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서아 가비 - 사랑보다 지독하다
김탁환 지음 / 살림 / 2009년 7월
평점 :
품절


뼈대만 세운다고 집이 완성되는 것은 아니다.  

당연하지 않은가? 

벽을 만들고, 구들을 만들고, 지붕을 얹는 것, 즉 기본적인 골격을 만다는 것은 물론 중요한 일이다. 하지만 집은 그것만으로 만들어지지 않는다. 벽지를 바르고, 장판을 깔고, 가구를 들여놓고, 마침내는 사람들이 입주해서 알콩달콩 살아가면서 사람냄새를 풍겨야...... 그제야 집이 완성된다.

궁궐이든, 아파트든, 단독주택이든, 초가삼간이든 모두 같다.  

애당초 집이란 그런 것이다.  

그리고 이 '집의 비유'는 그대로 이야기에도 적용된다.  

내가 처음 사용하는 것이 아니다. 동서고금의 여러 작가&학자들이 이 비유를 즐겼다. 우리의 근대문학사에서도 팔봉(八峰)과 회월(懷月)이라는 당대의 걸출한 논객들이 펼쳤던 '소설의 내용과 형식 논쟁', 일명 '소설건축설 논쟁'이 있지 않았던가? (물론 이들의 논쟁은 당대에는 건출했으나, 지금의 시각으로 보자면 적당히 유치하다. 아주 못봐줄 정도는 아니지만, 흥미를 느끼기에는 다소 부족하다는 의미이다) 

나는 다시 한번, 이 해묵은 비유를 사용하고 싶을 따름이다.  
어찌보면 문학에 대한 우리의 인식이, 팔봉-회월 시절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한 탓이기도 하다.  


무릇, 이야기를 가장 큰 덩어리로 구분하면, 이야기와 디테일로 나누어진다. 
이 표현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스토리와 플롯, 파불라와 슈제, 이야기와 담론 등을 선택하도 크게 벗어나지는 않을 것이다.

아무튼, 이 둘은 건축의 뼈대와 인테리어의 관계라고 할 수 있다.

(사실, 나는 '뼈와 살의 관계'라는 표현을 더 좋아한다. 그런데 소설건축설에 기대다 보니 표현이 다소 바뀌었다. 뼈와 살을 더 좋아하는 이유는, 이 두 가지가 유기적으로 결합되어 있다고 믿는 까닭이다.)

뼈대가 이야기라면, 인테리어는 디테일이다.
뼈대만 세운다고 해서, 그 황량한 집에 누가 들어와 살려고 하겠는가?
마찬가지로 인테리어만 세련된 집이라면, 그 부실시공 때문에 끝내 무너지고 말 것이다. 

이 작품 <노서아 가비>는 꼭 뼈대만 잔뜩 만들어놓은 형상이다.
이야기는 다소 과도할 정도로 넘치는데,그것을 효과적으로 풀어내지 못했다.
  

디테일의 가장 주요한 역할은 독자/관객이 이야기에 동화될 수 있도록 만드는 것이다.
그런데 디데일이 부족하니(사실 거의 없으니), 독자는 이야기에 빨려들지 못한다.

주인공 따냐의 인생역정은 참으로 기구하고 속도감 넘치는데도, 전혀 동감할 수가 없다. 
이 인물에게는 망설임과 고민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니 숨가쁘게 진행되는 이야기를 소화하기에 급급한 신인여배우처럼 느껴질 밖에.
이 인물은 분명 매력적이지만, 인형(doll or idol)의 수준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 


작가는 스스로를 '스토리 디자이너'라고 말한다.
(김탁환, <당신에게 이 검은 액체는 무엇입니까?>(작가의 말), 236쪽.)  

※ 김탁환이 말하는 '스토리 디자인'의 개념은 강심호의 해설에 비교적 잘 설명되어 있다. 참고할 만하다. (강심호, <러시안 커피-소설노동자가 '따냐'와 함께 내달린 세계>(해설), 249-251쪽.)  
 
하지만 작업 내용을 고려하면, 그는 디자이너가 아니라 기획자에 가깝다.
디자인은 디테일을 가지고 이루어지는 작업이다.
전혀 디테일을 찾아볼 수 없는데, 어찌 디자인을 하겠다는 것인가?

★ 

사실, 지금까지 지적한 문제들은 <노서아 가비>만의 문제는 아니다.
내가 읽었던 김탁환의 또 다른 작품인 <나, 황진이>도 다르지 않았다.  

의심은 넘치는데, 아직 이런 이야기 과잉을 "김탁환 소설의 문제"로 싸잡아 말하지 않는 것은,
내 독서가 부족하기 때문이다. 
이런 표현은 그의 작품을 전반적으로 감상한 뒤에나 합당하리라.   

앞으로 이 작가의 작품을 계속 읽을 것인가?

아마도 그럴 것이다.
적어도 그는 소재를 발굴하는 데 있어서는 재능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독서가 즐겁지는 않을 것이다.
내가 읽고 싶은 것은 잘 만든 '작품'이지, '아이디어 꾸러미'가 아닌 탓이다.  

같은 맥락에서,
이렇게 책으로 출간되었다는 것은, 독자들이 재화와 시간을 소비하기를 원한다는 뜻일 게다.
독자가 읽고 싶은 것이 결과인지, 과정인지, 심각하게 고민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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