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밥헬퍼 > '성공'보다 '길'을 선택하는 삶에 대해

 길을 걷는 사람, 스스로가 길이라고 말하는 사람  보다

신경림 시인이 1993년 내놓은 시집 '쓰러진 자의 꿈'이라는 시집의 첫 번째 시는 '길'이다. 그 내용 중에 한 대목을 다시 옮겨본다.


사람들은 자기들이 길을 만든 줄 알지만

길은 순순히 사람들의 뜻을 좇지는 않는다...(중략)


사람을 끌고 가다가 문득 벼랑 앞에 세워 낭패시키는가 하면 큰 물에 우정 제 허리를 동강내어

사람이 부득이 저를 내버리게 만들기도 한다. 사람들은 이것이 다 사람이 만들 길이

거꾸로 사람들한테 세상사는 슬기를 가르치는 거라고 말한다.... (중략)


그래서 길의 뜻이 거기 있는 줄로만 알지 길이 사람을 밖에서 안으로 끌고 들어가 스스로를 깊이 들여다보게 한다는 것은 모른다.

길이 밖으로가 아니라 안으로 나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에게만 길은 고분고분해서 꽃으로 제 몸을 수놓아 향기를 더하기도 하고 그늘을 드리워 사람들이 땀을 식히게도 한다.

그것을 알고 나서야 사람들은 비로소 자기들이 길을 만들었다고 말하지 않는다.


시를 읽으며 삶의 방식을 생각해 본다. 두 가지가 떠오른다. 하나는 과정을 아무렇게나 생략하는 결과중심적 삶과 다른 하나는 길을 통한 과정의 의미를 되새겨보는 삶으로 마침내 바람직한 결과에 도달하는 삶이다.



역동적인 삶을 노래하는 시23편

 

나는 무엇인가를 꽉 움켜쥐고 더 이상 움직이지 않고 한곳에 머물러 살아가겠노라고 말하는 삶보다 길을 걸어가며 누리는 행복과 더불어 설령 정착한다해도 늘 그 곳에 깊이 빠져 머물지 않고 그 자리를 나의 새로운 출발점이 된다고 여기면서 삶의 마지막이 가까올 때 비로서 이제는 이 곳에서 편히 쉬겠노라고 말하는 삶을 아직도 더 좋아한다. 또한 내가 길을 가는 삶을 선택했다고 말할 때 그것은 내가 실제로 길을 만드는 사람이라는 생각은 아니다. 다만 가장 올바른 길을 ‘선택해서’, 그 길을 가는 것뿐이다. 이것은 내 삶이 어떤 길을 걸으며 그 길에서 부딪히는 모든 문제들과 더불어 엮어가는 것임을 인정하는 것이다.


구약성경의 아름다운 시 중에 하나인 시편 23편은 그런 점에서 내 삶의 정체성을 다시한번 일깨워준다. 내가 어떤 사람인가 하는 것 말이다. 요즘 사투리가 표준어를 능가하는 인기를 얻고 있으니까 마음 편하게 사투리로 한번 읽어보자. 


"여호아가 내 목잔데 내가 머-가 부족할끼 있겠노?

마, 내사 더 이상 바라는 거 엄따!.

그 양반께서 나알로 시-퍼런 풀구디이에서 디비져누어 푸-욱 쉬라 카시고,

잔자아-난 시내까로 델꼬 가시며,뒤졌던 내 영혼 도로 살려가꼬는,

마아, 어너 누구한테도 그 양반 욕 안 보이게로 똑- 바로 살아라 카셨대이.

들어가믄 마, 꼭 뒤질 것 같은 시-꺼먼 골짜구를 내가 걸어간대캐도

내가 간띠이가 퉁-퉁 부우가꼬 미친개이처럼 히죽거리고 돌아다닐 수 있는거넌,

그 양바이 내한테서 안 떨어지고 바-싹 붙어서 내하고 꼭 같이 가시기 땜인기라!

그 양반 몽디이와 짝대기가 내를 따악- 지켜주시는데

내가 머땜에 가시나처럼 벌벌 떨겠노?

내사 마, 맘 푸욱- 놓는기라! 우리 주인 양바이 저 문디 같은 내 원쑤들 보는 앞에서

상다리 확- 뿌러지게 채래놓고, 나를, 마, 억쑤로 높이시고는,

어여 와서 배터지게 시일-컷 먹어라 카이, 아이고오! 와 이래 좋노?

내사 마 더 이상 원도 없대이! 머가 더 필요하겠노?

내보다 더 부자고 행복한 놈 있으믄 나아보라캐라!

내 인생이 지아무리 골치아프고 복잡다캐도 그 양바이 내 인생 다- 책임져 주신다카이까네 나는 마, 어언 놈이 날 잡아죽인다캐도 그 양반 옆에 따악 달라붙어가꼬,

마, 절-때로 안 떠날끼고, 그 양반 집에서 팽생또록 살끼대이!

암! 내가 내 집 놔 놓고 어데 가겠노? 택도 없다! 할렐루야아아-!

                                                         <- 번역: 갈릴리마을>"


이 시를 읽을 때마다 나는 나 자신이 길을 가는 사람임과 동시에 또 그러해야 하고 어쩌면  죽음을 담보로 하는 긴 여정의 끝까지 가서 마침내 영원히 거할 내 신앙의 종착역, 그 집에 머물 때를 그려보게 된다. 동시에 나는 그 긴 여정을 나 홀로 걸어가는 길이 아니라 동행이있다는 사실을 경험한다.

  이 시는 고요한 목가적 풍경을 그려내는 시가 아니라 인생의 험한 길을 사투를 벌이며 치열하게 걸어가는 사람의 발걸음으로 , 또 그 길을 함께 걸어가는 존재의 땀이 흠씬 배여 있는 역동성과 그 삶이 험한 골짜기에서도 생기 넘치게 걸어가는 그런 운동성이 돋보이는 시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이 시는 정적인 노래로 탈바꿈되어 불려지는가? 그것은 이 시를 맨 마지막 절, 그러니까 시의 마지막 결론을 앞에 두고 해석한 결과이다. 즉 마지막 구절의 집에 거한다는 그 기쁨이 마치 인생의 처음부터 당연히 주어진 것인양 여기고 그 과정이나 역경을 아무 것도 아닌 것처럼 가볍게 처리하는 그런 태도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다시 말하지만 이 시는 결과를 두고 모든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그 집에 영원히 거하겠다는 고백을 했기 때문에 앞의 일들이 다 의미있는 것이 아니라 이미 처음부터 치열하게 그 길을 걸어온 후 이제 마지막 지점, 그 길을 온전하게 꿋꿋하게 걸어온 결과 마침내 도착할 ‘그 집’에 도착하고 다시는 이 집을 떠나지 않아도 되는 기쁨을 누리게 되었다는 노래인 것이다.

  결국 이 시는 내가 현실의 길을 걸어가는 사람이고, 그 현실의 길 하나하나에 삶과 신앙의 깊은 의미를 퍼올리며 걸어가는 것이지만 그 길은 어떤 막연한 수도의 길처럼 흘러가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마침내 끝이 있고, 목적지가 있는 길을 걷는 다는 의미인 것이다.


내가 스스로 조심해야 하는 단어들 : '꿈', '승리', '성공'


여기서 스스로 배격해야 할 생각이 있다. 그것은 '꿈', '승리', '능력'이라는 표현들이다. 사실 '꿈'이라는 단어를 너무 많이 접하고 있다. 이것이 무슨 뜻인지 모두가 안다. 인생의 목적이며, 가치를 두는 일이라는 것을 잘 알지만 전혀 그렇지 않은 뜻인데도 그렇게 생각하는 경우도 있다. 그 한 예로 사람들은 가끔 자다가 꾸는 '꿈'을 '인생의 최고의 가치를 담은 꿈'과 동일하게 말하기도 한다는 것이다. 후자를 좀 더 고상한 말로 바꾸어서 말하기도 하는데 그것은 '비전'이라는 것이다. 이 말을 다시 설명하면 '인생의 목적 달성'이라는 말이 된다.  이것이 조금 더 다듬어지면 '신이 주신 인생의 목적 달성'이 되고 그 속뜻은 '인생에서의 업적이나 결과물'이 된다. 그러다가 마침내 자다가 꾼 꿈이 현실로 드러나지 않으면 그것은 실패한 인생이 되고 마는 것이다. 그리고 그 문제의 중심에 기독교인들의 중요한 언어인 ‘승리’, ‘성공’이라는 단어가 있다. 다시 말하면 승리하지 못하는 기독교인은 존재의미가 없기도 한다는 것이다. 이 말이 전혀 틀리지 않았다고 해도 그것은 한 가지 중요한 오해를 하고 있다. 그것은 이러한 사고의 근간이 되는 '요셉'의 삶이 불분명하게  오해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요셉하면 '꿈 꾸는 사람'의 대명사로, 그래서 '비전의 사람'이라고 말할 때는 요셉을 빼놓지 않는다. 그는 단 한번 꾼 꿈을 평생 간직했기 때문에 모든 역경에도 굴하지 않고 애굽의 총리가 되었다고 말한다. 신앙을 잘 간직하고 꿈을 잘 꾸고 간직하면 애굽의 총리되는 것쯤은 아무 것도 아니다라고 말한다. 그러니 어떤 경우에도 신앙을 저버리지 말고, 신뢰하면서 꿈을 잘 꾸라고 권면한다.

  그러나 성경에 등장하는 요셉과 그의 이야기는 그런 사실을 전혀 언급하지 않는다는데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이다. 그것은 ‘승리의 삶’을 주창하고 싶은 어떤 사람의 해석이며, 그 해석을 마구 소개하는 사람들의 무분별의 결과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요셉이 애굽의 총리가 되기 위해서 모든 역경을 참고 견뎠다는 논리를 보인다. 어린 시절 꾼 꿈 하나를 평생 간직하면서 마침내 애굽의 총리가 된 입지전적 인물이니 우리 모두가 다 꿈을 가지면 이렇게 된다는 식이다. 이렇게 못하면 천하에 바보가 신앙인이라는 것이다. 승리하지 못하면, 성공하지 못하면 신앙인도 아니다는 결론이다. 그리고 더 나아가 그것이 '비전'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러니 이 땅에서 승리하지 못하거나 성공하지 못하면 그는 그리스도인이 아니라 다 손에 쥐어준 떡도 못챙겨먹는 바보가 되는셈이다. 그러니 부딪히는 현실에 대해 막연히 꿈이 없기 때문에 능력도 없다는 논리에 휩쓸려 그 현실을 어떻게 넘어갈 것인가?라는 치열한 고민에 앞서 그 문제에 모든 관심을 쏟게 하고 왜 넘어갈 수 있는데 못 넘어가느냐? 고민할 필요없이 그냥 부딪쳐 밀어붙여라, 꿈이 없으니 그러는 것이 아니냐?라는 식에 휘둘린다.  그러나 구약성경 창세기 50장의 맨 마지막 부분, 요셉의 유언을 다시 읽을 때 거기에는 전혀 다른 해석이 담겨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나는 죽으나 하나님의 너희를 권고하시고 너희를 인도하여내사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맹세하신 땅에 이르게 하시리라 하고 요셉이 또 이스라엘 자손에게 맹세시켜 이르기를 하나님이 정녕 너희를 권고하시리니 너희는 여기서 내 해골을 메고 올라가겠다 하라 하였더라”


그의 유언은 애굽에서의 총리로 멋지게 살았다가 죽었노라는 말이 아니라 ‘해골으로라도’ 아직 끝나지 않은 길을 걸어나서겠다는 것이다.  


요셉 자신은 이 애굽 총리가 그의 인생의 목표이거나 삶의 마지막 종착점이라고 말하지 않는다는 점에 주목해야 할 것이다. 놀랍게도 이방인으로서 애굽의 총리에까지 오른 이 요셉은 인생의 끝에서 자기가 끝까지 품고 살았던 것을 말하는 것이다. 그 때 그는 '자신의 인생은 애굽 총리가 아니라 가나안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 총리의 땅을 떠나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돌아가야만 한다‘는 것이 그가 평생동안 간직했던 꿈' 이었다. 그는 전 생애를 통해 그가 인생에서 도달해야 할 최고의 고지를 설정한 것이 아니라, 또 그가 어린 시절 꾼 꿈을 이루는 것으로 인생의 목표를 삼았던 것이 아니라 그가 죽음 이후에라도 걸어가야 할 길, 자신의 죽음을 통해 여전히 이 애굽 땅에 머물러 있는 사람들이 걸어가야 할 길을 보고서 그것을 간곡히 부탁하는 것이다. 유언으로 말이다. 아직까지는 풍요로운 땅, 그래서 사람들이 자신의 땅을 버리고 정착하기를 원하는 땅, 그리고 그것을 마음대로 할 수 있었던 요셉의 자리가 삶의 끝이 아니라 그에게는 죽음 이후에라도 계속해서 벗어나지 않고 걸어가야 할 길이 있다는 것을 그는 평생 간직하며 살았다.  그러니 요셉에게 있어서 '꿈'은 이 마지막 장면에서 비로소 사람들에게 드러난 것이다. 그리고 그 요셉의 말 속에서 우리는 신앙의 길을 제대로 본 요셉을 발견할 수 있는 것이다.


꿈이 아니라 길을 걸었던 사람, 요셉

 

요셉이 비전의 사람으로 드러나는 것은 어린 시절의 요셉이 아니라 그가 죽는 순간 비로소 드러났다. 그 이전까지의 요셉은 인생이 어떻게 흘러가는지도 모르고, 삶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철부지였기에 어느 날 자신이 꾼 꿈을 함부로 말하고, 그것 때문에 야곱이 마음에 근심하기도 하며, 스스로 험난한 길에 처하도록 만들었을 뿐입니다. 그가 험난한 길을 가면서 비로소 그는 자신이 말했던 그 '꿈'이 사실은 처음부터 자신의 것이 아니라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적으로 자신의 삶이 무엇인가 어긋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뿐이다. 그러나 그는 비록 어긋난 것처럼 보이지만 자신의 삶과 길을 누군가가 끝까지 책임지고 이끌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어 마지막 순간까지 자신이 걸어가야 할 길이 무엇인지를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더 확신하게 되는 것이다.  성경은 곳곳에서 하나님이 요셉과 함께했다고 말하지 요셉이 하나님과 함께 했다고 말하지 않는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하나님을 향한 요셉의 고백은 점점 무르익어 간다. 보디발의 아내로부터 유혹을 받았을 때에도 요셉은 신앙의 절정기가 아니라 설익은 신앙을 표현할 뿐이었다. '어찌 이 큰 악을 행하여 하나님께 득죄하리이까?'라는 고백은 요셉의 탁월한 신앙의 고백으로 보기에는 석연치 않은 점이 드러난다. 그는 하나님을 여전히 그 지역의 신, 인간의 삶을 억제하고 심하면 벌을 내리는 그런 대상으로 인식하는 것이다. 또한 요셉은 처음부터 자신의 꾼 꿈을 이루려는 의지가 있었던 것이 아니라 그 꿈을 자랑하고 싶었을 뿐입니다. 워낙 부모의 사랑을 많이 받던 철부지 17살 청소년이었기에 뭐든지 부모님을 믿고 형들을 함부로 대했다. 그에게 있어서 해와 달, 그리고 열 한별이 절하는 꿈은 자신이 그런 존재가 되기를 그 때부터 마음먹었다는 것이 아니라 그 꿈을 그냥 철없이 자랑해 버리고 말았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그의 인생은 그때부터 꼬이기 시작한 것이다. 그런데 요셉에게는  탁월한 재주가 있었는데 그것은 다른 사람의 꿈을 요령있게 설명해 줄 수 있다는 것이다. 그의 인생은 계속해서 곤경에 처한다. 그러나 단 한번의 기회로 그는 애굽의 총리가 되었다. 애굽으로 잡혀온 지 13년 만에 자수성가 한 셈이다. 그러던 그가 애굽에서 80년을 사는 동안 그의 인생이 어떻게 흘러온 것인지 되새기게 된다. 그리고 그의 삶은 그가 어떤 꿈을 이루어 온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자신의 꿈에 맞추어 자신의 인생을 이끌어 오셨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그것이 그의 인생에서 종착점은 아니었다. 창세기 41장과 42장 사이에는 무려 93년의 시간 차이가 있다. 적어도 이 90년 이상의 헤어짐 속에서 그들은 모두 다른 사람이 되었을 것이다. 한 사람은 이스라엘 사람으로, 한 사람은 17살에 노예로 팔려와 90년간을 애굽에 산 사람으로 존재한다. 그가 언어를 지키고 문화를 지켰다해도 그의 모든 영역은 다 애굽 사람이며, 애굽의 터전이다. 그러나 그와 형들이 만났을 때, 그는 이 긴 세월을 다 뒤로 한채 곧바로 이스라엘 사람, 야곱의 아들, 형들의 동생으로 돌아가 버린다.  형들은 그를 몰라보지만 그는 단번에 그들을 알아본다. 요셉의 인생은 애굽의 총리라는 이른 바 꿈의 성취가 아니라 그의 고향, 하나님이 약속하신 땅, 그 조상들에게 보여주신 그 길을 따라 마지막에 머물러야 할 땅을 기억하며 살았다는 결정적인 증거가 그의 유언에 담긴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110세의 요셉이 형들보다 먼저 삶을 마감하는 순간에 유언처럼 남겨두는 말씀이 중요한 의미를 갖는 것이다.


이것은 한 인간이 못 다 이루어 눈을 감을 수 없는 그런 아쉬움의 절정에서 하는 호소가 아니라 자신의 삶 전체를 통해 보았던 '길을 걸어가는 사람의 확신‘이다. 짐 앨리엇 처럼 말이다. 여기서 요셉의 본 것은 무엇인가? 자신의 인생에서 그가 험난한 과정에서 본 것은 무엇인가? 너의 꿈이 대단했다. 너는 참 대단했다. 큰 일을 이루었다는 승리의 축하 소리가 아니라 자신은 자신이 머물러야 할 곳으로서 총리로 살았던 애굽 땅을 미련없이 ’떠나‘ 그의 인생에서 끝없이 걸어가고 돌아가야 할, 그리고 반드시 하나님이 찾아오셔서 이끌어 가실 '약속의 땅'으로 돌아가는 것이었다. 이것이 요셉이 보여준 꿈이며, 비전이다. 

요셉의 꿈은 해와 달과 별이 자신에게 절을 하는 것을 이루어내는 것에 있지 않았다. 오히려 요셉의 꿈은 그것은 인생의 모든 상황에서도 자신이 돌아가야 하고, 걸어가야 하고 마침내 자신이 머물 길, 땅, 그리고 자신과 끝까지 그 길을 동행하고 있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본 것이었다. 지나간 이야기지만 요셉의 자신의 형들이 자신에게 곡식을 얻기 위해 온 순간, 요셉은 이 사건을 통해 하나님이 자신에 대해 무슨 일을 하시는가를 각성했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본질, 길을 걸어가는 사람들


길을 걸어가는 사람들에게는 '꿈', '승리', '능력'이라는 말은 본질적 의미가 아니다. 승리하지 못한다고 해서 꿈을 잘 못꾼다고 해서 우리 인생이 무의미한 것은 더더욱 아니다.  설령 좋은 꿈을 꾸었다고 해서 우리 인생의 모두 다 복된 길로 나아가는 것도 아니다. 더군다나 '능력'이란 '탁월한 힘' 그 자체를 말하지도 않는다. 특별히 기독교인들에게 '꿈'이나 '승리'나 '능력'은 하나님의 길, 그리스도의 길을 얼마나 정확하게 보고 있으며 그 중에 내가 걸어가야 할 길의 부분은 어디인지 냉철하게 바라보며 그 길에 그리스도와 함께 동행하는 것이어야 한다. 그러기에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비전이란 말로 대변되는 꿈은 '하나님의 길을 잘 볼 수 있는 것'이며, 이 현실 세계에서 '하나님의 길을, 그 길에 여전히 생동감있게 넘치는 하나님의 세계'를 보는 것이다. 이것이 곧 ‘비전’이다. 


출애굽기 13장 19절에는 이 요셉의 마지막 유언을 기억하며 길을 떠나는 출애굽의 이스라엘 백성이 등장한다. 무엇이 그들로 하여금 이 오랜 세월동안 요셉의 뼈를 애굽에 묻지 않고 누군가에 의해 간직되고, 그의 유언에 따라 마침내 애굽에서 나가게 된 날, 모세는 어디에서 요셉의 뼈를 찾아다가 그들의 길에 동참시키게 했을까? 또 광야 40년을 헤매는 동안에도, 그리고 가나안에 들어가기 위해 치열하게 싸우던 동안에도 그들은 다른 것은 몰라도 요셉의 뼈를 지키고, 간직해서 마침내 이 뼈를 여호수아 24장, 약속의 땅,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만을 선택하기로 결단하는 신앙고백의 자리, 세겜에 묻게 했을까? 무려 반세기동안 오합지졸 이스라엘이 광야를 거쳐 나오는 동안 무슨 이유로 이 요셉의 뼈를 포기하지 않고 나올 수 있게 한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이 요셉의 뼈가 단순히 물리적인 뼈, 우리 육체의 뼈가 아니라 ‘길을 걸어가는 삶’을 확신하고 그것을 놓쳐서는 안된다고 하는 요셉의 비전이 깊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반드시 애굽의 우리를 찾아오실 것인데, 그 때가 되면 여기에 있겠다고 하지 말고 하나님이 보여주신 길을 따라 가겠노라고 대답하며 이 약속의 징표로 나의 뼈를 기억하라는 간곡한 당부가 그들에게 남겨졌기 때문이다.


다시 생각한다. 나는 무슨 일을 하며 살아야 하는가? 그러나 실제 고민은 지금 이 현실에서 나는 ‘길’을 걸어가는 사람인가?를 묻는 것이어야 한다. 나는 이 땅에서 어떤 길을 걷고 있는가?를, 나는 어떤 길을 보고 그 길을 따라가고 있는지를 살펴야한다. 현실은 전혀 바뀌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 현실이 삶 전체를 지배할 수는 없다. 그 현실에 매몰되지 않고 그 현실 너머의 세계를 계속해서 주시하고, 그 본 길을 찾아 나서기만 한다면 말이다. .


신약성경의 히브리서를 펼쳐보라. 꿋꿋이 자신이 선택한 삶의 길을 걸었던 사람들의 삶을 정리할 때 요셉의 평가는 그가 애굽의 총리의 꿈을 이루었다고 정리하지 않는다.(히11장22절 참고) 그가 임종 때에 가졌던 이 태도, 이 확신, 이 본 바, 즉 이 비전, 꿈, 소망이 그가 믿음으로 살았던 징표라고 선언한다. 요셉에게 볼 수 있는 믿음으로 산 삶은 '비전'이었다. 하나님의 길을 보고 그것을 죽어서도 끝까지 걸어가려고 했던 그것이 요셉이 믿음으로 살았던 징표라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삶도 마찬가지이다. 그 분이 십자가에서 마지막 선언으로 '다 이루었다'고 말씀하실 때, 그의 삶이 화려한 자리나 열매로 가득했던가? 오히려 그의 다 이루심은 그가 죽음을 향해 걸어가는 마지막 길에 서 있다는 표시이며, 확신이었다. 그가 정말로 걸어가지 않을 수도 있다면 이 길을 가지 않도록 좀 조정해 주시기를 기도하기도 했지만 그러나 아버지의 뜻이 이 길을 보고 가는 것이기에 그대로 간다는 것이다. 그 길을 보았으니 그 길이 곧 나의 길인 것을 선언하고 그 길을 벗어나지 않았던 것이다.


요셉의 삶에서 '꿈'이란 '하나님의 길을 보는 것'이다. 삶의 거창한 목적을 이루거나 도달해야 할 목표를 세워놓고 열심히 따라가며 이루어내는 것에 그치지 않았다. 


성공과 승리가 그리스도인인이 추구해야 할 으뜸이라고 말하는 책들이 있다. 그것은 본질에서 벗어난 것이다. 반드시 기독교인은 자신의 목표 달성을 위해 존재하지 않고 길을 걸어 가는, 길 위에서 삶을 드러내는 과정으로 그 길을 온전히 잘 걸어가고 있는가를 실제적으로 경험하고 확인하며, 공유하는 비전덩어리여야 한다는 것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기독교인은 단순히 주어진 목표와 사명달성의 존재가 아니라 마지막에 도달할 하나님의 나라까지 어떻게 걸어가고 있는가?를 함께 고민하는 사람들이어야 한다. 현실이 잘 풀리지 않는다고 현실에 먼저 목매지 말고 그 현실 너머를 보아야 한다. 현실은 그리 만만하게 넘어가지 않는다. 삶을 정말 치열하게 싸워야 할 대상이다. 그러나 그 현실에 치여 매몰되는 일은 더욱 없어야 한다. 현실을 그대로 두고, 그 너머에서 나의 현실을 나와 똑같이 바라보고 계시는 ‘존재자’를 기억하라. 그리고 내가 본 대로 그 길을 향해, 그 나라를 향해 돌진하라. 현실을 해결하기 급급한 노력이 아니라 그 현실을 뚫고 그 너머의 세계를 보고 전진하는 것이다. 그러면 어느 순간 지금의 자신에 눈에 비친 현실너머의 세계, 자신 그토록 오랜 세월 꿋꿋하게 지켜온 비전의 세계가 눈에 들어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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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nna 2004-09-09 14: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저도 프린트해서 한 번더 보구, 친구한테두 읽힐라구요..^^
 

 

  너는 아침에 씨를 뿌리고 저녁에도 손을 거두지 말라

 이것이 잘 될는지, 저것이 잘 될는지,

 혹 둘이 다 잘 될는지 알지 못함이니라.

 

전도서 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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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랑녀 2004-09-09 07: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 그렇군요. 가슴에 새겨야겠네요, 진짜...

가슴에 새길 말은 많은데 따라하기는 왜 이리 힘든지...ㅠㅠ

3777

행운의 777 이라 복사해다 붙여봤어요. 다른 서재들에선 요즘 이런 놀이 많이 하길레...^^


Hanna 2004-09-09 14: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 처음 해봐요. 감사해요. 행운의 777. 멋진걸요~
어느새 그렇게 많은 분들이 왔다 가셨다니.. (물론 비교안 될만큼 숫자 단위가 큰 서재도 많지만요..) 기분 좋네요~? ^^
따라하기 힘든 거 맞아요. ㅡㅜ 그래두 힘 내자구요~!! 그런 의미에서 오늘도 열심히...
 

 

             

쇼팽의 에튀드 이야기를 좀 더 해야겠다.

쇼팽의 에튀드.. 음반 이야기.

아마도 쇼팽 에튀드하면 역시 폴리니의 음반을 가장 먼저 떠올리게 된다.

완벽에 가까운 테크닉과 놀라우리만치 엄청난 속도.

이게 과연 사람이 친 게 맞을까 싶기까지 한 엄청난 그의 연주에 에튀드를 공부하는 뭇 음악도들은 실상 기가 죽기 마련이다.

다소 차갑고 너무나도 정격화되어 있는 그의 연주는 역시 쇼팽의 에튀드적인 면을 잘 살려주고 있다.

또 다른 사람의 음반으로는 내가 갖고 있는 것은 부닌의 음반이다.

부닌의 에튀드는 폴리니와는 정말 많이 다르다.

부닌은 음악적이고, 루바토를 잘 살린, 여유롭고, 조금.. 할랑하다고 해야할까?

그렇다고 테크닉이 부족하다거나, 빈틈이 보이는 연주라고는 할 수 없다.

오히려 전혀 그렇지는 않다. 다만 그는 쇼팽 에튀드의 음악에 치중해서 아름답고 화려하며, 많은 감정을 갖고 있는 선율을 주로 살리고 있다.

쇼팽의 에튀드에는 기교적인 면과, (그에 상반되는 의미로) 음악적인 면이 함께 공존하기 때문에, 그 중간을 잘 지켜서, 기교적이면서도 음악적으로 친다는 것이 사실 불가능한지도 모를 일이다.

(간혹 생각한다.. 정말.. 쇼팽은 자기의 연습곡을 완벽하게 잘 연주했었을까?? -어허! 버릇없이..ㅡㅡ;)

에튀드의 어떤 면을 중점을 두고 연주하든, 그것은 개인의 취향이고, 오랜 공부 끝에 결론을 내릴 일이며, 또 어떤 연주를 선호하는지는 개인의 결정에 따를 일이지만, 폴리니의 테크닉과 조금 많이 헐렁하긴 하지만, 충~분히 부드러운 부닌의 음악을 합친 연주는 없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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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nna 2004-09-07 18: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무리 노력해도.. ㅡㅡ; 음악 올리기엔 내가 컴퓨터랑 너무 안 친한가부다.. 오늘도 실패.. 승질나서 더는 못하겠다.. (이래서 발전이 없나...) 그냥 CD 들어야겠다. 으으윽...

Fithele 2004-09-08 04: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폴리니, 너무 완벽해서 그림의 떡이라는 데 120% 동감합니다. 하필 피아노 공부할 때 레퍼런스로 삼았던 게 (우연히) 폴리니가 되어서 참 좌절 많이 했더랬지요 ... ㅠ.ㅠ

하도 주위에서 부닌, 부닌 해대길래 젊을 때는 오기로 싫어했었는데, 한국 왔을 때 라이브 보고 완전히 (정신) 나갔습니다. 그때 연주한 것도 바로 이 에튜드였었죠. 마지막 타건까지 후까시의 압박. 음... 전에 다른 데도 썼지만, 세상에 왕자는 존재하더군요...

그 외에 딱 뭐라 잘라 말할 수는 없지만, 강한 인상을 주었던 음반을 들자면 아슈케나지의 옛 녹음이 생각나는군요. 언제 나왔는지는 잘 모르겠는데 LP로 들었었죠. 부드러웠어요.

영국 가서 들었던 Jack Gibbons도 상당히 흥미로운 연주를 했는데 25의 7번이랑 10번이 특히 좋았어요. 콘서트홀이 아닌 작은 음악감상실 같은 곳에서 들으니까 7번은 정말 몽환적인 소리가 나더군요. 10번의 경우 참 amazing한 템포 때문에... 폴리니보다 앞부분이 약 1/10쯤 빨랐던 것 같아요 -.-a

Hanna 2004-09-08 10: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헉.. 폴리니보다 1/10이 빠르다면... 놀랍네요. 소리가 다 나던가요...?
님은 피아노 공부도 하시나봐요.. (궁금증 발동..) 피아노에 비올라에... 알라딘엔 멀티플레이어들이 많나봐요~ ^^

tarsta 2004-09-08 11: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컴퓨터에 개성이나 인격같은게 생긴다면 가장 폴리니스럽게 연주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그 폴리니보다 십프로쯤 빠르다니.. 상상이 잘 안되네요. 헉스... ;;;;

Hanna 2004-09-09 14: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맞아요.. 아마 손이 피아노 위를 날라다니지 않았나 싶어요..
폴리니의 연주를 들으면... 연습하기 싫어지지요..^^;
 

오늘은 아이들이 2시간안에 거진 20명이 왔다갔다 했다.

지금 폭풍이 한 차례 지나간 것처럼 학원이 너무나 조용하다.

난 폭풍 뒤 폐허처럼.. 완전히 지쳤다.

이런 날은 정말이지 뭐라도 당한 기분이다.. ㅡㅡ;

귀에서 아직도 아이들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선생님, 다 했어요."

"선생님, 레슨해주세요."

"선생님..."

"선생님..."

ㅡㅜ 오늘 저녁은 맛있는 거 먹어야지  안 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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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rsta 2004-09-07 18: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맛있는거 드셨나요?
저도 맛있는 떡볶이가 먹고싶어서 사왔는데. 두꺼운 쌀떢복이인데가 달기만 해요 흑흑.
한나님은 실패하지 마시고 맛난거 드시길.. ^^

Hanna 2004-09-08 10: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님 글 읽고.. 떡볶이가 불현듯 생각나서 나가서 사 먹었는데.. 토할뻔 했어요. ㅡㅡ;
고추장떡오뎅범벅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어요.. ㅡㅜ 오늘은 꼭 맛있는 거 먹어야지.. 우흑!
 

피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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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랑녀 2004-09-04 20: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애틋할 것 같습니다. 결혼을 해서 떨어져 사니 그렇게 느끼는지도 모르겠습니다.(페이퍼보다 더 긴 댓글 ^^)

Hanna 2004-09-07 00: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마.. 그러신 걸꺼에요.. ㅡㅡ; (뭐. 좋은 점도 있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