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란  


겨우내 아무 일 없던 화분에서 잎이 나니 찬란하다
흙이 감정을 참지 못하니 찬란하다 

감자에서 난 싹을 화분에 옮겨 심으며 
손끝에서 종이 넘기는 소리를 듣는 것도
오래도록 내 뼈에 방들이 우는 소리 재우는 일도 찬란이다 

살고자 하는 일이 찬란이었으므로
의자에 먼지 앉는 일은 더 찬란이리
찬란하지 않으면 모두 뒤처지고
광장에서 멀어지리 

지난밤 남쪽의 바다를 생각하던 중에
등을 켜려다 전구가 나갔고
검푸른 어둠이 굽이쳤으나
생각만으로 겨울을 불렀으니 찬란이다 

실로 이기고 지는 깐깐한 생명들이 뿌리까지 피곤한 것도
햇빛의 가랑이 사이로 북회귀선과 남회귀선이 만나는 것도
무시무시한 찬란이다 

찬란이 아니면 다 그만이다
죽음 앞에서 모든 목숨은  
찬란의 끝에서 걸쇠를 건져 올려 마음에 걸 것이니 

지금껏으로도 많이 살았다 싶은 것은 찬란을 배웠기 때문
그러고도 겨우 일 년을 조금 넘게 살았다는 기분이 드는 것도
다 찬란이다   

詩 이병률 

 

  <바람의 사생활>을 읽은 후로 이병률의 시를 더 안 읽어도 좋겠다는 생각을 했더랬다. 그거면 족했다. 시인의 새로운 시들을 우연히 맞닥뜨려도 읽지 않았다. 내가 읽고 싶은 시들, 새록새록한 일상들, 사연과 멜로디를 품고 있는 시어들을 더 알고 싶지 않았던 것 같다. 그리고 더 오래 바람의 사생활에 수록된 시들을 읽고 암송하고 간직하고 싶었던 것 같다. 새시집 출간 소식을 듣고도 시큰둥, 했다. 나에겐 아직 일용할 시가 있어, 하는 도도함으로 버텼다. 아무런 기대없이 횡단보도에 섰을 때 마침맞게 푸른 신호등으로 바뀐 것처럼 시집이 뚝, 떨어져 내게 왔다.   

 

세상 모든 길이 찬란으로 통한다면 좋겠다. 반성, 슬픔, 자괴감, 실망, 희망, 망각, 각질, 소멸...그런 모든 것들이 다 찬란으로 통한다면 참 좋겠다. 시인은 벌써 해탈을 준비하는 것일까. 시인의 조언과 수긍이 내게 피가 되고 살이 되었으면 더 좋겠다. 그런데 어떡하나. 나는 <바람의 사생활>이 더 좋다. 바람의 사생활을 더 좋아하는 것도 '다 찬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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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phistopheles 2010-05-20 10: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찬란한 빛을 내뿜을 수도 있는 경우가 있을지라도 주변에 안개가 너무 짙게 깔려 그 빛이 발하는 경우가 너무나 많은 요즘입니다. (잘 지내시죠 플레져님..?)

플레져 2010-05-21 01:15   좋아요 0 | URL
등대지기같은 불빛이라도 있다면 위로가 될텐데요.
벌써 여름이에요, 메피님!^^
금세 겨울도 올 것 같은 이 예감은...뭘까요...ㅎㅎ

2010-05-20 16:4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5-21 01:1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6-18 12:48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