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통은 나눌 수 있는가 - 고통과 함께함에 대한 성찰
엄기호 지음 / 나무연필 / 201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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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은 나눌 수 있는가. 

이 책을 읽으며 요즘 아주대 대학병원의 우국종 교수가 생각났다. 사회적으로, 언론에서 대단한 이슈가 되는 "훌륭한" 의사이지만, 해당 대학병원으로부터는 따돌림을 당하고 있고 거기다 병원장에게 모욕적은 언사까지 들어야 했다고 하니... 결국 개인의 고통을 해소하기 위해선 사회적인 존경과 인정보다는 "곁"이 중요한 가 보다 싶다. 

나 역시 직장내 따돌림을 당한 경험이 있어 이를 해결해 보려고 심리상담, 집단상담이란 걸 꾸준히 받아보았다. 물론  내 자신의 문제점, 나를 둘러싼 갈등에 대해 입 밖으로 내뱉어 봄으로 해서 객관적인 시선을 가질 수 있었던 것도 사실이나, "곁"의 인정없이는 결코 해결되지 않았다.

고통을 나눌 수 있으려고, 즉 고통을 해결하려면 "곁"이 중요하고,

여기에 자신의 언어를 가질 수 있는 게 중요하다고 한다. 자신의 언어를 가진다는 것. 나도 요즘 사회과학서를 많이 읽게 되고 그러면서 밑줄 그을 표현들이 많다. 내가 내 언어로 말할 수 없는 부분을 작가들이 깔끔하게 정리해 주고 있어 밑줄긋기를 하게 된다. 내 언어를 찾기위한 초보단계가 아닐까 싶다. 이제 나도 내 언어를 찾아 나가야 하지 않을까? 


p89 요즘 여러 사회단체들에서 '수다 모임'을 만들려고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전문가에 대한 의존에서 벗어나 당사자들이 수다를 통해 기존의 언어와는 다른 언어를 만들어보려는 것이다. 특히 피해 당사자들이 모여서 이야기 나누는 것은 각자의 사연을 개별적이고 고립적으로 간주하여 '자기 문제'로만 생각하는 것을 넘어서게 하는 중요한 효과가 있다.  


p97 고통에는 세 가지 측면이 있다. 사회적 측면, 관계의 측면, 그리고 실존적 측면이 그것이다. 이 세 가지 차원에서 다시 거주할 세계를 구축하는 언어는 다 다르다. 고통의 사회적 측면을 인식하고 동시에. 주변에 공감하고 더구나 실존적 측면을 응시하는 것, 이 세가지를 동시에. 해낼 수 있는 '마법의 단어'는 없다. 


p124 그러나 자연과학적으로 그 실체와 메커니즘이 파악된다 하더라도, 고통은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이 말은 고통의 실체와 의미를 알 수 없다는 뜻이 아니다. 고통을 겪는 사람이 경험하는 자기 고통의 절대성 때문에 다른 사람에게 그 고통이 가닿을 수 없다는 말이다. 말할 수 없다는 것은 전달할 수 없다는 것이고, 전달할 수 없다는 것은 말로는 보태고 나눌 수 없다는 것이다. 이것이 고통이 무의미하다는 말의 뜻이다. 그 결과 고통의 절대성은 사람을 세계가 파괴된 '외로움'의 상태로 떨어뜨린다. 


사람의 존재감은 크게 세 가지 영역이 있는데, 첫 번째는 사회적 영역,

p135 두 번째는 내가 '곁'이라고 부르는 친밀성 영역이다. 이 영역에서의 존재감이 사라진 채 사회적 존재감만 가지고 있다면, 삶은 부단히 외롭고 쓸쓸해진다. 반대로 사회적으로 크게 쓸모 있는 존재라는 생각을 하지 못하더라도 나를 둘러싼 주변 사람들보터는 쓸모 있는 존재로 평가받을 때, 사람은 살아가면서 견딜 수 있는 힘을 얻는다. 곁의 존재감은 사회적 영역에서 상처받는 존재감을 회복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사랑'이 이 존재감의 핵심이다.

마지막은 내적영역으로 흔히 '자존감'이라고 부르는 영역의 존재감이다. 


p266 자신의 경험, 특히 자신이 겪은 고통의 경험에 대한 자기만의 생각과 언어를 고민하게 되면서 사람들이 폭발적으로 관심을 두게 된 것이 있다. 다른 사람의 삶, 즉 경험이었다. 사람들은 자기만의 생각을 가지기 위해 자기만의 생각을 가지게 된 사람들이 어떻게 그렇게 될 수 있었는지를 참조하고 싶어했다. 그 덕분에 많은 사람이 읽기 시작한 것이 다른 사람의 자서전이나 회고록, 그리고 일기와 같은 것이었다. 다른 누구에게 읽히기 위해 쓴 것이 아니라 오로지 자기에 대해 해명하기 위해 쓴 글들이 오히려 다른 사람들이 읽고 싶어하는 글이었다. '자기'에 대한 욕망이 생기면서 다들 하고 싶었던 것이 바로 그것이었기 때문이다. 


p271 이런 점에서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이 '교양'이었다. 들을 준비가 되어 있던 사람들이 글을 읽고 견문을 넓혔다. 우치다 타츠루는 '표현을 세밀히 나눈다는 것'이라는 글에서 견문이 넓어지는 것을 해상도가 높아지는 것이라고 적절하게 비유했다. 교양이 쌓이면 어휘가 풍부해진다. 어휘가 풍부해진다는 것은 이전까지 분별하지 못하던 것을 더 세밀하고 정확하게 분별해낼 수 있다는 것을 말한다. 분별력이 높아지니 사물이나 사건을 바라보는 해상도가 높아진다. 더 생생하고 세밀하고 정확하게 사물과 사건을 포착해낼 수 있게 한다. 이것이 우치다 타츠루는 '교양'이라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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