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지난밤에 쟁여뒀던 영화를 꺼냈다. 서랍에서 안 읽은 편지를 꺼내듯. 무심히, 기대없이 꺼냈다. 마이크 뉴웰의 영화들이 단아하나 격정적이며 뭉클했다는 오래전 소감을 떠올렸다. 타이틀이 참 멋졌다. 엔딩 화면 또한 멋졌다. 영화의 정보는 많지만 일일이 다 주워들을 수 없다. 요샌 한계를 느끼는 일이 많아서 많이 알려고 하기 보다 알았던 것들을 다시 반복하여 깨닫는 일에 집중하는 편이다. 2주전 인상깊게 보았던 <햇빛 찬란한 월요일> 의 하비에르 바르뎀이, 지난 봄 동네친구와 다정하게 보았던 <내 남자의 아내도 좋아>의 하비에르 바르뎀이 콜레라 시대의 사랑 남자 주연배우다. 팔색조, 카멜레온, 이런 흔한 수식어 말고 무엇이라 이름 붙여 부르면 좋을까. 하비에르 바르뎀이란 배우는 없고 오로지 그 배역의 이름과 사람으로만 존재하는 것 같은 참 좋은 배우라는 걸 <콜레라 시대의 사랑>으로 깨달았다. 그는 정말 멋지고 좋은 배우다. <햇빛 찬란한 월요일>의 노동자 산타를 전혀 짐작할 수 없었다. 그는 오직 한 여자와의 사랑을 이루기 위해 침착하게 세월을 살아가는 플로렌티노 아리자였다.
나이든 사람들의 사랑 이야기를 '노년의 사랑' 이라고 콕 집어 부르는 게 일반화된 것 같다. <사랑은 너무 복잡해> <사랑할 때 버리기 아까운 것들> <어웨이 프럼 허> 등...의 영화를 빗대어 말할 때 그 수식어는 지겹게도 따라붙는다. 틀렸다는 게 아니다. 가만히 발음해보면 노년의 사랑이라는 말에는 쓸쓸함과 동시에 연민없는 동정이 느껴진다. 소년소녀의 사랑, 청춘의 사랑, 젊은이의 사랑, 중년의 사랑 등등의 느낌과는 사뭇 다르다. 이렇게 글자로 적고나니 이유를 조금 알 것 같다. 이건 순전히 나이에 깃들어 있는 나이듦의 슬픔에서 기원하고 있는 것 같다. 소년소녀라고 쓸 때는 파릇파릇하다 못해 귀여웠고, 청춘의 사랑은 서툴지만 뜨겁다. 그래도 우리, 이제부터 노년의 사랑이라고 콕 집어 말하기 보다는 (나이드는 것도 서러운데!) 한 남자의 한 여자의 어떤 사람들의 사랑 이야기라고 말하자. 당신도 곧, 늙는다.
콜레라시대의 사랑, 을 노년의 사랑이라고 콕 집어 말하는 건 조금 더 어울리지 않는다. 이건 순전히 사랑에 대한, 사랑을 위한, 사랑의 영화다. 소설은 읽고 있는 중이라 뭐라고 얘기할 수 없지만 일단 영화는 오랜 세월을 기다려 사랑을 이룬 한 남자의 이야기다. 그는 그저 사랑을 이루느라 기다렸을 뿐인데 은발의 머리와 수염, 굽은 허리를 갖게 되었다. 그는 인내를 알고 지치지 않으려 노력했던, 아름다운 사람이었다.
<아주 약간의 스포가 있는 단락 ↓>
대신, 노년의 사랑을 콜레라시대의 사랑 이라고 부르는거다. 어떤 장애물과 생의 굴곡을 다 뛰어넘은 뒤, 비로소 내 품으로 돌아온 그대와 나누는 안전망 모드 '콜레라'. 페리에 콜레라 환자가 타고 있으면 환자 외에 아무도 탑승할 수 없다고 한다. 그러니 콜레라 모드로 설정하고 망망대해를 거침없이 가로지르며 오랫동안 기다려온 사랑을 나누는거다.
하비에르 바르뎀은 완벽한 플로렌티노 아리자다. 영화가 파국으로 흘러갈 때 배우가 바뀐 게 아닐까 의심했었다. 느릿느릿 그러나 여유있게 말하는 그의 음색은 심야의 라틴 음악 디제이로도 손색이 없다. 만약 한밤중 라디오에서 그의 목소리를 듣게 된다면 잠 자는 걸 과감히 포기해야 할지도 모른다. 그런데, 그렇다고 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팬은 아니다. 이상하다. 팬이라고 말하기엔 마음이 좀 부족하다. 그가 나오는 영화라면 믿음을 갖겠지만 쭉- 챙겨보겠다는 다짐은 아니란건가. 알 수 없는 내마음.
영화에 반해서 원작 소설을 읽고 있다. 마르께스 선생님은 참 정력가이기도 하지. 필력이 어찌나 좋으신지 비행기를 타지 않았는데도 금세 남미로 슝- 날아가 있는 기분이 든다. 영화와는 다른 느낌이다. 영화는 영화대로 소설은 소설대로 좋아서 아주 다행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