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내 비문, 나는 오래 전에 그걸 작성해 놨는데, 그것에 늘 만족, 것도 아주 만족한다. 내 다른 글들, 그것들은 잉크가 다 마르기도 전에 벌써 싫증을 느끼게 하지만, 내 비문은 늘 마음에 든다. 내 비문은 문법상의 한 논점을 잘 보여준다. 불행하게도 그 비문이 새겨진 비석이, 그것을 구상한 머리맡에 언젠가 세워질 가능성은, 국가가 그 일을 떠맡지 않는 한 거의 없다. 그런데 죽은 나를 파내려면 먼저 나를 찾아내야 하는데, 국가가 살아 있는 나를 찾아내는 것만큼이나 죽어 있는 나를 찾아내는 데 고전하지 않을까 걱정이 된다. 그래서 나는 너무 늦기 전에 서둘러 내 비문을 이 자리에 기록해 두고자 한다.
"여기, 그토록 그곳을 피했으나
이제 겨우 그곳을 벗어난 자 잠들다."
- 내게 입을 맞추었던 그 모든 입술들, 나를 좋아했던 마음들(사람은 바로 마음으로 좋아하는 게 아닌가, 아니면 내가 다른 것과 혼동하고 있나?), 내 손과 장난쳤던 손들, 내 마음을 사로잡을 뻔했던 정신들!
- 자신이 더 이상 자기 자신이 아니라는 것은 괴로운 일이고, 무슨 말을 하든간에, 그건 자기 자신인 것보다 훨씬 더 괴로운 일이다. 왜냐하면 자신이 자기 자신이면, 자신이 자기 자신인지 약간 오락가락해도, 자기가 뭘 해야만 하는지 아는 반면에, 자신이 더 이상 자기 자신이 아니면, 자기는 어느 누구라도 될 수 있기에, 스스로를 모호하게 만들어 버리기 때문이다.
- 그 당시 나는, 여자들을 잘 몰랐다. 지금도 잘 모른다. 남자들도 그렇고, 동물들도 마찬가지이다. 그나마 안다고 할 수 있는 건, 내 고통들뿐이다...... 어쨌든, 언젠가, 생각이 나서, 할 수만 있다면, 나의 이상한 고통들을, 상세하게, 그리고 아주 확실한 이해를 위해서, 그 각각을 선명하게 구별해서, 당신들한테 조목조목 이야기할 계획이다. 그러니까 당신들한테, 분별의 고통들, 마음이나 감정의 고통들, 영혼의 고통들(그것도 아주 대단하신, 영혼의 고통들), 그리고 육체의 고통들에 대해서 말할 텐데......
- 나를 울리는 무생물들이 있었다. 그렇다고 내가 슬퍼했던 것은 아니다. 나도 모르게 뚜렷한 이유 없이 울고 있는 경우는, 내가, 부지불식간에, 뭔가를 봤기 때문이다.
- 그때마다 거의 같은 시간에, 내 말은 거의 같은 하늘 아래로, 아냐, 그게 또 그렇지가 않아, 왜냐하면 그게 언제나 같은 하늘이긴 하지만 결코 똑같은 하늘은 아니기 때문이라서, 아, 이걸 어떻게 표현하지, 좋아, 표현하지 말자.
- 나는 다른 방을 보고 싶다고 그녀에게 말했는데, 왜냐하면 다른 방을 아직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만일 내가 그 방을 이미 봤더라면 나는 그 방을 다시 보고 싶다고 말했을 것이다.
- 나는 소리내어 말하는 적이 거의 없어서, 문법적으로는 완전무결하나 철저하게 뭔가가 결핍된 문장들이 가끔씩 제멋대로 내 입을 빌려 튀어나오곤 했는데, 여기서 나는 그 결핍을, 의미가 아니라, 왜냐하면 그 문장들을 잘 따져보면 거기에서 하나 혹은 다수의 의미를 얻을 수 있으니까, 근거로 보고자 한다. 그러면 소리는, 내가 그 소리를 내는 한, 반드시 듣게 되는 것이었다.
-- 사무엘 베케트 단편선 <첫사랑> , 전승화 옮김, 문학과지성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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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 그들은 배갈을 마시면서 연극 얘기를 했다.
"베케트가 탔지."
"음."
......
"벌거숭이. 벌거숭이 된 내 마음."
"그래그래. 벌거숭이 된 마음이 벌거숭이의 공간을 밀고 나가는 거야."
"밀고 나간다?"
"그럼."
.......
"그런데 베케트처럼 안 해도 되잖아?"
"어떻게?"
"체홉처럼."
"그건 달라."
"달라?"
"다르고 말고. 끝까지 가면 베케트가 되는 거야."
-- 최인훈, <소설가 구보씨의 一日> (최인훈 전집 4, 문학과지성사), 26 - 29쪽
최인훈의 견해처럼, 나도 문학을 끝까지 밀고 가면 어느 한 정점에서는 '베케트가' 될 거라는 생각을 한다
헌데 베케트를 말하는 이 대목에서 사용된 저 구절, '벌거숭이 된 내 마음'은 보들레르가 자신에 관한 고백이라고 내세우는 산문집 표제이기도 하다.
["나는 <벌거벗은 내 마음>을 어디부터건, 어떤 식으로건 시작할 수 있고, 그날그날 벌어지는 상황에 따라 그 영감이 생생하기만 하다면 계속해 나갈 수 있다." -- 샤를 보들레르]
2.
소설에 진력이 나고 뭐가 뭔지 알 수 없어질 때,
출구를 찾는 심정으로 내가 잡는 문고리 두 개.
한쪽에는 롤랑 바르트와 사무엘 베케트가 있고,
다른 한쪽에는 무라카미 하루키와 스티븐 킹이 있다.
3.
정영문의 모든 글에서, 그의 말하는 방식에서, 세상을 보는 시선에서
카프카의 그림자와 함께
베케트의 그림자를 본다
너무나 짙고 큰 그림자......
4.
"장단을 맞추듯 이어지는 장문과 단문의 반복, 잦은 쉼표로 인과 관계와 상관없이 연결되어 있는 문장들, 또 앞뒤 문장과 어떤 의미 관계가 있을까 고민하게 만드는, 마침표로 파편처럼 제시된 명사들, 강박적으로 반복되어 나오는 단어들, 그리고 매번 미묘한 차이를 보이는 그 단어들의 의미, 제대로 그 의미를 파악하기에는 뭔가 부족한 문장의 상태, 혹은 논리, 글의 흐름을 방해하는 삽입절들, 말하는 '나', 생각되어지는 '나', 생각(상상)하는 '나', 만들어지는 '나' 등 무수한 '나'의 행렬, 바다 한가운데 난데없이 나타난 무인도처럼 당황하게 만드는 고유명사들."
이 책의 매력 중 하나는, 드물게 만날 수 있는, 베케트에 관해 '먹을 게 많은 생선' 같은 맛있는 '옮긴이의 말'이 실려 있다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