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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종교 이야기 -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 믿음과 분쟁의 역사
홍익희 지음 / 행성B(행성비) / 201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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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학생때였을까? 사회 선생님의 한 마디에 매우 놀랐던 적이 있다. "이슬람에서 말하는 알라는 하느님을 말합니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하느님과 같죠."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이럴수가! 같은 신을 믿고 있었단 말야! 그런데 도대체 왜 싸워?' 정말이지 놀라운 발견이었다. 두 종교가 싸울 때 좋은 편과 나쁜 편을 나누기도 했었던 그때 둘의 갈등이 좀 어처구니가 없었다. 그리고 당연 두 종교가 싸우는 이유가 궁금하기도 했었다. 무엇이 문제인지  알고 있는 지금이야 단순히 편을 가르지는 않지만, 완전히 이해가 가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그 오래 전에 시작된 종교 간의 분쟁이 현재도 진행형인 걸 볼때면 안타까움이 절로 생기고, 결코 단순히 지나칠 일이 아님을 걱정하기도 한다.

 

<세 종교 이야기>에 대한 관심은 여기에서 시작되었다.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 자치구를 공격하면서 국제사회의 이해를 요구했다. 하지만 유대인의 이스라엘은 이해보다는 비판을 받고 있으며, 심지어 과거 유대인 학대로 인한 유대인 동정론까지 자기 발로 걷어차고 있는 꼴이다. 이스라엘 영토에서 점차 팔레스타인 자치 영역이 점점 축소되어 육지 위의 섬처럼 고립되어 있는 모습을 볼 때면, 도대체 이런 비극이 언제부터 무엇이 잘못되어 일어났는가라는 의문을 갖게 된다. 이들의 불행의 근원을 종교에서 찾는다.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 존재한다고 믿는 신은 같지만, 인간들의 '해석'이라는 굳건하고 두터운 퇴적층이 비극을 일으켰음을 의심하지 않는다.

 

<세 종교 이야기>는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를 분석 비교한다. 출발점을 유대교로 삼고, 기독교, 이슬람교 순으로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종교를 가진 사람이라면 우선 순위에 민감할지 모르겠으나, 이는 아브라함, 예수, 무함마드의 등장순으로 이해하면 크게 오해할 일 도 아니지 싶다. 다신사회에서 유일신을 믿는 사회로의 도래에 합당한 근거와 함께 유대교의 탄생에 대한 설명으로 이어진다. 그리고 기독교가 유대교에서 어떻게 분리되었는지, 또 이슬람교는 어떤 과정을 통해 생겼는지를 서사적으로 풀이하고 있다. 또한 각 종교의 특징들을 자세히 설명하고 있으며, 특히 유대교에 대한 설명이 자세하다. 때에 따라서는 유대교가 서술의 기준이다 싶을 정도로 유대교가 차지하는 부분이 많은 것 같기도 하다. 따라서 유대교에 대해 미처 몰랐던 점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고, 유대교에 대한 오해를 가지고 있었다면, 그 해소에 도움이 될 듯 싶다. 이와 함께 현재 서양사회의 가장 많은 오해를 받고 있어 악의 무리로까지 인식되고 있는 이슬람교에 대한 이해도 훨씬 쉬어질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작가가 책의 후반에 세 종교의 같은 점과 다른 점을 정리해주는 친절함까지 보여줌에도 불구하고, 세 종교의 발생과 공통점, 차이점에 대한 긴 서술로 인해 세 종교가 발전하면서 인류에게 미친 폐해 소개와 반성에 관한 비판이 적은 점은 아쉬움으로 남는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p.248 유대교와 기독교가 극명하게 다른 점이 있다. 유대교는 유대인에 한정된 종교인 반면 기독교는 예수의 죽음과 부활을 계기로 사랑과 전 인류의 구원을 지향하는 보편적인 종교로 발전했다.

p.248 하지만 이후 기독교 문명의 번성은 포교와 전쟁이란 양자택일적 강압 수단에 의한 것이 많았다. 인류 역사에 기독교가 뿌리를 내린 이후 오늘날까지 신앙이란 이름으로 수많은 전쟁과 이로 말미암은 숱한 희생이 있었다.

p.295 이슬람교에서는 신의 계시를 받은 자들을 예언자로서 존경하는데 아브라함, 모세, 다윗, 예수, 무함마드는 모두 여기에 속한다. 이슬람교는 무함마드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그에 의해 `알려진 것`뿐이라는 것이 이슬람교의 주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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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파마피아]를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피파 마피아
토마스 키스트너 지음, 김희상 옮김 / 돌베개 / 201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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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출신의 토마스 키스트너의 <피파 마피아>는 400쪽이 조금 넘는 분량의 책이다. 책을 들어보면 제법 무게가 나가 한 손으로 받쳐 읽기가 좀 불편하기도 하고, 책을 펼치면 글밥도 촘촘히 많다. 여기까지가 <피파 마피아>가 가지고 있는 하드웨어적 불편함이었다면, <피파 마피아>의 소프트웨어적 불편함은 이 책의 전부라고 할 수 있겠다. 처음부터 끝까지 '피파'의 부패에 대해서 집요하고 냉소적으로 파고들고 있기 때문에 입 안에서 맴도는 욕과 마음 속의 배신감을 다스려야 하는 수고가 필요하다. 

<피파 마파아>를 읽고 있으면 '피파'라는 조직이 이 정도로 주먹구구식이었나 싶을 정도로 어설프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회장, 부회장, 사무총장, 그리고 위원들, 이들이 이 조직 구성원 전부이다. 조직의 수장 회장은 위원들의 투표에 의해서 선출되고, 주요 의사들은 위원회의를 통해 결정된다. 조직의 설계와 운영이 참 간결하다. 그러나 이것이 피파의 가장 큰 문제로 조직의 덩치와 영향력에 맞지 않게 운영은 소수에 의해 진행되고 있다는 점이다. 

피파는 '회장'의 힘이 절대적이다. 그렇다면 이 조직은 '회장'에 의해서 결정되는 절대적으로 '회장에 의한' 조직이다. 여기서부터 이해가 가지 않는다. '피파'란 말이다! 피파는 동네 사람들의 친목모임이 아니라 그야말로 세계적인 조직이란 말이다. 이런 조직이 오직 '회장' 한 명에 의해서 좌우된다는 것이 어불성설이다! 하지만 현실이 그렇다. 피파는 아벨란제에서 블라터로 이어지면서 이들의 입맛대로 운영되어 왔다. 우리가 기대해야 할 것은 피파 회장의 인품이다. 그가  합리적이고, 타당하고, 투명하고, 도덕적이길 바라야 한다. 그럼 역대 회장과 현 회장은 위 조건에 맞는 인물인가? 확신하건대 'NO'이다. 토마스 키스트너가 400쪽 넘게 그들의 피파 운영방식을 말하고 있지만, 온통 부패와 거짓일 뿐이다. 한편으로 지면이 부족했음을 아쉬워하는 것 같기도 하다.

피파의 부패는 어떨까? 언제부터, 누구에 의해서, 왜, 어떤 방식으로, 어떻게 썩어들어갔을까? 토마스 키스트너는 아디다스와 푸마의 가족 싸움에서 시작한다. 가족 싸움이라고 우습게 볼 일이 절대 아니다. 시작은 그랬으나 스포츠가 점점 큰 돈을 벌어주는 산업으로 성장하고, 다른 산업뿐만 아니라 삽시간에 한 나라의 국내정치에까지 영향을 주게 되었으니 말이다. 이 모든 거미줄처럼 얽기고 얽긴 관계를 따라가다 보면 한 곳에 도달하게 된다. 누구나 짐작하겠지만 결국 '돈'이다. 여기에 현 피파 회장 블라터가 더 원하는게 있다면 '노벨평화상'이라는 명예, 그는 부에 더해 명예라는 점을 더 찍고 싶어한다. 그와  축구로 맺어진 그의 가족들의 욕심은 끝없이 팽창하여 이젠 더 이상 부풀어오르지도 못할 것 같기도 하다.

블라터와 그의 축구 가족들의 욕심으로 채워진 풍선에 바늘을 댈 수 있는 것은 스위스 검찰뿐이라고 키스트너는 주장한다. 그렇다고 법체계 위의 피파를 끌어내려 주저앉힐 수 있는 존재가 있다고 안심하지는 말자. 블라터와 그의 축구 가족은 이미 스위스의 특별검사의 수사망을 피했으며, 미래의 수사를 피하고자 성실히 자신만의 방어벽을 구축중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피파의 조직개편이 있지 않고서는 스위스검찰만의 노력만으로는 턱도 없지 않을까? 과연 피파가 조직개편의 필요성을 느낄 수 있는 수단이 존재할까하는 의심이 든다. 이상적인 방법이 있다면 전세계 축구팬들의 보이콧 혹은 후진국들의 투명한 정치상황 정도가 아닐까. 키스트너의 다양한 증거와 주장들에 비쳐볼 때 피파의 부패는 전세계의 부패와 마주한다.

끝까지 우리는 피파의 부패를 척결할 방법을 알 수가 없다.  피파의 부패는 너무나도 크고, 얽힌 관계가 마치 시작과 끝을 알 수 없는 둥근 공 같다. 그래서 설사 해결 방법을 알았더라도 한눈에 보이지도 않게 된 부패 정도를 어디서부터 칼을 대야할지도 모르게 되었다. 그래도 외침이 있는 곳에 울림이 있고, 그곳에 변화를 기대해 볼 수도 있지 않을까 싶다. 축구팬으로서 바란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p.9 축구는 그저 스포츠 경제, 스폰서 경제, 정치 그리고 미디어의 힘으로 부풀려진 가죽공을 둘러싼 비즈니스일 따름이다.

P.123 왜 피파를 상대로 아무런 대비책이 강구되지 않는 걸까? 이유는 간단하다.늘 거듭해서 새로운 권리가 공개입찰에 부쳐지기 때문이다. 바로 그래서 국제연맹과 줄곧 시비를 벌이고 싶어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p.226 수조 원이라는 돈을 신탁 관리하는 피파에서 단독 서명권을 행사하는 블라터는 스포츠의 자율성이 국가의 법적 간섭을 막아주는 보호장치라는 점을 잘 알고 악용한다. 더 많은 보호를 제공하는 쪽은 바로 언론 지평이며, 과도할 정도로 축구를 사랑하는 팬이다.

p.321 셀프서비스의 자극과 횡령의 유혹이 뒤섞인 단체운용 현장의 백미를 보여주는 것이 바로 스포츠 행정이다.

p.365 다름 아니라 전 세계의 스포츠가 정체를 의심할 수밖에 없는 사업가들에게 장악되어 국경을 자유롭게 넘나들며 서로 접촉하면서 판을 키우는 장으로 변모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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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신의 오후 - 남자, 나이듦에 대하여
우에노 지즈코 지음, 오경순 옮김 / 현실문화 / 201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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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험해 보지 못한 것에 대한 두려움이 있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할 때가 있다. 그러나 그것은 예정되어 있어서 피하고 싶어도 피할 수 없고, 도망치고 싶어 멀리 도망가려해도 때가 되면 잡히게 된다. 그럴 때 누군가는 '피할 수 없으면 즐겨라.'라고 호쾌하게 말하기도 한다. 하지만 한번 집어먹은 두려움은 쉬이 가시지 않고, 어쩌겠어싶은 포기하는 심정으로 알게 모르게 안의 무언가를 턱 내려놓는다. 정말로 피할 수 없다면 어쩌겠어? 진심으로 즐기지는 못해도 주어진 것은 감내하며 살아야지 않겠어? 나름의 용기를 일깨운다. 하지만 삶의 무게가 이 하찮은 결심마저도 쉽게 놓아주지 않는다. 끈질기게도 물고 늘어지는 진정 현실적인 삶이 말이다. 인생의 반려자를 만나 반평생, 한평생 해로했다해도 남고, 남겨지는 시간차는 존재한다. 각각은 너무 늦게, 너무 갑자기, 혹은 너무 일찍, 어쩌면 영원히 알아채지 못할지도 모르지만 생의 마지막에는 혼자가 아닐까? 늙어서, 병들어서, 사고로 등등 다양한 이유로 생을 마감할 즈음 곁에 가족, 친구, 동료 등이 있다해도 혼자라는 생각은 변함이 없다.

그래서인지 '독신의 오후'에 등장하는 다양한 독신의 종류에도 불구하고 모두 한 종류의 독신으로 생각이 모인다. 아무리 나누려해도 모든 인생이 독신인 것 같은 생각은 좀처럼 흔들리지 않는다. 우에노 지즈코는 남자들의 독신에 초점을 맞추려고 했다. 그러나 곳곳에서 남자들에게 향한 시선을 여자들에게도 돌린 흔적을 발견한다. 이는 남자든 여자든 독신, 인생말에는 누구나 비슷한 상황에 처하게 마련이란 생각이 있기 때문이 아닐까.

한 가지 차이점을 든다면 여자는 그렇지 않은데, 남자는 그런 것. 즉, 독선적이고, 젊은 시절 무례한 행동을 일삼고, 가족에게 무책임했던 남자들은 독신의 생활이 우울하다. 그리고 작가는 말한다. 남자들이 우울한 독신생활을 원하지 않는다면 남을 배려하고, 가족에게 다정하게 행동하며, 군림하고 계급을 나누려하지 말고, 다양하게 친구들을 사귀라고 말이다. 이거 어디서 본 듯한 남자들이다. 소위 착한남자. 한마디로 두루두루 착한 남자는 우울한 독신생활을 하지 않을지도. 결국 남자들은 아름다운 석양에 물든 평온한 오후같은 독신생활을 원하면 착해져야 한다.

그렇다면 너무 무책임한 말이 아닐까? 세상에서 '착하다'만큼 이도저도 아닌 말이 없기 때문이다. 그야말로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 같은. 그러므로 누구에게는 착하지만, 누구에게는 착하지 않은 인생을 살아온 모두에게 따뜻한 독신의 오후를 맞보게 해주어야 한다. 그래서인지 작가는 글 중간중간에 사회구조에 대해서 언급하기도 한다. 하지만 성공적이고 구체적인 사례는 우울한 독신생활을 경고하는 것만큼 다양하지도, 구체적이지도 않다. 노후를 걱정하는 독신자들에게 이러이러하게 살지 않는다면 당신의 삶도 이들과 그닥 다르지 않을 것이라는 겁만 잔뜩 줄 뿐이라는 생각마저 든다. 우울한 독신생활의 경우보다는 독신들이 함께 하는 공동체의 성공적인 사례와 가능성에 대해 좀더 지면을 아끼지 않았다면하는 아쉬움이 짙게 남는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P.201 남자가 홀로 살아갈 방법은 있을까? "예스!"가 이 책의 대답이다.

P.221 집에서 홀로 죽는 것도 좋다는 각오는 되어 있다. 그러나 발견이 늦어져 주변에 민폐를 끼치는 것만은 막아야 하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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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자는 인간을 이방인과 비교했다. 나는 '천명의 사람이 있으면, 천개의 하늘이 있다.'란 말을 좋아한다. 아무리 누군가가 카테고리에 넣으려해도 인간은 모두 제각각이란 생각이다.

특히나 요즘같은 개인위주의 사회에서 지금까지 사회를 바라봤던 기존의 시각에 변화를 주어야 할 때인 것 같기도 하고 말이다.

 

 

 

 

 

 

 

 

 

움베르토 에코의 작품을 백퍼센트 이해한 적이 없는 것 같다. '한국의 움베르토 에코 김용규'라니... 이 문장에 그냥 끌려서 읽고 싶어진다.

 

 

 

 

 

 

 

 

 

 

 

 

현재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공격을 보고 있자니, 세 종교에 대해서 확실히 알아둘 필요가 있겠다 싶다.

 

 

 

 

 

 

 

 

 

 

 

 

 

여자 아이들은 어릴 때 한번쯤(?) 발레리나를 꿈꿔봤을지도... 그렇지 않은 사람도 많겠지만. 발레리나를 꿈꿔보지는 않았지만, 발레리나가 무대에서 춤 추는 모습을 볼 때면 발레의 우아함에 빠지기도 한다. 겉으로 보이는 발레의 우아한 모습외에 다른 모습들도 물론 있겠지. 존재하는 것들에게는 빛과 그림자가 있기 마련이니 말이다. 이 책에서 이런것도 기대할 수 있을까?

 

 

 

 

 

 

 

 

살아가면서 별로 생각하지 않아도 될 일이 있다. 구지 필요성이 없어서이기도 하지만 너무 오랫동안 유지되었던 것들이기 때문에 말이다. '국가'도 그랬다. 세월호 사건이 발생하기 전에는 말이다. 국가 존재에 대한 좋은점과 나쁜점을 따져볼 필요성도 못 느꼈고, 생각조차도 해본적 없다. 하지만 세월호 사건은 많은 사람들과 더불어 나에게도 의문을 갖게 했다. 아나키스트의 국가없는 사회는 어떤 사회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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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틀러의 철학자들]을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히틀러의 철학자들 - 철학은 어떻게 정치의 도구로 변질되는가?
이본 셰라트 지음, 김민수 옮김 / 여름언덕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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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경우든 나의 예상은 대체로 빗나가는 편이다. 이럴때면 운도 지지리도 없지 혹은 그럼 그렇지 하며 체념하고 넘어가면서도, 어떤때는 지극히 일반적인 범주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나의 사고한계에 실망하기도 한다. 주절주절 잡기적 얘기를 털어놓는 이유는 <히틀러의 철학자들>도 그렇다는 얘기다. 나의 기대와 예상은 히틀러에게도 철학이 있었다면 그것이 무엇이었는지, 그리고 그의 계획에 동조한 철학자들이 있다면 그들의 면면과 사상, 구체적 동조 방식들에 대한 것들이었다.

그런데 1, 2부로 나누어진 <히틀러의 철학자들>은 예상과 기대에 크게 벗어나진 않았지만, 어느 지점부터는 히틀러의 나치에 부역한 철학자와 나치의 반대편의 철학자들의 삶에 치중한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그리고 에필로그에 이르러서야 <히틀러의 철학자들>의 핵심이 등장한다. 바로, '나치사상에 물든 철학자의 사상을 가르쳐야 하는가?'이다. 마지막에서 작가는 솔직하게 독자에게 묻는다. 지금까지 나치에 부역했던 철학자들과 나치의 반대편에 있던 유대인 철학자들을 소개했으니, 독자들의 생각은 어떠한지 말이다.

하지만 작가의 질문이 개운하지 않으며, 도전적으로 느껴지기도 한다. 1부에서 작가는 히틀러의 꿈을 이루어주고자 나치에 부응한 철학자들 로젠베르크, 보임러, 크리크 등을 객관적이면서 평정을 유지하며 소개하고 있다. 심지어 작가의 담담함이 지나쳐 나치 부역 철학자들의 반유대인정책의 악랄함과 잔인함이 덜 느껴지기도 한다. 그렇기에 나치 부역 철학자들이 신랄한 비판을 받아야함에도 불구하고 작가가 감정에 빠지지 않고 객관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다는 생각이이 들기 시작했다.

<히틀러의 철학자들>의 2부는 나치의 반유대정책으로 피해를 당한 철학자들이 나온다. 벤야민, 아도르노, 아렌트, 후버 등등이 말이다. 하지만 '히틀러의 적들'이라고 표현한 철학자들에 대한 작가의 입장은 1부하고는 조금은 다르다. 자살로 생을 마감한 벤야민, 생명에 위협을 느끼고 불안한 망명생활을 한 아도르노와 아렌트, 사형을 당한 후버 등은 아무 죄없이 단순히 유대인이며 유대인과 관계가 있다는 이유로 핍박당했다.

여기서 더이상 평정을 유지하지 못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히틀러의 적들'의 철학자들의 삶을 얘기할때면 점점 격앙된 분위가가 감지된다. 어떻게 나치부역 철학자들 중 로젠베르크만이 처벌을 받고, 나머지 많은 철학자들은 독일패전 후에도 같거나 나은 생활을 하고, 심지어 하이데거는 후세들에게 존경까지 받을 수 있는지 말이다. 반대로 '히틀러의 적들' 철학자들은 두려움에 고향에 돌아오지도 못했는데! 이쯤되니 작가가 유대인이 아닐까하는 의심이 살짝 들기도 한다.

에필로그의 작가 물음이 도전적이긴 해도 사고의 여지가 남기도 한다. "하지만 대다수 유명인사들이 세속의 명리를 좇았던 것과 달리 철학자들은 마치 내세에 골몰하는 승려들처럼 현실과 동떨어진 세상의 사람들로 여겨졌다. 언뜻 보면 철학자들은 상아탑에서 살다가 추상적인 관념 속에서 길을 잃은 사람들이거나 평범하고 이기적인 관심사 따위는 초월한 사람들처럼 보인다." 공감되는 부분이다. 철학자라하면 이런 이미지가 먼저 떠오른다. 더 범위를 넓혀 철학자뿐만 아니라 지성인에 대해서 품고 있는 이미지이기도 하다. 하지만 현실은 이런 기대를 가차없이 밟아버린다. 오히려 지성인들이 정의와 상식을 경시하는 경우가 더하면 더했지싶은 경우가 태반인 것이 현실이다. 그래서인지 작가의 '나치사상에 물든 철학자의 사상을 가르쳐야 하는가?'에 대한 질문의 대한 대답으로 망설임이 줄어든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바인라이히는 회플러의 행적을 폭로했다. 하지만 그는 진실을 폭로할 수는 있었지만 정의를 집행할 힘은 없었다. 종전 후 회플러는 공식적으로 '단순동조자'로 분류됐다. 회플러는 자신이 태어난 오스트리아로 돌아가 1951년부터 1971년까지 빈에 거주하면서 연구를 계속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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