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인생에 대해 환멸을 느껴 점점 더 고독해 갔다. "인간이란 것을 알게 된 이후로 나는 점점 더 동물을 사랑하게 되었어"하고 그는 말했는데, 물론 그리 진지한 말투는 아니었다.

사람들은 거리에서 지나가려는 사람들로부터는 비키라는 말을 듣고, 서 있으려는 사람들로부터는 밀침을 당했으며, 어디에나 사람들이 줄을 지어 늘어섰다..... 편안하게 되기 위해서는 불안했고, 그 불안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초조했다.
그리고 사람들의 모토는 "오늘은 아무것도 생각지 않겠다. 오늘은 그저 즐겁게 지내고 싶다."는 것이었다.

단순히 생존만을 위한 삶은 고문이었다.
그러면서도 어머니는 죽음을 두려워했다.

'무엇이라 이름 붙일 수 없는 것'이 이 이야기에는 가끔 나타난다. 그리고 그것은 어쩌면 '무엇이라 쓸 수 없는 것'인지도 모르는데, 난 그것이 대개는 나의 잘못된 표현 때문이라 생각하고 있다. 하지만 이 이야기는 의식이 경악하는 순간과 순간들을 취급하고 있다. 너무나 짧아서 언제나 말이 늦게 나오는 경악의 순간들. 너무나 무시무시해서 의식 속에 있는 벌레로서 사람이 생생하게 체험하는 꿈의 과정들. 숨이 막히고 몸이 굳어지고 '오싹하는 냉기가 등줄기를 타고 올라와 머리카락을 곤두세우는' 그런 순간들, 그리고 수도꼭지가 저절로 열려 황급히 잠그는 유령 같은 순간, 또한 저녁이면 맥주병을 손에 들고 거리를 방황하는 유령의 상태, 그리고 이것은 결코 어떤 결말을 기대할 수도, 결말이 좋아지는 그런 이야기는 아니다.


-- 페터 한트케, <소망 없는 불행>, <<왼손잡이 여인>>, 홍경호 옮김, 범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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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망 없는 불행...
이 말은 너무 참혹하고 소름 끼칠 만큼 차갑다
우리는 명백하고 실제적인 불행 속에서라도
정체 없는 희망을, 보이지 않는 소망을 버리지 않도록 '양육'되었다
언젠가는 좋은 날이 오리라...
진정한 의지로 극복하지 못할 좌절과 고난은 없다...
그러나 흐릿한 너울 같은 환상을 걷고, 익숙해서 단단하게 굳은 감언이설을 머리에서 지워 내고 냉정하게 투명한 눈으로 바라보자
실제로 이 지상에 살았던 누군가의 삶,
아니 아직 살고 있으며 앞으로 살아가게 될 우리 모두의 삶이란 것의 정체는
어쩌면 '소망 없는 불행'이 아닌지

페터 한트케는 전후의 '소망 없이 불행한' 개인사를 헤쳐 온 한 여성, 자기 어머니의 삶을 이야기하면서 이런 제목을 붙였다
그의 어머니는 '아무것도 되지 못했고 또 그 이상이 될 수도 없었던' 삶을 살다가 자살로 자기 인생의 끝을 맺는다
소설가인 아들은 그 삶에 대해 '소망 없는 불행'이라고 쓴다
'무엇이라 이름 붙일 수 없는 것'이 있는 이야기.....
어쩌면 '무엇이라 쓸 수 없는 것'일지 모르는 이야기를.....

 

2.
아침 텔레비전 뉴스에서 김선일 씨의 마지막 삶의 한 장면을 보았다
우리는 언젠가부터 그러한 순간을, 부인할 수 없을 만큼 지독한 현장감을 지닌 '비현실적인' 순간을 안방에서 관람하는 시대를 살고 있다
그는 오렌지색 티셔츠 차림에 눈이 가리워진 채 무릎 끓여 앉혀 있었다
한 기자가 그 오렌지 색의 '의미와 상징'에 대해 알려주었다
그의 옆에 선 복면을 한 사내가 그들의 모국어로 적들에게 전하는 메시지를 읽었다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와 함께 화면에는 친절하게 그 뜻을 옮긴 우리말 자막이 흐르고 있었다

그 순간 그는 그들의 메시지를 정확히 이해하지 못했을 것이다
동시 통역사나 실시간으로 입혀지는 화면의 자막 따위는 없었을 테니까
그는 제 몸에 걸치게 한 오렌지 색 옷의 의미도 알지 못했을 것이다
자신의 피랍 사건이 갖는 정치 군사적인 협잡과 거래의 맥락을 이성적으로 파악하고 있지 못했을 테니까

"나는 살고 싶다, 내 목숨은 그 무엇보다 소중하다"고 외쳤던
그가 그 마지막 순간 온 몸의 세포로 느꼈을 경악과 공포에 대해서
우리가 무슨 말을 덧붙일 수 있을까

.............

'무엇이라 쓸 수 없는 것들'이 너무 많은 세상을, 우리는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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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케트 팸플릿을 열심히 보고 있는 선생 앞에서 다이스케는 다시 한번 그 종이 쪽지에 있는 문장을 읽고 "이거 제가 가져도 될까요?"라고 물었다.
"뭐하게?"
"그냥, 왠지 갖고 있으면 머리가 좋아질 것 같아서요."
다이스케는 진지한 얼굴로 그렇게 말하면서 "저, 선생님. 지적인 것에 발기하는 경우도 있을까요?"라고 물었다.
"지적인 것? 지성적인 여자를 말하는 건가?"
"아니요, 그게 아니라, 지성 그 자체랄까. 예를 들면 말이죠, 나는 이런 문장을 읽기만 해도 어쩐지 아랫도리 부근이 근질근질해지거든요. 조금 이상한가?"
"호오, 자네는 지성에 발기하나?"
"아니요, 하지 않아요. 그냥 근질근질할 뿐이지."

선생은 유화 그리는 것이 취미여서 다이스케도 선생 부탁으로 모델이 된 적이 한 번 있었다. 완성된 초상화 속의 그는 실물과는 전혀 닮지 않았을 만큼 고상한 얼굴이었다. "선생님, 제 별명이 감자라는 거 아세요?"라고 다이스케가 묻자 선생은 다시 한번 그림을 보고, "이거는 말이야, 천국에 있는 자네야"라고 했다. 다이스케는 그 비유가 마음에 들었다.

미쓰오의 이야기는 물론 거짓말일 것이 뻔하다. 뻔하기는 하지만, 만약 누구 한 사람이라도 그 얘기를 믿어준다면 그것이 사실이 되는 것이 아닌가, 하고 다이스케는 생각했다. 지어낸 얘기가 사실이라는 건 모순이다. 그쯤은 다이스케도 안다. 다만 모순 따위는 소금 뿌려서 먹어치워 버려라, 하고 문득 생각할 때가 있다.

-- <열대어>

치사토의 바람을 용서하는 일은 매우 간단하게 느껴졌다. 나는 테이블 위에 놓인 빈 캔을 들고, '용서하지 않는다'라고 크게 써 보았다. 한참 그 빈 캔을 보고 있었다. 그것이 정말 정직한 내 마음인지 어떤지 몇 번이고 확인했다. 정말로 용서하지 않을 건가? 아니면 용서하지 않는 척하는 것뿐일까?
...... 그러나 그때 나는 갑자기 혼란스러워졌다. 용서하지 않겠다는 결론을 낸 것까지는 괜찮지만, 사람을 용서하지 않으려면 도대체 어떻게 하면 되는 것일까? 그 방법이 아무리 생각해도 떠오르지 않았다. 남을 용서하는 일이라면 지금까지 몇 번 해본 것 같기도 하다. 그런데 남을 용서하지 않겠다고 결정하자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 <그린피스>


요시다 슈이치 소설집 <<열대어>>, 문학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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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감각적이고 자극적인 이 화려한 '영상'의 시대에
뜻없는 자음과 모음의 조합으로 이루어진 문자의 '의미'를 통해 '발기'가 되는 그 어떤 상태...
멋지다... 그리고 질투를 느낀다, 그런 지점에 가 닿아 있는 사람들에게

가끔은 느낀다
문자로 발화되는 이 언어의 세계가 얼마나 요염할 수 있는지,
얼마나 감각적으로 내 몸 안의 그 무엇을 건드리고 애무하는지

지금 나의 비애는
나 자신 애무를 받기보다 누군가에게 애무를 주고 싶다는 욕망,
'이런 문장을 읽기만 해도 어쩐지 아랫도리 부근이 근질근질해지'도록 만들고 싶다는 그런 욕망과,
상상력과 표현력의 '불감증'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고 있는 나의 이 고여 있는 현재 사이의 그 아득한 거리에 있다!


2.
"누구 한 사람이라도 믿어준다면 그것은 사실이 되는 것"
........

"진정으로 거짓말을 잘하는 법은, 그 속에 진실을 조금씩 섞는 법이다."
<에덴의 동쪽>에 이런 말이 있었던 것 같다
자기만의 멋진 거짓말을 만들어 내는 법과
그 속에 진실을 어떤 비율로, 어떤 배합으로 섞어넣느냐 하는 기법......

거짓말과 진실의 칵테일 한 잔!


3.
창 밖이 어두워지고 있다
태풍이 올라오고 있다
이번 태풍의 이름은 ‘천둥과 번개를 관장하는 여신'이란 뜻을 가진 디앤무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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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 비문, 나는 오래 전에 그걸 작성해 놨는데, 그것에 늘 만족, 것도 아주 만족한다. 내 다른 글들, 그것들은 잉크가 다 마르기도 전에 벌써 싫증을 느끼게 하지만, 내 비문은 늘 마음에 든다. 내 비문은 문법상의 한 논점을 잘 보여준다. 불행하게도 그 비문이 새겨진 비석이, 그것을 구상한 머리맡에 언젠가 세워질 가능성은, 국가가 그 일을 떠맡지 않는 한 거의 없다. 그런데 죽은 나를 파내려면 먼저 나를 찾아내야 하는데, 국가가 살아 있는 나를 찾아내는 것만큼이나 죽어 있는 나를 찾아내는 데 고전하지 않을까 걱정이 된다. 그래서 나는 너무 늦기 전에 서둘러 내 비문을 이 자리에 기록해 두고자 한다.

"여기, 그토록 그곳을 피했으나
이제 겨우 그곳을 벗어난 자 잠들다."

- 내게 입을 맞추었던 그 모든 입술들, 나를 좋아했던 마음들(사람은 바로 마음으로 좋아하는 게 아닌가, 아니면 내가 다른 것과 혼동하고 있나?), 내 손과 장난쳤던 손들, 내 마음을 사로잡을 뻔했던 정신들!

- 자신이 더 이상 자기 자신이 아니라는 것은 괴로운 일이고, 무슨 말을 하든간에, 그건 자기 자신인 것보다 훨씬 더 괴로운 일이다. 왜냐하면 자신이 자기 자신이면, 자신이 자기 자신인지 약간 오락가락해도, 자기가 뭘 해야만 하는지 아는 반면에, 자신이 더 이상 자기 자신이 아니면, 자기는 어느 누구라도 될 수 있기에, 스스로를 모호하게 만들어 버리기 때문이다.

- 그 당시 나는, 여자들을 잘 몰랐다. 지금도 잘 모른다. 남자들도 그렇고, 동물들도 마찬가지이다. 그나마 안다고 할 수 있는 건, 내 고통들뿐이다...... 어쨌든, 언젠가, 생각이 나서, 할 수만 있다면, 나의 이상한 고통들을, 상세하게, 그리고 아주 확실한 이해를 위해서, 그 각각을 선명하게 구별해서, 당신들한테 조목조목 이야기할 계획이다. 그러니까 당신들한테, 분별의 고통들, 마음이나 감정의 고통들, 영혼의 고통들(그것도 아주 대단하신, 영혼의 고통들), 그리고 육체의 고통들에 대해서 말할 텐데......

- 나를 울리는 무생물들이 있었다. 그렇다고 내가 슬퍼했던 것은 아니다. 나도 모르게 뚜렷한 이유 없이 울고 있는 경우는, 내가, 부지불식간에, 뭔가를 봤기 때문이다.

- 그때마다 거의 같은 시간에, 내 말은 거의 같은 하늘 아래로, 아냐, 그게 또 그렇지가 않아, 왜냐하면 그게 언제나 같은 하늘이긴 하지만 결코 똑같은 하늘은 아니기 때문이라서, 아, 이걸 어떻게 표현하지, 좋아, 표현하지 말자.

- 나는 다른 방을 보고 싶다고 그녀에게 말했는데, 왜냐하면 다른 방을 아직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만일 내가 그 방을 이미 봤더라면 나는 그 방을 다시 보고 싶다고 말했을 것이다.

- 나는 소리내어 말하는 적이 거의 없어서, 문법적으로는 완전무결하나 철저하게 뭔가가 결핍된 문장들이 가끔씩 제멋대로 내 입을 빌려 튀어나오곤 했는데, 여기서 나는 그 결핍을, 의미가 아니라, 왜냐하면 그 문장들을 잘 따져보면 거기에서 하나 혹은 다수의 의미를 얻을 수 있으니까, 근거로 보고자 한다. 그러면 소리는, 내가 그 소리를 내는 한, 반드시 듣게 되는 것이었다.


-- 사무엘 베케트 단편선 <첫사랑> , 전승화 옮김, 문학과지성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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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 그들은 배갈을 마시면서 연극 얘기를 했다.
"베케트가 탔지."
"음."
......
"벌거숭이. 벌거숭이 된 내 마음."
"그래그래. 벌거숭이 된 마음이 벌거숭이의 공간을 밀고 나가는 거야."
"밀고 나간다?"
"그럼."
.......
"그런데 베케트처럼 안 해도 되잖아?"
"어떻게?"
"체홉처럼."
"그건 달라."
"달라?"
"다르고 말고. 끝까지 가면 베케트가 되는 거야."

-- 최인훈, <소설가 구보씨의 一日> (최인훈 전집 4, 문학과지성사), 26 - 29쪽


최인훈의 견해처럼, 나도 문학을 끝까지 밀고 가면 어느 한 정점에서는 '베케트가' 될 거라는 생각을 한다

헌데 베케트를 말하는 이 대목에서 사용된 저 구절, '벌거숭이 된 내 마음'은 보들레르가 자신에 관한 고백이라고 내세우는 산문집 표제이기도 하다.

["나는 <벌거벗은 내 마음>을 어디부터건, 어떤 식으로건 시작할 수 있고, 그날그날 벌어지는 상황에 따라 그 영감이 생생하기만 하다면 계속해 나갈 수 있다." -- 샤를 보들레르]


2.
소설에 진력이 나고 뭐가 뭔지 알 수 없어질 때,
출구를 찾는 심정으로 내가 잡는 문고리 두 개.
한쪽에는 롤랑 바르트와 사무엘 베케트가 있고,
다른 한쪽에는 무라카미 하루키와 스티븐 킹이 있다.


3.
정영문의 모든 글에서, 그의 말하는 방식에서, 세상을 보는 시선에서
카프카의 그림자와 함께
베케트의 그림자를 본다

너무나 짙고 큰 그림자......


4.
"장단을 맞추듯 이어지는 장문과 단문의 반복, 잦은 쉼표로 인과 관계와 상관없이 연결되어 있는 문장들, 또 앞뒤 문장과 어떤 의미 관계가 있을까 고민하게 만드는, 마침표로 파편처럼 제시된 명사들, 강박적으로 반복되어 나오는 단어들, 그리고 매번 미묘한 차이를 보이는 그 단어들의 의미, 제대로 그 의미를 파악하기에는 뭔가 부족한 문장의 상태, 혹은 논리, 글의 흐름을 방해하는 삽입절들, 말하는 '나', 생각되어지는 '나', 생각(상상)하는 '나', 만들어지는 '나' 등 무수한 '나'의 행렬, 바다 한가운데 난데없이 나타난 무인도처럼 당황하게 만드는 고유명사들."

이 책의 매력 중 하나는, 드물게 만날 수 있는, 베케트에 관해 '먹을 게 많은 생선' 같은 맛있는 '옮긴이의 말'이 실려 있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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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10-23 22:09   URL
비밀 댓글입니다.

에레혼 2004-10-24 19: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님, 소설을 '공부'하고 있어요. 몇 년 동안 습작품 몇 편이 있을 뿐이지만, 소설을 제 인생의 화두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어쩌면 그런 과제를 제 자신에게 부과해 이 삶을 견디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구요.
 

나는 그들을 좋아했다. 그들의 친구들이 느꼈을 그런 유의 호감을 갖게 됐다. 단순히 그들이 모델로 적합하다면 채용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그러나 이렇게 완벽한데도 어쩐지 미심쩍은 구석이 있었다. 결국 그들은 아마추어였고 내게는 아마추어 혐오증이 있었다. 또 내게는 다른 괴벽, 진짜보다는 재현된 주제를 더 좋아하는 타고난 괴벽이 있었다. 진짜의 결점은 너무 쉽게 재현의 걸림돌이 된다는 것이었다. 나는 진짜보다는 오히려 그럴싸해 보이는 게 좋았다. 그런 것에는 믿음이 갔다.


"아, 이 사람들은 안 되겠어!"
"새 모델을 쓰고 있어."
"그건 알겠어. 이 사람들은 안 되겠어."
"아무도 이 사람들에 대해 비판한 적이 없는데. <칩사이드> 쪽 사람들도 괜찮다고 하던데."
"모두 멍청이인 데다 <칩사이드> 쪽 사람이 정말 멍텅구리라서 그래. 자, 요즘 같은 세상에 대중이나 특히 출판사 편집장에 대해 환상을 가지고 있는 척하지 말게. '그런' 멍텅구리들을 위해 일하고 있는 건 아니잖아. 자네를 알아보는 사람들을 위해서잖아. '거장을 알아보는 사람'들 말일세. 자네 자신을 위해 일할 수 없다면 계속 날 위해서 그려주게나. 과거에 자네가 시도하던 것들 말일세-- 정말 아주 멋졌다네. 하지만 이 쓰레기는 그런 유가 아니야."


-- 헨리 제임스, "진짜" 중 (헨리 제임스 단편선 <밝은 모퉁이 집>, 조애리 옮김, 문학과지성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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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저녁 겸 술안주로 족발을 시켜놓고, 드라마 <결혼하고 싶은 여자>를 보고 있던 참이었다.
요즘 한창 '나이가 찬' 결혼 전의 여자들에게 전폭적인 지지와 공감을 얻고 있다는 드라마...... 명세빈이 그 역할을 맡고 있는 '이신영 어록'까지 속속 만들어져 매니아들 사이에 회자되고 있다는 소문이다.
나는 오늘 처음으로 이 드라마를 온전히 한 자리에 앉아 보았는데, 왜 <결혼하고 싶은 여자>라는 드라마가 '아직 결혼하지 않은', 그래서 '결혼하고 싶어하는' 여자들의 지지와 공감을 얻고 있는지 어렴풋이 알 것 같았다.
오늘 그 여자들의 주제는 "내 인생에서 진정으로 하고 싶은 게 무엇인지를 찾자!"였다.
결혼이냐, 일이냐/ 사랑이냐, 인생의 성취냐...... 젊은 여자들에게 던져지는 물음은 거의 언제나 명백한 이분법에 기초하고 있지만(문득 대학 졸업 즈음 치른 한 면접 시험에서 나 역시 이런 질문을 받았던 장면이 떠오른다. "당신은 사랑과 성공 중에 하나만 가지라고 한다면 어느 쪽을 선택하겠는가?"-- 내가 여자가 아니었다면, 결혼하지 않은 젊은 남자였더라도 내게 같은 질문이 주어졌을까... 물론 아닐 것이다!), 이미 결혼을 했든 하지 않았든, 여자이든 남자이든, 미성년이든 성년이든, 어쨌든 누구이건간에 그에게 가장 먼저 던져져야 할 물음은 바로 이것, "네가 네 인생에서 정말 하고 싶은 건 뭐지?"라는 것이어야 하지 않을까.


2.
한 후배가 '머리꼭지가 돌도록' 술을 마시고, 느긋하게 드라마를 보고 있는 내게 전화를 걸어왔다.
저나 나나 잘 아는 한 지인이 이번에 등단을 했다는 소식이다. 등단-- 세상이 공인하는 시인이 '된' 것이다.
대학 때부터 시를 써 온, 그리고 주변에서 "시를 잘 쓴다'는 평을 들어 온 후배는 지난 몇 년간 논술시장에 뛰어들어 제법 실속있게 돈을 모았다. 한국 사회의 사교육 시장은 아이엠에프 같은 위기상황에도 '불황'이 없었고, 후배는 주말과 휴일을 반납하면서까지 부지런히 '먹이 사냥'에 열중했다. 친구들로부터 '처녀 재벌'이라는 농담을 들을 만큼 적금 통장에 기입되는 숫자가 늘어나는 동안 후배는 시를 잃어버렸다. 아니, 그 자신의 표현을 빌자면 뜨거운 자기 욕망을 숨기고 비겁하게 도망쳐 있었다. '정말 사랑하는 것으로부터 버림받을지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에.
"나는 비겁해. 너무 비겁해. 그 동안 남 모르게 시를 써 온 것도 아니거든. 단 한 줄도 쓰지 않았으면서, 줄곧 사랑하지도 않았는데 배신당한 것 같은 이 기분은 뭘까."
"그의 등단작을 읽어봤는데, 그렇게 썩 좋지도 않더라구. 진짜 그에게서 나온 게 아니라 어떤 기준에 맞춰 만들어 낸 것 같은 그런 느낌. 질시의 감정 때문일까. 그게 정말 그의 진짜일까. 세상은 그런 걸 진짜로 받아들일까......"
후배는 술기운에, 뒤통수를 맞은 것 같은 씁쓸함과 자괴감에 울고 있었다.

나는 묵묵히 후배의 넋두리를 들어주었다.
나는 이미 알고 있다.
며칠쯤 그런 씁쓸함에 잠겨 지내다 보면 얼마 안가 곧 등단을 한 누군가에게 향해졌던 시선이 다시 자기 자신에게로 돌아올 것이라는 걸.
결국 중요한 건 누가 나보다 먼저 '내가 하고 싶었던' 그 무엇을 했느냐가 아니라(그건 그의 인생의 대가이자 몫일 뿐!), 지금 내가 무엇을 '하고 있느냐', 그리고 앞으로도 그 사랑의 대답이 쉽게 들려오지 않는다 해도 변함없이 사랑하며 그 길을 갈 수 있는가라는 질문이라는 걸!


3.
헨리 제임스는 <진짜>에서 예술과 현실의 관계에 대해 묻고 있다.
헌데, 나는 아직 잘 모르겠다.
진짜를 어디까지 믿어야 할지. 진짜를 어디서 버려야 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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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당신에게 이렇게 속마음을 털어놓는다는 게 무슨 뜻인지 모르세요?"
"무슨 뜻입니까?"
"난 그동안 죽 그런 끔찍한 느낌을 갖고 살아 온 생활이 피곤해졌어요. 나는 당신이 내 고통을 덜어주기를 바라고 있어요. 뭔가 올바른 말을 해주길 원해요. 뭔가 치료 방법을 좀 알려주세요."
그는 빨간색 체크 무늬 스커트에 딸기 티셔츠를 입고 있는 그 여인을 쳐다보았다. 아직 서른이 되지 않았지만, 남편도 아이도 사랑하지 않고 이미 인생에 진력이 나 버린 그 여인을. 그녀의 고백은 그를 우울하게 했다.
.......
이미 그녀 자신이 말했듯이, 정직하게 털어놓는 것은 그녀의 기분을 한결 낫게 해줄 것이었다.
어쩌면 그가 중재인으로 나서서 부부의 인생 상담을 거들어 줄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가장 본질적인 질문으로 문제의 핵심을 찌르기로 결심했다. 그래서 이렇게 물었다.
"다스 부인, 당신이 느끼는 것이 정말로 아픔입니까, 아니면 죄의식입니까?"
그녀는 고개를 돌려 그를 쳐다보았다. 그녀는 뭔가 말을 하려고 입을 벌렸다. 그러나 카파시 씨를 노려보는 그 순간, 어떤 깨달음이 그녀의 눈앞을 스쳐 지나갔고 그녀는 입을 다물었다. 그것은 그를 아프게 했다.

-- 줌파 라이히, "질병의 통역사" 중 (<축복받은 집>, 이종인 옮김, 동아일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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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동안 책이 손에 잡히질 않았다. 별다른 탈출구를 알지 못한 탓에 짐짓 자신의 기미를 모른 체하며 책을 펼쳐도 마음은 자꾸 다른 곳을 서성이고 있었다.
책을 읽는 것이 조금도 위안이나 즐거움이 되지 못할 때, 나는 어디로 도망쳐야 했을까.......

아침에 빨래를 널다가,
문득 아주 오래 전 막연히 '글을 쓰고 싶다'고 생각했던 그 아득한 마음이 떠올랐다.
아주 오래 전부터, 나는 왜, 무엇을 쓰고 싶어했던 걸까.
그건 어쩌면 이 행성에서의 내 삶이, 내 존재가 너무도 분명하게 유한한 것이어서 언젠가 내가 깨끗이 여기서 '사라지고 말 것'이라는 사실을 '몸으로' 느낀 최초의 두려움에서 비롯된 것일지도 모른다.
열 살 무렵이었던가, 내가 죽고 난 뒤에도 아무 상관없이 우주는 여전히 '존재'할 것이라는 생각과 내가 죽고 나면 나는 '아무 것도' 느낄 수도, 생각할 수도 없을 거라는 무섭도록 선명한 자각이 들기 시작한 어느 밤 이후부터, 나는 무언가를 끄적이기 시작했던 것 같다.

언젠가 소멸되고 말 나를 영영 '사라지기 전에' 좀더 잘 알고 싶다는 마음,
사라짐을 운명으로 하는 이 존재의 아픔과 슬픔을 '얘기하고 싶다'는 마음,
삶 전체에 대해서는 비관적이면서도 삶의 순간 순간에는 낙관과 희망을 버리지 못하는 나라는 창을 통해 세계를 이해하려는 자세


줌파 라이히는 <질병의 통역사>에서 그렇게 묻고 있다.
"당신이 느끼는 것이 정말로 아픔입니까, 아니면 죄의식입니까?"

몇 년 전, 이 소설집을 읽었을 때는 별 감흥 없이 지나쳤었나보다.
오래 전 읽었던 책을 다시 펼쳐들었을 때, 지금의 마음의 움직임이 예전에 그어놓은 밑줄 부분과 미묘하게 어긋나는 걸 느낄 때가 있다.
내 눈이 좀더 깊어졌든가, 아니면 나이가 들었다는 의미이겠지.......

인도 벵갈 출신의 부모에게서 태어나 런던과 뉴욕에서 자란 줌파 라이히는 자신의 성장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변방의 삶' '경계의 삶'을 이해하는 눈을 가질 수 있었던 것 같다.
여성, 이방인, 이민자, 해외 체류자의 삶을 절묘하게 포착하면서, 섬세하고 미묘한 삶의 한 단면을 날렵하게 포착하는 솜씨를 지니고 있다.
그녀의 첫번째 소설집인 <축복 받은 집>을 몇 년 만에 다시 읽으면서, 이제 나는 회복된 느낌이다.
그래, 소설의 힘이 이런 거지.
자신의 '질병의 통역사'가 되는 것.......
언젠가 막연하면서도 간절하게 '무언가 쓰고 싶다'고 느꼈던 그 마음을 회복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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