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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너에게 가면
설재인 지음 / 자이언트북스 / 2022년 10월
평점 :
돌봄은 돌봄을 받는 이와 돌보는 이 모두를 성장시킨다. 돌보는 동안 상대를 지켜보고 사랑을 주기 때문이다. 의도하지 않았더라고 사랑을 주게 된다. 내 손길, 내 말, 내 마음에 따라 상대가 변화하는 걸 느끼는데 어떻게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상대도 마찬가지다. 관심을 갖고 지켜보는 이가 있다면 올바르고 좋은 쪽으로 나가려고 하니까. 관성처럼 말이다. 처음 만나는 설재인의 장편소설 『내가 너에게 가면』 은 그런 따뜻하고 애틋한 돌봄의 마음과 시선을 말하는 소설이다.
죽은 할머니가 혼자 남은 손녀딸을 지켜보기 위해 사물에 깃드는 장면으로 시작하는 이 소설은 SF 인가 싶었지만 아니었다. 할머니 종옥이 떠나지 못하고 지켜보는 손녀 성주는 작은 항만군의 초등학교 돌봄반 교사로 일하며 복싱을 한다. 그러니까 성인 여자다. 평생을 사랑하며 키운 성주가 밥을 안 먹어서 빵이라도 먹게 해달라고 저승사자에게 부탁해 남은 것이다. 그러나 성주에게는 그만한 사정이 있다. 복싱을 하려면 체중이 중요한데 밥과 빵은 절대 피해야 할 음식이라는 걸 할머니는 받아들일 수 없었다. 주먹을 날리며 싸우고 받아온 트로피를 던져버렸으니까. 그 목이 나간 트로피에 할머니의 영혼이 깃든 것이다.
할머니의 영혼이 성주를 지켜보듯 것처럼 성주는 돌봄반에서 만난 초등학교 1학년 애린이를 지켜본다. 할머니의 장례식장에서 엄마를 잃은 어린 소녀. 외국인 엄마와 한국인 아빠를 둔 애린. 아빠는 일하느라 외국에 있고 웹툰을 그리는 삼촌 도연이 애린을 키우고 돌봤다. 도연은 애린이 친구와 싸운 일로 미안한지 빵을 만들어왔다. 빵을 먹을 계획이 없었는데 애린의 집요한 권유에 어쩔 수 없이 먹었다. 한국말도 잘 하고 똑 부러지는 애린은 성주를 잘 따랐고 성주가 복싱을 한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다.
우연히 성주 집에 오게 된 애린이 목이 부러진 트로피를 가져가고 체육관에 등록할 줄은 몰랐다. 그 속에 깃든 종옥을 볼 수 있을 줄이야. 덕분에 종옥은 체육관으로 옮겨져고 그곳에서 매일 성주를 볼 수 있었다. 규칙적인 운동과 식단을 지키고 있던 성주였는데 애린과 도연의 등장으로 자꾸만 그게 무너졌다. 이상하게 싫지 않았다. 운동이 끝난 후 도연이 만든 빵을 맛있게 먹고 함께 달리기를 하고 애린에 대해 이야기를 했다. 성주는 애린을 통해 어린 자신의 모습을 발견했다. 친구의 손녀를 키운 할머니와 자신을 향하던 수많은 시선과 편견들, 부모도 아닌 삼촌이 키우는 애린에게는 어떤 말들이 오갈지 잘 알고 있었다.
소설은 성주가 일하는 돌봄반을 통해 여전한 사회적 차별을 말한다. 외국인 노동자를 바라보는 한국인의 시선, 돌봄 교사인 성주를 정규직과 다르게 대하는 교장의 태도, 부모가 아닌 이들과 가족으로 살아가는 이들을 향한 참견의 모습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동시에 그 반대의 시선도 들려준다. 성주를 키운 종옥, 애린을 돌보는 삼촌, 성주를 응원하는 교사들. 서로가 서로를 돌보는 모습이다. 어린이만 돌봄이 필요한 게 아니라는 걸 알려준다. 애린을 통해 성주와 삼촌도 돌봄을 받고 있었다.
아이의 작았던 세계에 낯선 사람들이 생겨난다. 땅에서 솟아나고, 하늘에서 떨어지고, 강을 헤엄쳐 흠뻑 젖은 채로 기어오르기도 하고, 또 어딘가에서 발을 구르며 전속력으로 달려오기도 한다. 작았던 아이를 그 사람들이 키운다. 점차 이 사람과 저 사람을, 그 사람과 또다른 사람들을 동시에 마음에 심어 사랑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누구도 가르쳐주지 않았지만 태생에서부터 내재된 본능의 씨앗이 발아하여 알게 된다. 소중히 여기는 사람들이 많아질수록 더 많은 씨앗을 심고, 더 많은 꽃을 피우고, 벌과 나비를 불러오고, 꿀을 슬그머니 맛볼 수 있다는 것도 조금 더 크면 알게 될 것이다. (229~230쪽)
소설은 대단할 것 없는 평범한 일상에서 혼자가 아닌 함께 살아가고 있음을 알려준다. 성주가 도연과 애린을 만나면서 “웃는 일이 많고 싶었다.”(244쪽)고 느끼는 것처럼. 한 사람의 생에 누군가 들어오는 일이 얼마나 대단한 일이지 확인시킨다. 누군가 돌보는 일은 돌봄을 받는 일이라는 걸 말이다. 나를 키우고 돌본 이들을 떠올리게 만든다. 그들의 존재가 얼마나 감사한지 알게 한다. 봄날의 햇살처럼 따뜻하고 소설 속 도연이 만드는 빵처럼 맛있고 부드러운 소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