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말 소반다듬이
권오운 지음 / 문학수첩 / 2011년 10월
평점 :
품절


이 책에서 지적된 내용의 대부분은 지극히 타당하다. 먼저 이 사실을 분명하게 밝혀야만 한다.

 

맞다. 백 번을 양보해도, 작가는 문장을 통해 이야기를 하는 사람이고,

그렇기 때문에 문장에 관해서는 한없이 엄격해야 마땅하다.

 

겸허하게 받아들이자. 좋은 약은 입에 쓴 법이다.

그리고 그 사실을 받아들이고, 그 모든 지적들을 수용할 때

우리말을 보다 정확하게 사용한 작품을 만들 수 있다.

 

작가의 역할이 그것만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중요한 부분의 하나인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또 하나 간과할 수 없는 부분은

이 책도 역시 몇몇 부분에서 적지 않은 오류를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예문과 설명에서의 오탈자야 편집자의 책임이라고는 해도

다음과 같은 지적들은 저자의 문제가 아닐까?

 

몇 가지를지적한다.

 

1. 너무 촘촘한 그물코

 

그가 고등학교 졸업반일 무렵 이 도시 어디에서든 쇠파이프나 사시미를 들고 달려가는 건달들을 쉽게 목격할 수 있었다. (…) 쇠파이프나 사시미를 든 시내파의 새파란 녀석들이 오함마나 빠루를 든 시외파의 중늙은이들을……. : 손홍규, <상식적인 시절>

이 예문에 대해 저자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세상에 둘도 없는 무지렁이도 ‘사시미(刺身, さしみ)’가 ‘생선회’라는 것을 모르지는 않으리라. 그렇다면 건달들은 왜 쇠파이프가 아니면 생선회를 들고 달려갔을까. 웃음이 먼저 비어져 나와서 치미를 뚝 따고 말할 수가 없어진다.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사시미’가 아니라 ‘사시미를 뜨는 칼’인 ‘회칼’이기 때문이다. - p.85.

옳바른 지적이다. 회칼이 맞는 말이다. 일반적인 문장이라면 분명히 그렇다.

하지만 문학작품의 문장은 그보다 많은 기능을 수행해야 한다. 

올바른 문장이 아니라 적합한 문장을 사용하는 것이 문학작품 문장의 기능이다.

위 예문에서 '회칼'이라는 올바른 표현을 사용한다면, '사시미'란 잘못되 표현을 사용했을 때만큼의 느낌을 전달할 수 있을까? 그러니 그 기능을 수행하려면 '사시미칼' 정도의 변화 정도나 가능하지 않을까?

 

내 좀도둑의 마음은 박물관의 전시품을 훔쳐 내기에는 배포가 쪼잔했던 것이라고 해도 좋겠다. : 윤후명, <의자에 관한 사랑 철학>, 《새의 말을 듣다》

‘쪼잔하다’는 표준말이 아니기도 하려니와 청소년들이 지껄이는 속어여서 낯뜨거워서라도 어른들은 좀처럼 입에 올리지 않는 말인데 어찌 소설의 지문에까지 들어왔는지 당최 모르겠다. ‘사람이 잘고 인색하다’인 ‘쩨쩨하다’면 되지 않겠는가. - pp.99-100.

이 부분의 비속어사용을 지적한 내용도 마찬가지.   

올바른 표현인 '쩨쩨하다'를 대신 쓴다면, 잘못된 표현 '쪼잔하다'만큼의 느낌을 줄 수 있을까?

 

나는 놀랐다. 총각김치를 담그는 알타리무가 아니라 알타이어였다. 그는 어학공부를 하고 있다고 확실히 밝혔었다. 그런데 그것이 알타이어였다. : 윤후명, <새의 말을 듣다>

‘총각김치’야 당연히 ‘총각무’로 담그는 것이다. ‘알타리무’는 ‘총각무’를 잘못 이르는 말이다. - p.154.

 

위의 예문으로 미루어 짐작할 때, 작가가 ‘총각무’를 몰랐다고 보이지는 않는다.

오히려 ‘알타이어’하고 리듬을 맞추려고 ‘알타리무’라는 잘못된 표현을 일부러 썼다고 판단된다. 

 

이처럼 저자는 지나치게 규범에 따라 소설의 문장을 분석했다.

하지만 문학작품에는 규범을 뛰어넘을 권리 또한 있다.
일반적으로 그를 '시적 허용'이라고 설명한다.

 

 

2. 주관적 판단

 

여러 사람들이 부는 휘파람 같은 바람 소리가 들려왔다. 다듬이질을 당하는 것처럼 가슴이 아파서 그녀는 벽에 기대어 앉았다. : 김향숙, 《벚꽃나무 아래》, p.135.

이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다듬이질을 당하다’가 마뜩찮아서 불러냈다. ‘당하다’의 뜻은 ‘좋지 않은 일 따위를 직접 겪거나 입다’이다. 그래서 ‘가슴이 아파 왔’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 아픔의 충격을 준 것은 반드시 부정적인 것이어야 마땅하다. 예컨대, ‘뭇매질’을 당하든지 ‘성폭력’을 당하든지, ‘농락’을 당하든지, 하다못해 ‘따돌림’이라도 당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아픔’이 느껴질 리가 없다. 그런데 ‘다듬이질’은 무엇인가?

‘옷이나 옷감 따위를 방망이로 두드려 반드럽게 하는 일’이다. 말하자면 아프게 하거나 해치려는 것이 아니라 그 반대의 목적을 갖는 행동이다. 즉 ‘다듬이질’은 ‘폭력’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당하여 아픔을 느끼게 한’ 대상으로 하필이면 ‘다듬이질’을 끌어다 대었을까? - pp.213-214.

그런데 문제는 이 아픔의 강도가 개인별로 차이가 있다는 점이다.

그러니 다른 사람들은 아무렇지 않더라도, 당하는 사람에게는 아픔이 될 수 있지 않을까?

 

 

가르치려는 말투도 문제라고 할 수 있다. 

손님이 방을 원해서 어머니는 안방에서 상을 봐줬다. 국수와 고추다대기 김치 한 종지가 전부였다. : 김애란, <칼자국>

‘다대기’는 ‘다지기’여야 한다는 것쯤 이제 다 알리라. 문제는 ‘종지’다. 안타깝게도 김애란은 ‘종지’가 어떤 그릇인지 모르고 있다(어머니 하시는 일을 전혀 도와 드리지 않았나 보다. 조금만 도와 드렸다면 청맹과니도 알고, 가는귀가 먹었어도 알 일인데…….) ‘간장․고추장 따위를 담아서 상에 놓는, 종발보다 작은 그릇’이 ‘종지’다. 사전의 풀이에서 이미 어느 정도 그 크기가 암시되어 있듯이 고작 간장이나 고추장, 기름 따위 적은 양을 담는 작은 그릇이다. 그런데 거기다 김치를 담아냈다고? 잘게 썬 깍두기면 서너 알갱이 담을 수 있을까 몰라도 이른바 김치라면 배추김치든 무김치든 아예 담을 수조차 없으리라. 김치를 담아내는 데는 ‘보시기’가 제격 아니던가! - pp.128-129.

 

일단 타당한 지적이라는 것은 인정한다.

다만 지적을 할 때 구태여 저런 거친 표현을 쓸 필요가 있는 지는 모르겠다.

특히 괄호 안에 들어간 부분.

 

이런 식의 표현은 작가를 낮춰보고 스스로를 높이는 것이다.

물론 저자가 한참 선배이니 충분히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작가라면 연배랑 상관없이 마땅히 존중받아야 마땅하다. 그들은 독립된 창조자이다.

작가가 만든 작품은 얼마든지 평가받을 수 있다. 

그렇다고 해도 그것으로 작가의 생애까지 판단할 수야 없는 일이 아닌가?

 

또 한 가지의 의문.

저자는 김애란의 예문에서 어머니가 봐준 상의 반찬을 ‘국수’, ‘고추다대기’, ‘김치’ 등의 3가지로 판단했다. 그런데 그것이 ‘국수’와 ‘고추다대기 김치’ 등의 2가지로 볼 수 있지 않을까? 즉, 여기에서 '김치'는 그냥 그 자체가 아니라 '고추다대기와 함께 있는 김치'라고 한다면.

그렇다면 '종지'라는 표현을 쓸 수도 있지 않을까?

 

내가 너무 작가를 방어하려고 하는가?

하지만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그것을 우선적으로 고려해야 마땅하다.

 

그래야만 비난이 아니라 비판이 될 수 있다.

이것이 모든 평가자가 마땅히 갖추어야 할 자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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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2-21 11:01   URL
비밀 댓글입니다.

라훌라 2012-02-23 14: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야 감사할 따름입니다.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어요! ^^

2012-02-22 09:47   URL
비밀 댓글입니다.

라훌라 2012-03-21 19:41   좋아요 0 | URL
에고, 연락이 늦었네요. 보내주신 책 잘 받았습니다. 감사해요! 앞으로도 좋은 책 만들어주세요^^

숲노래 2012-05-13 07: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여러모로 지나치다 싶은 비판이 많구나 싶은데,
'종지'는 그야말로 잘못 써서 어찌 둘러대 줄 수 없겠어요.
그냥 '김치 접시'나 '김치 그릇'이라 하면 되었을 텐데,
왜 '종지'라 했을까요.
김치 담은 접시가 너무 작아서?

..

그러나, 어느 식당이나 중국집은 참말 '종지'처럼
아주 작은 접시에 김치를 몇 점만 얹어 주기도 하니까...
이를테면 죽집처럼...
이 소설 문장이 아예 틀렸다고는 볼 수 없을는지 몰라요.
왜냐하면 '주기 싫은 김치를 주는 만큼 아주 쬐꼼' 준다는 뜻으로.

그러니까, 참말 '간장 종지에 김치를 담아' 주었을는지 모르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