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전히 요리 레시피나 요리 블로거들을 탐독하는 걸 즐긴다. 가끔은 이야기 책들이 재미없으면 요리책을 펼쳐 읽기도 한다. 레시피에는 과거형이 없다. 레시피를 참조하여 요리 하는 순간은 언제나 지금, 현재다. 볶는다. 끓인다. 뿌린다. 담는다. 조린다. 익힌다...등등. 이것이야말로 현재행 소설의 백미가 아닐까.

주말 오후 12시에 일주일치를 재방하는 EBS 최고의 요리비결을 자주 본다. 괜찮은 양념과 소스는 간단하게 메모한다. 새로운 요리, 획기적인 요리보다 보통 자주 해먹는 요리 레시피가 더 반갑다. 실수했던 과정을 '교정' 할 수 있는 잇점이 있다.   

 

   이 책에게 조금 미안하지만 요며칠 내가 왜 샀을까, 이 책을... 하며 곰곰이 생각했다. 항상 기억을 떠올리고 지난날을 회상할 땐 다시 육수처럼 후회가 밑바탕이 되는데 이 책은 좀 달랐다. 얼마전 책들을 결제하기 직전, 장바구니를 훑는데 기분이 이상했다. 뭔가 그 책들끼리 잘 어울리지 않고 서로 어색해하는 이상한 오글거림이 둥둥 떠있었다. 그러다 택배 상자를 받을 때 활자들 천지의 글이 아닌 달콤하고 분위기 있는 사진들이 있는 책도 좀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에 이르렀다. 다른 책들을 더 돋보이게 하고 풍미를 돋울 그런 책! 영화와 책에서 상상으로만 그리던 프랑스 요리책이 어떨까 하다가 고르게 되었다. 택배 상자를 열었을 때 진한 초콜릿 향같은 건 풍기지 않았지만 그저 보는 것만으로도 참 좋았다. 불어는 모르지만 소리내어 읽어보기도 하고 눈으로도 읽었다. 분위기 있는  발음과 낯선 소리들 때문에 외국어는 가끔 어떤 요리보다 더 맛있을 때가 있다. 부르고뉴풍의 쇠고기 스튜는 찬바람 불면 시도해봐야겠다.  

 

키조개 관자를 어떻게 먹어야 할까 검색하다가 찾게 된 블로그다. 도쿄에 사는 저자는 깔끔하게 일본 가정식 상차림을 차려낸다. 특히 내가 좋아하는 건 원플레이트 한 끼. 접시 하나에 반찬 조금씩 담아낸 상차림이다. 혼자 먹는다고 대충 먹고, 귀찮다고 대충 먹는 버릇들을 단번에 없애고 싶을만큼 깔끔하고 예쁘다. 계란말이, 양파와 감자 볶은 것, 구운김과 김치. 한 접시에 담아놓으니 차린 건 없어도 많이 먹고 싶어진다. 반찬이 없어서, 입맛이 없어서 밥 생각이 없다면 더더욱 예쁘고 깔끔하게 차려 먹는 게 좋은 거 같다. 손님들 오실 때 꺼내 쓰는 그릇이라는 수식어는 아예 없애버리고 집에 있는 그릇들은 널리 자주 쓰는 것도 집에서 먹는 밥의 풍미를 돋운다. 그러다 얼마전엔 아끼던 접시의 이가 나가버렸지만... 괜찮다. 그까이꺼. 알뜰살뜰하게 돈 모아 더 예쁜 접시 사면 되지 뭐. 흑. 좋은 벗에게 생일 선물로 보냈다. 그녀가 좋아했으면 좋겠다.  

 

    자주 들여다보고 참고하는 요리책 중에 하나. 감우성과 그의 아내 강민아의 밥 잘해먹고 살기 스타일의 요리 책이다. 레시피를 복잡하지 않게 설명한 것이 장점이다. 물론 처음 요리를 시도하는 이들에게는 불친절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 처음 요리를 시도하는 이들은 무조건 자세하고 친절한 설명을 담은 요리책을 선호한다. 경험상 처음이라는 첫 단추에 나는 요리를 해본 적도 없고 자신없으니 무서워, 라는 구절만 빼면 불친절한 요리책을 찾는 게 더 힘들다는 걸 알게 될 것이다. 재료의 양과 조리 시간의 측정이 초보 요리를 하는 데 가장 힘들긴 하지만 웬만한 요리 책이라면 그 정도는 다 나와있다. 가령 한 큰숟갈을 측정할 때, 납작하게 한 큰숟갈인지 봉곳하게 한 큰숟갈인지 헷갈리는것이다. 지나치게 정확한 잣대를 견주면 요리 자체가 피곤해지니 조금 실수하더라도 너그럽게 먹을 준비를 하는 게 맛있는 식탁을 즐기는 방법이 아닐까. 자신의 미각을 믿고, 맛있게 먹어본 경험을 되살리면 초보 요리 기간을 단축할 수도 있다. 고기도 먹어본 사람이 잘 먹는다는 말처럼 맛을 잘 아는 사람이 요리도 잘 하는 것 같다.   

 

  

  처음으로 밥을 짓고 국을 끓여야만 했던 그때. 내 식탁을 책임져야 할 시점에서 난생 처음 구입한 요리책이다. 어떤 책이 좋더라, 하는 조언은 떨궈내고 서점에서 직접 골랐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은 내게 친절했다. 이 책의 레시피는 몇 가지 빼고는 거의 다 해보았는데 만족스러웠다. 이 책을 펼치면 신혼의 향기가 폴-폴- 난다. 신문과 잡지 스크랩, 인터넷에서 프린터 한 종이들을 끼어놓아서 더 그렇다. 

  

어느날, 못된 마음을 품은 채 찌개를 끓였다. 매번 하던 방식 그대로, 재료도 그대로 넣었는데 맛은 형편없었다. 맛이 손끝에서 뿐만 아니라 마음에서도 우러나오는 건 그래서인가보다. 요리를 할 땐 맛있게 먹어줄 사람을 생각하며 한다. 엄마가 그 맛있는 반찬을 드시지 않고 우리들에게 밀었던 이유를 얼핏 알 것도 같다. 맛있게 먹는 것만 봐도 뿌듯하지만 요리하는 동안 냄새에 질려 먹고 싶지 않은 이유도 있을 것 같다. 내가, 그렇다. 맛있게 요리를 하고나면 찬물부터 들이켠다. 그순간 찬물은 내게 가장 훌륭한 반찬이다.  

계절이 바뀔 때 요리책을 펼치면 또다른 느낌이다. 식탁의 반찬을 바꾸면서 한 계절을 보내고 받아들이는 일상이 숭고하게 느껴진다. 매번 새로운 메뉴를 올려놓지는 못하지만 늘 해왔던, 조금은 잘해왔던 메뉴들은 항상 그 맛을 유지했으면 좋겠다. 올 가을에 바라는 것도 그뿐이다. 거기에 개미 허리만큼만 더 보태자면 지금보다 더 깊은 맛을 내는 된장찌개와 미역국을 끓이는 것. 그거면 올 가을은 족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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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nine 2010-09-01 18: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요리를 할 필요가 없던 시절에도 가끔 TV에서 요리 프로그램이나 요리책을 즐겨 보곤 했어요. 그 심리를 저도 왜그런지 모르겠더군요.
잘은 모르지만 프랑스와 한국, 일본 사람들은 요리에 대한 관점부터 다른 것 같지요? 식사를 하는 것을 어떤 의식처럼 생각하고 진지해지는 프랑스 사람, 오점 하나 없이 깔끔하게, 색의 조화까지 생각해서 담아 내야 음식으로 쳐주는 듯한 일본 음식, 그들도 우리 처럼 반찬 가짓수를 중요하게 여기는 것 같지는 않더군요.
제 경우엔 오히려 정성을 다해서 음식을 만들어 내는 경우보다, 좀 성의 없게, 몸에 안 좋다는 것도 그냥 귀찮아서 팍팍 집어 넣어가며 상을 차리면 식구들이 더 맛있다고 먹는 것을 종종 보게 되어요. 딜레마이지요 ^^
맨 위의 책 표지의 르 꼬르동 블루라는 타이틀이 눈에 들어오네요.

플레져 2010-09-01 23:36   좋아요 0 | URL
코르동블루가 요리학교 뿐만 아니라 레스토랑, 베이커리, 식자재, 조리기구등 다양한 영역에서 활동하고 있대요. 이 책은 사브리나 시리즈래요 ^^ 사브리나는 오드리 헵번의 영화 사브리나, 에서 따온거구요.

요리를 대하는 관점에서 민족 고유의 문화와 성품이 드러나는 것 같아요. 프랑스 사람들이 왜 음미하며 긴 시간 동안 식사하는지 요리만 봐도 알겠어요 ㅎㅎ 우리 입맛엔 hnine 님 스타일이 딱이지요. 저도 그렇게 팍팍! 요리한 음식들 좋아요. 군침돈다-

마그 2010-09-01 20: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추천마법사가 오늘 도쿄식탁 책을 추천하길래. 장바구니에 담고나서 이 포스팅을 보니 괜히 반갑네요. 저도 이상하게 요리 책이랑 다이어트책은 거의 수집 지경 입니다. 하하하.
지난번에 산 심야식당 요리책도 아직 뜯지도 못했습니다..흙

플레져 2010-09-01 23:37   좋아요 0 | URL
앗. 심야식당 요리책도 나왔군요. 드라마 보면서 매번 침만 삼키고, 나중에 나중에 하며 미뤘는데. 당장 장바구니로! ^^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추천마법, 추천마그님 ^^

다락방 2010-09-01 21: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못된 마음을 품은 채 찌개를 끓였던 플레져님께 이 글귀를 들려드리고 싶어졌어요.

「아저씨는 요리 솜씨가 좋군요」하고 유키가 감탄하여 말했다.
「솜씨가 좋은 게 아냐. 단지 애정을 기울여 정성스레 만들고 있을 뿐이야. 그러기만 해도 상당한 차이가 있어. 자세의 문제야. 여러 가지 사물을 사랑하려고 노력하면, 어느 정도까지는 사랑할 수 있어. 기분 좋게 살아가려고 노력하면, 어느 정도까지는 기분 좋게 살아갈 수 있고 말이야.」(2권, p.79)


'무라카미 하루키의 [댄스댄스댄스]중에 나오는 대화에요.

플레져 2010-09-01 23:40   좋아요 0 | URL
그 시절은 나에게도 고독한 계절이었다. 집으로 돌아와서 옷을 벗을 때마다 온몸의 뼈가 피부를 뚫고 튀어나올 것만 같은 느낌이 들곤 했다. 내 내부에 존재하는 정체를 알 수 없는 힘이 잘못된 방향으로 계속 나아가 나를 어딘가 다른 세계로 끌고 가는 것 같은 느낌도 들었다. <1973년의 핀볼, 77쪽>

애써 변명하자면 당시 제 시절이 그러했답니다. 훌쩍. 그후로는 못된 마음이 스며있을 땐 배달 음식을 이용합니다...ㅎㅎ 다락방님 덕분에 댄스댄스댄스를 읽어야겠어요. 마침 책꽂이에 있어서 아주 좋아요!

Kitty 2010-09-01 22: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플레져님 요리는 너무 정갈할 것 같아요 >_<
요리는 커녕 라면만 끓이려 해도 부엌을 폭탄으로 만드는 저로서는 ㅎㅎ
요리책은 돼지 발에 진주이지만 보는건 좋아한답니다~~~

플레져 2010-09-01 23:42   좋아요 0 | URL
에- 어떤 날은 그렇게 하려고 노력하지만 어떤 날을 뺀 나머지 날들은 대충, 후딱 모드로 일관해요 ㅠㅠ 날이 더웠던 이즈음엔 그야말로 얼렁뚱땅 해먹고 살았어요 ㅎㅎ 요리책 보는 것, 정말 재밌어요. 막 다 할 수 있을 것 같은 허황된 마음도 좋아요 ㅎㅎ

프레이야 2010-09-01 23: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요리책을 사두고도 그대로 한 번 해본 게 없는 저에용.
9월의 첫날 요런 페이퍼 쓰며 맛깔난 식탁 준비하시려는 플레져님이 사랑스럽네요.
못된 마음 먹고 요리하면 음식이 확실히 맛 없는 건 맞아요.ㅎㅎ

플레져 2010-09-01 23:43   좋아요 0 | URL
에이. 그래도 프레이야님 스타일이 어디 가겠어요.
저는 요리책을 요리 부적처럼 조리대 가까운 곳에 두고 있어요 ㅎㅎ

BRINY 2010-09-02 12: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사기의 도쿄식탁 블로그 보다가, 관자에 필꽂혀서 한창 제철이던 관자를 사다가 구워도 먹고 생라면도 넣어 해물라면 만들어먹고 만족했던 기억이 납니다. 아~ 내년 봄을 기다려야죠.

플레져 2010-09-02 22:08   좋아요 0 | URL
브라이니님도 우사기 식당에 자주 가시는군요~ 저도 자주 갑니다 ^^
파스타에서 공효진이 관자 요리를 하는 장면이 있거든요. 그거 보고 관자를 직접 하게 되었는데요, 저는 버터에 구운 담에 데리야끼 소스로 살짝 조려 먹는 걸 좋아해요. 담엔 저도 해물라면 해볼래요.

stella.K 2010-09-02 12: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예전에 알라딘 한창 때 플레져님 요리도 올리고 했는데.
아웅, 옛날 생각난다.
초대를 해 줘야 맛을 보지. 흥!
전 요리와는 거리가 멀죠. 아무래도 엄마 그늘을 떠나지 못하고 있어선가 봐요.ㅠ

플레져 2010-09-02 22:09   좋아요 0 | URL
알라딘 한창 때 -
이 말 슬프다 ㅠㅠ 아, 옛날이여.
언제나 초대합니다. 문은 열려 있어요! ㅎㅎ
요리해야 할 사람이 우리집에서 저밖에 없어서 저도 이렇게
관심을 갖게 되었다는...ㅎㅎㅎ
 

 

 

 

 

 

 

 

  

깜찍한 양아들과 함께 사는 집. 새엄마를 찬양하던 요,요 깜찍한 녀석. 하마터면 홀딱 빠질뻔했잖아. 새엄마와 어떤 애정 행각을 벌일 것인지 조마조마하며 읽었더랬다. 심장 콩닥지수 무한대. 

주노 디아스의 드라운은 폭격기 같다. 거칠고 즉물적이다. 이야기의 처음에서 아~ 이런 소품, 이런 이야기~ 하던 것이 결말에선 뒤통수를 치듯 휙- 날아온다. 짧지만 강하다. 보드랍고 정제된 소설을 지향한다면 이 소설과 불협화음을 낼 수도 있다.  

세상에 이런 식당이 있다면 나도 좀 찾아가고 싶다. 잘 될듯 하다가도 가끔씩 곤두박질치는데 무엇을 먹어야 할까요? 옷감을 직조하듯 널린 자연에서 한 올 한 올 풀을 캐와 멋진 음식을 만들어줄 것이다, 달팽이 식당이라면, 달팽이 식당 주인이라면.   

 

 

 

 

 

 

 

 

 

 

자자하게 듣던 명성을 확인하고 싶어서였을까. 요네하라 마리의 미식 견문록은 내가 생각한 명성과는 조금 다른 이야기였다. 요네하라 마리의 소박한 추억과 고향 (일본) 음식 이야기가 한 가득이다. 그녀와 동시대를 살았던 사람이라면 더더욱 애틋하고 맛깔스러웠겠다.  

그러고보니 영화라는 물질은 어느 정도 알콜 지수가 포함되있는 것 같다. 관객을 취하게 만드는 영화가 있는가하면 관객을 정신 번쩍 나게 만드는 영화도 있으니까. 그래서 술꾼과 영화는 잘 어울린다.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영화도 다시 되새겨보고 술 이야기도 들었다. 나는 마티니 술 잔은 꼭 갖고 싶다. 날씬한 기둥에 정교한 삼각형이 얹혀있는 그 술잔은 그 자체만으로도 몹시 매혹적이다.  

프랑수아즈 사강- 그녀는 쏘쿨, 하고 쏘핫하다. 빌리 할리데이, 테네시 윌리암스, 오손 웰즈와의 추억담도 매력적이었고 연극을 무대에 올린 그녀의 경험담도 즐거웠다. 그녀는 일단 저지르고 보는 성격이다. 그러니까 저렇게 멋진 말을 한 것이겠지. 나는 나를 파괴할 관리가 있다고. 그런 그녀가 너무 좋아 그녀를 흉내내듯 글을 옮겨적어보기도 했다.  

 

 

   

 

 

 

 

 

 

 

 

두 영화의 공통점이라면, 가족. 그리고 그녀가 처음으로 우리집에 왔다, 그녀가 다시 집으로 돌아왔다. 명절에 가족들이 모여앉아 이얘기 저얘기 하다가 슬픈 안녕을 고하게 되는 우리나라의 뻔한 스토리 못지 않다. 그런데...다시 생각하게 만든다. 그리고 나는 생뚱맞게도 나의 베프에 대해 알고 있는 것만큼 내 가족을 알고 있는지... 자문해 보았다. 좋은 일들은 거리낌없이 잘 나누고 있지만 아픈 것을 나눌 때는 가족 보다 친구에게 먼저 다가가고 있는 것 같다. 그것은 가족이 걱정하는 모습이 마음 아프고 미안하고 견딜 수 없어서다. 아무래도 피가 섞이지 않은 친구는 그만큼의 거리감으로 내게 걱정과 조언을 해줄 수도 있으니까. 나는 무조건적인 희생, 사랑, 염려가 가장 부담스러운 것 같다. 생물학적 가족의 의미도 아름답지만 가까운 곳에서 나를 담아주는 가족도 아름답다.  

준벅의 에이미 아담스, 레이첼 결혼하다의 앤 헤서웨이는 그 역할에 딱, 제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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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딧불,, 2010-08-16 17: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무조건적인 희생, 사랑, 염려는 부담스럽답니다.
그나저나 이 맛깔스런 글이라니.부끄러워서 글 못쓰겠사와요^^;
새엄마찬양 궁금했더랬는데..더 궁금한걸요.

플레져 2010-08-16 18:16   좋아요 0 | URL
짧지만 강렬한 책, 짧지만 황홀의 한트럭이 담겨있는 책이라고 하면
새엄마 찬양에 대한 뽐뿌질 댓글로 적당할까요? ㅎㅎ
아이의 아빠, 남편의 세정의식도 아주 마음에 들었어요.
한번 따라해보고 싶은 의식이었죠 ^^;; 반가워해주셔서 감사해요! ㅎ

다락방 2010-08-16 18: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새엄마 찬양으로 반갑다는 인사를 하려고 했더니 밑에 보니 더한게 있었어요! [준벅]과 [레이첼, 결혼하다]요. 두 영화 모두 제가 엄청 좋아하는 영화들이에요. [준벅]은 참 좋아서 DVD를 사서 친구들에게 선물하기도 했지요. 사랑한다는 말로 상대를 다 알기엔 역부족인것 같다는 생각을 준벅을 보면서 했더랬어요. 사랑하는 남자의 가족들과 함께 하면서 자신이 몰랐던 남자의 면들을 보게되는 그녀의 당황도 그렇고, 가족들에겐 절실한 문제이지만 그녀는 거기에 깊게 녹아내릴 수 없는 것들도 그렇고. 가장 뭉쳐있는 것도 가족이라면, 가장 배타적인것도 가족이란 집단인 것 같아요.
[레이첼, 결혼하다]는 제가 극장에서 혼자 본것 같은데(친구랑 같이 봤을지도 모르겠네요. 그건 기억나질 않아요.) 보면서 내내 제 여동생과 남동생이 떠올려지던, 그런 영화였어요. 혹시 읽어보셨는지 모르겠지만 [내가 너를 사랑한 도시]라는 책은 한 집안의 가장이 자신의 아기를 안다가 떨어뜨려서 죽게 되는, 그래서 그 가장은 집을 나가 노숙자가 되어버리는 그런 소설이거든요. [레이첼, 결혼하다]는 그 소설을 떠올리게 해요. 아프고 애틋하죠.

플레져 2010-08-16 18:21   좋아요 0 | URL
준벅, 을 엠피쓰리에 넣고 세번째 보고있어요. 처음엔 아무 생각없이 봤다가 자리를 고쳐앉고 집중해서 보기 시작했어요. 이 영화를 왜 몰랐을까 하는 아쉬움을 누르면서 보았는데 너무 좋아요 ㅠㅠ 찬송을 부르는 남편을 바라보는 매들린, 저도 그 장면이 자꾸 떠올라요. 결혼 후 첫 가족모임에 갔을 때 저만, 나 혼자만 이방인이었던 그 경험은 잊을수가 없어요. 내가 남편을 홀대(?)하거나 아무렇지 않게 여겼던 부분을 반성하게 만들었거든요.

레이첼...은 본 지 조금 됐는데 준벅 보면서 같이 떠오르더라구요. 그래서 다시 보기로 했어요. 가족의 상처가 드러날 때, 문제의 그 접시...때문에 왈칵했어요. <내가 너를 사랑한 도시> 챙겨볼게요. 다락방님의 독서 편력 덕분에 또하나의 책!을 건졌어요 ^^

2010-08-17 00:2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8-17 23:3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8-26 10:34   URL
비밀 댓글입니다.
 

 

7, 때문에 여름 기분 확 난다. 7월, 칠월, 줄라이, july! 줄라이 모닝, 은 줄라이 모닝으로 써야 맛이 난다. july morning 이라고 쓰면 어쩐지 반감되는 느낌. 사랑스러운 모국어는 참말 위대하다. 여름을 준비한다. 책과 음악과 영화들. 어지간히 보고 또 보고 쓸고 닦고 들었던 것들이지만 똘똘한 여름 보내고 싶어서. 허전하고 싶지 않아서.  

  질 나쁜 연애  

 이 여름 낡은 책들과 연애하느니
 불량한 남자와 바다로 놀러 가겠어
 잠자리 선글라스를 끼고
 낡은 오토바이의
 바퀴를 갈아 끼우고
 제니스 조플린의 머리카락 같은
 구름의 일요일을 베고
 그의 검고 단단한 등에
 얼굴을 묻을거야  

 (중략)  

 문혜진의 시집 한권으로 여름을 시작한다.   


연애는 여름에 하면 딱 좋다. 적당히 노출된 몸매 때문이 아니라 더운 날씨 때문에 마음이 조금은 너그러워지고 해이해지기 때문이다. 남편을 가을에 만났다. 초여름 무렵, 칠부 티셔츠를 입고 데이트를 했다. 내 팔에는 보송보송하다 못해 거뭇한 털...이 수북했다. 면도기로 박박 밀다가 어느새 포기해버렸는데 아주 제법, 원시인스러웠다. 그걸 본 그가 건넨 한 마디. "왜 진즉에 말 안했어?" 그의 안경엔 빙글빙글 골뱅이 두 마리가 어지럽게 돌아다녔다. 왜? 진즉 말했으면 데이트 안 했을거야? 결국 지금은 부숭한 털들을 다 면도했다. 여름이면 알러지가 들고 일어나는 바람에 온 몸이 간지럽다. 매일 면도해야 하는 번거로움이 있지만 나쁘지 않다. 이럴 줄 알았으면 진화가 덜 됐다는 농담을 들었던 초등학교 때 밀어버리는건데. 지금은 그런 농담을 들어도 아무렇지 않은 나이잖아.

 

 독일의 휴양지 바덴바덴에 7월의 저녁이 내리고 있었다. 먼 곳, 슈바르츠 발트나 튜링거발트쯤의 하늘에 보랏빛 먹구름이 걸려있고, 그 너머 더 먼 곳 어딘가에는 번갯불까지 번쩍이고 있었다. 좀 더 도시 쪽으로 가까이 오면 도시를 둘러싸고 있는 언덕이 있으며, 그 언덕에는 빽빽이 초목이 자라고 있었다. 또 붉은 벽돌로 된 알테스 성과 노이에스 성이 보이고, 삐죽이 솟아 있는 탑들과 오래된 기사들의 성도 볼 수 있었다.  

<치프킨, 바덴바덴에서의 여름>  

도스토예프스키와 두번째 아내 안나의 여정을 담았다. 역자 이장욱의 말처럼 '이 소설은 픽션과 다큐의 경계에 있다' 끈질기게 도박에 미쳐있는 도스토예프스키와 그를 위해 숄까지 팔아 밑천을 대준 안나의 이야기는 여름을 진득하게 이겨내는 사랑의 묘안처럼 들린다. 아끼고 사랑해마지 않는 책.  

 

 미필적 고의에 의한 여름 휴가-  

 섹시해 보이는 소녀가 있고,
 그소녀를 경계하는 어른 여자가 있고, 
 소녀와 왠지 잘 어울리지만 여자가 보기엔 자신과 더 잘 어울릴 것 같은 섹시 가이가 있다. 사랑의 신 큐피드는 누구일까. 결론은 큐피드의 말로다. 큐피드여, 사랑을 전도하고 연결해줄 거라면 힌트라도 먼저 주시길.  

소녀와 여자가 함께 요트를 타고 짧은 항해를 한다. 
그것만으로도 여름이 성큼 느껴진다. 
바다에 가지 않아도 될 것 같은 착각이 느껴지지만
외려 바다와 요트를 보고 있으면 얼른 구명조끼라도 입어줘야 할 것 같은 간절함에 몸살이 날 것 같다. 거실에서 허리에 튜브를 끼고 앉아 있어볼까. 아주 재미있을 것 같지만, 혼자 있을때만 그래야겠다.  

 


 Myrra, Sweet Bossa-  

 두 장의 씨디가 들어있다. 
 로맨틱하고 부드러운 바람같은 음색이 매력이다.
 오후 2시에서 3시 사이의 햇빛이 휘황찬란할 때
 미라의 노래를 듣고 있으면 드라이브 떠나지 않고는 못 배긴다.
 첫번째 트랙 Taxi Driver, 는 사랑 고백을 하러 가야 하는데
 택시 운전사가 아주 느긋하게 운전하고 있다는 이야기다. 
 How insensitive 에선 사랑이 떠나간다. 택시를 타고 사랑 고백하러 갔던 여자가 결국 사랑이 떠나 어떻게 냉담해질 수 있을까 고민하고 있는 상황인걸까. 고백했으니 아름다웠다고, 그것으로도 되지 않았냐고 말할 수 없는 것이 연애, 사랑인 거 같다. 여름엔 실연하지 않도록 조심하자. 하긴 어떤 계절에도 실연은 위태로운 계절이다.  

 

 차가운 벽, 트루먼 카포티- 

 차가운, 때문에 고른건 아니다. 어떤 여름날엔 짧은 이야기를 빨리 흡수하고 싶을 때가 있다. 단편 소설도 길 때가 있다. 엽편 소설은 흔하지 않다. 단편과 엽편 사이의 이야기들, 그러나 스펀지 흡수의 속도만큼 어떤 이야기가 살갗에 심장에 스며들어 줬으면 할 때, 이 책이다. 그의 명성 <인 콜드 블러드>에 비해 아주 흡족한 소설은 아니지만 아주 실망스러운 소설도 아니다. 나를 툭, 치고 가버리는 이야기들이 필요하다, 여름엔.  

 

 

 

 

 

 

 

 

 

 

 

이윤기가 건너는 강, 이윤기-
존 버거의 글로 쓴 사진, 존 버거-
아웃사이더 예찬, 마이클 커닝햄-  

이윤기의 에세이가 왜 좋으냐하면 옆에서 나한테 말을 건네고 있는 것 같아서다. 야야, 좀 들어봐, 이런 일 있었는데 난 이렇게 해버렸다, 그거면 됐어. 하고 경상도 사투리로 슬금슬금 말을 걸어오는 느낌. 소나기 같은 이야기들, 소나기처럼 빠르지만 여운이 남는 이야기들.  

존 버거는 언제나 그렇듯 섬세한 사람이다. 사진을 보고 있는 것처럼 글자로 사진을 찍고 있다. 거기에 영혼을 불어넣어 살아있는 활동사진으로서의 글을 썼다. 수변공원 산책로에서 자주 만나는 전형적인 사람들이 있는데 그들을 연상하게 한다. 유모차의 여인, 자전거를 탄 여인이 그렇다. 풀밭위의 그림, 도 자주 보는 풍경이다. 거기에 나만 포착하고 존 버거는 포착하지 못한 풍경은 -다리 밑에서 고기를 굽는 사람들- 이다.  

마이클 커닝햄! <세월, The Hours> 를 사랑한다. 영화도, 소설도 아주아주 좋다. 그가 말하는 프로빈스 타운에 갈 일이란 까마득한 먼 약속이겠지만 왠지 그와 함께 장도 보고 시청 화장실에들러 본 느낌도 든다. 완벽하게 그 지역색이 도드라져 한참 읽다가 내가 이걸 왜 읽지...하는 느낌은 잠깐 들지만 그래도 좋다.  

 

여름이 왔다. 잘 견뎌내고 싶은 마음이나 잘 지나가리라는 기대는 없다. 봄을 살아왔던 것보다는 조금 더 바지런하게 살아서 옹골찬 가을을 맞이하고 싶다. 그래서 잘 투과하고 싶은 계절이다. 견딘다고, 지나갈거라고 일상의 아픔이 위로가 되지 않는다는 걸 안다. 그저 묵묵히, 그러나 괜찮다는 말은 남발하지 않으면서 잘 지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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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0-07-01 13: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 점심먹기 전에 장바구니에 들었던 책들을 결재했는데, 만약 결재전에 이 페이퍼를 봤다면 저 위의 시집 [질 나쁜 연애]를 장바구니에 함께 넣었을거에요.


이 여름 낡은 책들과 연애하느니
불량한 남자와 바다로 놀러 가겠어


아! 제대로 여름인거죠.


플레져 2010-07-01 19:08   좋아요 0 | URL
다락방님과 잘 어울리는 시집이라고 생각합니다-. 진짜루-.
불량한 남자랑 가더라도
오토바이만큼은 좋은 걸 타야할 거 같아요 ^^

stella.K 2010-07-01 13: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우, 저 시 좋은데요!
글쵸. 역시 줄라이 모닝은 줄라이 모닝이어야 해요.
7월도 행복하게 보내시길! 나의 플레져님.^^

플레져 2010-07-01 19:08   좋아요 0 | URL
그죠? 좋죠?
저 시의 전문을 얼른 옮겨놔야겠어요.
마이 스텔라님...ㅎㅎ

2010-07-01 14:3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7-01 19:10   URL
비밀 댓글입니다.

Mephistopheles 2010-07-01 18: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박지성이 열심히 선전하는 질레트 면도기 코리아 에디션 리미티드 버젼이 플레져님 서재에서 생각날 줄은 꿈에도 몰랐어요.

플레져 2010-07-01 19:11   좋아요 0 | URL
흑.
(이 한마디로 제 심정(?)을 다 읽으셨으리라...ㅋ)

잉크냄새 2010-07-01 18: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줄라이 모닝, 역시 모닝이 어울리는 달이네요.
노래 제목의 영향도 크겠지만, 님 말처럼 줄라이보다는 줄라이 모닝...

플레져 2010-07-01 19:16   좋아요 0 | URL
노벰버에는 레인이 붙어야 하듯
줄라이에는 모닝이 제격이죠 ^

다리 밑에서 고기굽는 사람들,을 쓸때
잉크님의 오래전 페이퍼를 떠올렸어요.
기억하세요? 다리밑에서 고기 구워먹는 사람들 얘기 하신적 있는데.
다리밑에서 고기 구워먹는 사람들이 아주 인상적이었거든요.
그러나 지금, 거의 하루에 한번은
다리 밑에서 고기 굽는 사람들을 목격하고 있답니다.
고기는 여름이 아니어도, 날만 괜찮으면 구워도 될 거 같아요..ㅎㅎ

잉크냄새 2010-07-05 13:14   좋아요 0 | URL
기억력도 좋으셔라.
그 페이퍼를 기억하고 계시다니...
참 오래전의 추억을 들춰내주시네요.ㅎㅎ

플레져 2010-07-06 15:22   좋아요 0 | URL
스토커, 로 오해받을까봐 조금 고민했었어요 ㅎㅎ
다리 밑에서 고기를 굽다니.
생소한 목격담이어서 기억하지 않을 수가 없었어요 ^^;;

2010-07-02 10:1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7-02 11:1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7-09 14:2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7-04 00:09   URL
비밀 댓글입니다.

프레이야 2010-07-05 06: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미필적 고의에 의한 여름휴가, 재미있어요.
요트를 타는 대리만족보다 (요트 실제로 타보고 싶어라~)
'타인의삶'에 나왔던 그 여배우의 대담함과 반전에 깜짝 놀랐지요.
근데 그게 후련하더라구요.ㅎㅎ
줄라이 모닝, 굿모닝, 플레져님^^

플레져 2010-07-06 15:21   좋아요 0 | URL
아아- 타인의 삶에 그 여인이어서 저도 깜짝- 쿵- 놀랐어요.
몹시 관능적이고 매력적이죠? ㅎㅎ
실제로 요트를 타는 것같은 착각은
현란한 카메라 워크 때문이었던듯 ^^
오늘도 줄라이 모닝하세요, 프레이야님!

2010-07-07 00:38   URL
비밀 댓글입니다.

산사춘 2010-07-20 00: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역시 플레져님 서재에는 아래로 쭉쭉 보물이 그득그득합니다.
감사의 뜻으로 여름덕담을...
"여름 건강하게 보내세요~!" (싸다, 춘!)

플레져 2010-07-21 21:26   좋아요 0 | URL
다정한 춘님 ^^
너무 덥죠? 벌써부터 찜통이니...큰일이에요.
덕담 감사합니다. 춘님도 더위 조심하세욧!

2010-07-27 17:56   URL
비밀 댓글입니다.
 

 

 

 

 

 

 

 

 

 

지지난밤에 쟁여뒀던 영화를 꺼냈다. 서랍에서 안 읽은 편지를 꺼내듯. 무심히, 기대없이 꺼냈다. 마이크 뉴웰의 영화들이 단아하나 격정적이며 뭉클했다는 오래전 소감을 떠올렸다. 타이틀이 참 멋졌다. 엔딩 화면 또한 멋졌다. 영화의 정보는 많지만 일일이 다 주워들을 수 없다. 요샌 한계를 느끼는 일이 많아서 많이 알려고 하기 보다 알았던 것들을 다시 반복하여 깨닫는 일에 집중하는 편이다. 2주전 인상깊게 보았던 <햇빛 찬란한 월요일> 의 하비에르 바르뎀이, 지난 봄 동네친구와 다정하게 보았던 <내 남자의 아내도 좋아>의 하비에르 바르뎀이 콜레라 시대의 사랑 남자 주연배우다. 팔색조, 카멜레온, 이런 흔한 수식어 말고 무엇이라 이름 붙여 부르면 좋을까. 하비에르 바르뎀이란 배우는 없고 오로지 그 배역의 이름과 사람으로만 존재하는 것 같은 참 좋은 배우라는 걸 <콜레라 시대의 사랑>으로 깨달았다. 그는 정말 멋지고 좋은 배우다. <햇빛 찬란한 월요일>의 노동자 산타를 전혀 짐작할 수 없었다. 그는 오직 한 여자와의 사랑을 이루기 위해 침착하게 세월을 살아가는 플로렌티노 아리자였다.  

 

나이든 사람들의 사랑 이야기를 '노년의 사랑' 이라고 콕 집어 부르는 게 일반화된 것 같다. <사랑은 너무 복잡해> <사랑할 때 버리기 아까운 것들> <어웨이 프럼 허> 등...의 영화를 빗대어 말할 때 그 수식어는 지겹게도 따라붙는다. 틀렸다는 게 아니다. 가만히 발음해보면 노년의 사랑이라는 말에는 쓸쓸함과 동시에 연민없는 동정이 느껴진다. 소년소녀의 사랑, 청춘의 사랑, 젊은이의 사랑, 중년의 사랑 등등의 느낌과는 사뭇 다르다. 이렇게 글자로 적고나니 이유를 조금 알 것 같다. 이건 순전히 나이에 깃들어 있는 나이듦의 슬픔에서 기원하고 있는 것 같다. 소년소녀라고 쓸 때는 파릇파릇하다 못해 귀여웠고, 청춘의 사랑은 서툴지만 뜨겁다. 그래도 우리, 이제부터 노년의 사랑이라고 콕 집어 말하기 보다는 (나이드는 것도 서러운데!) 한 남자의 한 여자의 어떤 사람들의 사랑 이야기라고 말하자. 당신도 곧, 늙는다.     

   

콜레라시대의 사랑, 을 노년의 사랑이라고 콕 집어 말하는 건 조금 더 어울리지 않는다. 이건 순전히 사랑에 대한, 사랑을 위한, 사랑의 영화다. 소설은 읽고 있는 중이라 뭐라고 얘기할 수 없지만 일단 영화는 오랜 세월을 기다려 사랑을 이룬 한 남자의 이야기다. 그는 그저 사랑을 이루느라 기다렸을 뿐인데 은발의 머리와 수염, 굽은 허리를 갖게 되었다. 그는 인내를 알고 지치지 않으려 노력했던, 아름다운 사람이었다.  

<아주 약간의 스포가 있는 단락 ↓>

대신, 노년의 사랑을 콜레라시대의 사랑 이라고 부르는거다. 어떤 장애물과 생의 굴곡을 다 뛰어넘은 뒤, 비로소 내 품으로 돌아온 그대와 나누는 안전망 모드 '콜레라'. 페리에 콜레라 환자가 타고 있으면 환자 외에 아무도 탑승할 수 없다고 한다. 그러니 콜레라 모드로 설정하고 망망대해를 거침없이 가로지르며 오랫동안 기다려온 사랑을 나누는거다.  

 

하비에르 바르뎀은 완벽한 플로렌티노 아리자다. 영화가 파국으로 흘러갈 때 배우가 바뀐 게 아닐까 의심했었다. 느릿느릿 그러나 여유있게 말하는 그의 음색은 심야의 라틴 음악 디제이로도 손색이 없다. 만약 한밤중 라디오에서 그의 목소리를 듣게 된다면 잠 자는 걸 과감히 포기해야 할지도 모른다. 그런데, 그렇다고 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팬은 아니다. 이상하다. 팬이라고 말하기엔 마음이 좀 부족하다. 그가 나오는 영화라면 믿음을 갖겠지만 쭉- 챙겨보겠다는 다짐은 아니란건가. 알 수 없는 내마음.  

영화에 반해서 원작 소설을 읽고 있다. 마르께스 선생님은 참 정력가이기도 하지. 필력이 어찌나 좋으신지 비행기를 타지 않았는데도 금세 남미로 슝- 날아가 있는 기분이 든다. 영화와는 다른 느낌이다. 영화는 영화대로 소설은 소설대로 좋아서 아주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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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10-06-17 16: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게 영화로도 나왔군요.
그러고 보면 사랑은 젊음의 전위물도 아닌데 어쩌자고 젊은이의 사랑만 다루는지 모르겠어요.
우리가 늙어서도 과연 사랑이 가능할지 모르겠지만, 사랑이 젊을 때만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 다행이라고 해야할지 아니면 더 힘든 건지 그걸 모르겠어요.흐흐

stella.K 2010-06-17 16:31   좋아요 0 | URL
오늘 7, 총 100101
그런데 알고 봤더니 님도 이제 10만대를 돌파했구려.
축하해요!^^

플레져 2010-06-17 16:39   좋아요 0 | URL
콜레라..를 보니 사랑하기를 포기하지 않는다면 나이와 상관없이! 몸매(?)와 상관없이! 사랑할 수 있을 거 같아요 ^^;;

어머. 그러네요.
스텔라님이 1만을 10만으로 착각했나 했더니 10만 넘었네.
내가 없어도 서재는 빙빙 잘 돌아가나봐요..ㅎㅎ
축하 감사!! ㅎㅎ

stella.K 2010-06-17 16:50   좋아요 0 | URL
1만인지 10만인지, 플레져님 이제 서재엔 영 관심이 없으신가 봅니다.ㅋ
너무해요.ㅠ

플레져 2010-06-17 17:01   좋아요 0 | URL
기력이 딸려서 그래요!! ㅋㅋ
스텔라님을 향한 관심은 꺼지지않게 켜두리다~~흐흐...

2010-06-17 18:4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6-18 20:31   URL
비밀 댓글입니다.

Mephistopheles 2010-06-17 22: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비에르 바르뎀...좋은 배우라는 전적으로 주관적인 판단은 이런 영화에서의 주연과 성격이 정반대되는 영화(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에서의 무시무시한 킬러 안톤 시거의 역활까지 완벽하게 소화하는데 있다고 보여져요..앞으로 이 배우 영화는 챙겨봐야 할 의무감이 생길 정도로요..^^

플레져 2010-06-18 20:32   좋아요 0 | URL
아. 그 영화를 아직 못 봤어요. (메모하고 있음, 꼭 보자! ^^)
저도 기꺼이 바르뎀의 영화를 볼 거 같아요 ㅎㅎ
 

찬란  


겨우내 아무 일 없던 화분에서 잎이 나니 찬란하다
흙이 감정을 참지 못하니 찬란하다 

감자에서 난 싹을 화분에 옮겨 심으며 
손끝에서 종이 넘기는 소리를 듣는 것도
오래도록 내 뼈에 방들이 우는 소리 재우는 일도 찬란이다 

살고자 하는 일이 찬란이었으므로
의자에 먼지 앉는 일은 더 찬란이리
찬란하지 않으면 모두 뒤처지고
광장에서 멀어지리 

지난밤 남쪽의 바다를 생각하던 중에
등을 켜려다 전구가 나갔고
검푸른 어둠이 굽이쳤으나
생각만으로 겨울을 불렀으니 찬란이다 

실로 이기고 지는 깐깐한 생명들이 뿌리까지 피곤한 것도
햇빛의 가랑이 사이로 북회귀선과 남회귀선이 만나는 것도
무시무시한 찬란이다 

찬란이 아니면 다 그만이다
죽음 앞에서 모든 목숨은  
찬란의 끝에서 걸쇠를 건져 올려 마음에 걸 것이니 

지금껏으로도 많이 살았다 싶은 것은 찬란을 배웠기 때문
그러고도 겨우 일 년을 조금 넘게 살았다는 기분이 드는 것도
다 찬란이다   

詩 이병률 

 

  <바람의 사생활>을 읽은 후로 이병률의 시를 더 안 읽어도 좋겠다는 생각을 했더랬다. 그거면 족했다. 시인의 새로운 시들을 우연히 맞닥뜨려도 읽지 않았다. 내가 읽고 싶은 시들, 새록새록한 일상들, 사연과 멜로디를 품고 있는 시어들을 더 알고 싶지 않았던 것 같다. 그리고 더 오래 바람의 사생활에 수록된 시들을 읽고 암송하고 간직하고 싶었던 것 같다. 새시집 출간 소식을 듣고도 시큰둥, 했다. 나에겐 아직 일용할 시가 있어, 하는 도도함으로 버텼다. 아무런 기대없이 횡단보도에 섰을 때 마침맞게 푸른 신호등으로 바뀐 것처럼 시집이 뚝, 떨어져 내게 왔다.   

 

세상 모든 길이 찬란으로 통한다면 좋겠다. 반성, 슬픔, 자괴감, 실망, 희망, 망각, 각질, 소멸...그런 모든 것들이 다 찬란으로 통한다면 참 좋겠다. 시인은 벌써 해탈을 준비하는 것일까. 시인의 조언과 수긍이 내게 피가 되고 살이 되었으면 더 좋겠다. 그런데 어떡하나. 나는 <바람의 사생활>이 더 좋다. 바람의 사생활을 더 좋아하는 것도 '다 찬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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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phistopheles 2010-05-20 10: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찬란한 빛을 내뿜을 수도 있는 경우가 있을지라도 주변에 안개가 너무 짙게 깔려 그 빛이 발하는 경우가 너무나 많은 요즘입니다. (잘 지내시죠 플레져님..?)

플레져 2010-05-21 01:15   좋아요 0 | URL
등대지기같은 불빛이라도 있다면 위로가 될텐데요.
벌써 여름이에요, 메피님!^^
금세 겨울도 올 것 같은 이 예감은...뭘까요...ㅎㅎ

2010-05-20 16:4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5-21 01:1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6-18 12:48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