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주의는 회사 문 앞에서 멈춘다
우석훈 지음 / 한겨레출판 / 201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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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 졸업 후 만 15년의 직장생활을 했다. 정규직이었고, 그때는 야근을 밥 먹듯 했다. 어디 야근 뿐이랴. 주말에 직속상사가 나오면 나도 나가서 자리 지키는 게 당연했다. 뭐가 나쁜지도 뭐가 잘못된 건지도 모르고 따랐다. 억울하고 분한 마음, 모멸감을 느끼는 순간도 많았지만, 나 하나가 어떻게 해야 할지도 몰랐다. 

퇴사할 때 즈음에 신입사원들이 들어왔고, 늘 하던대로 회사 행사에서 나가 노래하라고 했더니 우리가 노래하고 춤추려고 회사 들어온 거 아니라고 말해서 맹랑하다 생각했었다. 나도 그땐 이미 많이 오염되어 있었다. 퇴사 후 비정규직 기간제 교사로 학교에서 근무를 했는데, 역시나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차이는 상당했다. 한번도 느껴보지 못한 가슴 시림이 느꼈다. 

이 책에는 정말 다양한 사례가 나온다. 윗분들이 꽂아놓은 인턴 공주님도 경험해 봤고, 조폭같은 문화도 경험해 봤고, 삼성이 하는 일이라면 무조건 신봉하는 사람들도 겪어봤다. 그래도 다행인 건 나쁜 사례들만 나오지 않았다는 거다. 서울우유 같은 협동조합의 좋은 본보기도 나오고, 여행박사 같은 직장 민주주의의 끝판왕도 나와서 뭔가 희망은 있구나 싶었다. 

얼마 전, 팟캐스트에서 북유럽의 동일노동 동일임금, 동일처우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 너무 낯설어서 받아들이기 힘들었는데, 그 이야기를 들은 후 이 책을 읽어서인가 이렇게 안되는 것이 왜 문제인지 어렴풋이 감이 잡힌다. 

우리나라는, 아빠가 어떤 회사에 다니는 가에 따라서, 일을 열심히 하는 것과는 별개로, 자녀의 미래가 결정된다. 대학 학자금이 나올 수도 있고, 내가 뼈빠져라 일해가며 대학을 다녀야 하는 경우도 생긴다. 복지라는 건 나라에서 해주면 되는 건데, 그걸 회사별로 따로따로 분리시키니 회사의 권한은 커지고 회사가 마치 시혜를 베푸는 꼴이다. 그리고 그로인해 다음 세대들의 인생도 갈린다. 

내가 앞으로 몇 년을 더 직장생활을 하게 될지 나도 알 수 없지만, 이제는 21세기답게, 뭔가 좀 달라진 모습이 있었으면 좋겠다.  



p168 직장으로서 KBS는 선후배 위계를 줄이기 위한 노력이 거의 없고, 그래야 한다는 인식도 없는 것 같다. 21세기, 문화와 진실의 첨단을 달리는 사람들에게서 선후배 놀이라니, 희극적인 일이다. 


p191 크게 보면 우리는 학교에서 민주주의를 경험하지도, 민주주의에 익숙해지지도 못하는 것 같다. 오히려 "까라면 까"라는 위계, 힘의 역학 관계를 더 많이 경험하는지도 모른다. 과도하게 수직적인 관계에 의한 위계적 명령 체계 그리고 조정되기 어려운 부당함, 그 속에서 전형적인 조직의 실패가 벌어지고 있는지도 모른다. 


p238 먹고사느라고 너무 많은 것을 포기해왔다. 모멸감을 참으면서 돈을 버는 시대가 너무 길었다. 


p259 아시아나에서 회장이 방문하면 '예쁜 애들'을 앞에 세우고 장미꽃으로 환영하게 한 사건 혹은 성심병원에서 간호사들에게 선정적인 춤을 강요한 사건 같은 것을 보면서 나는 정말로 충격을 받았다. 이건 질서정연한 바보짓 정도가 아니라 '질서정연한 나쁜 짓'이다. 도대체 거기 관리자 중에는 제정신 박힌 사람이 한 명도 없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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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뻔뻔한 엄마가 되기로 했다 - 엄마는 편안해지고 아이는 행복해지는 놀라운 육아의 기술 34
김경림 지음 / 메이븐 / 201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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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동안 내가 읽었던 육아서는 엄마가 아이를 영어 영재로 키우기 위해 노력한 이야기, 혹은 이런 저런 걸 했더니 아이 성적이 상위권이고 무슨 대회에 나가 상을 탔다는 내용이 많았다. 자녀들이 공부를 잘하니 엄마도 책을 내나보다 싶은 생각도 있었고. 

그런데, 이 책은.... 큰 아들은 아팠고, 그 큰 아들 돌보느라 작은 아들은 오히려 초등학교 저학년 때 학교에서 문제를 일으키기도 했다. 그런 엄마가 책을 냈다. 너무 솔직한 책이라 읽으면서 당황스럽기도 하고, 눈물도 나고, 오히려 큰 공감이 됐다. 

우리 부부는 공부가 인생의 전부는 아니라는 말을 많이 나눴는데, 정작 내가 임신을 한 후 남편과의 대화 중 남편이 상위 1%는 의미가 없고 1등만이 의미있다는 말을 해서 깜짝 놀랐던 적이 있다. 내심 다 내 자식만큼은 정상과 표준을 훨씬 뛰어 넘는 1% 혹은 1등을 원하고 있다. 하지만, 그게 어디 맘대로 되나. 인생이 자식이. 1%의 영재 자녀가 된 것도, 아픈 아들을 둔 것도, 순전히 우연이다. 자신의 교육방식이 좋았다고 자랑할 것도 기도빨이 좋았다고 할 것도 아니다. 인생 길게 봐야 한다.   

어제 산모교실에 갔는데, 강연자가 이런 질문을 했다. "육아용품은 아기를 위한 것일까요, 양육자를 위한 것일까요?" 모두들 "아기"라고 대답했지만, 강연자는 결국 엄마를 위한 것이란다. 엄마 편하자고 이런 저런 용품들을 사들이는 거라고. 어쩜 육아 방법도 나는 아이를 위한다고 하지만, 혹시 나를 위한 육아를 하게 되진 않나 하는 생각을 잠시 해본다. 

그 동안 읽었던 공부 잘하는 아이 이야기도 좋았지만, 이 책을 읽길 잘했다 싶다. 쉼표같은 책이다. 


p17 책을 쓰는 도중에 '좋은 엄마'에 대해 생각하다가, 아이들은 나를 어떻게 보는지 궁금하여 중학교 2학년인 작은아이에게 "네 생각에 엄마는 좋은 엄마니?"라고 물어보았다. 아이는 눈을 껌벅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엄마가 뭘 잘했기에 좋은 엄마야?"라고 다시 물었다. 아이는 "뭘 잘해서 좋은 엄마가 아니라, 내가 엄마를 좋아하니까 좋은 엄마지"라고 답했다. 그러면서 "엄마, '좋다'라는 건 사람마다 기준이 다 다르잖아. 그러니까 '좋은 엄마'라는 건 없고, 그냥 '내가 좋아하는 엄마'가 있는 거 아니겠어??"라고 말했다. 


p22 엄마로서 가장 큰 고통을 당한 듯 살아온 10년이지만, 지금 돌이켜 보면 나는 고통의 주변인이었다. 고통의 중심부에는 몸으로 병을 직접 겪고, 신체 기능의 일부를 상실한 아이가 있다. 누구 못지 않게 헌신하고 기도했으나 결국 아이를 먼저 보내야 했던 엄마들도 있다. 고백하건대, 나는 그들이 겪은 고통이 얼마만큼인지 감히 알지 못한다. 다만 내가 고통의 중심부에서 비껴 난 것이 순전히 우연이듯, 그 고통은 내게 왔을 수도 있고, 언제든 내게 올 수도 있을 것이며, 누구에게도 갈 수 있다는 것만은 안다. 


p92 아이는 부모와의 관계에서만 자라지 않는다. 또래 친구도 있고, 선생님도 있고, 가까운 친척도 있다. 그러므로 부모와의 관계에서 상처를 받았대도 얼마든지 치료할 수 있다. 어른들도 몇 년의 상담과 분석을 통해 자신의 삶을 근본부터 바꾸어 내는데, 배우고 회복하는 일이라면 아이들이 누구보다 전문가 아니던가. 어쩌면 '결정적 시기'란 부모의 불안과 두려움, 게으름을 합리화하는 핑계일지 모른다. 부모는 완벽할 수 없고, 늘 실수한다. 중요한 건 할 수 있는 만큼 최선을 다하는 것이다. 


p162 그때 분명히 잘잘못을 가리고 책임을 지도록 민원을 넣거나 법적인 절차를 밟았어야 했다. '차별 금지'에 대해 정확히 알고 있는 내가 그 일을 했어야 했다. 갈등을 두려워하지 말았어야 했다. 혹시 다른 교사나 다른 학부모에게 누가 될까 봐, 내 아이가 피해를 받을까 봐 움츠러들지 말았어야 했다. 좋은 게 좋은 게 아니라는 걸, 나쁜 건 나쁘다는 걸 말했어야 했다. 


p205 그러나 어떤 경우이든 평생 엄마 노릇을 하는 인생은 가능하지도, 바람직하지도 않다. 성장하는 삶, 자유로운 삶이란 더 많은 정체성을 경험하면서 풍부해지는 삶이 아니던가. 


p236 육아지 기자로 일했던 나는 어떤 게 '정상'이고 '표준'인지 비교적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 나는 '그 지식들은 어떻게 만들어졌으며 얼마나 믿을 만한가?', '그 지식들은 실제로 아이를 '잘' 키우는 데 얼마나 도움이 되는가?' 같은 질문들은 한 번도 해 보지 않았다. 오히려 그 '정상'과 '표준'을 아이를 채찍질하는 잣대로 삼았다. 내심으로는 '정상'과 '표준'을 뛰어넘어 특별한 1%가 되길 바랐다. 


p241 육아 지침들이 진정 중요해지는 지점은 한 부모와 한 아이가 처해 있는 '맥락'에서다. 기질이 소심하여 자신의 욕구와 기분을 잘 표현하지 못하는 아이가 유치원에서 친구를 때리고 왔다면, 공격적인 행동에 집중할 게 아니라, 아이가 드디어 자기표현을 했다는 걸 먼저 기뻐해야 한다. (중략) 절대적으로 옳은 가치는 그 어디에도 없으며, 엄마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원칙대로 아이를 키우는 것이 나쁜 일일 리 없다. 


p285 영국의 문화인류학자 그레고리 베이트슨은 이런 상황을 '이중 구속double bind'이라고 정의하면서 정신분열증(조현병)의 원인이 된다고 설명했다. 베이트슨은 발리 섬 주민 사이의 상호작용을 관찰한 결과, 이 이중 구숙 상태가 주로 어머니와 아이 사이에서 나타남을 발견했다. 예를 들어 어머니가 아이에게 "힘들면 쉬어야지"라고 말하고 돌아서면서 혼잣말로 "그래서 어떻게 살려고...." 한다면 아이는 쉬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몰라 혼돈에 빠지고 몸을 어떻게도 반응할 수 없는 정신 상태가 되는데, 이게 지속되면서 병증이 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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쉬는 시간에 읽는 젠더 이야기 - 소녀소년, 차별을 지우고 차이를 존중하며 평등을 외치다! 생각하는 청소년 6
김선광.이수영 지음 / 맘에드림 / 201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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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소년들이 읽기 쉽게 만들어진 책이라, 쉽게 술술 읽힌다. 

그렇다고 내용이 가볍지 만은 않다. 

어른의 입장에서, 교사의 입장에서 충분히 생각할 거리들이 많다.


외모가 스펙일 수 있는가?

학교가 성차별을 조장하고 있지는 않은가?

역차별은 없는가?

혐오표현은 어떤 것이 있나?


이런 문제들을 학생들과 한번 얘기해 보고 싶기도 하다만. 젠더 이슈가 요즘 학교에서도 워난 민감하여 교과와 무관하게 젠더 이슈를 꺼냈다가 오히려 역풍을 맞을까 싶기도 하다. 


성에 대해서 말할 때, 고귀한 것, 소중한 것, 순결... 뭐 이런 표현이 아니라 "사랑과 존중, 책임감을 바탕으로 한 성숙한 인간 관계의 표현"이라는 말이 맘에 든다. 성숙한 인간 관계의 표현. 

p114 하지만 성은 단순한 쾌락이나 육체적 본능에만 충실하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상대방에 대한 사랑과 존중, 책임감을 기반으로 하는 성숙한 인간 관계의 표현이어야 하죠. 


교사의 수업 평가를 학기말에 써 내게 하는 데, 한 남학생이 거기에 '앙 기모띠'라고 써서 냈다. 난 이게 무슨 말인지 몰라 일본어 선생님에게 물어보니 요즘 아이들이 '좋다'는 표현을 그렇게 한단다. 요즘 아이들이 워낙 많이 쓰는 말이 라며. 그런데 이런 뜻이 있단다. 내 참 어이가 없다. 그 학생에게 이런 표현을 쓴 것에 대해 한 마디 해줬어야 하는데... 

p192 일본 포르노물에서 비롯된 '앙 기모띠'는 성행위를 할 때 여성이 지르는 교성과 일본말 '기모치 이이(기분이 좋다는 뜻)'를 붙여 만든 말이라고 합니다. 이 말은 우선 여성을 성적 행위의 대상 내지는 쾌락의 대상으로만 여기는 측면에서 심각한 문제를 안고 있습니다. 아울러 청소년들에게 성행위 자체에 대한 그릇된 인식을 심어 줄 수 있는 아주 위험한 표현이죠. 


여학생의 자립에 대한 말을 하며, 엄마의 자립의 중요성까지 언급하고 있다. 기성세대인 엄마들은 어쩌면 자식에 대한 희생이 당연한 것으로 여기고 있을 수 있다. 그리고 모든 것을 쏟아부은 딸이 어쩜 나에게 반항을 하나 하는 생각을 할 수도 있을 것이고. 각자의 인생이다. 부모 자식 간에도 존중과 배려, 그리고 자립이 필요하다. 

p217 그래서 자립은 소녀에게만 중요한 것이 아니라 엄마에게도 중요합니다. 엄마도 자신만의 독자적인 생활 영역을 소중히 여기며 가꿔 나가야 한다는 뜻이죠. 서로가 자립해서 주체적인 존재로 우뚝 서서 각자의 삶을 지지해 줄 때, 엄마와 자녀 모두 행복해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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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워킹맘 남편입니다 - 살림하는 남자 아이 키우는 아빠
폴 킴 지음 / 피톤치드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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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 전 직장 생활을 1년 정도 하다가 그만두고 결혼했고, 

결혼 후 다시 직장생활을 하다 딸의 양육 문제로 다시 퇴사, 

그리고 본인의 사업을 3년 정도 하다가 정리하고, 

배우자의 유학을 따라 미국에서 2년 생활하다가, 

다시 한국으로 돌아와 직장을 구하는 대신 프리랜서를 하며 가정을 돌보고 있다.

이것만 읽어보면 여느 아내의 모습과 다르지 않다. 여자들의 삶도 이렇지 않은가. 양육문제로 퇴사하는 경우가 많고, 남편과 아이가 먼저다 보니 남편따라 유학도 가고, 아이땜에 직장을 구하기 보다 반찬값이라도 벌만한 소소한 일거리를 하게 되고. 

여기 이 책의 저자가 남자라서, 좀 그 점이 다르다는 건데, 

솔직히 이 책을 읽으며 여느 여자들의 삶과 크게 다르지 않아 대단하다는 생각은 안들었다. 남자인데 이렇게까지 희생했구나, 남자인데 이런 감정이 들겠구나 하는 그런 건 없었다. 

사실, 여자들도 직장 생활을 하다가 일이 없어지면 무기력해진다. 그리고 나이가 들면 몸이 아프기도 하고.


단지, 이 책이 가치있다고 느낀 건, 이제 남편도 워킹맘을 내조할 수 있다는 인식, 육아를 위해 남편이 일을 쉴 수 있다는 인식을 가지게 한 점 때문이다. 남자들이 육아휴직 쓸 수 있는 좋은 세상이라고 하지만 여전히 남자와 여자의 역할에 대한 고정관념이 깊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이 인식 개선에 도움을 줄 수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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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은 나눌 수 있는가 - 고통과 함께함에 대한 성찰
엄기호 지음 / 나무연필 / 201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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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은 나눌 수 있는가. 

이 책을 읽으며 요즘 아주대 대학병원의 우국종 교수가 생각났다. 사회적으로, 언론에서 대단한 이슈가 되는 "훌륭한" 의사이지만, 해당 대학병원으로부터는 따돌림을 당하고 있고 거기다 병원장에게 모욕적은 언사까지 들어야 했다고 하니... 결국 개인의 고통을 해소하기 위해선 사회적인 존경과 인정보다는 "곁"이 중요한 가 보다 싶다. 

나 역시 직장내 따돌림을 당한 경험이 있어 이를 해결해 보려고 심리상담, 집단상담이란 걸 꾸준히 받아보았다. 물론  내 자신의 문제점, 나를 둘러싼 갈등에 대해 입 밖으로 내뱉어 봄으로 해서 객관적인 시선을 가질 수 있었던 것도 사실이나, "곁"의 인정없이는 결코 해결되지 않았다.

고통을 나눌 수 있으려고, 즉 고통을 해결하려면 "곁"이 중요하고,

여기에 자신의 언어를 가질 수 있는 게 중요하다고 한다. 자신의 언어를 가진다는 것. 나도 요즘 사회과학서를 많이 읽게 되고 그러면서 밑줄 그을 표현들이 많다. 내가 내 언어로 말할 수 없는 부분을 작가들이 깔끔하게 정리해 주고 있어 밑줄긋기를 하게 된다. 내 언어를 찾기위한 초보단계가 아닐까 싶다. 이제 나도 내 언어를 찾아 나가야 하지 않을까? 


p89 요즘 여러 사회단체들에서 '수다 모임'을 만들려고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전문가에 대한 의존에서 벗어나 당사자들이 수다를 통해 기존의 언어와는 다른 언어를 만들어보려는 것이다. 특히 피해 당사자들이 모여서 이야기 나누는 것은 각자의 사연을 개별적이고 고립적으로 간주하여 '자기 문제'로만 생각하는 것을 넘어서게 하는 중요한 효과가 있다.  


p97 고통에는 세 가지 측면이 있다. 사회적 측면, 관계의 측면, 그리고 실존적 측면이 그것이다. 이 세 가지 차원에서 다시 거주할 세계를 구축하는 언어는 다 다르다. 고통의 사회적 측면을 인식하고 동시에. 주변에 공감하고 더구나 실존적 측면을 응시하는 것, 이 세가지를 동시에. 해낼 수 있는 '마법의 단어'는 없다. 


p124 그러나 자연과학적으로 그 실체와 메커니즘이 파악된다 하더라도, 고통은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이 말은 고통의 실체와 의미를 알 수 없다는 뜻이 아니다. 고통을 겪는 사람이 경험하는 자기 고통의 절대성 때문에 다른 사람에게 그 고통이 가닿을 수 없다는 말이다. 말할 수 없다는 것은 전달할 수 없다는 것이고, 전달할 수 없다는 것은 말로는 보태고 나눌 수 없다는 것이다. 이것이 고통이 무의미하다는 말의 뜻이다. 그 결과 고통의 절대성은 사람을 세계가 파괴된 '외로움'의 상태로 떨어뜨린다. 


사람의 존재감은 크게 세 가지 영역이 있는데, 첫 번째는 사회적 영역,

p135 두 번째는 내가 '곁'이라고 부르는 친밀성 영역이다. 이 영역에서의 존재감이 사라진 채 사회적 존재감만 가지고 있다면, 삶은 부단히 외롭고 쓸쓸해진다. 반대로 사회적으로 크게 쓸모 있는 존재라는 생각을 하지 못하더라도 나를 둘러싼 주변 사람들보터는 쓸모 있는 존재로 평가받을 때, 사람은 살아가면서 견딜 수 있는 힘을 얻는다. 곁의 존재감은 사회적 영역에서 상처받는 존재감을 회복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사랑'이 이 존재감의 핵심이다.

마지막은 내적영역으로 흔히 '자존감'이라고 부르는 영역의 존재감이다. 


p266 자신의 경험, 특히 자신이 겪은 고통의 경험에 대한 자기만의 생각과 언어를 고민하게 되면서 사람들이 폭발적으로 관심을 두게 된 것이 있다. 다른 사람의 삶, 즉 경험이었다. 사람들은 자기만의 생각을 가지기 위해 자기만의 생각을 가지게 된 사람들이 어떻게 그렇게 될 수 있었는지를 참조하고 싶어했다. 그 덕분에 많은 사람이 읽기 시작한 것이 다른 사람의 자서전이나 회고록, 그리고 일기와 같은 것이었다. 다른 누구에게 읽히기 위해 쓴 것이 아니라 오로지 자기에 대해 해명하기 위해 쓴 글들이 오히려 다른 사람들이 읽고 싶어하는 글이었다. '자기'에 대한 욕망이 생기면서 다들 하고 싶었던 것이 바로 그것이었기 때문이다. 


p271 이런 점에서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이 '교양'이었다. 들을 준비가 되어 있던 사람들이 글을 읽고 견문을 넓혔다. 우치다 타츠루는 '표현을 세밀히 나눈다는 것'이라는 글에서 견문이 넓어지는 것을 해상도가 높아지는 것이라고 적절하게 비유했다. 교양이 쌓이면 어휘가 풍부해진다. 어휘가 풍부해진다는 것은 이전까지 분별하지 못하던 것을 더 세밀하고 정확하게 분별해낼 수 있다는 것을 말한다. 분별력이 높아지니 사물이나 사건을 바라보는 해상도가 높아진다. 더 생생하고 세밀하고 정확하게 사물과 사건을 포착해낼 수 있게 한다. 이것이 우치다 타츠루는 '교양'이라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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