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한때 나 자신에 대해 지독한 보호본능에 시달렸다
  사랑을 할 땐 더더욱 그랬다
  사랑을 하면서도
  나 자신이 빠져나갈 틈을 여지없이 만들었던 것이다
  가령, 죽도록 사랑한다거나
  영원히 사랑한다거나
  미치도록 그립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내게 사랑은 쉽게 변질되는
  방부제를 넣지 않은 빵과 같았고
  계절처럼 반드시 퇴색하며
  늙은 노인의 하루처럼...
  지루했다
  책임질 수 없는 말은 하지 말자.
  내가 한 말에 대한 책임 때문에 올가미를 쓸 수도 있다
  가볍게 하자, 가볍게
  보고는 싶지 라고 말하고
  지금은 사랑해 라고 말하고
  변할 수도 있다고
  끊임없이 상대와 내게 주입시키자
  그래서 헤어질 땐 울고 불고 말고 깔끔하게,
  안녕.
  나는 그게 옳은 줄 알았다
  그것이 상처받지 않고 상처주지 않는 일이라고
  진정 믿었다.
  그런데, 어느날 문득 드는 생각
  -너, 그리 살어 정말 행복하느냐?
 
 
  나는 행복하지 않았다
  죽도록 사랑하지 않았기 때문에 살만큼만 사랑했고
  영원을 믿지 않았기 때문에 언제나 당장 끝이 났다
  내가 미치도록 그리워하지 않았기 때문에
  아무도 나를 미치게 보고 싶어하지 않았고
  그래서,나는 행복하지 않았다
  사랑은
  내가 먼저 다 주지 않으면 아무 것도 주지 않았다
  버리지 않으면 채워주지 않는 물잔과 같았다
 
  내가 아는 한 여자
  그 여잔 매번 사랑할 때마다 목숨을 걸었다
  처음엔 자신의 시간을 온통 그에게 내어주고
  그 다음엔 웃음을 미래를 몸을 정신을 주었다
  나는 무모하다 생각했다
  그녀가 그렇게 모든 걸 내어주고 어찌 버틸까
  염려스러웠다
  그런데 그렇게 저를 다 주고도 그녀는 쓰러지지 않고
  오늘도 해맑게 웃으며 연애를 한다
  나보다 충만하게 그리고 내게 하는 말
  나를 버리니, 그가 오더라
  그녀는 자신을 버리고 사랑을 얻었는데
  나는 나를 지키느라 나이만 먹었다
 
  사랑하지 않는 자는 모두 유죄다
  자신에게 사랑받을 대상 하나를 유기했으니
  변명의 여지가 없다. 속죄하는 기분으로
  이번 겨울에도 난 감옥같은 방에 갇혀
  반성문 같은 글이나 쓰련다.

  ***

노희경, 방송국 드라마 작가실에서 연거푸 담배를 피우며 글을 쓴다는 작가. 밑천한 직업이라고 일컫는 직업은 다 가져본 사람. 사랑에도 앓아보고, 실연도 당해보고, 자신의 체험을 글로 쓴 적이 있는 사람.

가끔 텔레비전이 똑똑해질 때가 있다. 노희경 드라마를 할 때만 그런 줄 알았는데, 인정옥의 드라마도 그렇다. 노희경의 드라마가 있는 그대로의 슬픔을 보여준다면, 인정옥은 짧고 간결한 대사로 슬픔을 가공시킨다. 냉동건조식 커피 알갱이 같은 슬픔에다가 달콤한 크림을 살짝 섞는다. 아일랜드 첫회였던가. 시연의 가족들이 한꺼번에 등장하는 장면이 있다. 온가족이 차례차례 포개져서 과자를 먹으며 텔레비전을 보고 있다. 서로의 몸에 포개져 있던 동그란 얼굴.

3회에서 명장면은 마지막 장면이었다. 바람 난 것 같다고, 자꾸 그 사람이 내 머릿속에서 집을 짓고 있다는 아내 중아의 말에 남편 국이가 중아의 자전거를 발로 걷어차버렸다. 자전거가 바닥에 고꾸라지며 내던 소리가 국이의 마음에서 나는 소리 같아 찔끔 눈물이 났다. 국이, 국이 역할을 하는 현빈, 괜찮더군...ㅎ

그냥 좀 무작정 울고 싶을 때가 있지 않은가. 마음속에서 물컹물컹한 게 잡혀지는건 알겠는데 그걸 마땅하게 드러내기 곤란할 때, 나 자신한테도 좀 민망할 때, 아일랜드 같은 드라마를 보면서 마치 그 드라마 때문에 우는 것처럼 우는거다. 첨엔 드라마때문에 우는 것 같아도 나중엔 내 슬픔이 오버랩 되버린다. 슬픔의 기원이 확실해 지는 순간이다. 비겁해보이면 어때. 비겁하게 사는 게 얼마나 힘든건데...

꼬리에 꼬리를 무는 것처럼 글의 주제가 자꾸 빗나간다. 멈춰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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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딧불,, 2004-09-09 08: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래도 울 수 있어서 좋아요.
음..아일랜드 안보았었는데..
정말 봐야 할까봐요. 노희경...음..그녀의 극은 사람을 살아있게 해요.
드라마가 아니라..한 인물로 걸어나올 것 같아요.

깍두기 2004-09-09 08: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와 같은 걸 좋아하시는군요. 노희경 드라마와 아일랜드.
맞아요. 저도 꽃보다 아름다워를 볼때 드라마보고 우는 척 하면서 내 설움에 꺼이꺼이 울었더랬죠. 플레져님, 안 비겁해요. 원래 그런 거예요^^

urblue 2004-09-09 09: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들 비슷한 취향 ^^ 노희경과 인정옥, 저도 좋아합니다. 지난주부터 <아일랜드> 열심히 보고 있죠.

superfrog 2004-09-09 10: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아아아.. 넘의 집에서 보다가 차시간 때문에 마지막 장면을 못 봤는데 그게 명장면이었군요!!! ㅠ.ㅜ 저는 김민준(인가..?) 그 연기자를 거기서 첨 봤는데요(그 전에 나온 드라마는 안 보고 광고에서만) 생각보다 캐릭터를 잘 살리더군요..^^

비연 2004-09-09 12: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노희경 작가 좋아합니다. 이 글, 저도 올려두었는데..^^;
아일랜드 한번 봐야겠네요. 항상 보고나면 넘 가슴이 아려서....

mira95 2004-09-09 13: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요즘 유일하게 <아일랜드>보고 있습니다.. 현빈 정말 괜찮더군요.. 앞으로도 계속 볼 예정인데.. 아무래도 이나영이 가장 눈길을 끌어요.. 이나영의 연기도 많이 들었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어디에도 2004-09-09 14: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금 사랑하지 않는 자, 유죄.
2년전인가 이 말을 처음 들었을 때 저는 유죄가 되고 싶었었었어요. 지금은,
무죄가 되고 싶네요. 흐흐
(아일랜드 얘기를 잔뜩 쓰다가 지웠어요. 너무 흥분을 해서... 자제를 ^^)

플레져 2004-09-09 15: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반딧불님, 노희경의 드라마 거짓말 참 좋지요... 배종옥의 대사, 사랑이 다시 온다고 해줘...는 비오는 날 동그랗게 고이는 물처럼 톡톡 떠올라요. 가슴이 미어지죠 ㅎㅎ
깍두기님, 제 심정을 아시는군요...^^
urblue님도 아일랜드 좋아하시는군요. 방가~ ^^ 오늘도 기대됩니다. 크크...
금붕어님, 김민준이 다모에 나왔던 배우래요. 안봐서 모르겠지만... 좀 슬픈 바보같은 캐릭터에요. 어제 핀 꽂고 있는 모양이 귀엽더라구요 ㅎㅎ
비연님, 저두 이 글을 언젠가 제 서재에 올렸었는데 또 올렸어요. 이제는 참 흔한 아포리즘이 되버렸지만, 언제 읽어도 절절해요...절절...
미라님, 이나영의 짧은 머리 너무 상큼하지 않아요? 김민준하고 남매처럼 닮았어요. ㅎㅎ
어디에도님, 편하게 유죄가 나아요. 무죄는 언젠가 유죄가 될 거라는 불안(?)이 침입하기도 하잖아요... 어디에도 님이 들려주시는 아일랜드 얘기 듣고 싶어요^^


로드무비 2004-09-09 15: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플레져님,보내주신 선물 잘 받았습니다.
제가 또 공책 좋아하는 건 어떻게 아시고...
시집도 읽고 싶던 거예요.
우선 '장엄부엌' 한 편 읽었고요.^^ 바쁜 일 끝내고 읽어보겠습니다.
편지가 제일 반가웠어요.
얼마나 다정하신지...
저도 어느 하루 님께 꼭 엽서나 편지 보낼 거예요.
플레져님을 만나서 너무 기뻐요.
선물을 받으니 또 좋고요.ㅎㅎ
친구를 한 명 새로 얻은 것 같군요.
페이퍼로 자랑 못하는 게 아쉽구만요.
오늘 제가 아침부터 너무 날뛰어서...자중하고 있습니다.^^

플레져 2004-09-09 21: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드무비님, 맘에 드신다니 저도 기뻐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