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로쟈 > “책은 무조건 즐겁게 읽어라”(1)


낮에 (점심이 아니라) 아침을 먹고서 수업에 들어가기 위해 나서는 참에 문 우편함에 인쇄 우편물이 들어 있는 걸 발견했다. 북매거진 <텍스트>(23)였다. 지난 22호부터 20일 간행 체제로 바뀌고서 두번째로 나온 것인데(22호에 나는 체홉론을 기고한바 있다), 표지는 지난번과 마찬가지로 실용적이었지만, 책과 시대란 가볍지 않은 주제를 특집으로 다루고 있었다. 제목의 인용구는 다니엘 페나크의 <소설처럼>(문학과지성사)에 대한 서평의 제목이기도 한데, <텍스트>의 표지에는 그의 글이 조금 더 인용돼 있다.


지금까지 우리의 인격을 형성해온 책읽기란 대개는 순응하고 따르는 책읽기라기보다는, 무언가에 반하고 맞서는 책읽기였다. 즉 이제껏 우리가 책을 읽어온 것은, 마치 세상과 등지듯 현실을 거부하고 현실과 대립하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때론 우리가 현실 도피자처럼 여겨지고 현실마저 우리가 탐닉하는 독서의 매력에 가려져 아득해질지언정, 어디까지나 우리는 자신의 세계를 구축하는 일에 열중하고 있는 도망자, 새롭게 태어나고 있는 탈주자인 것이다. 모든 독서는 저마다 무언가에 대한 저항 행위이다.(<소설처럼>, 103-4)
두 개의 인용구를 종합하면, 책읽기는 즐거운 도망이고, 즐거운 저항이다. 도망치면서 저항하는 것인지, 저항하면서 도망치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하여간에 우리는 책을 읽으면서 한없이 도망치고 한없이 저항한다. 아니, 도망치기 위해서, 저항하기 위해서 책을 읽는 건지도 모르겠다. (페나크에 따르면) 그것이 책읽기의 의의이다. 중요한 것은 무조건 즐거워야 한다는 것. 만약에 당신이 책을 읽으면서 즐겁지 않()다면, 당신은 제대로 도망가지도, 저항하지도 못한 것이 된다(그건 당신이 변변찮다는 얘기이다). 그러니, 책은 무조건, 절대적으로, 악착같이 즐겁게 읽을 필요가 있다(물론 애초에 그럴 만한 책을 고르는 안목이 중요하다).


'즐거운 책읽기와 관련하여 나에게 즉각적으로 떠오르는 책이 두 권 있다. 그건 김현의 평론집 <책읽기의 괴로움>(민음사)과 롤랑 바르트의 <텍스트의 즐거움>(동문선)이다. 기억에 <책읽기의 괴로움>은 최인훈의 <회색인>에 대한 평문의 제목을 표제로 한 책이었다. 나는 김현 전집으로 다른 책과 묶여서 나온 <책읽기의 괴로움>도 갖고 있지만, 내가 더 아끼는 건 민음사판의 초판본이다. <분석과 해석> 이전에 나온 것이니까 아마도 80년대 초반에 나왔을 법한데, 내가 중학교 때부터 문학평론집을 읽은 건 아니므로 내가 이 책을 구한 건 당연히 훨씬 나중이다(물론 책은 이미 도서관에서 대출해서 다 읽은 뒤이다). 
절판됐던 그 책을 구한 건 아마도 (정확한 기억은 아니지만) 90년대 초반에 새로 개장한 영풍문고에서였다. 아마 재고로 먼지를 뒤집어 쓰고 있던 책이 나온 듯한데, 나는 한 권 남아 있던 이 책을 집어들고서 쾌재를 부른 적이 있다(요컨대, 이런 게 책 구하기의 즐거움이다). 그게, 마지막 한 권이었는지는 어떻게 아느냐고? 그걸 확인해보려고, 책을 사고 며칠 안 돼서 서점에 또 가봤기 때문이다(더는 진열돼 있지 않았다). 해서, 한동안 내가 가장 즐겨 들르던 서점이 영풍문고였고, 영풍문고는 내게 <책읽기의 괴로움>으로 각인돼 있다. 사실, (내 기억에) 김현이 말한 책읽기의 괴로움은 책을 통해서 읽을 수밖에 없는 세상 읽기의 괴로움을 뜻한다. 그러니까 그 자체로는 즐거운 책읽기를 괴롭게 만드는 건 세상인 셈. 하지만, 책읽기의 즐거움은 그런 괴로움을 기꺼이 감수하도록 하는 즐거움이며, 그런 의미에서 그것은 쾌락원칙을 넘어선다. , 책읽기의 즐거움은 쾌락이 아니라 향락이다.   


바르트의 책 <텍스트의 즐거움>은 우리말로 두 종의 번역서가 나와 있는데(나에겐 이 두 번역본과 영역본이 있다), 읽은 만한 건 김희영 교수가 옮긴 동문선본이다(연대출판부본은 책읽기의 괴로움을 강요하는 번역이다). 바르트의 책들은 우리말 전집이 기획/출간되고 있을 정도이니까 우리에게 친숙한 편이지만, 아쉽게도 그의 유미적인/유희적인 문체 때문에 쉽게 읽히지 않는 경우가 더 많다(<사랑의 단상>이나 <카메라 루시다> 정도가 예외적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한편, 우리말로 번역된 바르트의 책들은 대부분 러시아어로도 번역돼 있다(<카메라 루시다>, <밝은 방>만 아직 보지 못했다). 더 번역된 건 두툼한 선집 외에 <S/Z> 정도. 그 중에서 내가 산 건 아직까지는 <기호의 제국> 한 권뿐인데, 그건 내가 영역본을 따로 갖고 있지 않아서이다. 


<텍스트의 즐거움>을 읽기 위해서 먼저 읽어야 하는 것은 <저자의 죽음> <작품에서 텍스트로(From Work to Text)>라는 바르트의 두 짧은 평문이다(동문선본에 같이 번역돼 있을 듯하다). 어떤 책을 작품(Work)으로 간주하는 건 간단히 말해서, 그걸 산출한 주인 혹은 아버지로서의 저자를 상정하고, 그의 의도를 파악하는 것을 작품 읽기의 목적으로 삼는 태도이다(따라서 신학적이며 형이상학적인 태도이다). 반면에 어떤 책을 텍스트(Text)로 간주하는 건(교재란 의미의 텍스트가 아니다), 더 이상 그런 의미작용의 중심으로서의 저자를 고려하지 않는 태도이다. 그래서, 저자의 죽음이다(이건 반형이상학적이며 탕아적인 태도이다). 바르트는 작품의 은유로 유기체를 드는 반면에 텍스트의 은유로는 을 든다. 하나는 채워져 있고, 다른 하나는 비어 있다. 그래서, 작품은 독자가 읽어내는 것이지만, 텍스트는 독자가 채워넣는 것이 된다. 해서, (바르트의 다른 용어로 표현하자면) 작품이 독자가 읽어내는 텍스트(readerly text)에 대응한다면, 텍스트는 독자가 써나가는 텍스트(writerly text)에 대응한다.  


나는 러시아 문학 이전에 문학이 전공이다 보니까 문학이론/비평 또한 관심에서 제쳐놓을 수가 없()는데(해서 문학이론서들을 지겨울 정도로 많이 읽었다. 그런데, 이론이라는 게 말 그대로 모든 것에 대한 지식을 요구한다. 공부하기엔 좋은 동네인 셈), 이른바 이론 20세기 후반 인문학의 주도적인 담론이었다. 그 기폭제가 (프랑스) 구조주의였다면(좋은 의미에서건 나쁜 의미에서건 구조주의는 현실구조로 대체/환원했다) 문학비평에서 구조주의 혁명을 주도했던 바르트의 위치는 간과될 수 없다(물론 그는 <텍스트의 즐거움>(1973)을 경계로 포스트 구조주의로 넘어간다).


특이한 건 그가 주로 아카데미즘의 바깥에서 활동했다는 것. 콜레주 드 프랑스에서 기호체계의 사상을 가르치는 교수로 취임하는 것이 1977년이니까 1953 <글쓰기의 영도>(이 또한 우리말 번역이 있는데, 번역의 0쯤으로 불릴 만하다)데뷔한 지 22년이 지나서야 그는 변변한 직업을 갖게 된다(이전에 그가 몸담았던 연구소 등에서의 지위나 보수에 대해서는 알지 못하지만). 그가 교통사고로 사망하게 되는 것은 불과 몇 년 후이다(내 기억에는 1980년이고 그의 유작이 <밝은 방>이다).     


아마도 그런 전기적 이력이 보다 본격적인 구조주의 비평가라는 제라르 주네트보다 바르트에게 더 친밀감을 갖게 하는 듯하다(나는 두툼한 영어판 바르트 전기도 갖고 있으며, 1/3쯤 읽었더랬다). 그건 불문학자 김현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여서, 그는 <프랑스비평사: 현대편>(문학과지성사)에서 주네트 대신에 바르트에게 한 장을 할애한다(곽광수 교수 같은 이는 바르트를 딜레탕트 비평가, 재치 있는 비평가 정도로 평가절하한다). 참고로, 김현이 재구성한 프랑스 현대비평은 <사르트르-바슐라르-바르트-블랑쇼> 4각형으로 이루어지는바, 이들의 키워드를 차례대로 나열하면 <참여-상상력-언어-죽음>이다(나는 문학을 구성하는 네 원소가 사랑과 가난과 죽음과 언어라고 생각하는바, 사랑과 상상력, 가난과 참여를 등가화시키면, 두 사각형은 동일한 매트릭스의 변주가 된다). 


어쨌든 <책읽기의 괴로움> <텍스트의 즐거움>, 두 권의 책이 생각난다는 얘기이다. 물론 텍스트가 그러하듯이 모든 생각에는 꼬리가 있다(꼬리에 꼬리를 무는 생각!). 김현의 유작은 사후에 출간된 일기 <행복한 책읽기>인데, (내 기억에) 생전에 제목을 정해두었다는 그가 염두에 둔 것은 <책읽기의 괴로움>이었을 것이다(돌이켜 보건대, 그의 죽음은 90년대 한국문학의 최대 손실이다. 비평가와 불문학자로서 그의 열정업적을 넘어설 만한 이는 아직 없으며, 앞으로도 당분간은 없을 것으로 보인다. 그건 한편으로 고인에게 부끄러운 일이다). 행복한 책읽기 10년 정도만 더 연장됐어도, 우리는 (그는 4년에 한번 꼴로 책을 냈으므로) 최소한 두 권의 문학비평집과 (그가 <프랑스비평사>에서 포부를 밝힌바) 리쾨르와 데리다 등의 연구서를 더 가질 수 있었을 텐데, 안타까운 일이다(현재까지 우리말로 씌어진 리쾨르, 데리다 단독 연구서는 각각 한 권씩이다. 아마도 일본의 1/10 정도 수준이지 않을까 싶다. 학문어로서의 한국어는 아직도 한참 가난하다).


주인/아버지로서의 저자의 죽음을 선언한 바르트였지만, 사실 그에겐 아버지가 없었다(일찍 여읜 걸로 기억된다). 그래서 그에겐 내내 어머니밖에 없었으며(<밝은 방>은 그 어머니의 죽음에 바쳐진 책이다), 어머니의 죽음 이후에 (교통사고이긴 했지만) 그는 얼마 더 살지 못했다(참고로 그는 동성연애자였다). 유복자 혹은 아비 없는 자식이란 점에서 바르트는 한 세대 선배인 사르트르를 따르고 있다(프랑스의 20세기 지성 중에서 내가 좋아하는 이들은 사르트르-바르트-데리다이다. 데리다의 죽음으로 이들은 모두 고인이 됐다. 1980년부터 2004년까지이다). 어찌된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어린시절 나에게 더 강렬한 인상을 남긴 것은 79년 박정희의 죽음이 아니라 80년 사르트르의 죽음이었다. 나는 신문지상에 보도된 그의 죽음에 매료됐고, (정치가가 아닌) 작가의 길을 선망하게 된다(그 길이 이 길이었다니!).


고등학교 때부터 사르트르의 소설들을 읽었지만, 그렇다고 그의 책들을 모두 읽은 건 아니다(나는 <존재와 무>도 아직 읽지 않았다). 하지만, 국내에서 나온 사르트르에 대한 책들은 거의 다 읽었다. 얼마 전에는 헌책방에서 러시아어로 된 사르트르 연구서를 샀는데(333쪽이고 1,600) 레오니드 안드레예프란 저자의 이름은 낯설지만, 1994년에 나온 이 책이 러시아에서 나온 최초의 사르트르 연구서란 점이 마음에 들었다. 사실, (레이몽 아롱 정도를 제외하면) 대부분의 좌파였던 사르트르 세대의 프랑스 지식인들이 과거 소련체제, 그리고 소련의 작가들과 가졌던 친분을 고려하면(이들의 서신교환도 두툼한 책 한 권 분량이다), 90년대에 들어서야 그의 연구서가 나왔다는 점은 다소 의외이다(소련에서는 부르주아 철학도 열심히 연구했기 때문이다).


아마도 1994년에 책이 나온 건 1964년 그의 노벨문학상 수상/거부 30주년을 기념하는 의미도 갖고 있었을지 모른다. 그러니까 올해는 그의 노벨상 수상/거부 40주년이 되는 해이다. 어제 날짜 <니자비씨마야>엑스 리브리스의 표제기사가 그걸 상기시켜주었는데, 러시아(소련)에 사르트르가 제일 처음 소개된 것이 바로 그 해 1964년이고, <노브이 미르>란 잡지(1962년에 솔제니친의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가 발표됐던 잡지) <>이 번역/소개됐다(그의 자서전 <>읽기쓰기 두 대목으로 구성돼 있다). 계기는 물론 그가 노벨상 수상자로 선정된 것. 스웨덴 한림원의 선정에 대해서 사르트르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나는 상은 거부한다. 하지만, 돈은 받겠다.(이를 인용한 러시아 필자는 이것이 진정한 철학적 행위라고 평한다. 그는 사르트르를 무척 좋아한다고 하니까, 반어적으로 하는 얘기가 아니다.)


우리는(나부터도) 흔히 나는 노벨상을 거부한다란 그의 선언을 사르트르 철학(=자유의 철학)의 상징적인 제스처로 이해해왔는데, 알고 보면 그건 절반의 이해였던 셈이다. 거기에 덧붙여져야 할 것은 하지만, 돈은 받겠다!이다. 그럴 때에라야, 실존주의는 휴머니즘이다 같은 구호가 아주 실감나게 다가오지 않는가?(, 실존주의는 마음이 약하고, 돈에 약하다!) 그리고, 그럴 때에라야 실존주의가 왜 프롤레타리아 철학이 아니라 부르주아 철학인가가 명료해지지 않는가? 더불어, 우리는 사르트르를 더 좋아하게 되지 않는가?..


내가 갖고 있는 러시아어본 사르트르는 <> <구토> 등이 포함된 작품집과 <보들레르>, <상상적인 것>(그의 초기 상상력 연구서) 등이다(<존재와 무>는 너무 고가여서 사지 못하더라도 전쟁일기 <이상한 전쟁의 기록>이나 <문학이란 무엇인가> 등은 형편을 봐서 구할 생각이다. 어린시절 영웅에 대한 예의로서). <상상적인 것>은 그가 후설의 영향하에 쓴 것으로 흔히 바슐라르의 물질적 상상력 연구와 비교된다(김현의 연구가 있다). 더불어, 얇은 분량의 <보들레르>는 그의 실존적 정신분석이란 방법론이 구체적으로 적용된 사례이다. <상상적인 것>은 우리말 번역이 없지만, <보들레르>(문학과지성사)는 오래 전에 번역/출간돼 있다(아마 절판됐을 것이다). 나는 지난 달에 2권짜리 보들레르 선집도 구했기 때문에(1권은 시집이고, 2권은 산문집이다) 이젠 좀 읽어보는 일만이 남았다(보들레르를 읽는 건 나의 오랜 숙제 중의 하나이다. 그가 현대시의 시조이기 때문이다). 한국어와 영어와 러시아어로(들뢰즈가 인용한 프루스트의 말을 빌면, 훌륭한 작품은 모두 외국어로 씌어져 있다니까 읽는 것도 외국어로 읽어야 하지 않을까).


한국어 사르트르는 제법 풍족한 편이다. 작품도 <자유의 길>을 포함해 대부분 번역돼 있고(그의 일기와 플로베르론인 <집안의 백치>, 철학서인 <변증법적 이성비판> 정도를 제외하면) 정명환, 박이문, 박정자 선생들의 소개도 충실하고 수준도 높다. 사실 다른 작가/철학자들의 경우도 이런 정도의 소개 수준만 되면 더 바랄 나위가 없을 것이다(이에 견줄 만한 작가는 김화영 교수의 카뮈 정도이다). 사르트르의 전기로는 코헨-솔랄의 3권짜리 전기 <사르트르>가 우리말로 번역돼 있는바, 규모에 맞게 충실하면서도 재미있다. 


실존주의 세대(4-50년대)와 구조주의 세대(60년대)를 대표하는 사르트르와 바르트는 각각 타동사자동사로서의 문학을 주창한 걸로 흔히 비교되는데(하지만 사르트르 자신도 시는 앙가주망(=참여)에서 제외시켰다), 폴 존슨이 쓴 <지식인들>을 보면, 딱히 그렇게 대조적인 것만도 아니다(지식인들에 대한 신랄한 비판을 담고 있는 그의 책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건 브레히트 비판이다). 그는 사르트르를 모피를 뒤집어쓴 잉크라고 불르는데, 하여간에 이 인간은 평생 끊임없이 뭔가를 써댄 것이었다(그렇게 써대고 노벨문학상까지 받았으니 할말은 없지만).


, 그에게서 글쓰기의 발화주체는 타동사적 주체였지만(사르트르의 글쓰기 주어로서의 ), 발화행위주체인 사르트르 자신은 자동사적 주체였던 것이다(쉽게 얘기하면, 앙가주망(=타동사)을 주창하는 글들을 그는 자동사적으로 썼다). 그러니, 사르트르의 참여란 것은 좀 의심스러운 것일까? 거꾸로인 것 같다. 그는 모든 지식인의 참여가 갖는 자동사적 성격(자위행위적 성격)을 상기시켜주는바, 그런 의미에서 그의 앙가주망은 진짜 앙가주망이다(오히려 우리가 의심해 보아야 하는 것은 그런 자위행위적 성격을 부인/배제하는 앙가주망이 아닐까?).


미국의 대표적인 마르크스주의 비평가인 프레드릭 제임슨의 경우를 봐도 그렇다. 그의 박사학위논문은 사르트르인바(문체의 기원이란 제목인가로 책이 나와 있다), 그는 <마르크스주의와 형식>(<변증법적 문학이론의 전개>로 번역됨)에서도 (여느 마르크스주의자들과는 달리) 사르트르를 중요하게 다룬다. 하지만, 제임슨을 필두로 한 미국의 강단 좌파들의 정치적 행위(사르트르와 비교해 보더라도) 대학 등의 지식인 사회에만 한정된 것이다. , 그들의 참여는 의미론적으론 타동사이지만, 화용론적으론 자동사적 성격을 벗어나지 못한다.


하물며 대부분의 미국 학문은 기능주의적이지 않은가? (직접적인 경험담은 아니지만) 철학이 그렇고, 심리학이 그렇다. 분업화된 분석철학은 철학의 자기소외를 자기존립의 당위적인 조건으로 수용한다는 점에서 자폐적이며, 자아(에고) 심리학은 사회에 대한 (병리적) 개인의 적응을 중심적인 과제로 설정함으로써 정작 사회의 병리성 자체는 사고하지 못하는 무능력에 직면한다. 가령, 소비자심리학이나 유권자심리학이 자본주의나 민주주의 체제 자체에 대한 의문을 제기할 수 있을까? 가령, 분석철학이나 자아심리학은 파농의 탈식민주의를 문제로서 사유할 수 있는가?(최근 파농의 <대지의 저주 받은 사람들>(그린비)이 번역돼 나온 걸로 돼 있다. 기억에, 재번역이다.)      


이런 생각은 얼마전 미 대선 결과에 대한 김우창 교수의 시론(時論)을 읽고서 든 것인데, 정작 9.11 테러사건이 발생한 맨하탄 지역에서 부시의 지지율이 20% 미만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케리가 패배한 것은 도시 지역의 진보적 지식인/중산층들과 그와는 전혀 다른 사고와 가치관을 가진 전통적/보수적 시골 사람들이 서로 유리돼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이건 마치 제정 러시아시절, 인텔리겐치아와 민중 간의 유리를 상기시킨다). 아무리 대학은 좌파 혹은 민주당이 장악하고 있어도 그 영향력은 대학가 주변에 한정돼 있는 것(한국이라고 사정이 다른 건 아니다. 80년대 대학가와 지방 소도시의 공기는 너무도 달랐다). 그러니까 미국사회는 기본적으로 사회적 네트워킹이 부족한 고립사회이다(아메리카는 들로 이루어진 대륙이다). 개방된 고립사회(서로 문은 열어두고 있지만, 아무도 왕래하지 않는다). 그러니, 아무리 (좌파)이론이 첨단을 가고, 좌파 지식인들이 목소리를 높인다 하더라도 그 사회의 보수성은 쉽게 개선되지 않는 것이다.


이러한 미국의 경우를 타산지석으로 삼는다면, 우리가 좀더 관심을 가져야 할 대목은 사회적 의사소통의 네트워킹을 강화하는 것이다(데리다의 새로운 계몽주의는 이런 의미에서 이해될 필요가 있다). 그건 흔한 말로 시민의식의 강화이면서 시민교양의 확충이며, 그로써 지식인과 대중간의 거리를 좁히는 것이다(지식인이 대중화되고, 대중이 지식인화되어야 한다. 마치 모든 노동자가 예술가이어야 한다는 사회주의의 구호처럼, 모든 노동자는 지식인이 될 필요가 있다. 의사나 교수보다 응급차 운전기사가 더 많은 월급을 받았던 과거 소련에서처럼). 그리고 거기에 기본이 되는 것은 기본적인 책들을 읽()는 것이고(가령, 시카고시에서 <앵무새 죽이기>를 단체로 읽듯이), 서로 대화/토론하는 것이다(학교에서 왜 말하기를 교육하지 않는가?). 읽고, 생각하고, 토론하고, 글을 쓰는 것이 생활의 기본이 될 경우에(학교에서 왜 글쓰기를 교육하지 않는가?), 민주주의(=존재적 차원) (지젝이 지적하는바) 포퓰리즘(=존재론적 차원)으로 추락하지 않게 될 것이다(이런 경우엔 하이데거가 아니라 레비나스를 따라서, <존재에서 존재자로>라고 말해야 할 듯하다). 이 정도도 너무 거창한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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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레혼 2004-11-29 20: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왜 하필 알라딘에...?"

알라딘에 서재를 만들었다고 하니 한 친구는 네이버나 엠파스 따위의 블로그 대신에 왜 알라딘이었느냐고 물었다. 나는 "그냥'이라고 대답했다.

그냥... 이란 말은 대답할 이유가 딱히 없다는 의미이기도 하지만, 간단히 말할 수 없는 이유라면 이유란 게 여럿 있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그 중 하나가 이런 글을 만날 수 있는 매력이 아닐까 생각한다.

책을 둘러싸고 오가는 따뜻한 소통과 즐거운 담소도 서재놀이의 묘미이지만, 그 한켠에서 '책읽기'에 관한 이런 깊고도 뜨거운 글을 읽을 수 있는 즐거움은 어쩌면 알라딘 서재가 아니었다면 어려운 일 아니었을까.....



로쟈님은, 이 글에 나와 있듯이, 지금 러시아에서 러시아문학을 공부하고 있다고 한다. 책과 영화와 러시아에서의 생생한 일상이 종횡으로 어우러져 있는 이분의 리뷰는 날카롭고도 섬세하게 빛난다. 언젠가 이분이 쓴 리뷰 -- 니진스키의 자서전 "영혼의 절규"를 읽고 내 몸을 관통하고 지나간 전류를 기억한다. 그 뒤 나는 한동안 니진스키의 영혼의 독백과 광기와 함께 지냈다.


앞으로 기나길 겨울날, 생각날 때마다 아랫목에 발 넣고 찬찬히 읽어 보고 싶은 욕심에 이 글을 내 방에 옮겨 왔다. 로쟈님께 감사 드린다.
 


 






 






 






 






 






 



가을 저녁의 詩




 
- 김춘수


누가 죽어 가나 보다
차마 다 감을 수 없는 눈
반만 뜬 채
이 저녁
누가 죽어 가는가 보다.

살을 저미는 이 세상 외롬 속에서
물같이 흘러간 그 나날 속에서
오직 한 사람이 이름을 부르면서
애터지게 부르면서 살아온
그 누가 죽어 가는가 보다.

풀과 나무 그리고 山과 언덕
온 누리 위에 스며 번진
가을의 저 슬픈 눈을 보아라.

정녕코 오늘 저녁은
비길 수 없이 정한 목숨이 하나
어디로 물같이 흘러가 버리는가 보다.




김춘수 시인이 세상을 떠나셨다.




장정일은 김춘수의 시를 변주하여 다음과 같은 시를 썼다.  






라디오와 같이 사랑을 끄고 켤 수 있다면
- 김춘수의 꽃을 변주하여







내가 단추를 눌러 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라디오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단추를 눌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전파가 되었다.
내가 그의 단추를 눌러 준 것처럼
누가 와서 나의
굳어 버린 핏줄기와 황량한 가슴속 버튼을 눌러 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전파가 되고 싶다.
우리들은 모두
사랑이 되고 싶다.
끄고 싶을 때 끄고 켜고 싶을 때 켤 수 있는
라디오가 되고 싶다.






이제 시인은 우리에게 하나의 전파로, 꽃 같은 한 떨기 별로 여기가 아닌 다른 세상에서 빛나고 있으려나




김춘수 시인의 별세 소식에 잠시 그를 생각한다.




최근에 읽었던 그의 작품 가운데 가장 마음에 와 닿았던 '밤의 시'를 떠올리며........ 



나는 얼마 전 이국의 여행을 떠나는 누군가에게 긴 밤기차 여행길에 이 시를 하나 가슴에 품고 가라고  메일에 적어 보내 주었다. 그이는 긴 여행을 마치고 돌아왔고, 시인은 이제 돌아오지 못할 길을 떠났다.






밤의 시()








                                                                                                                            
왜 저것들은 소리가 없는가




집이며 나무며 산(
)이며 바다며




 
왜 저것들은




죄()지은 듯 소리가 없는가




바람이 죽고




물소리가 가고




별이 못 박힌 뒤에는




나뿐이다 어디를 봐도




광대무변(廣大無邊)한 이 천지간(天地間
)에 숨쉬는 것은




나 혼자뿐이다.




나는 목메인 둣




누를 불러볼 수도 없다




부르면 눈물이




작은 호수(湖水
)만큼 쏟아질 것만 같다




―이 시간(時間)




집과 나무와 산(
)과 바다와 나는




왜 이렇게도 약(
)하고 가난한가




밤이여




나보다도 외로운 눈을 가진 밤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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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만두 2004-11-29 11: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겨울 길목에서 더욱 쓸쓸해집니다... 이제 그 분 꽃이 되셨을까요. 아님 우리가 부르는 소리에 님이 봄 꽃으로 다시 태어나실까요... 찡한 마음으로 퍼갑니다...

2004-11-29 18: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난 일요일 퀴즈프로에 김춘수란 이름이 나왔을 때 와~ 시집을 24권이나 하고 놀랐던 기억이 채 가시기 전에 또 이런 소식을 접하네요..부디..
 

 


여기 있어 줘요, 기린 아저씨


볼프강 보르헤르트


  


 그는 바람이 소용돌이쳐 지나간 텅 빈 밤의 플랫폼에, 잿빛으로 그을고 달처럼 외로운 거대한 홀 안에 서 있었다. 밤이 되어 텅 빈 정거장은 죽어 무의미해진 세계의 종말이다. 그리고 허전하다. 텅 비고 공허하고 허전하다. 그렇지만 더 가려다 보면 길을 잃게 마련이다.


 그렇게 되면 누구든 길을 잃는다. 어둠은 무서운 목소리를 가지고 있으니까. 이 어둠은 순식간에 압도해 오며 그를 벗어날 자가 없다. 어제 저지른 살인을 기억시키며 그는 엄습해 온다. 내일 저지르게 될 살인을 예감하게 하며 그는 덮쳐든다. 이 암흑은 또 사람의 마음 속에서 비명을 키운다. 고독한 짐승의 섬찍한 비명을, 몸을 담근 바다까지도 압도하는 물고기의 비명을. 그 비명은 누군가의 얼굴을 갈갈이 찢어 버리고 역사의 동혈을 공포로 채운다. 다른 이들까지도 경악하게 될 뚝뚝 듣는 위험으로 가득 채운다. 이처럼 적막한 것은 바로 바닷속의 외로운 짐승이 내뱉는 무시무시한 암흑의 비명이다. 이제 비명은 밀물처럼 불어나서 파도처럼 검게 흔들리며 위협적으로 솨솨거린다. 거품처럼 부서져 사라지면서 솨솨거린다.


 그는 세계의 끝에 서 있었다. 차갑고 하얀 아크릴 등이 무자비하게 비춰 무엇이든 노출시키고 비참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그들 뒤에서는 무서운 어둠이 커 가고 있었다. 어떠한 암흑도 텅 빈 밤 플랫폼을 비추고 있는 하얀 전등 주변의 어둠처럼 어둡지는 않았다.


 당신이 담배를 가진 걸 봤어요. 창백한 얼굴에 지나치게 빨간 입술의 여인이 말했다.


 그래, 조금 있지. 그가 대답했다.


 그럼 저와 함께 가시지 않겠어요? 여인이 가까이에서 소근거렸다.


 싫어, 가긴 어딜? 그가 말했다.


 제가 얼마나 근사한지 전혀 모르시죠? 여자가 코를 벌름이며 그의 곁에서 서성거렸다.


 웬걸, 다 똑같니 뭘. 그가 대답했다.


 당신은 기린예요, 키다리 아저씨. 고집쟁이 기린이란 말예요. 그럼 제가 어떻게 보여요, 네?


 배 고프고 벌거벗고 잔뜩 그을렸군그래. 다 똑같아.


 당신은 키다리에다 멍청해요, 기린 아저씨. 그녀가 가까이에서 키득거렸다. 그렇지만 좋은 사람 같아요. 자 가요, 젊은 분. 밤이에요.


 이제 그는 여자를 쳐다보았다. 좋아, 그가 웃었다. 너는 담배를 벌고 나는 너와 키스를 하자. 그렇지만 내가 네 옷까지 벗겨 버리면? 그럼 어쩌지?


 그러면 저는 얼굴이 빨개지겠죠. 그녀가 말했다. 그는 여자의 비죽 웃는 모습이 천박하게 느껴졌다.


 화물열차가 홀을 와르릉거리며 지나갔다. 그리고는 갑자기 끝나 버렸다. 열차의 아물거리는 빈약한 꼬리등이 흔들거리며 어둠 속에서 흘러나왔다. 진동하며 신음하며 덜커덩거리며 지나갔다.


 그는 여자와 함께 갔다.


 그리고는 손과 얼굴과 입술이 있었다. 얼굴은 모두 피를 흘리고 있다고 그가 생각했다. 그들의 얼굴은 입에서 피를 흘리고 손에는 수류탄을 들고 있단 말야. 그러나 이제 그는 루즈를 맛보고 여자의 손이 그의 야윈 팔을 움켜쥐었다. 그러자 신음 소리에 이어 철모(여자의 가발을 가리킴)가 떨어져 버리고 한 쪽 눈이 흐려졌다.


 너 죽는구나. 그가 소리쳤다.


 죽는 것! 그녀가 환호를 올렸다. 그것은 무엇인가 뜻있는 일일 거예요, 정말.


 여자는 철모를 다시 이마까지 눌러썼다. 그녀의 검은 머리가 생기없이 번쩍거렸다.


 아, 네 머리가. 그가 속삭였다.


 여기 그냥 계시죠? 그녀가 나즈막하게 물었다.


 응.


 그래?


 응.


 언제나?


 네 머리에서 젖은 나무가지 냄새가 나는데, 그가 말했다.


 언제나 계시죠? 그녀가 다시 물었다.


 그러자 다음 순간 멀리서 가까워 오는 둔중하고 거대한 비명. 물고기의 비명. 박쥐 울음소리, 풍뎅이 소리. 기관차가 내는, 들어 본 일이 없는 짐승의 소리. 열차가 철길에서 이 비명 앞에 공포에 질려 비틀거렸던가? 창백하게 바랜 성좌 아래 결코 들어본 적이 없는 새로운 연두색 비명소리. 이 비명에 별들이 비틀거렸을까?


 이제 그가 창문을 열어젖히자 밤의 차가운 손으로 드러난 젖가슴을 움켜쥐며 말했다. 나 지금 가야 돼.


 여기 있어 줘요, 기린 아저씨! 그녀의 입이 하얀 얼굴 속에서 병색 짙은 빨간 색으로 아물거렸다.


 그러나 의족을 한 기린은 공허하게 울리는 발자국소리와 함께 포도를 건너 떠나갔다. 그의 뒤에서 아침 회색의 거리가 그 바위의 고독 속으로 다시 적막하게 가라앉았다. 창들은 우유입김으로 유리가 된 듯이 파충류의 눈처럼 죽어 보였다.


 커튼이, 잠에 겨워 몰래 숨쉬는 눈까풀이 가만히 흔들렸다. 좌우로 흔들거렸다. 하얗고 부드럽게 흔들리고 애처롭게 그의 뒤에서 손을 흔들었다.


 창의 문짝이 야옹 소리를 냈다. 그녀의 젖가슴이 시려 왔다. 그가 돌아보자 창유리 뒤에는 지나치게 빨간 입이 있었다. 기린 아저씨, 그 입은 울고 있었다.


 


 


 


 


눈에서 얼어죽은 고양이


볼프강 보르헤르트


  


 남자들이 밤에 거리를 지나갔다.그들은 콧노래를 하고 있었다. 그들 뒤에는 밤 속에 하나의 빨간 반점이 있었다. 그것은 역겨운 빨간 반점이었다. 그 반점은 마을이었다. 그리고 그 마을은 불타고 있었다. 남자들이 불을 지른 것이었다. 전쟁이었으니까. 그들의 징을 박은 군화 밑에서 눈이 비명을 질렀다. 역겨운 비명을 질렀다. 눈이. 사람들은 집에 둘러서 있었다. 집들은 불타고 있었다. 그들은 단지며 아이들이며 이불을 팔밑에 끼고 있었다. 핏빛 눈 속에서 고양이들이 비명을 질렀다. 눈은 불에 비쳐 그렇게 빨간 것이었다. 그런데 눈은 말이 없었다. 집들은 불타고 있었다. 그들은 단지며 아이들이며 이불을 팔밑에 끼고 있었다. 핏빛 눈 속에서 고양이들이 비명을 질렀다. 눈은 불에 비쳐 그렇게 빨간 것이었다. 그런데 눈은 말이 없었다. 사람들이 여기저기 바작바작 타며 신음소리를 내는 집 주변에 말없이 둘러서 있었고 그래서 눈은 비명을 지를 수가 없었다. 집에 木像을 가진 사람들도 얼마간 있었다. 이때 둥그스름한 얼굴에 갈색 수염을 한 남자가 저쪽에 보였다. 사람들은 퍽이나 멋지게 생긴 이 남자의 두 눈을 노려보았다. 그러나 집들은 여전히 여전히 그치지 않고 탔다.


 이 마을 옆에 다른 마을이 또 하나 있었다. 이날 밤에 그곳 사람들은 창문 앞에 서 있었다. 그리고 때때로 눈이, 달빛처럼 환한 눈이 저쪽 마을 때문에 약간 담홍색을 띠기도 했다. 사람들은 서로 쳐다보았다. 짐승들이 마굿간 벽에 쿵쿵거리며 부딪치고 있었다. 사람들은 어둠 속에서 아마도 건성 고개를 끄덕였을 것이다.


 대머리의 남자들이 탁자 앞에 앉아 있었다. 두 시간 전에 한 남자가 빨간 연필로 선을 하나 그었다. 지도 위에. 그 지도 위에 점이 하나 있었다. 그러자 군인들이 그 점을 밤 속으로 깨끗히 쓸어넣어 버렸다. 핏빛으로 불타는 마을을. 담홍색 눈 속에서 비명을 지르며 얼어 죽어가는 고양이들과 함께. 그리고는 대머리 남자들로부터 다시 나즈막한 노래소리가 들렸다. 한 처녀가 무슨 노래인가를 불렀다. 여기에 맞춰 때때로 뇌성이 들렸다. 아주 멀리에서.


 남자들이 밤에 거리를 지나갔다. 그들은 콧노래를 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에게서는 배나무 냄새가 났다. 그것은 전쟁이 아니었다. 남자들은 또 군인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 때 하늘에 핏빛의 빨간 점이 나타났다. 이제 남자들은 콧노래를 그쳤다. 그리고 한 남자가 말했다. 자, 보아라, 태양이다. 그리고는 그들은 계속 걸어갔다. 그러나 이제 콧노래는 부르지 않고 있었다. 꽃피는 배나무 아래에서 담홍색 눈이 소리를 지르고 있었으니까. 그들은 이 붉게 물든 눈을 다시는 벗어날 수가 없었다.


 반쯤 남은 마을에 아이들이 시커멓게 불탄 막대기를 가지고 놀고 있었다. 그런데 그 때 거기에 하얀 막대기가 한 조각이 나왔다. 그것은 뼈다귀였다. 아이들은 그 뼈를 가지고 마굿간 벽을 두드렸다. 누구인가 북을 치는 소리 같은 것이 들렸다. 톡 톡. 뼈다귀가 소리를 냈다. 톡 톡 톡. 누구인가 작은 북을 치는 소리 같은 것이 들렸다. 아이들은 즐거워하고 있었다. 아주 예쁘고 말끔한 뼈였다. 그것은 고양이에게서 나온 것이었다. 그 뼈다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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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술과 손의 떨림 ― 황순원과 마르그리트 뒤라스의 세계 [2]



3. 마르그리트 뒤라스, 모데라토 칸타빌레로 마시다



작가 마르그리트 뒤라스도 술을 마시고, 그녀의 작품 세계에 등장하는 여성들도 계속 술을 마신다. 초조함과 고독을 잊기 위해서, 삶의 고통을 잊기 위해서.
뒤라스 자신은 실제로 알콜 중독으로 위험한 상태에 이르기까지 계속 술을 마셨다. 그리고 그녀의 분신인 작중인물들도 무언가 어렵게 견뎌 내야 할 일이 있을 때마다 술을 마신다.




뒤라스 소설의 주인공들은 대부분 여자이며, 남자들은 항상 부수적인 역할만을 맡고 있다. 그녀의 주인공들은, 자기들이 어떤 사람이며, 무엇을 원하는지를 모르기 때문에 퍽 고통스러운 느낌을 준다. 그녀들은, 자기들의 고독을 알고, 자기들이 살고 있는 단조롭고 냉혹한 세계의 넓이를 재면서, 무관심과 권태 속에서 살아간다. 그녀들은 항상 '무슨 일이 시작되었다는 증거'를 기다린다. 이것은 그네들에게 무슨 일인가가 결핍되어 있다는 증좌이다. 이 기다림은 그녀들에게는 '모데라토'하지 않게, '조용하게' 살아보려는 욕망의 표시이며, 하나의 얼굴과 신분 증명서만 얻을 수 있다면, 누구든지 되고 싶다는 모호한 의지의 표현이다. 그녀들의 모험은 부조리하며, 그녀들이 성공할 가능성은 거의 없다. 그 사실을 그녀들이 잘 알고 있다. 그렇지만 그녀들은 그 공허를 메우려고 애를 쓴다.
삶의 의미를 찾지 못한 채 몽유병자와 같은 삶을 이어가는 그녀들은 획기적인 그 무엇인가가 일어나기를 갈망하던 중, 극적 사건을 보거나 겪으면서 존재의 내면에 균열이 갈 정도로 충격을 받고 그에 매혹되어 환상을 뒤쫓게 된다.
이러한 유형의 대표적인 여인이 <모데라토 칸타빌레>의 안 데바레드이다.




뒤라스는 <모데라토 칸타빌레>에서 죽음으로 완성되는 절대적 사랑을 찾아 헤매는 한 여인의 내적 갈등의 역정을 간접적 문체 기법, 보류와 암시의 언어를 통하여 펼쳐 보인다. 모두 8장으로 이루어진 이 소설은 여주인공 안 데바레드의 아들이 피아노 레슨을 받는 장면(1, 5장), 안이 노동자 쇼뱅과 만나는 카페 정경과 대화(2, 3, 4, 6, 8장) 그리고 안의 저택에서 열리는 만찬의 장면(7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안의 욕망은 소설의 맨 처음에 그려진 정열적인 살인 사건 때문에 불러일으켜진다. 한 사내가 사랑하는 여인의 뜻에 따라 그녀를 살해하고 자신도 피투성이가 된 채 죽은 여인을 애무하는 광경...... 이 살인 사건은 아무런 필연성도 갖지 못한 것처럼 처음에는 느껴지지만, 사실 이 사건이야말로 이 소설을 지배하고 끝까지 따라다닌다.
안이 아들에게 피아노를 가르치기 위해 매주 한 번씩 오는 피아노 교사의 집에서 얼마 떨어져 있지 않은 카페에서 일어난 이 살인 사건이 안의 가슴에 아주 강렬하게 박혀 와, 어떤 것의 시작을, 자기의 공허를 인식하는 일을 예감하게 한다.
황혼 무렵의 카페 안에서 피를 흘리고 쓰러져 있는 여인의 모습과 거기에 비춰진 박명, 그리고 사람들 무리 속에 숨어 그 광경을 바라보는 안의 모습... 이제 사랑의 광기로 관통된 죽음은 안에게 살아 있는 매혹적인 것이 된다. 이제부터 완전한 사랑을 재현하려는 안의 내적 모험이 시작된다.
그것은 상류층의 주거지와는 정반대편 공장 지대에 위치한 카페를 드나들며 노동자 쇼뱅을 만나 '싸구려 포도주'를 마시면서 살인 사건의 두 주인공을 재현함으로써 그들이 도달한 경지를 맛보려는 시도로 구체화된다. 말하자면 안이 카페에 찾아와 마시는 술은 일종의 도피의 표상이다. 자유로의 도피의 상징.
현실 생활의 단조롭고 냉랭한 분위기 속에서, 그녀는 술을 통해 자기의 초조와 불안, 수전증을 극복하고, 그녀가 맞닥뜨린 살인 사건에서 본 사랑이라는, 현실 세계에서는 도저히 이룰 수 없는 알리바바의 문을 통과하는 마법의 주문인 셈이다.
<모데라토 칸타빌레>의 도처에서 우리는 안의 이해할 수 없는 술 마시는 장면과 부딪힌다. 그녀가 처음으로 술을 마시게 되는 장면은 퍽 인상적으로 그려져 있다.




  그 여자는 곧장 카운터로 갔다. 손님이라고는 신문을 보고 있는 남자 한 사람뿐이었다.
  "포도주 한잔 주시겠어요." 그 여자가 주문을 했다.
  여자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카페 여주인은 이 여인이 떨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똑바로 쳐다보지 않으려고 눈길을 돌렸다.




그리고 그 여자는 누가 물어보지도 않았지만 "목이 말라요."라고 변명한다. 손은 계속 떨리고, 여자는 술을 또 청한다. 두 잔째의 술을 마셨을 때, 그녀의 손의 수전증은 진정되고, 사랑의 코미디는 시작된다.




  그녀는 자기 앞에 놓인 빈 잔을 들어 마시려고 하다가, 실수임을 깨닫고, 잔을 카운터에 내려놓았다. 그리고 눈을 내리깐 채, 잔을 채워 주기를 기다렸다. 그때 남자가 다가왔다.
  "괜찮으시다면 제가 한 잔 권해도 될까요?"
  여자는 놀라지 않았다. 놀라지 않는 게 오히려 당황스러웠다.




카페 안의 이 두 사람, 안과 쇼뱅은, 한 잔 한 잔 술잔을 비우고 다시 채워 감에 따라 내면의 대화를 더듬더듬 이어 나간다. '모데라토 칸타빌레'로. 술과 함께 시간이 흐르고, 알콜 기운처럼 무언가가 두 사람 사이에 스며든다.




  손이 무의식적으로 잔을 찾았다. 그는 카페 여주인에게 포도주를 더 달라는 손짓을 했다. 안 데바레드는 사양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러기를 기다렸던 것처럼 보였다.



  그 여자가 포도주를 한 모금 삼키자, 다시금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다. 하지만 금세 조금 전보다 훨씬 더 어두운 얼굴이 되었다. 서서히 취기가 올라오고 있었다.




  언제나 그렇듯이 술기운이 점점 퍼지는 데 힘을 얻은 그 여자는 자기 앞에 있는 이 사내를 똑바로 쳐다볼 용기가 생겼다.



  "이상한 일이네요. 집에 돌아가고 싶지 않으니……"하고 그 여자가 말했다.
  그는 느닷없이 술잔을 들어서 단숨에 마셔 버리고는 아무 대답도 없이 여자로부터 눈길을 돌렸다.
  "너무 마셨나 봐요"하고 그 여자가 말을 이었다. "그렇죠?"
  "그렇군요." 남자가 대답했다.



날이 바뀌고 새로운 날이 왔을 때도 여자는 카페를 찾아 다시 술을 마신다.




  "이제 3일이 지났습니다." 남자가 말했다.
  그 여자는 간신히 몸을 일으켜 다시 포도주를 마셨다.
  "맛이 좋아요." 그녀가 나지막이 말했다.
  손은 더 이상 떨리지 않았다. 여자는 다시 일어서서 이제는 자신을 빤히 쳐다보고 있는 남자 쪽으로 살짝 다가갔다.




  "조금 더 마시고 싶은데"하고 그 여자는 벌써 상처를 입은 듯 애처롭게 술을 청했다. "이렇게 빨리 습관이 들 줄은 몰랐습니다. 하긴 저도 벌써 버릇이 다 되었습니다만."
  그는 포도주를 주문했다. 그들은 기갈이 들린 듯 포도주를 마셨다. 그때부터 안 데바레드가 술을 마시는 것은 포도주 맛에 눈을 뜨기 시작해서일 뿐 다른 이유라고는 전혀 없었다. 그 여자는 포도주를 마신 뒤 잠시 기다리더니, 죄지은 사람처럼 기어 들어가는 변명조로 또다시 남자에게 질문을 하기 시작했다.
 
사랑의 환상이 가혹해지면 가혹해질수록 주량은 많아지고, 반대로 주량이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사랑의 환상은 격렬해진다.



  여자는 조금 전의 남자들처럼 포도주 잔을 비웠다. 아직 손에 들려 있는 술잔이 떨리고 있었다.
  "이제 7일이 지났습니다." 쇼뱅이 말했다.
  "일곱 밤이죠"하고 그 여자가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말했다. "정말 술맛이 좋군요."
  "일곱 밤이라"하고 쇼뱅이 되풀이해서 말했다.




  그 여자는 있는 힘을 다해 술잔을 꼭 쥐었다. 행동도 목소리도 느릿느릿해졌다.
  "제가 얼마나 포도주를 좋아하는지, 그걸 모르고 있었지 뭐예요."
  "이제는 말씀해 보십시오."
  "아, 제발 저를 좀 내버려두세요." 안 데바레드가 애원했다.
  "우리에겐 시간이 너무 조금밖에 없는 것 같아 그럴 수가 없군요."




  안 데바레드는 또다시 포도주를 마시며, 술이 독하다고 생각했다. 그 여자는 미소짓고 있었지만 술에 취해 눈빛이 흐려졌다.
  "시간이 가고 있습니다"하고 쇼뱅이 말했다. "점점 더 늦어지고 있어요."
  "오늘 저처럼 이렇게 터무니없이 늦게 되면, 조금 더 늦거나 덜 늦거나 결과적으론 아무런 차이가 없는 법이죠."





안은 시간 속에 매몰된 사랑을 찾고 있다. 여자와 남자, 그들은 계속해서 만나고, 술을 마시고, 얘기를 나눈다. 그렇지만, 어떤 진정한 결합도 이루어지지 않고, 그들이 서로 감추고 있는 열망, 피곤, 나른함, 광기 등만이 서서히 드러난다. 그들은 서로 영원한 모놀로그만을 되풀이하고 있다. 그리고, 그 모놀로그의 사이사이에서 우리는 그 속에 현존하고 있는 은밀한 생의 그림자를, 그 환상을 보게 된다.




  "전 거짓말을 하고 있었습니다"하고 그가 말했다.
  그 여자는 엉망으로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매만졌다. 연민을 억누르려고 애를 쓰면서 기진맥진한 상태로 평정을 되찾았다.
  "그렇지 않아요." 그 여자가 말했다.
  홀을 비추는 네온 불빛 속에서, 그 여자는 경련을 일으키고 잇는 쇼뱅의 기괴한 얼굴을 찬찬히 살펴보았다.




  안 데바레드는 반쯤 눈을 감은 채 또 한 잔을 단숨에 비운다. 이미 달리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게 된 것이다. 술을 마시며 그때까지는 희미한 욕망으로 존재했던 것에 대해 확신을 갖게 되고, 또 그것을 확인한 데 대한 가당치 않은 위안까지도 발견한다.




  그 여자는 테이블 위에 있던 손을 끌어당기고, 아직 거기에 놓여 있는 쇼뱅의 손을 오래오래 바라보았다. 그 손은 떨고 있었다. 여자는 가느다랗게 안타까운 신음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그 소리는 오직 그 남자에게만 들렸다. [……]
  그 여자는 다시 손을 테이블 위에 놓았다. 그는 여자의 행동을 눈으로 쫓다가, 결국 고통스럽게 알아차리고, 납덩이처럼 무거운 손을 들어 그 여자 손 위에 포개놓았다. 그들의 손은 너무도 차가워서 오직 그렇게 되었으면 하는 소망 속에서만 환각으로 서로 스쳐갔다. 지금과 같이 소망 속에서 말고는 달리 이루어질 수 없었다. 그들의 손은 죽음의 포즈로 굳어진 채 그렇게 머물러 있었다. 그러자 안 데바레드의 신음 소리가 그쳤다.




  그 여자는 여전히 포도주를 홀짝거렸고, 남자도 이어서 술을 마셨다. 잔에 닿은 입술이 떨리고 있었다.
  "시간이……"하고 그가 말했다.
  "시간이 오래 걸릴까요?"
  "그렇습니다. 시간이 많이 필요하죠. 하지만 전 아무것도 모릅니다." 그리고 그는 몹시 나지막하게 이 말을 덧붙였다. "저도 부인과 마찬가지로 아무것도 모릅니다. 전혀 말입니다."
 
  "못하겠습니다."
  그래서 그가 할 수 없었던 일을 그 여자가 했다. 여자는 입술이 서로 닿을 만큼 가까이 남자에게 다가갔다. 차디찬 그들의 입술은 조금 전 그들의 손과 같이 죽음의 의식을 따라 서로 포개진 채 떨면서 그렇게 머물렀다. 이루어졌다.




마지막으로 이들이 마시는 술의 마지막 반응은 그 섬뜩하도록 죽음의 냄새를 풍기는 유일한 사랑의 제전이다. "이루어졌다"고 뒤라스는 쓰고 있지만, 과연 이 두 사람의 키스는 사랑의 성취 혹은 완성이었을까? 뒤라스는 이 입맞춤의 순간에 '죽음의 의식'이란 표현을 쓰고 있다.



  쇼뱅은 다른 곳을 보고 있었다. [……] 그 여자는 일어났다.
  "당신이 죽었으면 좋겠습니다." 쇼뱅이 말했다.
  "그대로 되었어요." 안 데바레드가 말했다.




 
이 작품에서는 소나티네가 배경 음악을 이루고 있으며 '모데라토 칸타빌레'는 그 연주 방법의 지시이다. 한 평론가는 침묵과 공허로 독자를 사로잡는 이야기의 애잔한 어조, 조심스러운 주문(呪文)의 목소리가 바로 '모데라토 칸타빌레' '보통 빠르기로 노래하듯이'라고 말하고 있다.
윤곽만이 대략 그려지고 알맹이는 텅 비어 있는 이 소설에서 우리는 여 주인공과 함께 이 공허를 메워 가야만 한다. 작가의 설명이나 주인공 자신에 의한 감정의 분출도 전혀 없다. 이렇듯 지루할 정도로 담담히 이어지는 실체 없는 대화의 이 소설이 사람들의 마음을 끄는 까닭은 무엇일까?
한 순간의 고요 속에 영원의 소리가 담기듯, 침묵으로 일관된 긴장 속에 놓여 있는 주인공의 위기가 냉정하면서도 극적으로 그려지는 뒤라스의 글쓰기 기법 때문이 아닐까. 가리면서도 보여주는 유연하고 간접적인 말하기 방식, 묘사나 분석, 설명은 사라지고, 암시가 담긴 간결함...... 여백의 의미와 침묵의 소리..... 그래서일까, 우리는 이 글을 따라가며, 안개처럼 잡히지 않는 취기에 서서히, 모데라토 칸타빌레로 함께 젖어 들어가게 된다.





4. 나오기




황순원과 뒤라스의 세계에 대해, 그들이 작품 속에서 마시고 취해 간 그 술의 마력에 대해, 취기와 떨림과 광기에 대해, 아주 강렬한 한 잔 술처럼 매혹적인 말로 마무리를 하고 싶었지만...... 이제 더 이상 내게 남아 있는 기운이 없다.
이제 그만 이 문을 열고 나가 술 한잔 마셔야겠다. 






 



* 참고한 책과 글






-- 김윤식, 김현, <한국문학사>, 민음사



-- 김현, "소박한 수락", <황순원 연구>, 황순원 전집 12, 문학과지성사



-- 김현, <현대 프랑스 문학을 찾아서>, 기린원



-- 마르그리트 뒤라스, <모데라토 칸타빌레>, 옮긴이(정희경) 해설, "절대적 사랑을 찾아 헤매는 언어의 모험", 문학과지성사



 





카니발의 아침



www.hidaewoo.com/rest/music/wma/light/카니발의아침.wm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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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드무비 2004-11-27 14: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 사진의 주인공 님이시죠?

손이 낯이 익어요.

요것도 퍼갑니다.^^

에레혼 2004-11-29 11: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ㅋㅋㅋ 모른 척하고 그냥 놔둘까 하다가, 답합니다......

저도 님의 말을 듣고 다시 보니, 제 손과 닮은 듯도 싶네요[손가락이 길고 가는 것이 이쁘군요^^].

헌데 저는 저 파란 색 병에 담긴 알콜이 궁금해요.... 그 주종과 도수가, 그 맛이, 그 향이, 그 후유증이, 거기 담긴 이야기들이....... 세상에는 아직 가보지 못한 많은 길들이, 맛보지 못한 많은 술들이 있군요......
 


 


오래 전, 알라딘에 서재를 만들기 전에 나는 혼자 무얼 하고 놀았나 생각해 보다가, 한글 문서 저장고에서 이런 낡은 파일 하나를 찾아냈다. 그러니까 이 글은 나의 심심한 한때를 자신과 잘 놀아주던 기억의 한 자락, 한 점 얼룩 같은 것이다. 오래 전 장난감을 치워 두고는 잊어버렸는데 책상 의자 밑 먼지 구덩이에 그 한 조각이 떨어져 있는 걸 발견했을 때의 기분이 이럴까......


술 한잔 마시고 싶다.



 








 







 







 







 



   술과 손의 떨림 ― 황순원과 마르그리트 뒤라스의 세계



1. 들어가기




50-60년대 작가에 대한 탐색이란 주제의 과제를 생각하고 있던 즈음, 이런저런 모색을 하던 중에 한 책에서 나는 무척 흥미로운 단서를 만났다.
<한국문학사>의 '황순원 혹은 낭만주의자의 현실 인식'이란 장에서 김현이 이런 지적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황순원은 그의 낭만주의적 성격을 구극으로 밀고 나가면서 거기에 적절한 규제를 가하려 한 작가이다. 그의 낭만주의적 성격은 초기 낭만주의자들의 체제와 질서에 대한 강렬한 저항의식을 포함하지 않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그의 낭만주의적인 성격은 "죽어 가는 여인을 묘사하는 것이 가장 아름답다"는 포오의 시작(詩作) 철학에 표현된 '퇴폐적 낭만주의'에 가깝다.
황순원의 미(美)에 대한 경사는 사춘기의 꿈에서 비롯한다. 그의 초기 단편의 상당수는 '떨림'이라는 심적 동요를 기조음으로 삼고 있다. 대상을 정확하게 관찰하지 못하고, 자기감정의 내용을 뚜렷하게 분석하지 못하는 시기의 심적 동요를 그는 대부분 '떨림'이라는 상태로 표현한다.
그의 최초의 단편집인 <늪>의 첫머리에 실려 있는 <늪>에서부터 '떨림'은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독자들에게 제시된다. 대체적으로 그의 주인공들의 떨림은 여자와의 비정상적인 관계에서 비롯된다. 그 떨림은 순수하고 아름다운 것에 대한 동경과 등가(等價)이다. 사춘기의 떨림을 장년기에서도 계속 유지시켜 주는 소도구가 그의 소설에는 일정하게 등장하는데, 그 대표적인 것이 술이다.


"술과 손의 떨림이라는 주제를 소설로서 성공시키고 있는 예가 마르그리트 뒤라스의 소설들이다. 그녀와 황순원의 비교는 재미있는 결과를 보여줄 것이다."



김현의 혜안이 발견한 그 흥미로운 비교를 위해 나는 황순원과 마르그리트 뒤라스의 작품 속에서 '술'이 발산하고 있는 의미와 상징, 그리고 술을 매개로 그들의 문학 세계가 어떻게 전개되고 있는지를 찾아 나서 보기로 했다.
알콜과 작가의 관계뿐 아니라 두 작가의 작품 세계 속에서 알콜이 하나의 문학적인 상징물로서 어떻게 기능하고 있는지를 엿볼 수 있는 이번 작업은 내게 무척 흥미로운 일이었다.


2. 황순원,  떨림과 그리움을 마시다


황순원의 소설은 술이 그 중요한 소재와 주제를 이룬다. 술은 그의 주인공뿐만 아니라, 그 자신의 삶의 어려움을 해소시켜 주는 중개체이며 그의 창작력의 원동력이기도 했다. 다음과 같은 대목에서 이런 흔적을 엿볼 수 있다.




  나면서부터 허약해 빠진 몸이 곧잘 체증에 걸려 고생을 하곤 했다.[……] 성인이 되어 술을 대량으로 마시기 시작하면서부터는 체증이 가셔졌다.[……] 그것만이 아니다. 본디 주변머리 없고 소심장이어서 남 앞에 나서기를 꺼려하고 항상 무엇엔가 쫓기고 있는 듯한 심정에 사로잡혀 있는 위인으로 술만이 이런 불안과 공포에서 구출해 주는 것이다.   (<그래도 우리끼리는>)



  이렇게 술잔을 앞에 놓고 있노라면 내 몸 속에서는 인제 내가 쓰려고 하는 작품의 어느 막혔던 대목이 강물 흐르듯이 자연스럽게 풀리고, 거기 나오는 인물들은 하나하나 산 사람의 체온을 갖고 제각기의 생김새며 말투며 걸음걸이로 움직이는 것이다.   (<모든 榮光은>)



술은 황순원의 상당수의 주인공들을 사춘기의 떨림으로 환원시키는 소도구이다.
<그래도 우리끼리는>에서 황순원은 윌리엄 제임스의 말을 빌려 알콜을 '사물의 찬란한 핵심으로 이끌어' '진리와 일체가 되게 하는' 중간 매체로 파악하고 있다. 알콜 - 술을 통해 그의 주인공들이 얻을 수 있는 것은 환상과 순수이다. 먼 곳에 대한 취향과 순수하고 아름다운 것에 대한 확인은 술을 떠나서는 있을 수 없는 행위이다.




  술이 몇 순배 돌았을 때 황노인은 어떤 자꾸 흡족해지는 마음으로,
"참 동갑, 해금 한번 켜게" 했다. [……]
  늙은 재니는 잠시 먼 것을, 아주 머언 것을 생각하는 듯 허공 한 곳에다가  눈을 주고 있더니 스르르 눈을 감으며 해금에 활을 긋기 시작했다.   (<황노인>)



황순원 소설에서 그의 깊은 사랑을 받고 있는 것은 병적인 낭만주의자들이다. 그 낭만주의자들은 대부분 알 수 없는 병을 앓고 있거나, 신비한 웃음을 띠고 있기가 일쑤다. 세계와 사회와의 통로를 트지 않고 자신의 내적 세계에만 칩거하여 극단적인 주관성을 드러내 보인다는 점에서 그 주인공들은 낭만주의자들이다. 그 낭만주의자들은 대체적으로 여자와의 관계에서 수동적 역할을 맡는다. 여자들은 항상 밝고 명랑하며 현실적이고 능동적이다. 그러나 남 주인공들은 그녀들의 사랑을 이상하게 왜곡시켜 받아들인다. 그것은 자기 자신에게 그 사랑을 받아들일 수 없는 약점이 내재해 있다는 것을 의식적으로 믿는 자의 왜곡이다. 그것은 흔히 술에 의해 극복된다. 여자와 정신적이건 육체적이건 어떤 형태로든지 관계를 맺으려고 할 때, 그 낭만주의자들은 손이나 발을 떤다.  그 떨림은 인간 관계가 주는 압력에서 생겨난다.
특히 초기의 단편 <배역(配役)들> <사나이> 등은 술과 떨림을 잘 나타내 주는 작품이다.
 
  조훈은 자리를 잡자 등을 한번 으스스 떨고 나서 곧 여급에게 "워카!"한다. [……]
  조훈은 곱잡아 넉 잔이나 들이켜고 나서 도리어 더 얼굴이 창백해진다. [……]
  "자아!"하고 하나꼬가 내미는 손을 조훈이 어느새 떨기 시작한 손으로 잡아 끌어당기는데 하나꼬의 부푼 가슴이 탁자에 부딪히자……    (<배역들>)



  김서방은 가게로 나가 잔에다 술을 가득 부었다.
  내일 아침에는 이 여자가 또 자기의 생활을 헝클어놓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마에 구슬땀이 내돋았다. 잔의 술을 단숨에 들이켰다. 내일 일은 내일 보자. 그리고 떨리는 다리를 구름다리에 올려놓았다. (<사나이>) 
 
  현태는 자기 손을 내려다보았다. 거기 아직도 스며 있는 여인의 그 약간 떨리면서 땀기운이 돌던 손의 감촉, 그리고 메마른 피부에 온기를 띠고 있던 목의 감촉…… 그날 밤 그는 술을 마시고 또 마셨다. (<나무들 비탈에 서다>)




이처럼 초기의 황순원 소설은 능동적인 여자와, 그 여자 앞에서 자꾸만 '떨고' '술로' 그 떨림을 잠재우는 여위고 병든 남자 사이의 사랑을 주로 다룬다. 여자는 언제나 강인한 현실주의자이며, 남자는 여자에 대한 환상을 버릴 수 없는 낭만주의자들이다.
초기의 이런 대위법은 피난 시절 이후에 씌어진 <나무들 비탈에 서다> <일월> <움직이는 성> 등의 장편소설에서도 그대로 확인된다.



  "그일 죽인 건 당신예요. 전에 그렇지 않았던 그일 그렇게 만든 건 당신예요. 그래서 당신은 날 피하고 있었던 거지 뭐예요. 비겁해요. 술 안 먹군 할 말도 못하는 술주정뱅이, 술주정뱅이……"
  창백해진 그네 얼굴에 눈만이 발갛게 충혈돼 있었다.
  현태는 자신이 냉연해져 있음을 느꼈다. 새로 컵에 술을 부어 마셨다.  (<나무들>)
 


  이렇게 권태와 무관심의 그날그날은 마치 아무 것도 들어 있지 않은 하나의 두껍디두꺼운 책과도 같은 것이었다. 넘기고 넘기어도 흰 종잇장뿐인 책. 인간에 있어 차라리 불안이라든가 초조라든가 절망이라든가 공포라든가 하는 것이 이보다는 나은 것이다. 거기에는 아직 삶에 대한 몸부림이 따르는 법이니까.[……]
  단지 이러한 무관심과 권태 속에서 그래도 아직 어떤 생을 느끼게 해주는 한 가지 물건이 있었다. 그것은 술이었다. 이것만이 쌓이고 쌓인 잿더미에다 불씨를 일으켜 주는 것이다.    (<내일>)



황순원적 인물은 과거의 기억 속에 남아 있는 순수하고 아름다운 것 때문에 아름다움과 먼 곳에 대한 취향을 얻게 된다. 그 취향은, 그러나 현실 앞에서 자주 가로막히고 더럽고 추한 것과 타협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그것은 <나무들 비탈에 서다> 이후에는 인간 조건 자체로 확대된다. 그 가로막힘은 불안, 고독, 절망 등의 실존주의적 용어로 옮겨진다. 특히 <일월>에서 기룡은 이런 말을 하고 있다.


  "무리해서 술을 마실 필욘 없지 않을까. 술에다 외로움을 푼다는 건 가장 졸렬한 방법야. 물론 술이 그걸 받아주지두 않지만."      (<일월>)



그렇다고 황순원이 언제나 그 몽상의 세계에 푹 잠겨 있기만 한 것은 아니다. 희생과 사랑으로 세상에 의미를 주고 싶어하는 마음은 철저한 몽상의 세계로부터 바라본다면 하나의 불순한 자아의 찌꺼기일 수 있다. 그렇더라도 그는 그 불순한 자리에 남아 있는다. 아니 남아 있을 수밖에 없다. 왜? 그는 글을 쓰고 있고 글쓰기란 의식화 작업이므로. 그 남아 있는 모습은 <모든 영광은>에서 보듯 술을 즐기지만, 그 술이 가져다주는 신비스런 힘을 찬양하지만, 그에 흠뻑 취해 자신을 잃지 않고 단정하게 홀로 술을 즐기는 모습과 비슷하다.


  근자에 어떤 젊은 여자를 알게 된 것도 이 술 덕분이라고 할 수 있었다.
  [……] 어느 음식점에서 술이 취해 있는 모습이 더 인상적이었다는 것이다.[……] 실은 지금껏 지껄인 것만 해도 후회가 나는 것이다. 모처럼 흥감해진 술기분이 아까운 것이다. 이런 때 절로 입에서 흥얼거려져 나오는 것이 예의 A Drinking Song의 싯귀다. Wine comes in at the mouth,/ And love comes in at the eye;/ That’s all we shall know for truth,/ Before we grow old and die……          



  그 동안 젊은 여자를 알고 나서부터 그네를 만나기 전에 미리 술을 한두 잔씩 해야만 한 것도 실은 이 초조와 불안을 짐짓 은폐해 보려는 데서 온 행위가 아니었던가. 그뿐이 아니었다. 민숭민숭해서는 감히 엄두도 내지 못할 언동을 술기운을 빌려서 감행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것이 사십 대가 지녀야 하는 위축된 행동성의 일모였던가 하는 데 생각이 미치자, 한편 부끄럽고 서글프기까지 한 것이었다.    (<내일>)



  인철은 술을 좋아하지 않았다. 친구들과 만나면 한두 잔 안 하는 것도 아니지만 스스로 술을 부른 적은 없었다. 그러나 이날은 술을 좀 마시리라 했다.[……] 술을 먹는 것이 지금 꼭 알맞은 일일 것 같았다.[……]
  박해연의 술 먹는 법이 좀 색달랐다. 술 주전자가 오자 한 잔을 단숨에 들이켜더니, 한 십 분 뒤에 잔을 또 단숨에 비우는 것이다. 그 동안 술기운이 몸에 퍼지는 기분을 즐기는 듯했다. 그리고 통 안주는 입에 대지도 않는 것이다. 술이 들어가자 새로 얼굴에 생기가 돌며 쉴새없이 지껄여댔다. 그렇게 하는 것이 또 술 퍼지는 기분을 즐기는 한 방법인 성싶었다.




  그로부터의 인철의 생활의 변화는 소리 없이 다가왔다. 인철은 어느 샌가 예의 대폿집 패 속의 한 일원이 돼버렸던 것이다.[……] 예의 대폿집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처음에는 박해연이 앞장을 서서 같이 가게 되었던 것이 이제는 혼자서도 곧잘 들르게끔 되었던 것이다. 자욱이 서린 담배연기와 웅웅거리는 혼음 속에 인철도 담배를 피워 물고 술잔을 앞에 놓고 앉았느라면 절로 주위 분위기와 동호해 버리는 듯함을 느끼곤 하는 것이다.
  이러한 속에서 그는 술잔을 찔끔거리며 다혜의 생각을 쫓는 수가 있었다. 자기가 저녁마다 술을 먹는다는 걸 안다면 얼마나 놀랄까. 그러면서 조용히 나무라는 그네의 모습을 떠올려보다가는 애써 지워 버리곤 했다.  (<일월>)





술은 현실 밖의 세계로 그의 주인공들을 안내해 순수와 아름다움의 세계 속에 잠겨 있게 한다. 그러나 그의 주인공들은 그 술 속에만 안주하여 환상의 세계에서 서식하지만은 않는다. 그것이 황순원 소설의 한 특징이다. 그의 주인공들은 가능한 한 그 취해서 떨리는 상태에서 벗어나려고 애를 쓴다. 절제를 행하는 것이다.
황순원 소설의 주인공들의 적절한 절제는 그가 서구 문물의 세례를 비교적 발리 받은 서북지방 출신(1915년 평안남도 대동군에서 태어남)이라는 것과 그의 부친이 기독교 학교의 교직자라는 것에서 연유한다고 추측할 수 있다.
그의 선조들의 합리적인 생활과 정신력은 불의를 그대로 용인할 수 없다는 프로테스탄적 세계관과 결부되어 그의 환상 속으로의 도피를 가로막는다. 황순원이 '떨림'을 기조로 한 환상적 낭만의 세계에 칩거하려고 애를 쓰면서도 결국 거기에만 머물러 있지 못한 것은 그러한 불의에 대한 고통스러운 저항감 때문이다. 황순원 소설이 아름다움을 동경하면서도 세태 묘사나 예민한 현실 감각에서 연유하는 위기감을 항상 동반하고 있는 것도 그것과 무관하지 않다.


현실 속에서 삶을 유지하면서 순수하고 아름다운 것을 어떻게 지킬 수 있을까?
황순원은 여러 가지 방안을 제시한다.




첫째, 어찌 됐든 인간에게는 순수하고 아름다운 것이 숨겨져 있다고 믿는 일
  "저기 있는 천사의 날개보다도 더 희었어. 그걸 우리가 모두 달고 있었어. 너두 나두"   (<인간접목>)



둘째, 좌절을 폭넓게 수락하고 감당한다.
  "모르겠어요…… 어쨌든 제가 이 일을 마지막까지 감당해야 한다는 것 외에는……"      (<나무들 비탈에 서다>)



셋째, 좌절에서 오는 고독을 참고 견디며, 그럴수록 더욱 부딪친다.
  "어쨌든 인간이 소외당한 자기 자신을 도루 찾으려면 각자에 주어진 외로움을 우선 참고 견뎌 나가는 데서부터 시작해야 할 꺼야"    (<일월>)




이렇게 해서 낭만주의자의 떨림은 후기의 좌절감을 거쳐 '구원의 미학'에 이른다. 황순원 자신이 가장 힘주어 그리고 있는 것이 항상 순수성과 아름다움을 지키려고 애를 쓴 인물이라는 것은 그런 의미에서 관찰돼야 한다. 그리고 그들 대부분이 죽는다는 것도 주목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황순원이 평생 자신의 창작 세계에서 주요한 표현의 매개로 '술'을 곳곳에 배치시켜 두고 있는 까닭에 대해, <일월>의 두 인물의 입을 빌어 이런 대답을 찾고 싶다.



  "지금 전 다른 사람 아닌 나하구 같이 있어요. 바루 내 방에서 내가 나하구 같이 있단 말예요. 그러니까 조금두 외로울 리 없죠. 아까 인철씬 저더러 외로워 보인다구 하셨지? 그건 천만의 말씀. 언제나 내가 나하구 같이 있는 이상 외로울 수 없어요."



  "인간이 소외당한 자기 자신을 도루 찾으려면 우선 각자에 주어진 외로움을 참고 견뎌 나가는 데서부터 시작해야 할 꺼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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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드무비 2004-11-27 10: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글 앞으로 계속 되는 거죠?

술과 손의 떨림, 황순원과 마르그리트 뒤라스의 세계

참 독특하고 흥미진진합니다.^^

그런데 무슨 과제로 시작한 일이었을까요? 궁금.

hanicare 2004-11-27 10: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랫만입니다.종종 세상이 낯설어지곤 하는데 요즈음 그랬나봅니다.바람이 히스테리를 얼마나 부렸던지 공동현관문의 손바닥 하나 드나들 틈으로 비쩍 마른 잎들이 수북히 들어왔더군요. 날씨가 갑자기 차가와져서 안그래도 꾀죄죄한 전실의 가지마루가 몸져누울까싶어 현관중문을 열어두었습니다. 이런 날에 너무 추운 곳에서 지내야하는 생명들을 생각해보았습니다. 외로움따위야 어찌보면 사치이겠습니다.그런 사치를 너무 오래 속으로 품으면 저렇게 삭아서 소나무껍질처럼 겹겹이 탈피하는 법랑그릇같이 될지도 모르겠습니다만. 모처럼 긴 글을 읽고나니 욕조에 목욕한 듯 합니다.추운날 건강하시길.

내가없는 이 안 2004-11-27 11: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잘 읽었어요. 나중에 다시 또 읽어보려고 퍼가기도 했구요. 추천도 했구요. ^^

라일락와인님, 예전에도 매혹적인 놀이시간을 즐기셨군요. ^^

에레혼 2004-11-27 13: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드무비님, 이 주제를 잡아놓고 저도 무척 마음에 들어 흥분과 감격에 잠시 떨었었답니다^^ 한때 이런 숙제를 하며 지내던 시절도 있었다지요.



하니케어님, 정말 오랜만인 듯싶네요. 한동안 저와 같은 증세를 앓았나 봅니다.

님 계신 곳도 어제 첫눈이 내렸나요? 겨울이 빨리 찾아오는 곳이잖아요, 그쪽...... 이 동네는 어제 잠시 비가 좀 내리다가 지금은 아주맑고 화창한 겨울 햇살이 내리 쏟아지고 있네요, 환기시킨다고 거실 창을 열어 두었어요. 외로움 따위도,쓸쓸함 따위도 일조량에 제법 큰 영향을 받는다니, 어찌 보면 엄살이자 과장된 비명일 수 있지요. 저녁에는 집 앞 찜질방에나 다녀올까 싶어요.



이 안님, 정말 오래 전 책상 밑에 굴러들어가 있던 레고 한 조각이 문득 발에 밟혀 주워들고 들여다보는 느낌이에요..... 이 놀이의 흔적에서 좀 쓸쓸해서 혼자 맥주 캔을 따는 소리라도 들려오지 않나요? 지금 제게는 어쩐지 낯설고 부끄러운 흔적이지만... 추천해 주시고 가져가 천천히 읽으시겠다니 고마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