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을 넘기기 힘들 것 같던 작은 엄마는 설을 이틀 앞두고 세상을 버리셨다. 힘겹게 이어 온 생명이 끊어지는 순간 다행히도 가족들이 함께 있었단다. 요 며칠 죽을 조금씩 먹기 시작했다며 잠도 더 잘 자는 것 같다는 사촌동생과의 전화통화를 한 다음날이었다. 사촌동생에게 전화를 걸어 엄마를 보낼 마음의 준비를 잘 하라고, 너무 슬픔에 겨워 자신을 돌보지 않으면 아마도 엄마가 더 많이 아파할 것이라고 얘기해주었다. 하지만 막상 엄마를 보내는 사촌동생의 슬픔을 내가 어찌 가늠할 수 있겠는가 말이다.
나이가 들면서 가까운 분들의 죽음이 점점 많아지고, 앞으로 우리 부모님도 죽음을 맞이하시겠구나를 생각하게 되었다. 막연한 이별 앞에서 슬픔을 주체할 수 없게 되었다.
부고 소식을 듣고 장례식장으로 향했다. 우선 남편만 먼저 가고 나는 친정에 아이들을 내려놓고 저녁을 먹이고 나서기로 했다. 아이들 모두 데려가기엔 장례식장이 어수선할 것 같아 우선 엄마네 집에 두기로 했다. 오빠네 아들, 큰언니네 아이들 셋, 그리고 우리 아이 둘을 엄마네 데려다놓고 저녁을 지어 먹였다. 그리고 장례식장으로 가서 절을 했다. 한 시간 조금 지나니 아이들에게 전화가 오고, 언니들은 남아 손님을 치뤄냈다. 다시 집으로 돌아가 아이들 씻기고 집안을 정리하고 이불을 깔아주고 모두 잠을 재웠다. 그러는 사이 작은 언니와 엄마가 학원에 다녀온 큰 조카 아이를 데리고 들어왔다. 아이들이 모두 잠이 들었으니 큰 조카 아이에게 깨서 울면 전화해달라고 부탁하고 엄마와 언니를 차에 태워 장례식장으로 다시 갔다. 엄마네 집과 병원을 수도 없이 왔다갔다 했다. 설을 앞두었기에 문상객이 많지 않겠구나 싶었다. 하지만 첫날 문상객이 넘쳐났다. 큰 아이의 지인들이 많이 다녀갔고, 작은 엄마와 함께 일하시던 분들도 많이 다녀가셨다. 그리고 가까운 친척들로 북적거렸다. 잠시 쉴 틈도 없이 바빠 한참 도와주고 있는데 현수가 깨서 운다고 전화가 왔다. 새벽 1시반 다시 집으로 돌아가 아이들 데리고 잠을 잤다.
다음날 아침 밥을 먹이고 아이들 모두 데리고 장례식장에 갔다. 아이들도 작은 외할머니께 절을 하겠다고 해서 모두 문상을 했다. 그리고 소란스러워지기 전에 다시 엄마네 집으로 데려갔고, 엄마와 나는 다음날 화장하고 납골당에 모실때 필요한 제사 음식을 만들었다. 새언니도 함께 와서 음식을 만들고 아이들을 돌보고 설연휴를 장사 치르느라 고생이 많았다.
밤이면 우는 아이들때문에 다시 집으로 돌아왔고, 다음날 발인 시간에 맞추기 위해 다시 아이들을 모두 데리고 장례식장으로 갔다. 벽제 화장터는 분주했다. 23개의 분향실이 모두 꽉차고 끊임없이 죽은이를 태우기 위해 들고 나고 바빴다. 생각지도 못했던 죽음이 가까이 많게 느껴졌다. 끊임없이 영구차는 들어오고 나가고 있었다.
설 당일이 발인일이라 길이 많이 막혔다. 벽제에서 남양주에 있는 납골당으로 돌아오는 길이 꽉 막혀 평소 2~3배의 시간이 걸렸고 아이들이 많이 지쳤다.
납골당에서 제를 올리고 다시 집으로 돌아와 제를 올렸다. 그렇게 3일동안의 상을 치루었다.
제사를 지내고 모두 저녁을 먹고 10시쯤 정리하고 집을 나서려는데 작은 아버지께서 우리 큰집 식구들은 좀 더 있다 갔으면 좋겠다고 붙잡으신다. 아직도 옆에 작은 엄마가 함께하고 있는 느낌이 든단다. 아들 둘과 덩그러니 남겨지는 게 두려운 작은 아버지를 위해 우리 식구들이 남았다. 술을 더 마시고 싶으시다는 작은 아버지, 평소가 좋지 않았던 막내 작은 아버지는 작은 엄마와 사촌 동생을 보내고 다시 오셨다. 어릴때 작은 형수에게 참 못했다고 미안하다고 눈물을 보이신다. 거나하게 취하신 작은 아버지가 방으로 들어가 주무시고 그제서야 정리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왔다. 12시쯤 나와 우리 집으로 돌아오니 1시가 다 되었다.
다시는 볼 수 없다는 생각이 들자 눈물은 걷잡을 수 없이 흐른다. 무엇보다 몸이 불편한 사촌동생을 생각하면 마음이 많이 아프다. 앞으로 자신을 스스로 돌보고 바쁜 형 대신 아버지를 도와 집안 살림을 해야하는 사촌 동생을 생각하면 너무 안쓰럽고 마음이 많이 아프다. 녀석이 오열하던 모습을 보며 함께 울어주는 일밖에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는 것이 가장 가슴 아프고 속상할뿐이었다.
작은 엄마의 죽음은 이미 예정되어 있었다. 폐암 말기, 더 이상 가망이 없다는 의사의 말을 듣고 찾아갔던 병원, 작은 엄마의 모습은 거의 죽음에 다다른 모습이었다. 1월을 넘기기 힘들 것 같다는 나의 예상대로 작은 엄마는 2월 1일 돌아가셨다. 더이상 고통스러워하지 않아도 되니 그것은 다행스럽다. 다만, 남겨진 자들이 앞으로 어찌 살아갈까를 생각하면 걱정스럽고 안쓰러운 마음뿐이다.
설이라고 아이들은 저마다 시골에도 가고 세배돈도 받을 생각에 들떠 있었는데 갑작스러운 상에 엄마 아빠와 떨어져 지내야했고 두둑하게 생길 세배돈도 제대로 챙기지도 못했다. 그래도 아이들은 아이들인지라 재잘재잘 즐겁기만 하더라.
장사 치르고 다음날 충북 영동 시부모님께 다녀왔다. 빙판에 다리를 다치셨다는 아버님도 찾아뵈야하고 아이들도 시골에 너무 가고 싶어해서 바리바리 짐을 싸들고 시골에 다녀왔다. 피곤에 지쳐서 그랬던가 내내 잠만 자다 왔다.
우리 집안에 큰 일이 생길때마다 몸 사리지 않고 열심히 일해준 남편에게 죽을때까지 잘하라는 친정엄마의 당부는 잊지 말아야겠다. 늘 궂은 일에 힘이 들어도 열심히 일해주는 남편이 있어 얼마나 다행스러운지 모르겠다. 그리고 정말이지 고맙다.
노희경 장편소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이별>처럼 아름답게 죽음을 대하지는 못했지만, 영원히 이별하는 작은 엄마를 위해 가족들과 친지들 그리고 지인들이 모두 함께 죽음을 슬퍼하고 안타까워했다. 이제 남은 가족들이 돌아가신 작은 엄마 대신 좀 더 의미있게 삶을 살아갔으면 좋겠다. 떠난 사람에 대한 슬픔에 겨워 남은 자신의 생을 헛되이 보낸다면 더 슬플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죽은 사람에 대한 안타까움과 슬픔은 기억 속에 남겨두고 자신을 돌보고 자신의 삶을 아름답게 가꾸어가는 일은 남겨진 자들의 몫이 아닐까 한다. 그것은 먼저 간 사람에 대한 예의인 것 같다. 앞으로 얼마를 살게 될지 모르지만 남은 삶을 좀 더 의미있는 일을 위해 살아가야겠다. 그리고 늙은 부모님들을 위해 좀 더 마음을 쓰면서 살아야겠다. 우리 앞에 어떤 이별이 기다리고 있을지 모르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