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 행복하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이병률 지음 / 달 / 202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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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을 읽는 일은 모든 감각을 깨우는 일이다. 설령 내 사랑이 끝났을지라도 사랑과는 멀리 떨어져 나온 삶이라도 사랑을 읽는 동안 나를 휘몰아졌던 사랑 속으로 진입하기 때문이다. 아픈 줄 알면서도 사랑의 불구덩이 속으로 걸어 들어가던 시간, 이별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며 스스로를 갉아먹던 침잠의 시간. 어느 날 이유 없이 서러워 아무도 모르게 울음을 쏟아내던 그 쓰라린 시간과 마주한다. 사라졌다고 믿었던 설렘의 순간, 무엇 때문에 헤어져야 하는지 납득할 수 없어 잠들지 못하던 밤이 고스란히 밀려온다.


이병률의 에세이 『그리고 행복하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를 읽으면서 누군가 여전히 사랑의 조각을 붙잡고 있음을 인식하거나 소식을 모르는 그의 안부나 행복을 바라는 마음을 발견하게 될지도 모른다. 사랑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말할 수 없음에도 시인이 들려주는 사랑에 나도 모르게 빠져든다. 당신이라 부를 수 있는 이가 지금은 곁에 없어도 어느 시절 당신과 보냈던 짧은 시간, 스치든 지나간 계절, 그리고 가슴에 남은 기억들은 누군가의 사랑이고 감정이다.


사랑을 배운 적이 없어서, 사랑을 하지 못하는 당신이 사랑을 하지 못하고 있을 때도, 세상은 사랑의 풍경을 보여주며 페이지를 남긴다. 그러니까 당신아, 우리는 그 페이지를 따라 여행해야 하고, 그 길에서 나 자신을 에워싼 모두를 괴롭혀서라도 영혼을 다 소모할 수 있을 때만 이번 생의 주인이 될 수 있다. 주인공 말고 주인이.(49쪽)


친구라도 될 걸 그랬다는 노랫말처럼 때로 사랑의 고백은 발화되어서는 안 되는 침묵으로 남아야 했다. 정성껏 써 내려간 치밀한 프러포즈가 그러하듯 상대에게 부담으로 남을 뿐이다. 여행을 하고 시를 쓰고 강의를 하고 꽃집을 운영하는 그가 말하는 사랑은 지극히 개인적인 사랑이자 모두의 사랑에 해당된다. 어떤 사랑은 시로, 어떤 사랑은 일기로, 어떤 사랑은 하나의 사연으로, 어떤 사랑은 편지의 형태로 쓰일 뿐이다. 그러니 이 책은 사랑에 대한 담론이며 사랑과 이별에 대한 고백이자 누구나 공감하는 애틋한 사랑이자 사랑을 기다리는 이의 마음이다.


그래서 하나하나 사랑의 조각을 소개하는 건 무의미할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어떤 글에는 오래 머물게 된다. 생일에 꼭 장갑을 선물하고 싶다는 글, 비 오는 날 연인이 저 멀리서 우산을 들고 있는 걸 발견하고 냉큼 쓰고 있던 우산을 쓰레기통에 버리는 여자에 대한 글, 사귀는 걸 주변에 알리지 못해 둘만이 아닌 여럿이 보낸 크리스마스에서 사다리 게임으로 선물이 다른 사람에게 돌아갔다는 글이 그랬다. 어느 시절 매만지던 약지 손가락의 감각이 되살아나서, 비가 오던 날 우산을 하나만 사 오던 모습이 좋아서 심장이 뛰던 순간, 어느 해 크리스마스 선물로 준비한 장갑이 떠올라서다.


내가 사랑했던 사람들이 번복자가 되어 나를 떠날 수밖에 없었던 순간들을 되돌린다면 어떨까. 당신이라는 세계가 놓치고 만 것들을 붙잡는 것. 그것은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일이라서, 있는 힘껏 몸을 돌리고 관점을 되돌려 ‘그때의 나는 내가 아니었다’고 말하면서 두 팔 벌려 안을 수 있다면.(98쪽)


과거가 돼버린 이야기다. 시인은 모든 걸 번복할 수 있다면 어떨까 하며 지나간 사랑을 후회하지만 어떤 사랑은 우주의 의지를 끓어 모아도 결국 이별의 수순을 밟게 된다는 걸 알기에 그저 담담하다. 어쩌면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시간이 지났기 때문에 가능한 담담함일지도 모른다. 사랑은 둘이어야 가능한 일이고 둘이어야 만들 수 있는 것이라서 그렇다. 


한 사람이 혼자서 하는 게 사랑은 아니기에, 한 사람이 할 수 있다 하더라도 그건 사랑이 아니기에, 우리는 사랑하다가고 어긋나고, 이어보려 해도 고스란히 해진 자국을 남긴다.(124쪽)


그럼에도 책에서 만난 사랑은 한 편의 영화 같고 음악 같다. 그건 사랑이 우리를 살게 하고 지탱하는 힘이라는 걸 알기 때문이다. 심지어 이별을 견디는 시간조차도 사랑의 기억이 있기에 버틸 수 있는 시기가 있다. 좋았던 기억이 왜 이별로 이어지나 분노하면서도 훗날 그 모든 것들은 아름다움에 아름다움으로 남는다. 아련해지고 흐릿해진 아름다움으로 말이다.


우리가 사는 삶이란 그저, 사랑하는 모두가 빠져나간 자리의 뒷전을 자주 느끼는 일이며, 사랑이 사랑의 힘만으로 도달할 수 없다는 불가능을 여러 번 체험하는 일이며, 도무지 막으려 해도 막을 수 없는 신산한 시절을 그저 견디고 견뎌야만 하는 일, 피할 수 없어서 우리는 그 모든 것들의 쓸쓸함을 삼키고 또 삼키며 삽니다.(160쪽)


『그리고 행복하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는 사랑을 하는 이들에게는 찬란한 사랑으로 나가는 격려가 될 것이고 혼자만의 사랑을 하는 이들에게는 사랑이 주는 기쁨과 힘을 확인하며 용기를 북돋을 것이고 사랑이 끝났다고 여기는 이에게도 결국 삶이란 사랑에 속한 것이라는 걸 깨닫게 될 것이다.


사랑을 읽는 일은 가만히 내 사랑을 헤아려 보는 일이다. 서툴고 아팠던 사랑부터 전부를 걸어도 아깝지 않았던 사랑과 이제는 그의 이름을 들어도 덤덤해진 가슴이 서럽기도 한 사랑까지. 그 모든 사랑으로 받은 것들로 인해 내가 살았던 날들과 부디 내가 주었던 것들로 그 사랑도 살았던 날들이 있기를 바라는 마음을 꺼내보는 일이다. 사랑이 얼마나 눈부시고 소중한 것인지 나만의 공간에 새기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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