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행 슬로 보트 Remix
후루카와 히데오 지음, 김현희 옮김 / 문학사상사 / 2005년 4월
평점 :
절판



[ 1 ]



  이 작품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이미 영화 업계에서는 고전적인 명제로 자리 잡은 그것, “전작보다 나은 속편은 없다”

 

  맞다. 분명 이 소설은 무라카미 하루키의 원작 <중국행 슬로보트>보다 떨어진다. 구성상의 밀도도 부족하고, 작품에 제시된 이미지도 선명하지 못하며, 심지어 주제의식까지도 모호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 작품에 주목한다. 아니 이 표현은 잘못되었다. 내가 주목하는 것은 이 작품 그 자체라기보다는, 이러한 시리즈물을 생각해낸 기획력이다.


  “리믹스소설”이라는 용어는 낯설다. 물론 ‘리믹스’라는 용어 자체가 낯선 것은 아니다. 이 용어는 음악, 특히 대중음악에 있어서는 이제 일반적인 용어가 되었을 정도로 많이 사용되고 있다. 그러나 이미 사용되고 있는 용어라고 해서, 이를 문학에도 그대로 적용시킬 수 있는가? 나는 잠시 고민한다. 그리고 상념은 보다 근원적이고 추상적인 부분으로 이어진다. (근원이나 추상과 같은 단어가 마음에 들지 않는 독자들은 다음에 이어지는 단락을 건너뛰고 이 글을 읽는 것이 좋다. 뭐, 상관없다. 그런 상념을 하는 나 역시도, 남들의 상념을 읽는 일은 그리 좋아하지 않으니까. 아무튼 생각을 조금만 이어가자.)


  문학은 대중음악과 다른가? 결국 내 생각은 이 질문으로 국한된다. 만일, 다를 것이 없다면, 이 용어를 사용하는 것은 무리가 될 수 없다. 오히려 적극적으로 받아들일만한 기법이다. 그렇지만 만일, 다르다면? 쉽지 않은 문제다. 일단 고전적인 명제에서부터 시작하자.

  문학은 다른 장르에 비해서 작가의 세계관이나 사회의식이 분명하게 표현된다. 그러나 이것은 충분한 대답이 되지 못한다. 다른 사람의 작품을 표절한 것도 아니고, 단지 그 작품을 토대로 창작을 시작했을 뿐이라면, 그리고 원작과는 분명하게 다른 작품으로 만들어졌다면, 이를 통해서 작가의식은 분명하게 표현될 수 있다. 그렇다면 이 기법을 사용하는 것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다음, 문학 각 장르에는 오랜 시간 동안 축적된 스타일이 내재되어 있다. 그러나 이 역시 내 질문에 대한 답이 되지 못한다. 그건 다른 예술 장르도 마찬가지이다. 모든 예술, 그리고 단순한 창작자 이상인 작가는 자신만의 독특한 스타일을 가진다. 더구나 리믹스음악이라고는 해도, 그것은 원곡을 그대로 부르는 것이 아니라, 최근의 경향에 따라 새롭게 창작된다. 그렇다면, 이 역시 나름의 스타일을 만들어내는 것이 아닌가?

  마지막으로, 대중예술 장르와는 달리 문학의 창작자는 ‘작가’라도 호칭된다. 이 부분에 있어서는 문제가 조금 복잡해진다. ‘작가’라는 호칭에는 그의 권한에 대한 절대성이 내포되어 있다. 광고를 만드는 사람도 창작활동을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광고주의 요구를 치장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영화를 만드는 사람도 창작활동을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는 투자자와 관객의 요구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그에 비해 문학작품을 만드는 사람은 자신의 창작품에 있어서, 거의 절대적인 권한을 행사한다. 물론 출판사나 잡지 편집자의 견해가 제시되는 경우도 있지만, 대중예술에 비한다면 그 영향력은 지극히 미비하다. 그래서 우리는 문학작품의 창작자에게 ‘작가’라고 부른다. 그리고 이 단어 속에는 작가라면 온전하게 독창적인 창조력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의미가 되기도 한다. 맞다. 내가 ‘리믹스’라는 용어를 받아들이는데 주춤거렸던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리믹스 기법을 사용한다면, 작가의 창조력은 온전히 자신만의 것으로 한정되지 않는다. 하지만 나는 여기에서 또 다른 의문을 떠올린다. 과연 작가의 지위가 그렇게 절대적일 필요가 있는가? “태양 아래 온전히 새로운 것은 없다”는 포스트모더니즘의 명제처럼, 어떤 작품도 앞선 작가들, 그리고 작품들과의 영향력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다. 서로 다른 시대, 서로 다른 공간, 서로 다른 개성의 작가들은, 그리고 그들이 만들어낸 작품들은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다. 그것은 때로 동감(同感)이 되기도 하고, 때로는 반감(反感)이 되기도 하지만, 관계를 맺는다는 점에서는 차이가 없다. 요컨대, 너무 어깨에 힘을 줄 필요는 없는 것이다. 작가라는 명칭에 부여된 전지전능한 창작자로의 무게를 조금만 덜어낸다면, ‘리믹스소설’이라는 용어는 충분히 사용가능하다. 




[ 2 ]


  무라카미 하루키가 <중국행 슬로보트>에서 말하고자 했던 것은 “인간이 인간을 이해하는 것의 어렵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노력을 그쳐서는 안 된다”는 다소 선언적인 내용이라고 나는 읽었다. 하지만 이 리믹스소설의 저자 후루키와 히데오는 나와는 다른 관점에서 <중국행 슬로보트>를 읽었다, 라고 나는 이 작품을 읽으면서 생각했다. 리믹스 작업을 통해서 그가 말하려고 했던 것은 무엇인가?


  우선, 그는 제목에다 “도쿄 탈출기”라는 설명을 달았다. 하지만 왜 그곳을 탈출해야 하는지에 대한 설명은 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는 탈출을 시도한다고 하면서도, 각 연도별로 당시 도쿄에 대한 기억을 모으려는 노력도 함께 진행하고 있다. 이제는 다소 천박해진 느낌까지 있지만, “잊어버리는 것이 가장 빠르고도 완전한 탈출”이 아니던가.

  아마도 ‘탈출’과 관련되는 상상력은 하루키의 작품 끝부분에 나오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계기가 된 것이리라.


  오류……, 오류라는 것은 그 중국인 여자 대학생이 말했던 것처럼(혹은 정신 분석의가 말했던 것처럼) 결국은 역설적인 욕망일지도 모른다. 아무데도 출구 따위는 없는 것이다.

- 무라카미 하루키,「중국행 슬로보트」, 『오후의 마지막 잔디밭』, 모음사, 1991, p.44.


  하지만 나는 그 의미를 알지 못한다. 이 작품의 주인공은 어째서 도쿄를 탈출하려고 하는 것인가? 작품을 읽고, 그 감상을 생각하고, 이렇게 글을 쓰고 있는 지금까지도 나는 그 이유를 명확하게 잡아내지 못하고 있다. 어쩌면 이것은 하루키가 이야기했던 “이해할 수 있는 부분도 있겠지만, 이해할 수 없는 부분도 있겠지요”(무라카미 하루키, 앞의 작품, p.21.)라는 구절에 해당하는 부분인지도 모르겠다. 히데오와 나 사이에는 건너기 힘든 거리가 있다. 그것은 적어도, 현해탄만큼이나 넓고, 깊다. 동경에 사는 사람이 아닌 나는 그의 말을 이해하지 못한다.

  내가 이 작품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단순히 거리 때문은 아니다. 나는 하루키가 “아무데도 출구 따위는 없는 것이다”라고 중얼거렸을 때, 동감했다. 맞다. 도쿄가 아닌 서울에 사는 나에게도 출구는 없었다. 그리고 (꼭 그런 이유 때문만은 아니지만) 그 문장을 읽은 뒤 조금의 시간이 지나서 나는 서울을 빠져나왔다. 이런 점에서 하루키는 히데오보다 좀더 보편적이라고 하겠다. 하루키의 도쿄는 서울이기도 하고 뉴욕이기도 하지만, 히데오의 도쿄는 오직 도쿄일 뿐이었다. 


  하루키가 ‘중국인’이라는 계층을 통해서 모든 소외 받는 사람들을 이야기했다면, 히데오는 이를 남자와 여자의 관계에 국한시키고 있다. 아마도 그는 남자와 여자 사이에서 바다를, 바다 건너의 또 다른 중국을 발견했을 것이다. 하긴, 가장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으면서도, 가장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남자와 여자가 아닌가. 그러니 그 둘 사이에 건너기 힘든 바다가 가로놓여 있다는 설정이 억지스러운 것은 아니다.

  하지만 아쉽다. 서로를 이해하지 못해서 만들어지는 바다는, 비단 이런 경우에만 생기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남자와 여자가 아닌,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도 바다는 만들어진다.


  여기에서 다시 불만이 생긴다. 그가 바다, 즉 단절의 상황을 인식하는 관점에도 문제가 있다. 리믹스소설의 주인공은 항상 빼앗긴다. 처음 좋아했던 누나를 그녀의 부모가 빼앗아가고, 두 번째 좋아했던 대학 동급생은 다른 남자에게 빼앗기고, 마지막으로 좋아했던 여자 아이와의 공간은 난데없는 우박으로 가게가 무너지면서 빼앗긴다. 그는 항상 수동적이다. 그는 손에 피를 묻히지 않는다. 그는 아무런 잘못을 하지도 않았는데, 상황이 그에게 상처를 준다.

  하지만 이것은 지극히 저열한 변명이고, 자기만족이다. 현실은 그렇지 않다. 현실에서도 상대방이 나에게 상처를 주기도 하지만, 내가 상대에게 상처를 입히기도 한다. 요컨대, 손에 피를 묻히지 않고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는 것이다. (하루키의 소설에서도 그렇다. 그가 만났던 두 번째 중국인, 그 여자아이에게 주인공은 상처를 입힌다. 비록 의도하지는 않았다고 하더라도.)


  리믹스된 노래에는 피할 수 없는 굴레가 지워진다. 원작과의 비교가 그것이다. 그리고 대부분 원작에 비해 좋은 평을 받기 힘들다. 리믹스곡을 듣는 사람 중의 많은 수가 원작에 대한 애착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사람이 무언가에 애착을 가지게 되면, 가능한 그것이 변하지 않기를 바란다. 설령 나는 나이를 먹어 머리가 벗겨지기 시작하고 군살이 붙어버렸을 지라도, 그때 그 노래를 부른 가수만은 여전히 청춘이기를 바란다.

  알고 있다. 그것은 욕심이다. 시간이란 것은, 지독하게도 공평하다. 누구도 시간을 거스를 수는 없다. 그리고 리믹스되지 않는다면 내가 사랑했던 노래는 언젠가 잊혀져 버리게 될 것이다. 하지만 알고 있는 대로 움직일 수 있다면, 그것이 어다 사랑인가? 이런 점을 충분히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원작 <중국행 슬로보트>에 더 많이 눈이 가고, 그렇기 때문에 <중국행 슬로보트 Remix : 도교 탈출기>에게는 아쉬움을 느낀다. 그러므로 이 서평은 다분히 감정적이다. 하긴, 내가 이 책을 읽은 시선부터가 곱지 않지 않았던가.



[ 3 ]


  리믹스소설이라는 기법은 제법 활용해볼만 하다. 우리나라에도 이런 기법을 적용한 작품이 나올 수 있을 것이다. 예를 들면, 김승옥의 <서울, 1964년 겨울 Remix>나 이문구의 <관촌수필 Remix> 같은 작품이 나온다면, 나는 다시 한번 애증이 섞인 눈으로 그 작품을 읽어치울 것이다.

  또한 이 기법은 소설 창작을 연습하는 사람들에게 도움이 될 것이다. 하긴 습작기에는 꼭 이렇게 ‘리믹스’라는 타이틀을 붙이지 않아도, 선배 작가들의 냄새를 강하게 피우지 않는가.


아무튼, ‘리믹스’라……  지속적인 관심과 고민이 필요한 기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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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달, 바보가 된 고구려 귀족
임기환 기획, 이기담 지음 / 푸른역사 / 2004년 11월
평점 :
품절


 

[ 1 ]

 


“과거를 지배하는 사람이 미래를 지배하고, 현재를 지배하는 사람이 과거를 지배한다.”

- 조지 오웰, 『1984』 중에서


  “역사는 진실이고, 소설은 거짓이다”라는 말은 착각이다. 그것도 아주 위험하고도 분명한.


  역사는 사실에 기반을 두고 있지만 그 자체가 진실이 되지는 않는다. 오히려 그것은 아주 위험한 방향으로, ‘진실’의 가면을 쓴 거짓으로 왜곡되기 십상이다. 독일 히틀러 정권의 게르만 신화 조작이나, 일본의 역사교과서 왜곡이 그 대표적인 예가 아니겠는가?

  그러나 이런 거창한 일이 아니더라도 역사가 잘못 알려질 경우, 현실에 잘못된 영향을 미치는 예는 너무도 많다. 일본 사람들은 <임나일본부설(任那日本府說)>을 진실이라고 교육받는다. 그래서 그들은 여전히 한국을 식민지로 만드는 것은 자신들의 옛 영토를 되찾는 것이라고 착각하기 쉽다.『1984』의 빅브라더는 수많은 문명의 이기를 자신이 발명한 것이라고 국민들을 속였다. 그래서 그들은 빅브라더를 위대한 구원자라고 착각한다. 이런 잘못된 지식으로 인해서, 그들은  잘못된 현실을 만들거나, 현실의 잘못을 유지시키는데 (자신들도 모른 채) 협조하게 된다.

  잘못 알려진 경우만 문제인 것은 아니다. 알려지지 않는, 더구나 누군가에 의해 의도적으로 감추어진 역사도 역시 문제이다. 우리나라 사람들의 대부분은 우리 독립운동사에 대해서 잘 알지 못한다. 그래서 간혹 우리의 광복이 오로지 미국을 주축으로 하는 연합군의 승리에 의해서만 얻어진 타율적인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처럼 감추어진 역사 역시 현실을 잘못된 방향으로, 혹은 현실의 질서를 유지시키려는 세력에 협력하게 된다.


  역사를 바로 아는 일이 중요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역사는 결코 지나간 과거가 아니다. 그것은 현재와 끊임없이 대화하고 있으며, 그로 인해 현재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한다. 그러므로 역사를 발굴하고, 가르치고 거기에 현재적 의미를 부여하는 일은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그런데 우리의 현실은 어떠한가? 우리의 역사 발굴 및 해석 수준은 아직 부족하기만 하고, 역사 교육 방법에 대한 논의도 충분하지 못하고, 더욱이 역사적 사실에 대한 현재화 작업은 수준을 말하기에도 부끄러운 실정이다.

  이러한 현실은 <온달 이야기> 역시 다르지 않다. 오랜 시간 동안 우리는 온달을 옛 이야기 속의 주인공, 그것도 ‘바보’로 한정시켜 받아들였고, 교육해 왔다. 그러나 정말 그것이 전부였을까? 바보에게 시집을 갔던 평강공주는 정말 현실감각이 부족한 사람에 지나지 않았나? 결혼한 후 짧은 시간 동안 명장으로 성장할 수 있었던 온달이 과연 바보에 지나지 않았을까? 온달은 왜 위험하기 짝이 없는 전투에 자진해서 나갔던 것일까? 이런 질문에 대한 해답은 기존의 연구(역사학과 국문학 모두)에서 주어지지 않았다.

  그러므로 이 책이 제시하는 다음과 같은 문제의식은 탁월하고, 이런 문제에 천착한 이 책의 기획의도 역시 탁월하다.


  「나는 먼저 온달 이야기를 분석한 모든 연구논저를 연구자의 시각과 분야에 따라 재분류했다. 그러자 역사학자들과 국문학자들의 연구 경향이 매우 다르게 나타났다. 역사학자들은 온달이 실존 인물임을 증명하는데 초점을 둔 반면, 국문학자들은 온달이 설화 속 인물이라는 가정을 전제로 삼아 접근하는 경향이 있었다. 이렇다보니 어느 한족의 연구 성과에만 의존하다 보면 균형 잡힌 결과를 도출해내지 못할 위험이 있었다.」- p.74.


  그러나 이 책 역시 온달 이야기에 대한 해답을 제시하지는 못한다. 그저 다양한 해석의 가능성을 제시할 뿐이다. 더구나 이처럼 탁월한 문제의식을 그렇게 몇 번이고 반복했던 것도 역시 문제이다. 타당하고 또 타당한 이야기이지만, 아무리 좋은 이야기라도 이렇게 반복해서 듣게 된다면 누군들 지겹지 않겠는가?


  사실, 이처럼 오래된 이야기의 진실은 연구를 통해서 확인될 수 없다는 것은 지극히 당연할 지도 모른다. 그것은 과학적 논리력으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오히려 소설을 비롯한 예술작품이 가진 상상력으로 해결해야 할 문제이다.

  이러한 접근 방법은 비판받을 여지가 많고, 또한 역사적인 오래를 일으킬 여지도 많이 있지만 (그래서 이 책에서도 설화나 허구에 대한 부분은 조심스럽게 다가갈 수밖에 없었겠지만), 대중의 관심을 유도하는데 있어서 예술이 가진 영향력만큼 효과적인 것은 없다. 관심을 가지는 사람들이 많아야, 연구인력 및 연구결과에 대한 수용 인력도 늘어날 것이고, 그래야 보다 정밀한 연구가 가능하지 않겠는가? 그러므로 옛 이야기에 대한 예술적인 상상력을 통한 접근이야 말로, 역사적 사실을 밝히기 위한 첫 번째 단계라고 하겠다.


  일본과 자꾸 비교하게 되는데, 일본만 하더라도 자신들의 역사와 설화에 대한 현대화 작업이 활발하게, 소름끼칠 정도로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애니메이션 <원령공주>나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에서 현대화 된 설화, 만화 <배가본드>를 통해서 재해석되는 미야모토 무사시와 같은 역사적 인물, 그리고 각종 게임에 도입되는 일본의 전래적 이야기 및 디자인적 요소들. 이런 작업이 이루어진다는 것 자체도 대단하지만, 이것이 대부분 자신들의 역사를 보다 멋지게 왜곡하고 있다는 점은 으스스하기까지 하다.

  우리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 우리에게는 이런 작업이 거의, 정말로 거의, 없다. 흔히 소재가 없다고 말한다. 그러나 정말 소재가 없는 것인가, 아니면 소재를 찾으려고 노력하지 않은 것인가? 너무나 당연하게도 우리에게도 좋은 소재는 많다. 그 대표적인 예가 이 책에서 다루고 있는 온달이 아닐까?

  물론 우리에게 이러한 시도 자체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문제는 시나리오(스토리텔링)에 있다. 이에 가장 적합한 말이 “구슬이 서 말이라도 꿰어야 보배”이다. 아무리 좋은 재료가 있어도, 그것을 잘 꿰어야 보배가 된다. 그리고 바로 그 ‘꿰는’ 작업을 하는 것이, 이야기 즉 서사예술의 역할이다.


  이런 점에서 이 책은 한계를 가진다. 이 책은 역사학과 국문학의 균형을 유지하기 위해서, 보다 직접적으로 말하자면 ‘온달’의 역사성에 집착한 나머지, ‘온달과 평강공주’가 가지는 이야기성(敍事)을 간과하고 말았다.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온달이 의미를 가지는 이유는, 그가 역사적인 인물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가 나름의 이야기를 가지는 인물이기 ㏏?甄? 이야기를 가진다는 것은 거짓을 통해 진실을 이야기 한다는 것, 더 나아가 시대를 뛰어넘은 예술적 초월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역사와 함께 중요하게 다루어져야 할 것이 ‘온달이야기’의 예술적 가치가 아니겠는가?

 

 


[ 2 ]


"아아, 온달이여, 살아서는 어리석지 않았고 죽어서는 신이런가.(嗚呼溫達 生亦不遇死猶神)"

- 이학규의 시 「우온달(愚溫達)」 중에서


   물론 이 책에서도 온달에 대한 설화를 소개하고 있다. 그러나 이는 단순한 나열과 소개에 그쳤을 뿐, 이를 재창조하는 작업, 혹은 재창조 작업에 대한 분석에 이르지 못했다. 이 부분을 강조했다면, 보다 드라마틱한 전개가 가능하지 않았을까?

  우리의 문학작품에서 온달이야기를 재해석 한 것으로는, 최인훈의 희곡「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와 김지원의 소설 「편강공주와 바보 언달」등이 있다. 이에 대한 분석, 혹은 작가와의 인터뷰가 포함되었다면 더욱 다채로운 해석 가능성이 제시되었을 것이다. (희곡의 경우에는 그것을 공연했던 배우들이나 관람객들과의 인터뷰도 가능했을 것이다.)


  앞으로 이와 같은 기획의도를 가진 저술이 보다 많이 발표되어야 한다. 그러나 책도 역시 하나의 문화상품이라면, 보다 독자들의 흥미를 자극할 수 있는 방법을 강구되어야 할 것이다.

  흔히 문화산업의 가치를 강조하는 예로 영화 <타이타닉>이 거둔 수익을 예로 드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이 예는 <타이타닉>이 얼마를 벌었는지에만 집중하고 있지, 왜 수익을 올릴 수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간과하고 있다. 이 예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이 영화가 좋은 스토리텔링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영화뿐만 아니다. 책도 마찬가지이다. 책도 스토리텔링이 있어야 한다. 그것도 아주 좋은, 독자들이 흥미를 가질만한. 

 

 



[ ]


온달은 고구려 평강왕 때 사람이다. 겉모습은 꾀죄죄하여 우스웠으나 속마음은 맑았다. 집이 몹시 가난하여 늘 먹을 것을 빌어 어미를 봉양하였다. 찢어진 옷과 헤진 신발로 시정 사이를 왕래하니, 당시 사람들이 이를 가리켜 바보 온달이라 하였다. (溫達 高句麗平岡王時人也。 容貌龍鐘可笑 中心則曉然。 家甚貧 常乞食以養母。 破衫弊履 往來於市井間 時人目之爲愚溫達) -『삼국사기』권45 열전5 온달편


  사족이다. 온달이야기의 원문을 처음 공부했을 때부터, 나는 이 점이 참으로 궁금했다(그런데 왜 선생님들께 질문하지 않았는지…… 지금 생각하면 후회될 뿐이다).


  원문에는 ‘愚溫達’이라고 되어 있다. 어리석을 (우)에 온달이라는 이름이다. 그리고 이를 ‘바보 온달’이라고 해석한다. 그런데 왜 이렇게 해석되는 것일까?

  어르신들의 호를 살펴보면 종종 ‘愚’자를 사용하는 경우를 볼 수 있다. ‘愚巖’과 같은. 그런데 이 경우에 ‘愚’는 ‘바보’라는 의미가 아니라, ‘어리석다’의 의미가 된다. 그리고 여기서의 어리석음이란, “세상 풍파에 어울리지 않는” 혹은 “부귀권세를 탐내지 않는”이라는 의미인 경우가 많다.

  그렇다면 愚溫達’ 역시 ‘바보 온달’이 아니라, ‘어리석은 온달’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다시 말해서, 세상 풍파에 어울리지 않고 청렴하게 살아가는 숨은 인물이 될 수도 있지 않겠는가. 그렇다면 공주가 그에게 끌린 이유도, 온달이 어여쁜 공주를 거절하는 이유도, 공주와 결혼하면서 짧은 기간에 갑작스럽게 성장하여 용맹을 떨치는 원인도 해결될 수 있다.


  물론, 이런 해석은 한 문장만 가지고 짐작할 수는 없다. 아마도 이를 해석한 연구자들은『삼국사기』전체 혹은 당대의 한문학 전체를 가지고 이 문장을 해석했으리라. 그러나 나의 상상력은 이를 다르게 해석할 수 있을지 모른다는 의심을 계속하게 된다.


  내 해석과는 약간 다른 측면이지만, 愚溫達’이란 구절을 다르게 해석한 분도 있었다.

  (관심 있는 분들은 님의 블로그를 방문해보시기 바란다. 관련 게시물의 주소는 다음과 같다.)

   http://blog.naver.com/art2173/120011893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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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 퍼니 발렌타인
무라카미 류 지음, 양억관 옮김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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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 1. 연애, 소설의 기원 ]



  “연애는 인간의 근본적인 감정이다”라는 말은 현대가 만들어낸 신화에 불과하다. 적어도 ‘애정’이라는 단어가 아니라, ‘연애(戀愛)’라는 단어를 사용할 경우에는 그러하다.

  인간은 실체를 확인할 수도 없는 단어들에 현혹되곤 하는데, 이를테면 영원, 낙원, 구원, 평화, 자유, 평등, 절망…… 따위의 말들이 그것이다. 이 말들은 도무지 정체를 확인할 수도 없으며, 공통된 경험을 추출할 수 없고, 그 구체적인 면모를 표현할 수도 없다. 그러나 바로 그러하기에 이러한 단어들에 대한 인간의 동경은 끊임없이 계속되었다. 그것도 매우 강렬하게.


『지금까지 연애소설이라는 말에 의미가 있었던 것은, 연애가 특별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19세기에 프랑스에서 확립되었다는 연애란 놈은 특권계급의 소유물로, 일반 서민에게는 동경의 대상이었을 따름이다. 그래서 연애소설이 필요했던 것이다.』


  무라카미 류는 작가 서문에서, 연애에 대해서 이렇게 말했다. 그의 말은 타당하다. 사실, ‘연애’라는 말 자체가 근대의 산물이다. 근대 이전의 사람들에게는 연애는 특정 계층의 전유물에 불과했다. 서구의 연애소설이 기사와 공주/귀부인의 ‘플라토닉한 불륜’에 기원을 두고 있다는 사실이 그 증거이다. 이는 동양에서도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 <운영전>의 주인공들이 그러하고, <구운몽>의 성진과 여덟 명의 선녀들이 그러하며, <춘향전>의 몽룡과 춘향이 그러하다.

  그렇다면 나머지 사람들은 어떠한가? 그들에게는 연애보다는 하루하루의 노동과, 한 끼 한 끼의 식량이 훨씬 주요한 문제였을 것이다. 단언하건데, 먹고사는 문제보다 더 큰 문제는 없다. 그렇기 때문에, 생계를 압도하는 예술이란 있을 수 없다. 그들에게 연애는 ‘실체를 확인할 수 없는 단어’에 불과했다. 그러나 바로 그러했기에 그들은 끊임없이 그 단어에 대한 환상을 만들어 냈다. 이들이 만들어낸 환상은 연애소설의 두 가지 전형이 되었는데, 하나는 서구에서 유행했던 사랑할 수 없는 사랑을 사랑하는 이야기이고, 다른 하나는 동양에서 유행했던 서로 사랑하지만 신분의 차이로 인해 고통을 당하는 이야기이다.

  이러한 이야기들에서 연애소설에 대한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우선, 랜슬롯과 기니비어 왕비의 불륜이 그러했던 것처럼, ‘플라토닉’과 ‘불륜’이란 결합될 수 없는 것이며, 결합된다하더라도 오히려 더욱 비겁하고 타락한 사랑의 양태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니 그들이 이런 연애를 꿈꾸었다면 이는 감정의 작용이 아니라 권태를 이기기 위한 장난, 혹은 자신을 돋보이기 위한 치렁치렁한 액세서리와 같은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연애소설의 특징을 찾아볼 수 있다. 즉 연애소설이란 현실에서 일어날 수 없는 환상에 기반을 둔 이야기이다.

  또한, 이몽룡과 성춘향의 결합이 그러했던 것처럼, 신분을 뛰어넘는 연애, 나아가 신분의 상승으로 이어지는 연애는 불가능하다. 만일, 춘향이가 몽룡의 첩실이 되었다면 다소 현실성을 획득했을 것이다. 그러나 연애소설에서 이런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연애소설의 독자들은 어정쩡한 이야기를 용납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런 측면에서 연애소설의 독자를 확인할 수 있다. 즉 연애소설이란 현실을 뛰어넘고자 하는 인물들, 특히 자신의 힘으로는 현실을 뛰어넘을 수 없기에 누군가의 도움이 절실히 필요한 인물들을 위한 이야기이다. 연애소설의 주된 독자가 여성이었다는 사실도 같은 연장선에서 이해되는데, 특히 조선 후기 연애소설의 열렬한 독자였던 집단이 바로 궁녀였다는 사실, 그리고 이들은 독자이면서 창작자이기도 했다는 사실이 이를 증명한다.

  연애소설은 “로망스에 나타나는 여성을 보살피는 남성주인공의 등장은 여성 자신이 외디푸스 시기 이전의 어린시절 이후로 느껴보지 못한 보살핌과 관심의 원천이 되는 환상”이라는 래드웨이의 견해나, “연애소설이란 소녀가 체험하는 외디푸스의 드라마”라는 카워드의 견해도 이러한 연애소설의 특징을 그대로 반영하는 것이다(Janice A. Radway, “Reading the Romance - Woman, Patriarchy, and Popular Literature”, The University of North Carolian Press, 1984.; 존 스토리, 박모 역,『문화연구와 문화이론』, 현실문화연구, 1995, p.187. : 이 견해들의 내용 및 출처는 김지영,「정비석 초기 연애소설 연구」, 부산대 국문과 석사학위논문, 2000, p.15.에서 참고한 것임).



[ 2. 연애, 소설의 상품화 ]



  이러한 특징을 가진 연애, 혹은 연애소설은 시대에 따라 변모한다.

  근대 이전의 연애소설은 그것이 가진 환상성을 그대로 드러내었다. 거짓이라는 것을 뻔히 드러내는 거짓말, 속임수라는 것을 뻔히 드러내는 마술, 그렇다면 이러한 거짓말과 마술은 더 이상 거짓말도 마술도 아닌, 한바탕 신명나는 놀이가 된다.

  놀이는 현실이 아니다. 놀이를 주도하는 사람도, 놀이에 참가하는 사람도 모두 그 사실을 알고 있다. 그 사실을 알기 때문에 이들의 놀이인 ‘연애소설’이 아무리 과격한 내용을 담고 있더라도, 현실은 조금도 변하지 않는다. 변하지 않는 걸을 알고 있으니, 연애소설을 읽는 사람도 연애를 꿈꾸지 않고, 꿈꾸더라도 그것이 현실에 나타나지 않을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므로 그들에게 있어서 연애소설은 한바탕 꿈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근대로 접어들면서 사정은 변한다. 연애를 할 수 없었던 혹은 하지 못했던 계층인 부르주아가 사회의 중심세력이 되면서, 그리고 그러한 변모를 지켜보면서 사람들은 연애의 가능성을 느낀다. 이제 그들에게 연애는 더 이상 환상만은 아니게 된 것이다.

  이루어질 수 없다고 믿었던 관계가 이루어지는 경우, 아니 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선을 넘어버려도 이전처럼 무자비한 보복을 당할 경우가 생기기 시작했다. 그러니 이제 더 이상 ‘플라토닉한 불륜’이라는 애매모호한 관계에 안주하기보다는, ‘플라토닉’ 혹은 ‘불륜’을 분명하게 선택할 수 있었다. 「좁은 문」이 플라토닉으로 기울어진 예라면, 「보바리 부인」은 불륜으로 기울어진 예라고 하겠다. (상대적으로 근대 체험이 늦어졌던 아시아, 특히 우리의 소설에서는 플라토닉의 형태가 개화 혹은 계몽의 형태로 나타나기도 하는데, 이광수의 『무정』이 그 예가 될 것이다.)

  또한 태생적인 계급에 의해 신분의 동반상승이 불가능했던 제약이 느슨해지면서, 혹은 신분이 자본의 유무로 치환되면서, 신분의 동반상승이 가능해지기 시작했다. 이는 근대 자본주의 문명의 대표적인 나라 미국의 소설에서 자주 표현되는데, 「키다리 아저씨」 류의 작품이 대표적인 예이다. 근대 이전의 춘향이는 현실 불가능했지만, 근대에는 춘향이를 현실에서 발견하는 일이 전혀 불가능해진 것은 아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다시 ‘연애’를 꿈꾸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들의 꿈도 여전히 환상에 지나지 않는다. (키다리 아저씨와 같은 이야기도 비현실적이긴 마찬가지이다. 설마, 아직도 이런 이야기를 믿는 사람이 있다면, 시사 잡지에 자주 등장하는 우리나라 기업의 가계도를 찾아보기 바란다. 자본가들은 결혼과 연애를 통해 자신들의 자본을 수호한다. 뭐, 그렇다고는 해도, 신데렐라가 왕자를 만날 가능성보다야 주디가 키다리아저씨를 만날 가능성이 더 높긴 하지만.) 아니, 오히려 근대 이전의 꿈이 무해(無害)한 것인데 비해, 근대의 꿈은 “호환, 마마보다 무서운” 중독성을 가진 꿈이다.

  이 꿈은 사람들에게 현실을 극복할 의지를 빼앗아 기존의 질서를 유지시키며, 정당한 노력보다는 자신의 육체나 순결을 상품화하여 출세의 도구로 전락시킨다. 경영에는 관심도 없고, 유아기적 트라우마를 벗어나지 못한 ‘실장님’들이 등장하는 모든 드라마는 이런 점에서 해악을 가진다. 그리고 그런 드라마를 좋아하는 우리 사회는 근대에서 아직 벗어나지 못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이런 것들이 없다면, 드라마가 무슨 재미가 있겠는가? 그런 점에서 드라마는 술과 담배와 같다. 나쁘다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그 견딜 수 없는 중독성에 우리는 굴복하고 만다.)


  이와 같은 측면에서, 근대의 ‘연애소설’은 본질적으로 상품성을 가진다.

  섹스의 문제, 더 나아가 보다 큰 자극으로의 변태적인 성 의식과 행위의 문제는 이러한 상품성에 기반을 둔 것이다. 무라카미 류의 소설, 더욱이 “무라카미 류 최초의 연애소설”이라는 카피를 달고 있는「마이 퍼니 발렌타인」은 이러한 근대적 연애소설의 특징에 충실한 작품이다.


『현대 사회에는 어느 정도의 자유가 있으므로, 일반 남녀도 연애를 할 수 있다. 그러나 많은 사람이 그 ‘자유’를 두려워하고, 낯설어한다. 누구든 누군가를 좋아할 수 있는 ‘자유’에 제대로 대응할 수 없는 사람들이 스토커가 되기도 하고 가정에서 폭력을 휘두르는 사람이 되기도 한다.

  자유에 불안을 느끼는 사람은 좋아하는 사람에게도 모순 된 감정을 가진다. 사실은 너무 가까이 하고 싶은데, 괴롭고 불안해서 멀리 떨어져 있고 싶어진다. 그런 독특한 감정을, 이 단편집의 제목으로 삼았다.』


(※ 이 작품집의 일본어판 제목은 <멀리 떨어져 있어도 곁에 있어줘>이다.)


  그의 작품에서 몸을 파는 여자들, 특히 변태적인 성행위에 동조하는 여인들이 많이 나오는 사실이 이러한 작가의 견해를 증명한다. 사실, 누가 등장하는지의 여부는 큰 문제가 아니다. 춘향이는 기생의 딸이라는 애매한 신분이지만, 그 외의 고전 연애소설에 등장하는 여인들은 엄연한 기생인 경우가 많다. 물론, 기생이 그대로 몸을 파는 여자인 것은 아니지만, 그 범주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있는 것 또한 아니다. 그러니 류의 이 작품은 동양적 연애소설의 전통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또한 그런 점에서 류의 작품들에서 벌어지는 각종 변태 플레이는, 순결 이데올로기를 강요하는 여타의 로멘스 소설에 비해 덜 역겹다. 연애소설에서 가장 역겨운 것은 “곱게 간직한 제 순결을 당신에게 드리겠어요” 따위의 상품화 논리로 덕지덕지 장식된 작품들이다. 또한 순결을 가지고 놀다버리는 나쁜 남자와 이에 당하기만 하는 청순가련한 여자만큼 역겹고 무기력한 인물도 또 없다.

  이런 주장이야 말로, 포르노만큼이나 위험하다. 포르노가 위험한 것은 성을 상품화하여 인간관계를 다루기 때문인데, 순결 이데올로기도 변형되기는 했지만 성을 상품화하여 인간관계를 설명한다는 점에서는 동일하다. 또한 이는 중세 유럽의 ‘플라토닉한 불륜’과 다를 바 없다. 인간에 대한 공통된 사랑이 아닌, 특정 인물과의 연애로 구체화된 플라토닉이란 변태적인 사랑의 또 다른 이름에 불과하다



[ 3. 연애, 소설이 만들어내는 분위기 ]



  연애, 혹은 연애소설은 특유의 분위기를 만들어낸다. 그것은 비록 환상에 지나지 않을지라도, 인간에게 세상을 이겨낼 수 있는 힘을 준다. 단 한 사람이 내게 주는 사랑만으로도, 혹은 내가 단 한 사람에게 주는 사랑만으로도 세상은 충분히 견딜만한 곳이다.

  이 글의 시작에서 제시했던 허황하기 짝이 없는 단어들, 영원, 낙원, 구원, 평화, 자유, 평등, 절망…… 따위가 인간에게 구체적인 이득을 주거나, 실질적인 도움을 주지 못했더라도, 이러한 단어로 인해 인간의 도전이 계속될 수 있었던 것만은 사실이다. 그런 점에서 모든 인간은 시지프스다. 결코 도달할 수 없는 정상을 향해 끊임없이 바위를 굴려 올리는 모순적인 존재다. 그리고 사랑, 혹은 연애도 인간의 욕망을 자극하는 또 다른 산이다.

  사랑이 아름다운 것은 성공했기 때문이 아니다. 사랑은 시도했다는 그 자체, 혹은 열심히 시도했으나 끝내 실패했기 때문에 아름답다. 선남선녀의 순탄하기 짝이 없는 연애보다는, 평범하지 않은 남자와 여자의 고통스러운 연애가 더 재미있고 감동적인 것은 그 때문이다. 전장에서 피어난 사랑, 집안의 반대, 만날 듯 만날 듯 만나지 못하는 연인…… 그 모든 위험요소들은 주인공들의 사랑을 빛나게 만난다.

  류의 작품에서도 이런 위험요소가 끊임없이 제시된다. 그의 작품에서 정상적인 만남이나 상식적인 연애는 나타나지 않는다. 그들은 헤어졌지만, 다시 만나려 하지 않고, 만나지 않기 때문에 새로운 사건은 일어나지 않는다. 그들은 끊임없이 과거를 반추하고, 과거를 통해 추악한 현재를 발견한다. 작가가 제시하는 과거와 현재의 낙차가 크면 클수록, 작품의 분위기는 강렬해진다.

 

  물론 이 과정에서 반성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러나 류가 제시하는 낙차가 워낙 크기 때문에, 연애라고 할 것도 없는 그의 작품들은 특유의 분위기를 가진다. 첫 번째 작품 「그리고 우연한 만남」이나, 작가의 경험으로 파악되는 「지옥에 떨어진 용사들」과 「와일드 엔젤」같은 작품들이 여기에 해당하고, 그렇기 때문에 이 작품집에서 가장 매력적이다.


  사실, 무라카미 류가 보여주는 연애에 대한 전망은 암울하기 짝이 없다. SM과 폭력적인 성행위는 구원이 되지 못한다. 그럼에도 사랑은, 사랑에 대한 이야기는, 연애는, 연애에 대한 이야기는 계속될 것이다. 다른 삶의 면모들이 그런 것처럼, 사랑도 역시 절망을 극복하면서 자신의 길을 찾는 법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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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ai 2005-12-22 15: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간만에 쓰신 글이군요. '연애'의 신화화, 공감하는 바입니다. 책은 못 읽었지만서도.

tommasi 2009-12-11 21: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 낙차는 현재의 추악함을 드러낸다'고 읽으셨군요.
<와일드엔젤><지옥에떨어진용사들>의 경우, 그런식으로하면, '순수했던시절'에 대한
노스탈지아 예찬으로 떨어질 수도... 두 작품의 결론이 공히, '썩 나쁘지않은성장'으로 읽히더군요.
개인적 의견일 뿐입니다.
 
코인로커 베이비스
무라카미 류 지음, 양억관 옮김 / 북스토리 / 2004년 3월
평점 :
품절


 

[ 1. 무라카미 류 ]



  무라카미 류의 소설에 나오는 인물들은 대부분 어린아이들이다. 아무리 나이를 먹었더라도, 커다란 덩치에 카리스마를 내뿜는 인물이더라도, 그들의 정신은 어린아이와 다르지 않다. 그들은 자신의 삶이 결핍되었다고 느끼며, 그 원인은 다양하게 제시될지라도, 결핍으로 인한 증상은 언제나 ‘외로움’으로 나타난다. 그들은 외로움을 견딜 수 없다고 생각하는데, 여기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그들이 선택하는 방법은 대부분 SM적 폭력과 극단적인 형태의 섹스를 통해 나타난다.


  이러한 이유로, 무라카미 류의 소설은 엄살인 경우가 많다. 사실 그들이 느끼는 외로움이란 본질적으로 고독할 수밖에 없는 인간의 속성에 대한 고찰이거나, 인간의 존엄성을 위협하는 한계 상황에 직면한 경우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류의 작품에 나타나는 외로움은 헤밍웨이가 「노인과 바다」에서 제시했던 노인의 고독과도, 카뮈가 「페스트」에서 제시했던 타르와 뤼가 직면했던 상황과도 다르다. 노인이 고독했다면 류의 인물들은 외로울 뿐이고, 타르와 뤼가 위기 상황에 직면했다면 류의 인물들은 위기일지도 모르는 상황이 올 것이라고 호들갑을 떨 뿐이다.

  물론, 그렇기 때문에 헤밍웨이나 카뮈의 작품에 비해 류의 소설은 ‘한없이’ 가볍고, 또한 쉽게 받아들여진다. 그의 작품은 헤밍웨이나 카뮈에 비해 훨씬 쉽고 편안하다. 상황 자체, 표현 자체는 훨씬 잔혹하지만 이것은 혼자 있는 토요일 밤 킬링타임용으로 보는 공포영화와 다를 것이 없다. 선혈이 낭자하지만 주인공은 죽지 않는다. 한껏 분위기를 잡고 있지만 역시 주인공은 죽지 않는다. 견딜 수 없는 장면이 나오면 질끈 눈을 감아버리면 그만이다. 주인공은 절대로 죽지 않는다. 그리고 그 영화를 보고 있는 나 역시 절대로 죽지 않는다. 그것은 일종은 가짜 공포, 자본주의적 공포, 혹은 공포의 시뮬라크르에 불과하다.


  역시 같은 이유로, 무라카미 류의 소설은 변명에 지나지 않는 경우가 많다. 사디즘 혹은 마조히즘으로의 폭력, 그리고 극단적으로 왜곡된 형태의 섹스는 그 자체가 문제는 아니지만, 일반적인 통념에서 벗어난 행동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런 욕망을 가진 사람들은 자신들의 행동을 변명한다.

  내 잘못이 아니다, 군대라는 시스템이 나를 이렇게 만들었을 뿐이다. 나도 하고 싶어서 때리는 것이 아니다, 다 너희들 잘 되라고 때리는 거다. 나 혼자 즐기려고 이러는 거 아냐, 너와의 사랑을 확인하고 싶을 뿐이야. 너무도 닳고 닳은 변명들이다.

  사실, 이런 변명들은 어느 정도 타당성을 가진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더욱 위험하다. 이들의 마음에 진정성이 남아있을 때 이들은 행동은 다소 간의 타당성을 가지지만, 그 진정성이 변질되어 버리면 이런 식의 행동은 그 어떤 폭력보다 큰 영향력으로 세상을 파괴한다. 대표적인 예가 독재자이다. 세상의 모든 독재자들은 한결같이 말한다. 조국과 민족을 위해서 그랬던 것이라고. 박정희가 그랬고, 전두환이 그랬다. 히들러가 그랬고 스탈린이 그랬다. 가정의 문제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인사불성이 되어 폭력을 휘두른 남편은 쓰러진 아내를 껴안고 오열한다. 당신을 사랑한다고. 그들의 사랑은 위험하다. 변명하기 때문에 위험하고, 변명할 줄 모르기 때문에 끝까지 자신이 정당하다고 믿기 때문이다. 하여, 변명으로 치장된 모든 사랑은 위험하다.


  그러므로, 진정, 무라카미 류의 소설은 위험하다.

(이러한 측면에서 전상국의 「우상의 눈물」은 탁월하다. 가학과 피학, 폭력의 역학관계에 대해서 이 작품은 좋은 예시를 제공하고 있다. 그가 이런 측면을 다룬 최고의 작가라고는 할 수 없지만, 적어도 탁월하게 다룬 작가라는 것만큼은 분명하다.)



[ 2. 코인로커 베이비스 ]



  그러나, 한 걸음 물러서자, 잠시 열기를 가라앉히고 냉정해지자.

  다시 무라카미 류의 소설을 말한다. 그의 소설은 엄살이고 변명이다. 그러므로 그의 소설의 성패는 그러한 엄살과 변명에 대한 설명이 얼마나 타당성을 가지는가 여부에 달려있다. (전적으로 개인적인 취향이겠지만, 내가 파악하기에 「한없이 투명에 가까운 블루」의 엄살은 탁월했지만, 「토파즈」의 엄살은 구태의연했다. 「69」의 변명은 명쾌했지만, 「피지의 난장이」의 변명은 구질구질했다. 「사랑과 환상의 파시즘」의 엄살과 변명은 그럭저럭 인내심을 가질 수 있었지만, 「오 분 후의 세계」의 엄설과 변명은 구태여 인내심을 발휘해서 들어주고 싶지 않았다.)

 

  「코인로커 베이비스」는 다른 어떤 작품보다도 엄살과 변명이 잘 통용될 수 있는 요소들을 가지고 있다. 코인로커에 버려진 아이들, 그 아이들이 받았을 정신적인 충격과 그로 인한 행동은 충분히 동감을 얻을 만 하다.

  700페이지가 넘는 분량의 이 작품을 끌고나가는 힘은 바로 여기에 있다. 이 작품이 그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제법 많은 독자들이 이 작품에 공감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의문은 남는다.

  “꼭 이런 방법 밖에는 없는가?”

  사실, 이것은 그의 모든 작품에 대한 질문이다. 외로움을 달랠 수 있는 방법이 오직 폭력과 섹스 밖에는 없는가? 이런 방법은「한없이 투명에 가까운 블루」에서 이미 이야기 하지 않았는가? 그렇다면 이후 발표된 그의 작품은 대부분 동어반복에 불과한 것이 아닌가? 폭력과 섹스가 외로움을 (어떤 식으로든) 견디게 하는 분명한 방법인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것을 이미 맛본 사람들은 앞으로 어떤 방법을 선택할 수 있는가?


  코인로커에 버려진 이후 난 무엇을 필요로 했던 것일까? 뭔가가 필요했다. 뭔가에 굶주렸다. 역시 저 소리였을까? 저 소리뿐이었을까? 난 무엇 하나 손에 넣은 게 없다. 나는 변하지 않았다. 아직 코인로커 속에 있다. 피부가 썩어 문드러진 채로 상자 안에 갇혀 있다. 맹도견이 내 냄새를 맡고 짖어줄 때까지 기다리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무엇을 해야 하는가. (p.628.)


  “무엇을 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류의 대답은 섹스와 폭력뿐이다. 섹스가 주는 쾌락을 통해 분노를 잊어버리던가, 다른 사람에 대한 폭력을 통해 분노를 발산하던가.「코인로커 베이비스」의 두 주인공은 그러한 방법을 대표한다. 하시는 섹스를 택하고, 기쿠는 폭력을 택한다. 그러나 너무도 당연하게도, 쾌락은 더 큰 허무를 만들고, 발산은 또 다른 피해자를 만든다.

  남색에서 여색으로 TV쇼에서 라이브공연으로 히치의 욕망은 끊임없이 변모하지만, 결국 그 어떤 것도 그의 허무를 만족시키지 못한다. 높이뛰기에서 살인으로 다시 독극물 살포로 기쿠의 행동에는 외형적인 변화는 없을지라도, 자신의 육체적 한계를 파괴하려는 욕망에서 시작하여, 타인을 파괴하고, 끝내 아무런 연관이 없는 대중을 파괴하려 한다. 그러나 파괴당한 사람들은 어떻게 할 것인가? 결국, 상처에서 비롯된 그의 행동은 또 다른 상처를 만들었을 뿐이다. 



[ 3. 아이와 어른 ]



  아이는 아름답다. 숨을 쉬는 것, 욕망에 충실한 것, 행동하는 것 모두가 아름답다. 그러나 어른은 추하다. 그도 숨을 내쉬지만 구취가 묻어나고, 욕망에 충실하지 않은 척하지만 타락한 욕망에 복종하고 있으며, 행동하지 말아야 할 때에 행동하고 정작 행동해야 할 때에는 행동하지 않는다.

  맞다. 아이는 아름답고, 어른은 추하다. 그러므로 나는 어른이 되고 싶지 않다.


  이것이 지난 1990년대, 흔히 세기말이라 불렀던 시대에 한국와 일본에서 공통되게 나타났던 정서 중의 하나였다. 난해하기 짝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히트를 쳤던 애니메이션 <신세기 에반게리온>이나, 우리나라의 세대론(신세대, X세대, N세대 따위의 소모적인 논쟁) 등이  이런 경향의 대표적인 예이다. 나 역시 이런 정서에 대부분 공감한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이는 어른이 되어야 하고,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어른이 되는 것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아이의 면모를 간직한 어른, 그러면서도 어른의 면모를 함께 가진 어른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른의 면모’는 무엇인가? 아직 많은 고민이 필요한 부분이지만, 지금까지 내 고민이 찾아낸 대답은 두 가지뿐이다.

  어른은 책임을 진다. 또한 어른은 이해한다.

  아이는 책임지지 않는다. 그러므로 그들은 자신의 욕망, 자신의 감정에만 충실하면 된다. 혹시 잘못을 하더라도 그는 무서워할 뿐 가슴 아파하지는 않는다. 부모한테, 선생한테 혼나면 그만이니까. 혼나고 나면 모든 것이 용서되고 모든 일이 해결될 테니까. 그러므로 아이는 다른 사람을 생각하지 않는다. 그들은 다른 사람들의 사정을 생각하지 않는다. 내가 감정을 폭발하고 싶다고 해서, 아무 곳에서나 울고 떼를 쓰면 안 된다는 것을 아이들은 모른다. 그러나 어른들은 안다. 내가 울면 다른 사람도 울고 싶다는 것을, 내가 쓰러지면 나를 의지했던 다른 사람들도 함께 쓰러진다는 것을, 내가 때리면 누군가가 아프다는 것을.


  코인로커에 버려졌다고 해서, 분노를 폭발하는 방법 많이 있는 것은 아니다.  

  분노를 폭발하는 것은, 더구나 그것은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에게 폭발하는 것은 ‘아이들’이나 하는 행동이다. 그런 점에서 이들은 코인로커 ‘베이비스’일 수밖에 없다. 어른은, 책임을 지고 타인을 이해할 수 있는 어른은 그런 행동을 하지 않는다.

  아하, 그러나 부끄럽게도, 세상에는 ‘어른’이 그리 많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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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간과 인간
나카노 하지무 지음 / 국제 / 199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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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실, 이 책만 욕할 것은 아니다. 우리나라에서 번역되어 출판되는 이공계열이나 예술계열 책들은 대부분 '기본적인 글쓰기'가 엉망인 경우가 많다.

  맞다. 나는 지금 '기본적'이라는 말을 썼다. 글쓰기에도 기본이 있는가? 글을 쓰는 방법이나 표현하는 생각에는 기본이 있을 수 없지만, 최소한 그것이 <책>으로 만들어졌을 때에는 '기본적'으로 지켜야 할 것들이 있다. 맞춤법이나 띄어쓰기가 그것이고, 여기에는 포함되지 않지만 의미가 전달될 수 있는 문장이 되어야 한다는 조건이 그것이다.

  그런데 이 책은 그런 것들이 전혀 지켜지지 않았다. 번역자의 책임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출판사의 책임이 크다. 교정만 정확하게 보았더라고 이 책의 문제점은 충분히 잡아낼 수 있는 것이었다. 그만큼 책을 만드는 성의가 없었다는 것이다. 그것말고는 이유를 생각할 수 없다.

  이렇게 떠드는 것보다, 구체적인 예를 드는 것이 좋을 것 같아서, 책의 134~135페이지를 대상으로 문제점을 지적해 본다. 다소 길고, 피로한 작업이지만, 혹시라도 책 만드는 분들이 이 글을 본다면, 조금이라도 뜨끔하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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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것은 사이를 용도에 따라 구별한 것이지만, 그 사이와 방(室)과 상호 닮아 있으면서도, 그곳에는 중요한 차이가 있는 것을 알아차리게 된다. (p.134.)

⇒ 1) "상호"라는 것은 불필요한 한자어휘이다. 2) 조사를 정확하게 쓰자. 3) 괄호사용을 정확하게 하자. 한글과 한자의 음이 다르면 큰 괄호를 쓴다. 이 문장을 고쳐보면 다음과 같다. : "... 그 사이[間]와 방[室]은 서로 닮아 있으면서도, 중요한 차이가 있다"


- 일본의 전통적인 주거에는 거실과 침실, 그리고 차마시는 곳이 구별되는 경우가 많지 않다. 같은 사이(間) 중에 언제나 방석이 깔려 있으면 거실(居間)이 되고, 손님이 있으면 응접실로도 되고, 식사 때가 되면 밥상이 나오고 차 마시는 곳으로 바뀌고, 마침내 밤이 깊어지면 침구가 퍼져 침실로 된다(게다가, 그곳에는 불상도 놓여져 있고, 경우에 따라서는 위패를 모시는 방으로도 이용된다)라는 광경과, 또 서양화(西洋化)가 되지 않은 제2차 세계대전부터 전후(戰後) 얼마동안 일본에서는 결코 진귀한 것이 아니었다. (p.134.)

⇒ 1) 띄어쓰기 좀 똑바로 하자 2) 의미를 분명하게 밝혀야 한다. 3) 일본식 어휘의 사용은 피해야 한다. 예를 들어 "~라는" 것과 같은 어휘. 이 문장을 고치면 다음과 같다. : "일본의 전통적인 주거는 거실과 침실, 그리고 차 마시는 곳이 구별되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같은 사이[間]라도, 방석이 깔려 있으면 거실이 되고, 손님이 찾아오면 응접실이 되고, 식사 때가 되면 밥상이 들어오고 차 마시는 곳으로 바뀌고, 밤이 깊어지면 침구가 펴져 침실이 된다(게다가 불상도 놓여져 있고, 경우에 따라서는 위패를 모시는 방으로 이용되기도 한다). 이런 광경은 서양화가 진행되지 않았던 제2차 세계대전 전후까지만 해도 일본에서 그리 진귀한 것이 아니었다."


- 따라서, 일본가옥에 살 때에는 성숙한 인간의 독립적이고 개인적인 생활이 문제가 되는 것은 당연한 것이고, 또 이와 같은 전통적 분할법에 의한 가변공간(可變空間)과 비독립성, 비고정적 공간에서 구성된 가옥이며 그곳에 사는 것에서 자연적으로 결과의 융통무예(融通無碍)한 생활형태가 우리 민족성의 형성과 더불어 커다란 힘이 되었다는 것은 부정할 수도 없을 것이다. 일본인에게 자존심의 관념이 부족하고, 그것을 지켜서 싸우는 것보다도 타인과 화해하는 것이다라는 경향이 강한 것도 그러한 한 가지 예로써 생각되어진다. (p.135)

⇒ 1) 접속사 다음의 쉼표는 피해야 한다. 접속사는 그 자체로 의미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문장과 문장을 이어주기 때문이다. 2) 문맥을 분명하게 밝히자. 원본을 확인하지 않았으니 알 수 없지만, 혹시 원본의 글 자체가 이렇게 난삽하다고 하더라도, 번역본에서는 의미를 분명하게 해야 하지 않겠는가? 이 문장을 고치면 다음과 같다. : "따라서 일본 가옥에서 생활할 때에 성숙한 인간의 독립적이고 개인적인 생활이 문제가 된다. 이처럼 일본 가옥은 전통적 분할법에 의해 만들어진, 가변공간과 비독립적이고 비고정적인 공간으로 구성된 가옥이며, 그곳에 살았기 때문에 자연적으로 융통성있고 막힘이 없는 생활형태가 형성되었다. 이것이 우리 민족성의 형성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일본인에게 자존심이라는 관념이 부족하고, 그것을 지켜기 위해 싸우기보다는 타인과 화해하려는 경향이 강한 것도, 그러한 공간적 특성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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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종류의 예는 이 책을 여기저기에서 발견된다.
책은 책으로의 기본을 갖추고 있어야 한다. 아무나 갈겨놓은 낙서가 책이 되어서는 안된다. 더구나 다른 사람이 공들여 쓴 책을 번역하는 경우라면 더욱 그렇다. 번역가가 작가가 될 필요야 없겠지만, 적어도 최소한의 문학적 역량은 갖추고 있어야 하지 않을까?

책을 읽다가, 어이가 없어서 성급하게 글을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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