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는 하루종일 아픈 남편 옆에서 조잘조잘 떠들어대며 지냈다. 남편은 귀찮다며 손사레를 치지만 그래도 난 꿋꿋하게 주저리주저리 이야기를 한다. 남편도 체념한 듯 열심히 듣고 간단하게 대답한다.
하루종일 편히 쉰 덕에 오늘 아이들도 일찍 일어나고, 나도 여유가 생겼다. 오랜만에 영화를 보러 나갔다. 2월 알라딘에서 제공한 할인쿠폰이 아직 남아 공짜 영화를 보고 왔다.
<황산벌>을 본지가 언제인지 기억은 잘 나지 않는다. 하지만 박장대소하며 보았던 기억은 떠오른다. 계백장군의 박중훈, 김유신의 정진영, 감초 연기의 달인 거시기 이문식 등 각 지역의 사투리로 대화하는 장면이 인상깊었다. 늘 사극에서 보여주는 표준말을 볼 수 없었다. 그래서 리얼리티가 살아있다고 생각했다.
<평양성>에서도 마찬가지로 각 지역의 사투리로 대화가 이루어진다. 정말 그러했을 것 같다. 그 지역의 사투리로 각자의 말을 했을 것 같다.
사실 요즘 너무 우울했다. 도처에 깔린 죽음을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은 날을 보내고 있었다. 그래서 재미있다고 말하는 영화를 보고 싶었다. 배우들의 개성이 살아 있으면서 가끔 관객에게 웃음을 주는 <평양성>을 봐야겠다고 생각한 이유도 그랬다. 그런데 웃음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웃다 웃다 그렇게 웃으며 나오고 싶었는데 수많은 사람들의 목숨을 앗아간 전쟁은 내게 눈물을 펑펑 흘리게 만들었다. 대체 나란 사람은 어떤 사람인가? 웃음의 코드로만 받아들이고 싶었던 영화에서 눈물을 펑펑 흘리다니 말이다. 전쟁으로 이익을 보는 사람은 대체 누구란 말인가? 목숨을 내걸고싸우는 그들이란 말인가? 수없이 창 칼이 부딪히고 화살이 날아들고 불이 나고 커다란 돌에 짓이겨 목숨을 잃고마는 그들을 보며 눈물이 흘렀다. 다시 돌아가 돌보아야할 가족들이 있는 그들, 원하든 원하지 않든 자신의 목숨을 걸고 싸워야하는 전쟁터. 피 비린내가 내게로 전해오는 듯, 몸을 잔뜩 움츠렸다.
"싸우지 않고 이기는 것" 이것이 진정 이기는 것이라던 김유신의 대사를 곱씹고 있다. 평화가 너무 멀리 있는 것은 아닐까 사실 두려운 마음도 있다. 1950년을 겪었던 세대들은 전쟁이라면 치를 떤다. 이념, 사상 이런 것과 무관한 사람들의 죽음이 도처에 널러 있었으니 말이다. 요즘 뉴스를 보면서 요 몇년간의 햇볕정책은 찾아보질 못하고 어느날에는 전쟁이 일어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사실 내 마음 속 어딘가에 숨어 있다. 그것은 걱정과 두려움일뿐 죽음의 실체는 바로 보지 못한다. 하지만 바란다. 제발 전쟁이 없기를, 우리의 싸움에 더이상 누군가가 개입해서 이래라 저래라 하지 않기를, 평화로운 해결이 이루어지기만을 바란다.
영화를 보고 집으로 돌아왔다. 남편에게 전화가 왔다. "무슨 영화 보고 왔어?" "음, 평양성" "뭐라고? 그런 걸 왜 너 혼자 보냐?" 함께 볼 시간을 맞추기란 쉽지가 않으니 혼자 보고 왔다. 그런데 남편이 무척 실망스러워한다. 같이 보려고 했다가 아마도 나도 영화 한편 못 보고 지나갈게 뻔하다.
월요일 아침 극장가는 한산해서 좋았다. 주차권에도 3시간 무료 도장을 찍어주어 오늘은 주차비도 굳었다. 이번 주는 좀 활기차게 보내고 싶다. 신나게 책도 읽고 글도 쓰고 영화도 보고 그렇게 시간을 보내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