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이었다. KBS 홀도, KBS 교향악단의 정기연주회도.. 피터 야블론스키의 연주도.
KBS홀에 도착한 것이 7시 조금 넘어서... 오늘의 프로그램 중 단연 돋보이는 순서는 피터 야블론스키의 그리그 협주곡이었다. 좌석은 앞에서 4번째 줄? 왼쪽. 내가 생각하기에 가장 소리가 안 울리는 바로 소리의 '사각지대'라 할 수 있는 좌석이었으나, 건반과 연주자의 손은 자세히 볼 수 있는... 뭐랄까. 비쥬얼한 자리였다. ^^; 좋아해야 할지.. 말아야할지..
연주는 생소한 이름의 스웨덴 작곡가, 라우타바라의 '축복의 섬'이란 곡으로 시작되었는데, 마치 안개가 자욱한 섬에 여러가지 이름모를 새들이 울어대는 듯한 다소 몽환적이면서 환상적인.. 그런 곡이었다. 스웨덴 - 북유럽의 곡들은 거의가 아름다운 자연과 맞물려, 음악도 아름다운 경치를 보는 듯한 느낌이 드는 경향이 있다.
처음 들어보는 곡이라 긴장하면서 들었는데, 이내 따듯하고 신비로운 멜로디에 젖어들수가 있었다.
잠시 후 드디어 기대했던 그리그의 피협. 당당하게 걸어 나오는 야블론스키에게서 처음부터 그의 음악을 기대하게 하는 뭔가가 보였다. 신선하면서도 당찬 그의 모습. 멋지다. 사실.. 그리구.. 잘생겼다. ^^;
그리그의 피협은 아무래도 역시 팀파니의 트레몰로로 시작되어 피아노와 오케스트라가 함께 연주하는 그 첫 음. 그 긴장감과 음악의 모든 것을 이야기해주는 듯한 그 첫 화음. 그것이 중요하다. 거기서 모든 음악이 시작하고 끝난다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박진감 넘치는 1악장 부터 시작해서 그의 연주는 거침이 없었다. 큰 체구에 걸맞게 그의 연주는 폭넓었고, 곡을 완전히 소화해서 아주 자연스럽게 연주하는 모습이 인상깊었을 뿐만 아니라 안정감을 주기까지 했다. "아.. 이 곡은 아주 저 사람의 곡이 되었구나." 하는 느낌.
카덴차 부분에서는 정말 화려한 테크닉으로 보는 사람의 눈과, 듣는 사람의 귀를 즐겁게 하였으니, 피아노 협주곡의 백미를 가장 잘 살렸다 하겠다.
아름다운 선율선을 지닌 따듯한 2악장과 재미있는 스케르초 풍의 3악장. 그의 연주는 깊이가 있고, 진한 감동이 있기 보다는 재미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연주를 쉽게, 즐기면서 재미있게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그의 피협보다도 더 좋았던 것이 있었으니 그의 앵콜곡이었다. 정말 이례적인 일로, 피아노 독주회도 아닌, 협연의 자리에서 오케스트라 단원들도 자리를 뜨지 않고, 관객들도 박수를 멈추지 않았고, 3차례의 겸손한 인사 끝에 그는 피아노 앞에 앉고야 말았다.
사실, 협연 시에는 오케스트라와 음량을 맞춰 연주해야 하고, 특히, KBS홀은 소리가 그리 잘 울리는 곳이 아니어서, 다이나믹이 자유롭게 보이지 않았던 것 같다. 더군다나 내 자리가 피아노 소리는 정말 잘 안 들리는 곳에 위치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내심, ' 저 사람이 다이나믹은 공부를 덜 했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 였는데, 사실은 그게 아니었다.
그의 앵콜곡은 마치 바르톡 같기도 하고, 프로코피에프의 곡 같기도 했는데, 그런 현대곡을 앵콜곡으로 할리는 없다고 생각하고 듣기는 했으나, 아주 빠른 아르페지와 반음계, 그리고 뭔가 메시지를 담고 있는 도약음들로 구성된 처음 들어보면서도, 왠지 익숙한 곡이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드뷔시의 곡이라고..^^- 암튼, 그 곡에서는 다양한 음색과 다이내믹으로 멋진 연주를 해 주었다. 역시..^^; 나의 착오였다.
연주 후에 겸손하게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듯한 인사를 하는 것도 참 인상깊었다. 어렸을 때부터 화려하게 등장하는 '신동' 음악가들에게서 보기 쉬운 오만함이나, 너무 높아만 보이는 자존감도 없어보였다. 오히려 그는 모든 상황을 즐기는 듯한 유쾌한 연주자였던 것 같다. 그의 음악은 자유롭다는 느낌이다.
인터미션 때는 중간에 비어있는 자리로 옮겼다. 우.. 진작 옮길 것을.. 얼마나 잘 들리던지.. 후회 막심이다.
2부에서는 시벨리우스의 교향곡 op. 39였다. 사실, 시벨리우스나 드보르작 등 북유럽 쪽의 음악을 즐기거나 좋아하는 편은 아니지만, 서정적이고, 그러나 단순한 서정성 그 저편에, 나라에 대한 사랑, 자연에 대한 아름다움, 내지는 그리움을 노래하는 그들만의 메시지. 가을에는 참 잘 어울렸던 것 같다. 눈을 감고 들으니, 가보지도 않은 북유럽의 깍아지른듯한 절경, 내지는 하얀 눈이 덮여있을 것만 같은 아름다운 호수 건너편 등이 펼쳐지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매년 하는 생각이지만, 내년에는 좀 더 많은 연주회를 다니면서 듣는 공부, 느끼는 공부도 더 많이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