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의 기별
김훈 지음 / 생각의나무 / 2008년 11월
평점 :
절판


   
  나는 처음에 이것을 "꽃은 피었다"라고 썼습니다. 그러고 며칠 있다가 담배를 한 갑 피면서 고민고민 끝에 "꽃이 피었다"라고 고쳐놨어요. 그러면 '꽃은 피었다"와 "꽃이 피었다"는 어떻게 다른가. 이것은 하늘과 땅의 차이가 있습니다. "꽃이 피었다"는 꽃이 핀 물리적 사실을 객관적으로 진술한 언어입니다. "꽃은 피었다"는 꽃이 피었다는 객관적 사실에 그것을 들여다보는 자의 주관적 정서를 섞어 넣은 것이죠. "꽃이 피었다"는 사실의 세계를 진술한 언어이고 "꽃은 피었다"는 의견과 정서의 세계를 진술한 언어입니다. 이것을 구별하지 못하면 나의 문장과 소설은 몽매해집니다. 문장 하나하나마다 의미의 세계와 사실의 세계를 구별해서 끌고 나가는 그런 전략이 있어야만 내가 원하고자 하는 문장에 도달할 수 있습니다.  『바다의 기별』「 회상」中 (p140~141)  
   

 김훈이 20대 초반에 처음 읽던『난중일기』가『칼의 노래』로 태어나는데 37년이 걸렸다고 한다. 오랜 세월 김훈의 독에서 곰삭혀 잘 익어 만들어진 『칼의 노래』를 '나'라는 독자는 그때 하룻밤 지새며 쥔 자리에서 다 읽었었다. 원래는 단박에 읽을 생각이 아니었는데 가속도 붙어 저절로 읽혀나가는 숨을 어디쯤에서 끊어야 할지 몰라 내달린 끝에 이미 잠은 달아나 버렸고 정체 모를 전율을 내 속에 개켜 넣으며 희뿌윰한 새벽에 앉았었다.  

내가 정체 모르겠다고 했던 그 전율의 실체를 어렴풋이 알아차린 것이 이번 책 읽기의 소득이다. 에세이『바다의 기별』을 통해 칼의 노래를 포함한 여러 작품들을 집필하게 된 배경 뿐만 아니라 작가의 글쓰기에 대한 고달프리만큼의 진지함을 읽었다. '꽃은 피었다'가 '꽃이 피었다'로 고쳐지기까지 며칠의 시간과 담배 한 갑이 필요했다. 대단한 작가니까, 또 문학하던 아버지의 피를 물려 받았으니까 입으로 글이 쏟아지듯 나오지 않을까 하는 을녀(갑남을녀)의 생각은 빗나갔고 역시 글을 짓는다는 것은 누구에게나 고통스런 작업임을 보았다. 

더우기 그는 아직도 원고지에 연필로 꾹꾹 눌러 글을 쓴다니 더욱 고될 수밖에.  

   
  연필로 쓰기는 몸으로 쓰기다. 나는 컴퓨터를 다룰 수가 없지만, 컴퓨터로 글을 쓸 수 있다는 상상을 해본 적도 없다. 연필로 쓰기는 몸으로 쓰기다. 연필로 글을 쓸 때, 어깨에서부터 손가락 끝까지 작동되는 내 몸의 힘이 원고지 위에 펼쳐지면서 문장은 하나씩 태어난다. 살아 있는 몸의 육체감, 육체의 현재성이 없이는 나는 한 줄의 글도 쓸 수 없다. 글은 육체가 아니지만, 글쓰기는 온전한 육체노동인 것이다. 『바다의 기별』「무너져가는 것에서 빚어지는 새로운 것」中 (p110~111)  
   

나는 컴퓨터 워드기능을 전적으로 이용하는 부류이지만, 하루에 한 시간씩은 손으로 책 쓰기를 진행하고 있어서 '육체노동'이라는 표현에 공감한다. 필사본 성경을 가보로 물려주겠다는 경건한 마음으로 시작한 일이지만 꼬박 앉아서 글자를 쓰자니 무척이나 힘들다. 과연 내가 죽기 전에 완필할 수 있을지, 자신 없다. 오른손 새끼손가락부터 어깨와 목줄기가 아프고 욕심을 더 내서 무리하게 쓰고나면 눈도 침침하고 골반이며 복사뼈까지 온 몸이 아파 벌렁 드러눕는다. 김훈이 쓰는 연필과 내가 사용하는 필기구의 차이도 있겠고 자신의 사유를 풀어내는 글쓰기와 (가능한)정확하게 베끼려는 작업에 차이가 있겠지만 아무튼 손에 필기구를 잡고 종이에 글을 쓰는 작업은 녹록찮은 육체노동임이 틀림없다.  

그런데 이 육체노동도 행복으로 여기니 그는 천상 작가이다. 한 손으로 활을 쥐고 손으로 줄을 문질러서 소리를 뽑아내고 다른 한 손으로 줄을 통째로 쥐었다 폈다 눌렀다 풀었다 하면서 소리를 내는 해금연주에 매료되는 것도, '오치균이 손가락으로 물감을 으깰 때 재료가 육체와 섞이는 그 확실한 행복감을 나는 짐작할 수 있다'라고 하며 손가락으로 그림 그리는 화가의 작업에서 각별한 친밀감을 느끼는 것도 육체노동에 대한 동질성이 기저이다. 글을 쓴다는 것은 몸을 던져 문지르는 작업이고 연필심이 닳듯이 그의 몸이 닳은 후에 가까스로 태어난 것이 작품이다.  

김훈의 소설을 읽을 때, '에세이가 더 근사하겠다'고 생각한 적 있다. 그의 소설에 성이 안 찬다고 말하기엔 내 역량이 부족할 뿐더러 작품도 많이 접하지 못한 조악한 처지이니 소설을 폄하하는 말은 아니다. 다만 소설이란 장르에서 느낄 수 있는 짜릿하고 탄력있는 '필연적인 인과관계에 의한 사건의 유기적인 배열' 즉 구성보다 사물의 내면 묘사라든가 문체에 더 마음이 끌렸던 건 사실이다. 그의 문장 하나하나는 벼루어 놓은 듯 단아하고 그러면서도 그의 사유는 담담하다. 내가 막연히 에세이를 기대하게 되었던 건 아마도 이 담담함 때문이 아닐까. 그의 나이 60, 귀가 열린다는 이순에 펴낸 이 에세이집은 더욱 담담하여 만추의 하늘같다. 나는 수필 읽기를 좋아하지만 쓰는 입장에선 수필만큼 어려운 갈래도 없을 것이다. 김훈의 작품은 시보다는 산문에 강하고 소설보다는 에세이가 더 좋다고 생각하는 것은 『바다의 기별』을 곁에 두고 자주 보고 싶어지기 때문이다. 20110208ㅎㅂㅁ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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