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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인로커 베이비스
무라카미 류 지음, 양억관 옮김 / 북스토리 / 2004년 3월
평점 :
품절
[ 1. 무라카미 류 ]
무라카미 류의 소설에 나오는 인물들은 대부분 어린아이들이다. 아무리 나이를 먹었더라도, 커다란 덩치에 카리스마를 내뿜는 인물이더라도, 그들의 정신은 어린아이와 다르지 않다. 그들은 자신의 삶이 결핍되었다고 느끼며, 그 원인은 다양하게 제시될지라도, 결핍으로 인한 증상은 언제나 ‘외로움’으로 나타난다. 그들은 외로움을 견딜 수 없다고 생각하는데, 여기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그들이 선택하는 방법은 대부분 SM적 폭력과 극단적인 형태의 섹스를 통해 나타난다.
이러한 이유로, 무라카미 류의 소설은 엄살인 경우가 많다. 사실 그들이 느끼는 외로움이란 본질적으로 고독할 수밖에 없는 인간의 속성에 대한 고찰이거나, 인간의 존엄성을 위협하는 한계 상황에 직면한 경우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류의 작품에 나타나는 외로움은 헤밍웨이가 「노인과 바다」에서 제시했던 노인의 고독과도, 카뮈가 「페스트」에서 제시했던 타르와 뤼가 직면했던 상황과도 다르다. 노인이 고독했다면 류의 인물들은 외로울 뿐이고, 타르와 뤼가 위기 상황에 직면했다면 류의 인물들은 위기일지도 모르는 상황이 올 것이라고 호들갑을 떨 뿐이다.
물론, 그렇기 때문에 헤밍웨이나 카뮈의 작품에 비해 류의 소설은 ‘한없이’ 가볍고, 또한 쉽게 받아들여진다. 그의 작품은 헤밍웨이나 카뮈에 비해 훨씬 쉽고 편안하다. 상황 자체, 표현 자체는 훨씬 잔혹하지만 이것은 혼자 있는 토요일 밤 킬링타임용으로 보는 공포영화와 다를 것이 없다. 선혈이 낭자하지만 주인공은 죽지 않는다. 한껏 분위기를 잡고 있지만 역시 주인공은 죽지 않는다. 견딜 수 없는 장면이 나오면 질끈 눈을 감아버리면 그만이다. 주인공은 절대로 죽지 않는다. 그리고 그 영화를 보고 있는 나 역시 절대로 죽지 않는다. 그것은 일종은 가짜 공포, 자본주의적 공포, 혹은 공포의 시뮬라크르에 불과하다.
역시 같은 이유로, 무라카미 류의 소설은 변명에 지나지 않는 경우가 많다. 사디즘 혹은 마조히즘으로의 폭력, 그리고 극단적으로 왜곡된 형태의 섹스는 그 자체가 문제는 아니지만, 일반적인 통념에서 벗어난 행동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런 욕망을 가진 사람들은 자신들의 행동을 변명한다.
내 잘못이 아니다, 군대라는 시스템이 나를 이렇게 만들었을 뿐이다. 나도 하고 싶어서 때리는 것이 아니다, 다 너희들 잘 되라고 때리는 거다. 나 혼자 즐기려고 이러는 거 아냐, 너와의 사랑을 확인하고 싶을 뿐이야. 너무도 닳고 닳은 변명들이다.
사실, 이런 변명들은 어느 정도 타당성을 가진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더욱 위험하다. 이들의 마음에 진정성이 남아있을 때 이들은 행동은 다소 간의 타당성을 가지지만, 그 진정성이 변질되어 버리면 이런 식의 행동은 그 어떤 폭력보다 큰 영향력으로 세상을 파괴한다. 대표적인 예가 독재자이다. 세상의 모든 독재자들은 한결같이 말한다. 조국과 민족을 위해서 그랬던 것이라고. 박정희가 그랬고, 전두환이 그랬다. 히들러가 그랬고 스탈린이 그랬다. 가정의 문제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인사불성이 되어 폭력을 휘두른 남편은 쓰러진 아내를 껴안고 오열한다. 당신을 사랑한다고. 그들의 사랑은 위험하다. 변명하기 때문에 위험하고, 변명할 줄 모르기 때문에 끝까지 자신이 정당하다고 믿기 때문이다. 하여, 변명으로 치장된 모든 사랑은 위험하다.
그러므로, 진정, 무라카미 류의 소설은 위험하다.
(이러한 측면에서 전상국의 「우상의 눈물」은 탁월하다. 가학과 피학, 폭력의 역학관계에 대해서 이 작품은 좋은 예시를 제공하고 있다. 그가 이런 측면을 다룬 최고의 작가라고는 할 수 없지만, 적어도 탁월하게 다룬 작가라는 것만큼은 분명하다.)
[ 2. 코인로커 베이비스 ]
그러나, 한 걸음 물러서자, 잠시 열기를 가라앉히고 냉정해지자.
다시 무라카미 류의 소설을 말한다. 그의 소설은 엄살이고 변명이다. 그러므로 그의 소설의 성패는 그러한 엄살과 변명에 대한 설명이 얼마나 타당성을 가지는가 여부에 달려있다. (전적으로 개인적인 취향이겠지만, 내가 파악하기에 「한없이 투명에 가까운 블루」의 엄살은 탁월했지만, 「토파즈」의 엄살은 구태의연했다. 「69」의 변명은 명쾌했지만, 「피지의 난장이」의 변명은 구질구질했다. 「사랑과 환상의 파시즘」의 엄살과 변명은 그럭저럭 인내심을 가질 수 있었지만, 「오 분 후의 세계」의 엄설과 변명은 구태여 인내심을 발휘해서 들어주고 싶지 않았다.)
「코인로커 베이비스」는 다른 어떤 작품보다도 엄살과 변명이 잘 통용될 수 있는 요소들을 가지고 있다. 코인로커에 버려진 아이들, 그 아이들이 받았을 정신적인 충격과 그로 인한 행동은 충분히 동감을 얻을 만 하다.
700페이지가 넘는 분량의 이 작품을 끌고나가는 힘은 바로 여기에 있다. 이 작품이 그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제법 많은 독자들이 이 작품에 공감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의문은 남는다.
“꼭 이런 방법 밖에는 없는가?”
사실, 이것은 그의 모든 작품에 대한 질문이다. 외로움을 달랠 수 있는 방법이 오직 폭력과 섹스 밖에는 없는가? 이런 방법은「한없이 투명에 가까운 블루」에서 이미 이야기 하지 않았는가? 그렇다면 이후 발표된 그의 작품은 대부분 동어반복에 불과한 것이 아닌가? 폭력과 섹스가 외로움을 (어떤 식으로든) 견디게 하는 분명한 방법인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것을 이미 맛본 사람들은 앞으로 어떤 방법을 선택할 수 있는가?
코인로커에 버려진 이후 난 무엇을 필요로 했던 것일까? 뭔가가 필요했다. 뭔가에 굶주렸다. 역시 저 소리였을까? 저 소리뿐이었을까? 난 무엇 하나 손에 넣은 게 없다. 나는 변하지 않았다. 아직 코인로커 속에 있다. 피부가 썩어 문드러진 채로 상자 안에 갇혀 있다. 맹도견이 내 냄새를 맡고 짖어줄 때까지 기다리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무엇을 해야 하는가. (p.628.)
“무엇을 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류의 대답은 섹스와 폭력뿐이다. 섹스가 주는 쾌락을 통해 분노를 잊어버리던가, 다른 사람에 대한 폭력을 통해 분노를 발산하던가.「코인로커 베이비스」의 두 주인공은 그러한 방법을 대표한다. 하시는 섹스를 택하고, 기쿠는 폭력을 택한다. 그러나 너무도 당연하게도, 쾌락은 더 큰 허무를 만들고, 발산은 또 다른 피해자를 만든다.
남색에서 여색으로 TV쇼에서 라이브공연으로 히치의 욕망은 끊임없이 변모하지만, 결국 그 어떤 것도 그의 허무를 만족시키지 못한다. 높이뛰기에서 살인으로 다시 독극물 살포로 기쿠의 행동에는 외형적인 변화는 없을지라도, 자신의 육체적 한계를 파괴하려는 욕망에서 시작하여, 타인을 파괴하고, 끝내 아무런 연관이 없는 대중을 파괴하려 한다. 그러나 파괴당한 사람들은 어떻게 할 것인가? 결국, 상처에서 비롯된 그의 행동은 또 다른 상처를 만들었을 뿐이다.
[ 3. 아이와 어른 ]
아이는 아름답다. 숨을 쉬는 것, 욕망에 충실한 것, 행동하는 것 모두가 아름답다. 그러나 어른은 추하다. 그도 숨을 내쉬지만 구취가 묻어나고, 욕망에 충실하지 않은 척하지만 타락한 욕망에 복종하고 있으며, 행동하지 말아야 할 때에 행동하고 정작 행동해야 할 때에는 행동하지 않는다.
맞다. 아이는 아름답고, 어른은 추하다. 그러므로 나는 어른이 되고 싶지 않다.
이것이 지난 1990년대, 흔히 세기말이라 불렀던 시대에 한국와 일본에서 공통되게 나타났던 정서 중의 하나였다. 난해하기 짝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히트를 쳤던 애니메이션 <신세기 에반게리온>이나, 우리나라의 세대론(신세대, X세대, N세대 따위의 소모적인 논쟁) 등이 이런 경향의 대표적인 예이다. 나 역시 이런 정서에 대부분 공감한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이는 어른이 되어야 하고,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어른이 되는 것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아이의 면모를 간직한 어른, 그러면서도 어른의 면모를 함께 가진 어른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른의 면모’는 무엇인가? 아직 많은 고민이 필요한 부분이지만, 지금까지 내 고민이 찾아낸 대답은 두 가지뿐이다.
어른은 책임을 진다. 또한 어른은 이해한다.
아이는 책임지지 않는다. 그러므로 그들은 자신의 욕망, 자신의 감정에만 충실하면 된다. 혹시 잘못을 하더라도 그는 무서워할 뿐 가슴 아파하지는 않는다. 부모한테, 선생한테 혼나면 그만이니까. 혼나고 나면 모든 것이 용서되고 모든 일이 해결될 테니까. 그러므로 아이는 다른 사람을 생각하지 않는다. 그들은 다른 사람들의 사정을 생각하지 않는다. 내가 감정을 폭발하고 싶다고 해서, 아무 곳에서나 울고 떼를 쓰면 안 된다는 것을 아이들은 모른다. 그러나 어른들은 안다. 내가 울면 다른 사람도 울고 싶다는 것을, 내가 쓰러지면 나를 의지했던 다른 사람들도 함께 쓰러진다는 것을, 내가 때리면 누군가가 아프다는 것을.
코인로커에 버려졌다고 해서, 분노를 폭발하는 방법 많이 있는 것은 아니다.
분노를 폭발하는 것은, 더구나 그것은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에게 폭발하는 것은 ‘아이들’이나 하는 행동이다. 그런 점에서 이들은 코인로커 ‘베이비스’일 수밖에 없다. 어른은, 책임을 지고 타인을 이해할 수 있는 어른은 그런 행동을 하지 않는다.
아하, 그러나 부끄럽게도, 세상에는 ‘어른’이 그리 많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