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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과 손의 떨림 ― 황순원과 마르그리트 뒤라스의 세계 [2]
3. 마르그리트 뒤라스, 모데라토 칸타빌레로 마시다
작가 마르그리트 뒤라스도 술을 마시고, 그녀의 작품 세계에 등장하는 여성들도 계속 술을 마신다. 초조함과 고독을 잊기 위해서, 삶의 고통을 잊기 위해서.
뒤라스 자신은 실제로 알콜 중독으로 위험한 상태에 이르기까지 계속 술을 마셨다. 그리고 그녀의 분신인 작중인물들도 무언가 어렵게 견뎌 내야 할 일이 있을 때마다 술을 마신다.
뒤라스 소설의 주인공들은 대부분 여자이며, 남자들은 항상 부수적인 역할만을 맡고 있다. 그녀의 주인공들은, 자기들이 어떤 사람이며, 무엇을 원하는지를 모르기 때문에 퍽 고통스러운 느낌을 준다. 그녀들은, 자기들의 고독을 알고, 자기들이 살고 있는 단조롭고 냉혹한 세계의 넓이를 재면서, 무관심과 권태 속에서 살아간다. 그녀들은 항상 '무슨 일이 시작되었다는 증거'를 기다린다. 이것은 그네들에게 무슨 일인가가 결핍되어 있다는 증좌이다. 이 기다림은 그녀들에게는 '모데라토'하지 않게, '조용하게' 살아보려는 욕망의 표시이며, 하나의 얼굴과 신분 증명서만 얻을 수 있다면, 누구든지 되고 싶다는 모호한 의지의 표현이다. 그녀들의 모험은 부조리하며, 그녀들이 성공할 가능성은 거의 없다. 그 사실을 그녀들이 잘 알고 있다. 그렇지만 그녀들은 그 공허를 메우려고 애를 쓴다.
삶의 의미를 찾지 못한 채 몽유병자와 같은 삶을 이어가는 그녀들은 획기적인 그 무엇인가가 일어나기를 갈망하던 중, 극적 사건을 보거나 겪으면서 존재의 내면에 균열이 갈 정도로 충격을 받고 그에 매혹되어 환상을 뒤쫓게 된다.
이러한 유형의 대표적인 여인이 <모데라토 칸타빌레>의 안 데바레드이다.
뒤라스는 <모데라토 칸타빌레>에서 죽음으로 완성되는 절대적 사랑을 찾아 헤매는 한 여인의 내적 갈등의 역정을 간접적 문체 기법, 보류와 암시의 언어를 통하여 펼쳐 보인다. 모두 8장으로 이루어진 이 소설은 여주인공 안 데바레드의 아들이 피아노 레슨을 받는 장면(1, 5장), 안이 노동자 쇼뱅과 만나는 카페 정경과 대화(2, 3, 4, 6, 8장) 그리고 안의 저택에서 열리는 만찬의 장면(7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안의 욕망은 소설의 맨 처음에 그려진 정열적인 살인 사건 때문에 불러일으켜진다. 한 사내가 사랑하는 여인의 뜻에 따라 그녀를 살해하고 자신도 피투성이가 된 채 죽은 여인을 애무하는 광경...... 이 살인 사건은 아무런 필연성도 갖지 못한 것처럼 처음에는 느껴지지만, 사실 이 사건이야말로 이 소설을 지배하고 끝까지 따라다닌다.
안이 아들에게 피아노를 가르치기 위해 매주 한 번씩 오는 피아노 교사의 집에서 얼마 떨어져 있지 않은 카페에서 일어난 이 살인 사건이 안의 가슴에 아주 강렬하게 박혀 와, 어떤 것의 시작을, 자기의 공허를 인식하는 일을 예감하게 한다.
황혼 무렵의 카페 안에서 피를 흘리고 쓰러져 있는 여인의 모습과 거기에 비춰진 박명, 그리고 사람들 무리 속에 숨어 그 광경을 바라보는 안의 모습... 이제 사랑의 광기로 관통된 죽음은 안에게 살아 있는 매혹적인 것이 된다. 이제부터 완전한 사랑을 재현하려는 안의 내적 모험이 시작된다.
그것은 상류층의 주거지와는 정반대편 공장 지대에 위치한 카페를 드나들며 노동자 쇼뱅을 만나 '싸구려 포도주'를 마시면서 살인 사건의 두 주인공을 재현함으로써 그들이 도달한 경지를 맛보려는 시도로 구체화된다. 말하자면 안이 카페에 찾아와 마시는 술은 일종의 도피의 표상이다. 자유로의 도피의 상징.
현실 생활의 단조롭고 냉랭한 분위기 속에서, 그녀는 술을 통해 자기의 초조와 불안, 수전증을 극복하고, 그녀가 맞닥뜨린 살인 사건에서 본 사랑이라는, 현실 세계에서는 도저히 이룰 수 없는 알리바바의 문을 통과하는 마법의 주문인 셈이다.
<모데라토 칸타빌레>의 도처에서 우리는 안의 이해할 수 없는 술 마시는 장면과 부딪힌다. 그녀가 처음으로 술을 마시게 되는 장면은 퍽 인상적으로 그려져 있다.
그 여자는 곧장 카운터로 갔다. 손님이라고는 신문을 보고 있는 남자 한 사람뿐이었다.
"포도주 한잔 주시겠어요." 그 여자가 주문을 했다.
여자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카페 여주인은 이 여인이 떨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똑바로 쳐다보지 않으려고 눈길을 돌렸다.
그리고 그 여자는 누가 물어보지도 않았지만 "목이 말라요."라고 변명한다. 손은 계속 떨리고, 여자는 술을 또 청한다. 두 잔째의 술을 마셨을 때, 그녀의 손의 수전증은 진정되고, 사랑의 코미디는 시작된다.
그녀는 자기 앞에 놓인 빈 잔을 들어 마시려고 하다가, 실수임을 깨닫고, 잔을 카운터에 내려놓았다. 그리고 눈을 내리깐 채, 잔을 채워 주기를 기다렸다. 그때 남자가 다가왔다.
"괜찮으시다면 제가 한 잔 권해도 될까요?"
여자는 놀라지 않았다. 놀라지 않는 게 오히려 당황스러웠다.
카페 안의 이 두 사람, 안과 쇼뱅은, 한 잔 한 잔 술잔을 비우고 다시 채워 감에 따라 내면의 대화를 더듬더듬 이어 나간다. '모데라토 칸타빌레'로. 술과 함께 시간이 흐르고, 알콜 기운처럼 무언가가 두 사람 사이에 스며든다.
손이 무의식적으로 잔을 찾았다. 그는 카페 여주인에게 포도주를 더 달라는 손짓을 했다. 안 데바레드는 사양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러기를 기다렸던 것처럼 보였다.
그 여자가 포도주를 한 모금 삼키자, 다시금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다. 하지만 금세 조금 전보다 훨씬 더 어두운 얼굴이 되었다. 서서히 취기가 올라오고 있었다.
언제나 그렇듯이 술기운이 점점 퍼지는 데 힘을 얻은 그 여자는 자기 앞에 있는 이 사내를 똑바로 쳐다볼 용기가 생겼다.
"이상한 일이네요. 집에 돌아가고 싶지 않으니……"하고 그 여자가 말했다.
그는 느닷없이 술잔을 들어서 단숨에 마셔 버리고는 아무 대답도 없이 여자로부터 눈길을 돌렸다.
"너무 마셨나 봐요"하고 그 여자가 말을 이었다. "그렇죠?"
"그렇군요." 남자가 대답했다.
날이 바뀌고 새로운 날이 왔을 때도 여자는 카페를 찾아 다시 술을 마신다.
"이제 3일이 지났습니다." 남자가 말했다.
그 여자는 간신히 몸을 일으켜 다시 포도주를 마셨다.
"맛이 좋아요." 그녀가 나지막이 말했다.
손은 더 이상 떨리지 않았다. 여자는 다시 일어서서 이제는 자신을 빤히 쳐다보고 있는 남자 쪽으로 살짝 다가갔다.
"조금 더 마시고 싶은데"하고 그 여자는 벌써 상처를 입은 듯 애처롭게 술을 청했다. "이렇게 빨리 습관이 들 줄은 몰랐습니다. 하긴 저도 벌써 버릇이 다 되었습니다만."
그는 포도주를 주문했다. 그들은 기갈이 들린 듯 포도주를 마셨다. 그때부터 안 데바레드가 술을 마시는 것은 포도주 맛에 눈을 뜨기 시작해서일 뿐 다른 이유라고는 전혀 없었다. 그 여자는 포도주를 마신 뒤 잠시 기다리더니, 죄지은 사람처럼 기어 들어가는 변명조로 또다시 남자에게 질문을 하기 시작했다.
사랑의 환상이 가혹해지면 가혹해질수록 주량은 많아지고, 반대로 주량이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사랑의 환상은 격렬해진다.
여자는 조금 전의 남자들처럼 포도주 잔을 비웠다. 아직 손에 들려 있는 술잔이 떨리고 있었다.
"이제 7일이 지났습니다." 쇼뱅이 말했다.
"일곱 밤이죠"하고 그 여자가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말했다. "정말 술맛이 좋군요."
"일곱 밤이라"하고 쇼뱅이 되풀이해서 말했다.
그 여자는 있는 힘을 다해 술잔을 꼭 쥐었다. 행동도 목소리도 느릿느릿해졌다.
"제가 얼마나 포도주를 좋아하는지, 그걸 모르고 있었지 뭐예요."
"이제는 말씀해 보십시오."
"아, 제발 저를 좀 내버려두세요." 안 데바레드가 애원했다.
"우리에겐 시간이 너무 조금밖에 없는 것 같아 그럴 수가 없군요."
안 데바레드는 또다시 포도주를 마시며, 술이 독하다고 생각했다. 그 여자는 미소짓고 있었지만 술에 취해 눈빛이 흐려졌다.
"시간이 가고 있습니다"하고 쇼뱅이 말했다. "점점 더 늦어지고 있어요."
"오늘 저처럼 이렇게 터무니없이 늦게 되면, 조금 더 늦거나 덜 늦거나 결과적으론 아무런 차이가 없는 법이죠."
안은 시간 속에 매몰된 사랑을 찾고 있다. 여자와 남자, 그들은 계속해서 만나고, 술을 마시고, 얘기를 나눈다. 그렇지만, 어떤 진정한 결합도 이루어지지 않고, 그들이 서로 감추고 있는 열망, 피곤, 나른함, 광기 등만이 서서히 드러난다. 그들은 서로 영원한 모놀로그만을 되풀이하고 있다. 그리고, 그 모놀로그의 사이사이에서 우리는 그 속에 현존하고 있는 은밀한 생의 그림자를, 그 환상을 보게 된다.
"전 거짓말을 하고 있었습니다"하고 그가 말했다.
그 여자는 엉망으로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매만졌다. 연민을 억누르려고 애를 쓰면서 기진맥진한 상태로 평정을 되찾았다.
"그렇지 않아요." 그 여자가 말했다.
홀을 비추는 네온 불빛 속에서, 그 여자는 경련을 일으키고 잇는 쇼뱅의 기괴한 얼굴을 찬찬히 살펴보았다.
안 데바레드는 반쯤 눈을 감은 채 또 한 잔을 단숨에 비운다. 이미 달리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게 된 것이다. 술을 마시며 그때까지는 희미한 욕망으로 존재했던 것에 대해 확신을 갖게 되고, 또 그것을 확인한 데 대한 가당치 않은 위안까지도 발견한다.
그 여자는 테이블 위에 있던 손을 끌어당기고, 아직 거기에 놓여 있는 쇼뱅의 손을 오래오래 바라보았다. 그 손은 떨고 있었다. 여자는 가느다랗게 안타까운 신음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그 소리는 오직 그 남자에게만 들렸다. [……]
그 여자는 다시 손을 테이블 위에 놓았다. 그는 여자의 행동을 눈으로 쫓다가, 결국 고통스럽게 알아차리고, 납덩이처럼 무거운 손을 들어 그 여자 손 위에 포개놓았다. 그들의 손은 너무도 차가워서 오직 그렇게 되었으면 하는 소망 속에서만 환각으로 서로 스쳐갔다. 지금과 같이 소망 속에서 말고는 달리 이루어질 수 없었다. 그들의 손은 죽음의 포즈로 굳어진 채 그렇게 머물러 있었다. 그러자 안 데바레드의 신음 소리가 그쳤다.
그 여자는 여전히 포도주를 홀짝거렸고, 남자도 이어서 술을 마셨다. 잔에 닿은 입술이 떨리고 있었다.
"시간이……"하고 그가 말했다.
"시간이 오래 걸릴까요?"
"그렇습니다. 시간이 많이 필요하죠. 하지만 전 아무것도 모릅니다." 그리고 그는 몹시 나지막하게 이 말을 덧붙였다. "저도 부인과 마찬가지로 아무것도 모릅니다. 전혀 말입니다."
"못하겠습니다."
그래서 그가 할 수 없었던 일을 그 여자가 했다. 여자는 입술이 서로 닿을 만큼 가까이 남자에게 다가갔다. 차디찬 그들의 입술은 조금 전 그들의 손과 같이 죽음의 의식을 따라 서로 포개진 채 떨면서 그렇게 머물렀다. 이루어졌다.
마지막으로 이들이 마시는 술의 마지막 반응은 그 섬뜩하도록 죽음의 냄새를 풍기는 유일한 사랑의 제전이다. "이루어졌다"고 뒤라스는 쓰고 있지만, 과연 이 두 사람의 키스는 사랑의 성취 혹은 완성이었을까? 뒤라스는 이 입맞춤의 순간에 '죽음의 의식'이란 표현을 쓰고 있다.
쇼뱅은 다른 곳을 보고 있었다. [……] 그 여자는 일어났다.
"당신이 죽었으면 좋겠습니다." 쇼뱅이 말했다.
"그대로 되었어요." 안 데바레드가 말했다.
이 작품에서는 소나티네가 배경 음악을 이루고 있으며 '모데라토 칸타빌레'는 그 연주 방법의 지시이다. 한 평론가는 침묵과 공허로 독자를 사로잡는 이야기의 애잔한 어조, 조심스러운 주문(呪文)의 목소리가 바로 '모데라토 칸타빌레' '보통 빠르기로 노래하듯이'라고 말하고 있다.
윤곽만이 대략 그려지고 알맹이는 텅 비어 있는 이 소설에서 우리는 여 주인공과 함께 이 공허를 메워 가야만 한다. 작가의 설명이나 주인공 자신에 의한 감정의 분출도 전혀 없다. 이렇듯 지루할 정도로 담담히 이어지는 실체 없는 대화의 이 소설이 사람들의 마음을 끄는 까닭은 무엇일까?
한 순간의 고요 속에 영원의 소리가 담기듯, 침묵으로 일관된 긴장 속에 놓여 있는 주인공의 위기가 냉정하면서도 극적으로 그려지는 뒤라스의 글쓰기 기법 때문이 아닐까. 가리면서도 보여주는 유연하고 간접적인 말하기 방식, 묘사나 분석, 설명은 사라지고, 암시가 담긴 간결함...... 여백의 의미와 침묵의 소리..... 그래서일까, 우리는 이 글을 따라가며, 안개처럼 잡히지 않는 취기에 서서히, 모데라토 칸타빌레로 함께 젖어 들어가게 된다.
4. 나오기
황순원과 뒤라스의 세계에 대해, 그들이 작품 속에서 마시고 취해 간 그 술의 마력에 대해, 취기와 떨림과 광기에 대해, 아주 강렬한 한 잔 술처럼 매혹적인 말로 마무리를 하고 싶었지만...... 이제 더 이상 내게 남아 있는 기운이 없다.
이제 그만 이 문을 열고 나가 술 한잔 마셔야겠다.
* 참고한 책과 글
-- 김윤식, 김현, <한국문학사>, 민음사
-- 김현, "소박한 수락", <황순원 연구>, 황순원 전집 12, 문학과지성사
-- 김현, <현대 프랑스 문학을 찾아서>, 기린원
-- 마르그리트 뒤라스, <모데라토 칸타빌레>, 옮긴이(정희경) 해설, "절대적 사랑을 찾아 헤매는 언어의 모험", 문학과지성사
카니발의 아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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