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인애플 스토리
IBLP 지음, 김두화 옮김 / 나침반 / 2002년 9월
평점 :
품절


나는 이 책에 포함되어 있는 기독교 논리를 비판하려는 것은 아니다. 다만, 그 속에 담겨있는 백인 중심주의적인 시각을 비판하고자 하는 것이다. 

   대부분의 선교사들이 그랬던 것처럼, 이 책 속의 선교사 역시 고집불통이다. 그는  원주민들의 세계관을 이해하려고 노력하지 않으면서, 원주민들에게는 백인 중심의 기독교적 가치관을 강요한다. 그가 제법 오랜 기간동안 뉴 기니아에서 선교활동을 했으면서도, 원주민들의 말을 익히려는 적극적인 노력을 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그 증거이다. 

「상점 문을 닫았을 때와 똑같은 결과가 나타났습니다. 사람들이 오지 않았기 때문에 얘기를 나눌 사람이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리고 나에게 그들의 언어를 가르쳐 줄 사람도 없었습니다.」

 

  위의 인용에 나타난 것처럼, 그는 스스로 원주민들을 몰아내고서는, 아무도 자신에게 말을 가르쳐 주지 않는다고 투덜거리고 있다. 원주민들이 찾아오지 않는 것은 자신이 문을 닫아걸었기 때문이라는 것은 생각하지도 않고서, 투덜거린다.  다만 투덜거릴 뿐, 정작 원주민들이 되돌아 간 정글 속으로 찾아 들어가서 말을 알려달라고 간청하지는 않는다.

 

  그럴 수밖에, 애초부터 그가 원했던 것은 백인들의 말로 된‘말씀의 종교’인 기독교를 전파하는 것이지, 원주민들의 말 따위를 배우는 것이 아니었다. 원주민 말을 배우는 것은 유용하긴 하겠지만, 구태여 애를 쓸 필요까지는 없고, 쓰고 싶지도 않은 일이었던 것이다.

 

  그는 문제를 해결하려 노력하지 않는다. 물론 스스로야 노력했다고 하겠지만, 문제의 원인을 해결하려 하지 않는데 그것을 어찌 진심어린 노력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그는 스스로 원주민을 몰아냈다. 그가 먼저 상점 문을 닫았고, 그보다 앞서서 세퍼트를 들여왔다. 그리고 그는 개에게 사람보다 더 좋은 음식을 제공했다. 짐승이 사람보다 더 좋은 대접을 받다니, 자연 상태에서야 어찌 그런 일이 가능하겠는가?

 

  하여 그는 원주민들의 원성을 샀다.

  문제는 이것이다. 그는 스스로를 원주민보다 우월한 위치에 놓고 있다. 그는 원주민들에게 징벌을 내리면서 복종을 강요할 수 있는 자이고,  허락도 받지 않고서 원주민들의 땅에 낯선 짐승을 끌어들일 수 있는 자이며, 가축에게 인간보다 좋은 음식을 먹일 수 있는 자이다.

 

  누가 그에게 이런 권리와 오만함을 선물했는가? 없다. 아무도 없다. 그는 스스로에게 권리를 부여했고, 그로 인해 오만해졌다. 그가 스스로에게 권리를 부여했던 근거는 오직 하나, 원주민들이 믿지 않는 신(神)을 자신은 믿고 있다는 것뿐이었다.

 

  애초부터 그에게는 원주민들의 생활방식을 이해하려는 마음이 없었다. 그는 정글에서 살던 사람들을 초원으로 끌어냈으며, 경작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에게 경작을 요구했고, 소유와 분배의 개념을 모르는 사람들에게 이해를 강요했다.

 

  결국 이 책의 주된 갈등요인인 파인애플의 소유권 문제야 말로, 백인 선교사의 가치와 원주민들의 가치가 충돌하는 부분이 아니겠는가?

 

  사람의 소유를 주장하는 백인적 가치관과 땅의 소유를 주장하는 원주민적 가치관. 선교사는 이 근본적인 차이를 인정하지 않고서, 자신의 가치관만을 강요하고 있는 것이다. 그에 비해서 원주민들은 선교사의 가치관을 이해하려고 노력한다. 그들은 끊임없이 질문한다.

  “저 파인애플이 왜 당신의 것인가요? 당신은 저것을 심지도 않았는데.”

 

  마지막으로 선교사가 찾아낸 방법은 자신의 권리를 포기하는 것, 즉 모든 것을 하나님의 소유로 명의이전 하는 것이다. 그는 이 깨달음이 대단한 것처럼 내세우고 있다.

 

  그러나 이것이 애초부터 원주민들이 내세웠던 논리와 무엇이 다른가? 그의 논리 중에서 <神>이라는 글자를 <자연>으로 바꾸기만 하면, 원주민들이 반복했던 말들과 조금도 다를 것이 없다. 그것은 결국 사람의 권리가 아니라 자연의 권리를 인정하는 것이다. 자연에서 자라난 것을 자연의 것으로 인정하는 태도, 그것이 바로 원주민들의 논리가 아니면 무엇인가? 선교사는 종국에는 자신의 논리를 포기하고 원주민들의 논리를 받아들인 것이다.

 

  기독교는 많은 것을 몰고 들어왔다. 그리고 그 선두에는 선교사들이 있었다. 전쟁과도 같았던 선교의 시기가 지나가고, 선교사들은 헌신적인 노력으로, 자유와 평등, 문명과 교육을 전파했다고 평가받고 있다.

 

  그러나 그것뿐인가? 누가 평가를 내렸는가? 그것은 그런 수해를 받은, 이른바 ‘원주민’들의 평가가 아니다. 선교사들이 스스로 내린 평가일 뿐이다. 이제 그들 자신의 평가를 좀더 냉정한 시각을 판단해야할 때가 되었다. ‘이방인’ 혹은 ‘원주민’이라는 말은 그들에 의해 만들어진 말이다. 이제 뒤바뀐 주종관계를 복원해야할 때가 되었다. 신세계의 정당한 주인은 그곳으로 찾아온 이들이 아니라, 원래부터 그곳에 살고 있던 원주민들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댓글(1)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마태우스 2004-07-04 22: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라훌라님, 오랜만에 리뷰를 올리셨네요. 명예의 전당에서 님을 뵜구, 즐겨찾기 서재에 등록을 했었지요. 명예의 전당은 아무나 가는 곳이 아니라는 걸 보여주는 좋은 리뷰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