행복하게 해줘야 한다는 목적이 있다. 행복을 웃음과 편안함과 숙면 정도로만 추측할 수 있으면서 감히 그런 목적을 가지고 있다. (44쪽)


고고는 랑에 대해 더 많은 것을 알고 싶었다. 자신을 구한 랑, 랑이야말로 자신을 가장 완벽하게 아는 인간이라고 믿었는지도 모른다. 랑이 그토록 가고 싶었던 과거로 갈 수 있는 땅은 존재하는 것일까. 고고가 그곳을 바라는 건 그곳에서는 다시 랑을 만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고고에겐 랑을 만나는 일이 간절하다. 


사막에서 랑이 만난 이들은 저마다의 생각을 랑에게 전한다. 마치 세상의 모든 진리를 다 아는 것 같은 버진,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 수 없지만 푸른 스카프를 두르고 죽은 시체, 어디로 가는지 방향을 잃었지만 주인의 명령에 따라 길을 만드느라 트랙터에 몸을 부딪히는 로봇 알아이아이, 눈부신 황금빛 머리카락을 지닌 외계인 살리. 모두 처음 만나는 이들이지만 그들은 서로를 경계하지 않고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랑의 이야기를 듣는다. 


고고에게는 전쟁으로 멸망에 가까운 미래의 사막에서 혼자가 아닌 것만으로도 충분한 위로가 된다. 그럼에도 여전히 고고를 지배하는 건 랑이다. 전쟁을 위해 만들어졌을지도 모를 자신의 존재를 아끼고 사랑해 준 랑. 자신이 인간을 죽이고 지구를 망하게 했을지도 모르는데 말이다. 랑은 고고를 만난 순간부터 그 자체를 인정했다. 


고고는 자신이 로봇이라 인간인 랑을 이해하지 못하고 랑의 감정을 느끼지 못한다고 여겨 그 사실을 무척 안타까워한다. 로봇 알아이아이를 도와주느라 망가진 몸으로 언어 전달이 제대로 되지 않는 상태로 외계에서 온 살리와 대화를 이어가는데 살리는 랑을 향한 고고의 마음을 아는 것 같다. 살리는 고고가 닿고자 하는 과거의 땅을 알고 있었고 랑과 고고가 어떤 사이였는데 서로에게 어떤 존재였는지 알게 해준다. 


“너도 감정이 있다는 말처럼 들려. 너는 아쉬워하고 슬퍼하는 것처럼 느껴져. 감정을 가질 수 없다는 사실에.”

“그렇게 느끼…… 네가 감정을 느끼는 존재……기 때문이다.”

“감정은 교류야. 흐르는 거야. 옮겨지는 거고, 오해하는 거야.” (132~133쪽)


우리가 마주할 미래는 인간은 적고 로봇이 더 많을지도 모른다. 인간을 도와주며 함께 살아가는 실용적인 존재가 아닌 인간의 친구가 되어줄 로봇을 생각한다. 마음이나 감성을 인지하고 작동하는 대신 소설 속 살리의 말처럼 자연스럽게 서로에게 스며드는 로봇을 말이다. 


랑을 다시 만나면 이야기해주고 싶다. 내가 만난 사막에 대해. 너를 만나기 위해 걸어온 나의 사막에 대해. 그렇게 늙어가는 랑의 곁에서, 조금씩 망가져 가는 내 몸으로 이야기하겠지. 나쁘지 않다고 생각한다. 비로소 랑과 시간이 맞는 것 같다는 착각을 한다. 이번에는 너와 함께 늙어갈 수 있겠다는 헛된 희망을 품고 랑을 떠올리며, 더 깊은 어둠으로 내려간다. 간절하게. (144쪽)


얼핏 ‘오즈의 마법사’ 속 도로시의 여정을 떠올리게 만드는 소설이다. 그런 이유로 사막에서 만난 이들은 고고가 아니라 독자에게 말을 건네는 듯하다. 세상에서 중요한 게 무엇인지, 우리가 무엇을 향해 살아가고 있는지를. 그러나 이 소설에서 아름답고 감동적인 건 랑을 그리워하는 고고의 마음이다. 랑과의 모든 순간이 기쁘고 행복했다는 걸 느끼는 고고. 고고의 여정은 이제 랑을 향해 나간다. 그 끝에 있다는 걸 알기에 두려움은 없을 것이다. 설령 디스토피아의 혹독한 미래라 할지라도 고고 같은 로봇이 있다면 괜찮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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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청
김혜진 지음 / 민음사 / 202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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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닷없이 발생하는 사고에 대처하는 일은 어렵다. 예상했더라도 마찬가지다. 사고의 방향은 의도했던 대로 흘러가지 않고 해결책은 보이지 않는 경우가 많다. 논란의 중심에 선 인물이라면 어떤 선택을 해야 할까. 그 선택은 과연 옳다고 말할 수 있을까. 세상의 모든 일은 사람을 가라지 않고 일어나지만 그것이 내일이 되었을 때 차분하고 현명하게 대처할 수 있는 이는 거의 없다. 그 일로 삶의 기반이 무너지고 관계가 깨지고 고립된 지경에 이른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아니, 할 수 있는 일이란 게 있을까. 김혜진의 장편 소설 『경청』 속 임해수가 그런 인물이다.


상담사로 방송에 출연해 대본을 보고 한 배우에 대해 자신의 의견을 말했을 뿐이다. 자신의 일을 한 것이다. 얼마 후 그 배우가 자살을 했고 언론과 방송에서 그 이유를 그녀의 말 때문이라 쏟아냈다. 자신과 전혀 상관없는 한 사람의 삶에 그녀는 개입되고 말았다. 아니 그의 죽음이 그녀의 삶에 개입된 것이다. 이후의 삶은 나락 그 자체였다. 상담사로 일했던 자신의 자존감과 가치는 어디서도 찾을 수 없었고 센터는 휴직과 퇴사를 통보했다. 결혼생활도 끝났다. 한 마디로 그녀의 모든 게 망가졌다. 일상을 유지할 수 없는 상황에 놓였다. 


소설은 그녀가 쓴 기자에게 쓴 편지로 시작한다. 해명이라 여길 수 없는 너무도 절박한 반박이다. 편지는 기자뿐 아니라 센터에서 함께 일했던 동료, 상사, 변호사, 죽은 배우의 아내, 친구에게로 이어진다. 그러니까 자신의 입장을 설명하려고 애쓴다. 그러나 무례하지 않은 말들을 골라 최선을 다해 쓴 편지는 전달되지 않는다. 하루 종일 매달린 편지를 그녀는 태우고 만다. 그녀가 하는 일이라곤 편지 쓰기와 동네 산책 정도가 전부다. 산책은 그마저도 쉽지 않다. 동네에서 그녀를 아는 이들이 있기 때문이다. 그 일 이후로 그녀는 어떤 일에도 의견을 내거나 관여하지 않으려 애쓴다. 그러다 길고양이 순무를 만났고 고양이를 돌보는 아이 세이를 만났다.


순무는 경계심이 강했지만 그녀를 외면하지 않았고 세이는 경계심은 없었지만 그녀에게 모든 걸 말하지는 않았다. 순무 밥을 주고 간식을 주면서 세이를 자주 보게 되었고 조금씩 친해졌다. 순무가 아프다는 것과 길고양이로 인해 동네의 작은 다툼과 사소한 분쟁에 대해서도 알게 되었다. 그녀는 그저 세이의 말을 들었다. 말을 거드는 일은 할 수 없었다. 그건 세이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한 번씩 마주치는 세이의 모습은 자연스럽게 왕따를 떠올리기에 충분했다. 아빠와 단둘이 사는 또래보다 덩치가 큰 아이, 피구 연습을 하면서 아이들이 세이를 위협하고 따돌리고 있었다. 그러나 세이는 단 한 번도 그 이야기를 그녀에게 하지 않았다.


학교생활이나 집에서 어떻게 지내는지 그녀는 물을 수 없었고 세이는 말하지 않았다. 세이는 순무를 구조하는 일에 대해서는 눈을 반짝였고 생각을 말했다. 순무를 구조하는 과정에 다친 그녀는 어쩔 수 없이 동네 병원에서 진료를 받았다. 자신을 아는 이들, 혹시라도 자신을 기억하고 말을 거는 이가 있을까 두려운 공간에 가야 했다. 치료를 위해 찾은 병원에서 그녀를 알아보는 이의 조언을 들어야 했다. 사고에 대해 일부만 아는 사람들, 전체를 모르고 그녀를 위한다고 조언을 하거나 비난을 하는 사람들. 


그러니 이 순간은 이 순간일 뿐이다. 그녀가 과거에 겪은 어떤 일의 결과도, 원인도, 이유도 아니다. 시간은 곧게 나아가지 않는다. 삶의 모든 순간들이 인과의 직선을 따라가지 않는 것처럼. 그녀 자신이 단 하나의 얼굴로만 살아갈 수 없는 것처럼. (185쪽)


그런 말들을 그녀는 묵묵히 들었다. 일상으로 돌아올 수 있다고, 자신의 자리에서 일을 할 수 있다고 버티고 견뎠다. 하고 싶은 말은 여전히 쌓였고 차올랐다. 그래서 편지를 쓰는 일은 멈출 수 없었고 자살한 배우의 아내를 만나고 그녀와 비슷한 상황에 놓인 이들을 만나 고소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다. 하지만 뭔가 달라지고 해결되는 일은 없었다. 그녀는 멈춤 상태였고 도저히 움직일 수 없었다. 그런 그녀를 움직이게 만든 건 순무와 세이였다. 


구조를 시도할 때마다 상처를 주던 순무를 쉽게 구조한 건 세이였다. 치료를 할 병원을 찾아 입원시키고 그 과정을 지켜보면서 그녀는 세이가 말해주기를 기다렸다. 그러니까 학교에서 친구들과 어떤 일이 있었는지 왜 그렇게 당하고 있는지 말이다. 세이와 함께 보낸 시간을 통해 과거 그 방송에서 했던 말들의 의미를 돌아본다. 일부를 보고 전체를 판단하는 일, 정확한 전후 사정을 살피려 노력하지 않았던 부분에 대해서. 


피구 대회에서 결국 터져버린 세이의 감정들, 친구와 싸우고 전학을 가야 할 위기에 놓였다. 세이와 친하게 지내고 상담사라는 걸 알고 찾아온 세이의 아빠에게 사과하면 정리될 문제라고 말하는 그녀. 세이가 힘든 시간을 보내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 있었을 것이다. 어쩌면 그녀는 세이에게 자신을 대입시켰는지도 모른다. 순무가 사람들에게 다가오기를 기다렸던 것처럼, 어떤 일에는 그에 합당한 시간이 필요한지도 모른다. 그 시간을 기다려는 주는 일도 말을 경청의 일부일 것이다. 그러니 누군가의 말을 경청할 태도엔 그런 기다림도 필요하다. 회복된 순무를 세이가 키우고 해수의 집에 찾아와 자신의 이야기를 꺼낼 수 있을 때까지의 기다림.


그러나 이 순간에도 시간은 흐르고 있다. 막바지에 이른 더위가 물러가면 서늘한 바람이 불고 눈이 내리는 겨울이 올 것이다. 시간은 쉬지 않고 앞으로 나아갈 것이다. 그건 막을 수 없다. 그녀 역시 마찬가지다. 살아 있는 모든 것들이 그렇듯 지금의 시간을 지나 다음의 시간으로, 그다음의 시간으로 나가갈 의무가 그녀에게도 있다. (301쪽)


해수와 세이 모두 지금의 시간을 지나 다음의 시간으로 나가갈 때가 온 것이다. 편지를 쓰는 일 대신 누군가의 말을 들어주고 정성을 다해 상담을 하는 일. 이제까지 말하지 못했던 마음의 말을 하나씩 건네는 시간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소설 속 인물 ‘세이(say)’란 이름은 무척 상징적이다. 함부로 말하고 대충 듣는 일, 말의 무게를 생각하고 진심을 다하는 말을 고르는 일, 소설 속 인물을 떠나 우리 모두가 취해야 할 태도다. 


차분하고 단단한 문장으로 들려주는 김혜진의 글을 읽는 일, 귀를 기울여 듣는 경청과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쉽게 말과 글로 상처를 주고 잊어버리는 너무도 편리하고 익숙한 사회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경각심을 불러일으킨다. 고였던 말들이 천천히 움직여 흐르는 느낌이라고 할까. 그 말들이 누군가를 움직이는 아름다운 동력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전해지는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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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니데이 2023-01-06 23:4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달의 당선작 축하합니다.
따뜻한 주말 보내세요.^^

자목련 2023-01-09 09:06   좋아요 1 | URL
^^*

thkang1001 2023-01-08 10:2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자목련님! 이달의 당선작 선정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 항상 건강하시길 기원합니다! 행복한 하루 보내세요! 감사합니다!

자목련 2023-01-09 09:07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 즐겁고 행복한 날들 이어가세요^^

thkang1001 2023-01-09 09: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자목련님!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행복한 한 주 되시길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모든 것들의 세계 트리플 15
이유리 지음 / 자음과모음 / 2022년 11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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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이 좋은 이유 중 하나는 내가 상상하지 못한 세계로 나를 이끌기 때문이다. 명확하게 장르를 구분할 수 있는 SF나 판타지가 아니더라도 말이다. 누구나 한 번쯤은 상상했으나 확장되지 못하고 사그라든 이야기를 만날 수 있어 좋다. 이유리의 소설엔 그런 게 있다. 그러니까 뭐냐, 이 황당한 상상이 아니라 나도 그 상상을 경험하고 싶다는 막연한 바람을 품게 된다고 할까.


『브로콜리 펀치』에서 그랬듯 『모든 것들의 세계』에 수록된 세 편의 단편도 다르지 않다. 그런 기운 때문이었을까. 이유리의 소설에는 모든 것들이 가능한 세계가 숨겨진 것만 같다. 트리플 시리즈인 이 소설집을 ‘모든 것들의 가능한 세계’로 부르게 만든다. 


표제작 「모든 것들의 세계」의 화자 ‘고양미’는 죽은 사람이다. 귀신이라고 해야 맞겠다. 그러나 무섭거나 두려운 존재가 아니다. 그녀는 저승차사를 부모가 ‘천주안’이란 남자와 영혼결혼식을 올렸다는 소식을 듣는다. 그리고 곧 천주안을 만나 서로의 죽음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다. 고양미는 취직과 결혼을 하라는 부모님의 소망과는 다르게 게임을 하다 옆집에 난 불로 죽었다. 게임에 빠져 불이 난 줄도 모르고 죽은 거다. 천주안은 부모님과 결혼 문제로 다투다 20층에서 떨어져 죽었다. 자신이 게이라는 사실을 알리지도 못하고 죽기를 작정한 건 아닌데 그렇게 되고 말았다.


이승에 먼저 온 고양미는 천주안에게 사후 세계에 대해 설명한다. 부모나 가족이 아닌 누군가가 자신을 그리워하면 소멸하지 않는다는 사실도. 그래서 PC방에서 게임 동호회에 접속해 자신의 닉네임을 검색한다고. 천주안의 애인이 사는 곳까지 동행한다. 고양미는 이승의 게임에서 힐러였던 것처럼 저승에서도 천주안을 달래고 위로해 준다. 


다만 잊히고 싶지 않았다. 왠지 모르겠지만 그건 싫고 무서웠다. 꼭 즐겁고 행복한 기억으로가 아니어도 좋으니, 내 세계는 끝나 없어지더라도 다른 누군가의 세계 어느 한구석에는 끝내 남아 있고 싶었다. (「모든 것들의 세계」, 30쪽)


소설을 읽으면서 존재하지도 않을 양미가 잊히지 않기를 바랐다. 발랄한 귀신으로 여전히 좋아하는 카페에서 빵 냄새를 흠씬 맡으며 지내기를. 이런 마음을 갖게 만드는 게 이유리 소설의 힘이다. 허구의 존재에 대한 동경과 응원을 하게 되니까 말이다. 자신의 마음을 소리를 들을 수 있는 기발한 설정의 「마음소라」에서도 마찬가지다. 


일차성징처럼 때가 되면 누구나 ‘마음소라’를 갖게 되는데 만약 누군가에게 주게 된다면 그 한 사람만이 유일하게 자신의 진심을 고스란히 들을 수 있다. 그러니 고미는 도일의 마음소라를 선뜻 받을 수 없다. 결국 그것을 받으면서 둘은 7년의 연애를 시작한다. 고미와 도일의 사랑이 결혼으로 이어졌으면 문제가 없게지만 둘은 헤어졌다. 각자 다른 이과 결혼을 했다. 시간이 지나 도일의 아내 양희는 고미에게 마음소라를 돌려달라고 한다. 가출한 상태의 양희는 자신은 들을 수 없는 도일의 마음을 알려달라고 부탁한다. 고미는 도일의 마음에 양희에 대한 생각과 걱정이 없음에도 그녀를 걱정하고 있다며 집으로 돌아가라고 말한다. 누군가의 진심을 안다는 건 마냥 기쁠 수만은 없는 일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간절하게 사랑하는 이의 마음이 궁금하고 알고 싶다. 


마지막 「페어리 코인」에는 요정이 등장한다. 솔직히 말하자면 이름이 요정인 반려동물인 줄 알았다. 전세사기를 당한 ‘나’와 ‘우진’과 함께 산다. 말 그대로 요정이라 늙지도 죽지도 않는 존재로 키우는 데 어려움은 없다. 요정은 고조모가 발견하고 그 뒤로 증조모, 할머니, 엄마, ‘나’가 물려받은 가족으로 언제나 곁에 있었다. 법적으로는 문제가 없어 전세금을 돌려받을 수 없는 상황에 우진의 친구 ‘현철’은 요정으로 ‘페어리 코인’ 사기극을 벌이자고 제안한다. 현철의 계획대로라면 모든 게 완벽했다. 사기를 친 집주인과 부동산, 아무것도 찾을 수 없다는 변호사와 세상 모두에게 복수할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과거 현철이 우진을 배신한 일이 떠오르며 흔들린다. 요정의 존재를 제외하면 너무도 현실적인 설정이다. 어떤 방법으로 가상화폐가 많은 이들의 관심을 받는지, 작정하고 전세 사기를 치는 이들의 모습까지. 


현실에서 요정처럼 우리를 지켜주는 존재는 누구일까. 어쩌면 이유리는 힘들고 지친 우리네 삶에 소설로나마 그런 존재를 보여주고 싶었던 건 아닐까. 위로하는 귀신 양미, 때로 상대를 위해 가짜 마음소리를 전달하는 고미, 존재만으로 든든한 요정처럼. 이유리는 비현실적인 판타지를 통해 현실의 우리가 서로를 기억하고, 사랑하고, 지지하며 살아가기를 바라는 마음을 전한다. 그리하여 모든 것들의 가능한 세계를 꿈꿀 수 있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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