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은 계속 읽고 있었으나 리뷰를 올릴만한 시간적 정신적 여유가 없었다. 이 문장을 다시 곱씹어 보면 시간이 있고, 여유가 있어야만 내가 읽은 책에 대한 반성과 성찰을 할 수 있다는 의미다. 아침 독서 운동 등 어린아이들을 대상으로 하는 독서교육방법에는 독후활동을 최소화시켜야 한다는 것들이 많다. 그냥 읽게 하자는 것이다. 줄거리를 요약하게 하는 것도....무슨 내용이 나왔었는지 골든벨을 하는 것도...그 책에 대한 느낌을 쓰는 것도 일단은 놔두자는 이야기다. 아이가 책을 싫어하게 되기 때문이란다. 책 한 권 읽게 해놓고 '이 책을 읽으니 무슨 생각이 났니? 어떤 느낌을 받았니? 감동 받은 부분은 어느 곳이니?' 등등을 묻게 되면 그 질문에 대한 거부감 때문에 독서활동이 위축되거나 독서에 관한 오해와 편견이 생길 수 있다고 주장하는 이들이 많다. 나는 선천적으로 생각이 많은 아이였으므로 책을 읽고 생각을 말하는 일 따위는 100미터 달리기를 하는 것보다야 천배 만배 쉬운 일이었다. 그러나 그 반대인 친구들이 더 많았을 것 같으니 앞서 소개한 독서방법이 적절한 경우도 꽤 많을 것 같다. 그러나 읽기는 그냥 읽는 것만으로는 이룰 수 없는 과정이다. 읽고 생각하는 과정이 수반되어야 비로소 그 책을 읽었다라고 말할 수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은 정치철학자 한나 아렌트의 대표적 저서 중 하나다. 나치 전범으로 잡힌 아이히만의 재판을 보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달려간 그녀는 '악의 평범성'에 대해 말하였고, 아이히만의 지극히 인간적인 모습에 큰 충격을 받는다. 유대인인 그녀가 생각하기에 자신의 동족을 죽음으로 몰고 간 그는 분명 파렴치한 악마여야만 했다. 인간의 존엄성 등은 애초에 취급도 하지 않는 무뢰한이어야 했다. 그러나 그녀가 지켜본 결과 예루살렘에서 재판을 받고 있는 아이히만은 언어적 표현능력이 극히 떨어지고, 생각하는 기능을 상실한 평범한 인간이었다. 그는 성실한 근로자였고, 믿음직한 가장이었으며, 자상한 아버지 역할을 무리 없이 수행하고 있었다. 한나 아렌트는 아이히만 자체에 대한 심판은 그의 생각없음 즉 무비판적 사고에 대한 심판이어야지 그가 저지른 유대인 학살에 대한 심판이 아니라고 말하고 있다. 그녀의 이러한 주장에 유대인들은 경악과 분노의 반응을 보낸다. 그러나 그녀는 그녀의 주장을 철회하지 않는다. 이 끔직한 반인륜적 악행은 한 인간의 광기가 아닌 사회 전체의 무관심과 언어적 문제 등이라고 보았다. 아렌트의 주장은 오늘날도 유효하다고 여겨진다. 특히 사회언어학적인 관점에서 그녀의 지적은 유심히 고려해야 할 사항이다 나치는 유대인 학살을 '최종해결책'이라는 상당히 로지컬한 단어로 대체하였다. 실제 그 일이 무엇인지 알았던 이들도 이 단어의 무감각한 느낌 때ㅐ문에 최종 해결책을 비교적 수월하고 신속하게 수행할 수 있었다. 재판내내 자신을 옹하기도 하고 또 체념한 듯 낙담하여 말하는 아이히만은 읽는 내내 나에게도 큰 혼란스러움을 가져다주었다. 악의 본령에 대해 더 깊이 생각해보는 계기가 되었으며, 한나 아렌트의 통찰력에 더 없는 찬사를 보내는 계기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