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오늘 일기

 

너는 나 때문에 슬퍼하고

나는 너로인해 늘 출렁인다

출렁 추울렁 멈추지 않는 너울 때문에 지독한 배멀미는 멈출줄 모른다

나 때문에 매양 슬픈 너는 울음을 그칠지 모르고

서럽게 울어넘기다 잠깐씩 굴 밖으로 나가 고개를 든다.

출렁 추울렁 네 흐느낌은 내 영혼 속으로

스펀지를 만난 습한 공기처럼 미친듯이 달려들고

본인에게 적잖이 불리한 사실만이 기록된

내용진술서를 들이미는 무정한 네 두 손

그 하얀 손등에 입맞추며 싸인하는 일만 남겨놓은 나.

나의 슬픔은 너에게 전해질 방법이 없다.

우리 사이는 여전히 진공이다.

따라서 우리의 슬픔은 사랑보다 더 가까울 것이며

남겨진 모든 것들은 지워져야 마땅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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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를 보내며.

 

너를 마주하고 앉으면

내 입은 사라지고 그 자리에 귀가 꽃피지

빠르게 번지는 두드러기처럼

내 손바닥, 발바닥, 배꼽, 사타구니, 쇄골 언저리까지

온통 귀들 뿐이지. 예민한 귀 꽃들 뿐이지.

네가 나에게 말을 건넬때마다 수십개로 늘어난 내 귀들은

활자를 해체시켰다가 다시 조합하는 수고롭고 성가신 일들을 나눠하지.

온통 귀들 뿐이지. 바지런한 귀 꽃들 천지지.

'여기가 끝'이라는 너의 말을 마음대로 이리저리 찢고 부수고

그러다 다시 붙이고 옮겨 '여기가 시작'이라는 말로 재구성하지.

부서지지 않도록 여러번 매치다가 비로소 몸 속으로 들이는 내 귀들

입이 사라지지만 않았어도 이런저런 구차함을 말했으련만

대신 온 몸에 뿌리내린 아기 주먹만한 귀들이 일제히 몸을 흔들어

그대에게 충성을 맹세하네 내 사랑의 종말을 축복하네

귀 꽃들의 종착역은 아득한 추억이라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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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의 등은 어둔 밤

 

너의 등은 어둔 밤 나를 비추는 등

네 뒷모습 가득찬 등은

어둔 밤 내 발 끝을 비추는 등

꽉 찬 보름달이 꽉 채워진 등

스러지는 보름달도 물들어 있는 너의 등

너는 죽을 때까지 한 번도 보지 못할 너의 등

기이하게 너울거리는 너의 등은 나의 등

너의 등에 기대면 탁 하고 켜지는 나의 등

너의 등이 있는 한

나의 어둔 밤은 계속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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낮 달

 

수선화 등불처럼 타다닥 일제히 켜질 때

꽃 잎이 벙글어져 나비들 수시로 들락일 때

느릿한 두 손가락으로 자태 고운 잡초를 사정없이 뽑아낼 때

나는 옷깃을 부둥키며 수선스레 흐느껴 울었네

바람 속에서도 당신을 알아보는 내가

절벽 끝에 매달려 위태로운 내가

왜 부르지 않았겠는가. 당신을

왜 닿으려하지 않았겠는가. 당신에게

피어난 수선화는 이제 꺼질 일만 남았을 뿐

꽃들이 피고지는 이유를 묻는 이 누구인가.

이유를 아는 이 당신인가.

 

수선화 등불처럼 타다닥 일제히 꺼질 때

낮달은 언제나 그래야 하듯

구름도 달도 뭣도 아닌 채로

벙근 하얀 꽃잎으로 남겨졌네. 덩그러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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샬롯의 거미줄 시공주니어 문고 3단계 35
엘윈 브룩스 화이트 지음, 가스 윌리엄즈 그림, 김화곤 옮김 / 시공주니어 / 2000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윌버는 첫 번째로 태어나는 불운을 타고나서 이유없이 태어나자마자 죽을 뻔 했다. 어차피 스스로 살 수 없는 부실한 몸이고 설사 구사일생으로 살아난다 해도 정상적인 크기만큼 자라지 못할테니 상품 가치도 떨어질 게 뻔하다.

윌버의 기구한 운명은 샬롯에 의해 기적적인 반전이 일어난다.

기껏해야 거미줄에 걸린 곤충이나 허겁지겁 먹기 바쁜 평범한 거미 샬롯은 다가오는 크리스마스에 바베큐 통돼지로 변할 윌버의 운명을 가엷게 여긴다. 생명에 대한 연민은 기적을 낳는가보다. 선한 기운이기 때문이다. 밤새도록 이리저리 거미줄을 엮어 만든 '위대한 돼지'라는 글씨는 무지한 인간들에 의해 신격화되고 윌버는 신성화된다. 무녀리였던 돼지 윌버가 품평회에 출전할 정도이다.

나도 내가 가르치고 있는 아이들의 샬롯이 되어주어야겠다.

그들에 대한 연민을 깊게 하는 것이 먼저다.

글씨 따위야 언제든 누구나 만들 수 있겠으나 어떤 글씨를 쓸 수 있느냐는 그들에 대한 사랑과 배려에서 비롯된다. 그걸 이 책에서 다시 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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