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 전, 알라딘에 서재를 만들기 전에 나는 혼자 무얼 하고 놀았나 생각해 보다가, 한글 문서 저장고에서 이런 낡은 파일 하나를 찾아냈다. 그러니까 이 글은 나의 심심한 한때를 자신과 잘 놀아주던 기억의 한 자락, 한 점 얼룩 같은 것이다. 오래 전 장난감을 치워 두고는 잊어버렸는데 책상 의자 밑 먼지 구덩이에 그 한 조각이 떨어져 있는 걸 발견했을 때의 기분이 이럴까......
술 한잔 마시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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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과 손의 떨림 ― 황순원과 마르그리트 뒤라스의 세계
1. 들어가기
50-60년대 작가에 대한 탐색이란 주제의 과제를 생각하고 있던 즈음, 이런저런 모색을 하던 중에 한 책에서 나는 무척 흥미로운 단서를 만났다.
<한국문학사>의 '황순원 혹은 낭만주의자의 현실 인식'이란 장에서 김현이 이런 지적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황순원은 그의 낭만주의적 성격을 구극으로 밀고 나가면서 거기에 적절한 규제를 가하려 한 작가이다. 그의 낭만주의적 성격은 초기 낭만주의자들의 체제와 질서에 대한 강렬한 저항의식을 포함하지 않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그의 낭만주의적인 성격은 "죽어 가는 여인을 묘사하는 것이 가장 아름답다"는 포오의 시작(詩作) 철학에 표현된 '퇴폐적 낭만주의'에 가깝다.
황순원의 미(美)에 대한 경사는 사춘기의 꿈에서 비롯한다. 그의 초기 단편의 상당수는 '떨림'이라는 심적 동요를 기조음으로 삼고 있다. 대상을 정확하게 관찰하지 못하고, 자기감정의 내용을 뚜렷하게 분석하지 못하는 시기의 심적 동요를 그는 대부분 '떨림'이라는 상태로 표현한다.
그의 최초의 단편집인 <늪>의 첫머리에 실려 있는 <늪>에서부터 '떨림'은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독자들에게 제시된다. 대체적으로 그의 주인공들의 떨림은 여자와의 비정상적인 관계에서 비롯된다. 그 떨림은 순수하고 아름다운 것에 대한 동경과 등가(等價)이다. 사춘기의 떨림을 장년기에서도 계속 유지시켜 주는 소도구가 그의 소설에는 일정하게 등장하는데, 그 대표적인 것이 술이다.
"술과 손의 떨림이라는 주제를 소설로서 성공시키고 있는 예가 마르그리트 뒤라스의 소설들이다. 그녀와 황순원의 비교는 재미있는 결과를 보여줄 것이다."
김현의 혜안이 발견한 그 흥미로운 비교를 위해 나는 황순원과 마르그리트 뒤라스의 작품 속에서 '술'이 발산하고 있는 의미와 상징, 그리고 술을 매개로 그들의 문학 세계가 어떻게 전개되고 있는지를 찾아 나서 보기로 했다.
알콜과 작가의 관계뿐 아니라 두 작가의 작품 세계 속에서 알콜이 하나의 문학적인 상징물로서 어떻게 기능하고 있는지를 엿볼 수 있는 이번 작업은 내게 무척 흥미로운 일이었다.
2. 황순원, 떨림과 그리움을 마시다
황순원의 소설은 술이 그 중요한 소재와 주제를 이룬다. 술은 그의 주인공뿐만 아니라, 그 자신의 삶의 어려움을 해소시켜 주는 중개체이며 그의 창작력의 원동력이기도 했다. 다음과 같은 대목에서 이런 흔적을 엿볼 수 있다.
나면서부터 허약해 빠진 몸이 곧잘 체증에 걸려 고생을 하곤 했다.[……] 성인이 되어 술을 대량으로 마시기 시작하면서부터는 체증이 가셔졌다.[……] 그것만이 아니다. 본디 주변머리 없고 소심장이어서 남 앞에 나서기를 꺼려하고 항상 무엇엔가 쫓기고 있는 듯한 심정에 사로잡혀 있는 위인으로 술만이 이런 불안과 공포에서 구출해 주는 것이다. (<그래도 우리끼리는>)
이렇게 술잔을 앞에 놓고 있노라면 내 몸 속에서는 인제 내가 쓰려고 하는 작품의 어느 막혔던 대목이 강물 흐르듯이 자연스럽게 풀리고, 거기 나오는 인물들은 하나하나 산 사람의 체온을 갖고 제각기의 생김새며 말투며 걸음걸이로 움직이는 것이다. (<모든 榮光은>)
술은 황순원의 상당수의 주인공들을 사춘기의 떨림으로 환원시키는 소도구이다.
<그래도 우리끼리는>에서 황순원은 윌리엄 제임스의 말을 빌려 알콜을 '사물의 찬란한 핵심으로 이끌어' '진리와 일체가 되게 하는' 중간 매체로 파악하고 있다. 알콜 - 술을 통해 그의 주인공들이 얻을 수 있는 것은 환상과 순수이다. 먼 곳에 대한 취향과 순수하고 아름다운 것에 대한 확인은 술을 떠나서는 있을 수 없는 행위이다.
술이 몇 순배 돌았을 때 황노인은 어떤 자꾸 흡족해지는 마음으로,
"참 동갑, 해금 한번 켜게" 했다. [……]
늙은 재니는 잠시 먼 것을, 아주 머언 것을 생각하는 듯 허공 한 곳에다가 눈을 주고 있더니 스르르 눈을 감으며 해금에 활을 긋기 시작했다. (<황노인>)
황순원 소설에서 그의 깊은 사랑을 받고 있는 것은 병적인 낭만주의자들이다. 그 낭만주의자들은 대부분 알 수 없는 병을 앓고 있거나, 신비한 웃음을 띠고 있기가 일쑤다. 세계와 사회와의 통로를 트지 않고 자신의 내적 세계에만 칩거하여 극단적인 주관성을 드러내 보인다는 점에서 그 주인공들은 낭만주의자들이다. 그 낭만주의자들은 대체적으로 여자와의 관계에서 수동적 역할을 맡는다. 여자들은 항상 밝고 명랑하며 현실적이고 능동적이다. 그러나 남 주인공들은 그녀들의 사랑을 이상하게 왜곡시켜 받아들인다. 그것은 자기 자신에게 그 사랑을 받아들일 수 없는 약점이 내재해 있다는 것을 의식적으로 믿는 자의 왜곡이다. 그것은 흔히 술에 의해 극복된다. 여자와 정신적이건 육체적이건 어떤 형태로든지 관계를 맺으려고 할 때, 그 낭만주의자들은 손이나 발을 떤다. 그 떨림은 인간 관계가 주는 압력에서 생겨난다.
특히 초기의 단편 <배역(配役)들> <사나이> 등은 술과 떨림을 잘 나타내 주는 작품이다.
조훈은 자리를 잡자 등을 한번 으스스 떨고 나서 곧 여급에게 "워카!"한다. [……]
조훈은 곱잡아 넉 잔이나 들이켜고 나서 도리어 더 얼굴이 창백해진다. [……]
"자아!"하고 하나꼬가 내미는 손을 조훈이 어느새 떨기 시작한 손으로 잡아 끌어당기는데 하나꼬의 부푼 가슴이 탁자에 부딪히자…… (<배역들>)
김서방은 가게로 나가 잔에다 술을 가득 부었다.
내일 아침에는 이 여자가 또 자기의 생활을 헝클어놓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마에 구슬땀이 내돋았다. 잔의 술을 단숨에 들이켰다. 내일 일은 내일 보자. 그리고 떨리는 다리를 구름다리에 올려놓았다. (<사나이>)
현태는 자기 손을 내려다보았다. 거기 아직도 스며 있는 여인의 그 약간 떨리면서 땀기운이 돌던 손의 감촉, 그리고 메마른 피부에 온기를 띠고 있던 목의 감촉…… 그날 밤 그는 술을 마시고 또 마셨다. (<나무들 비탈에 서다>)
이처럼 초기의 황순원 소설은 능동적인 여자와, 그 여자 앞에서 자꾸만 '떨고' '술로' 그 떨림을 잠재우는 여위고 병든 남자 사이의 사랑을 주로 다룬다. 여자는 언제나 강인한 현실주의자이며, 남자는 여자에 대한 환상을 버릴 수 없는 낭만주의자들이다.
초기의 이런 대위법은 피난 시절 이후에 씌어진 <나무들 비탈에 서다> <일월> <움직이는 성> 등의 장편소설에서도 그대로 확인된다.
"그일 죽인 건 당신예요. 전에 그렇지 않았던 그일 그렇게 만든 건 당신예요. 그래서 당신은 날 피하고 있었던 거지 뭐예요. 비겁해요. 술 안 먹군 할 말도 못하는 술주정뱅이, 술주정뱅이……"
창백해진 그네 얼굴에 눈만이 발갛게 충혈돼 있었다.
현태는 자신이 냉연해져 있음을 느꼈다. 새로 컵에 술을 부어 마셨다. (<나무들>)
이렇게 권태와 무관심의 그날그날은 마치 아무 것도 들어 있지 않은 하나의 두껍디두꺼운 책과도 같은 것이었다. 넘기고 넘기어도 흰 종잇장뿐인 책. 인간에 있어 차라리 불안이라든가 초조라든가 절망이라든가 공포라든가 하는 것이 이보다는 나은 것이다. 거기에는 아직 삶에 대한 몸부림이 따르는 법이니까.[……]
단지 이러한 무관심과 권태 속에서 그래도 아직 어떤 생을 느끼게 해주는 한 가지 물건이 있었다. 그것은 술이었다. 이것만이 쌓이고 쌓인 잿더미에다 불씨를 일으켜 주는 것이다. (<내일>)
황순원적 인물은 과거의 기억 속에 남아 있는 순수하고 아름다운 것 때문에 아름다움과 먼 곳에 대한 취향을 얻게 된다. 그 취향은, 그러나 현실 앞에서 자주 가로막히고 더럽고 추한 것과 타협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그것은 <나무들 비탈에 서다> 이후에는 인간 조건 자체로 확대된다. 그 가로막힘은 불안, 고독, 절망 등의 실존주의적 용어로 옮겨진다. 특히 <일월>에서 기룡은 이런 말을 하고 있다.
"무리해서 술을 마실 필욘 없지 않을까. 술에다 외로움을 푼다는 건 가장 졸렬한 방법야. 물론 술이 그걸 받아주지두 않지만." (<일월>)
그렇다고 황순원이 언제나 그 몽상의 세계에 푹 잠겨 있기만 한 것은 아니다. 희생과 사랑으로 세상에 의미를 주고 싶어하는 마음은 철저한 몽상의 세계로부터 바라본다면 하나의 불순한 자아의 찌꺼기일 수 있다. 그렇더라도 그는 그 불순한 자리에 남아 있는다. 아니 남아 있을 수밖에 없다. 왜? 그는 글을 쓰고 있고 글쓰기란 의식화 작업이므로. 그 남아 있는 모습은 <모든 영광은>에서 보듯 술을 즐기지만, 그 술이 가져다주는 신비스런 힘을 찬양하지만, 그에 흠뻑 취해 자신을 잃지 않고 단정하게 홀로 술을 즐기는 모습과 비슷하다.
근자에 어떤 젊은 여자를 알게 된 것도 이 술 덕분이라고 할 수 있었다.
[……] 어느 음식점에서 술이 취해 있는 모습이 더 인상적이었다는 것이다.[……] 실은 지금껏 지껄인 것만 해도 후회가 나는 것이다. 모처럼 흥감해진 술기분이 아까운 것이다. 이런 때 절로 입에서 흥얼거려져 나오는 것이 예의 A Drinking Song의 싯귀다. Wine comes in at the mouth,/ And love comes in at the eye;/ That’s all we shall know for truth,/ Before we grow old and die……
그 동안 젊은 여자를 알고 나서부터 그네를 만나기 전에 미리 술을 한두 잔씩 해야만 한 것도 실은 이 초조와 불안을 짐짓 은폐해 보려는 데서 온 행위가 아니었던가. 그뿐이 아니었다. 민숭민숭해서는 감히 엄두도 내지 못할 언동을 술기운을 빌려서 감행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것이 사십 대가 지녀야 하는 위축된 행동성의 일모였던가 하는 데 생각이 미치자, 한편 부끄럽고 서글프기까지 한 것이었다. (<내일>)
인철은 술을 좋아하지 않았다. 친구들과 만나면 한두 잔 안 하는 것도 아니지만 스스로 술을 부른 적은 없었다. 그러나 이날은 술을 좀 마시리라 했다.[……] 술을 먹는 것이 지금 꼭 알맞은 일일 것 같았다.[……]
박해연의 술 먹는 법이 좀 색달랐다. 술 주전자가 오자 한 잔을 단숨에 들이켜더니, 한 십 분 뒤에 잔을 또 단숨에 비우는 것이다. 그 동안 술기운이 몸에 퍼지는 기분을 즐기는 듯했다. 그리고 통 안주는 입에 대지도 않는 것이다. 술이 들어가자 새로 얼굴에 생기가 돌며 쉴새없이 지껄여댔다. 그렇게 하는 것이 또 술 퍼지는 기분을 즐기는 한 방법인 성싶었다.
그로부터의 인철의 생활의 변화는 소리 없이 다가왔다. 인철은 어느 샌가 예의 대폿집 패 속의 한 일원이 돼버렸던 것이다.[……] 예의 대폿집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처음에는 박해연이 앞장을 서서 같이 가게 되었던 것이 이제는 혼자서도 곧잘 들르게끔 되었던 것이다. 자욱이 서린 담배연기와 웅웅거리는 혼음 속에 인철도 담배를 피워 물고 술잔을 앞에 놓고 앉았느라면 절로 주위 분위기와 동호해 버리는 듯함을 느끼곤 하는 것이다.
이러한 속에서 그는 술잔을 찔끔거리며 다혜의 생각을 쫓는 수가 있었다. 자기가 저녁마다 술을 먹는다는 걸 안다면 얼마나 놀랄까. 그러면서 조용히 나무라는 그네의 모습을 떠올려보다가는 애써 지워 버리곤 했다. (<일월>)
술은 현실 밖의 세계로 그의 주인공들을 안내해 순수와 아름다움의 세계 속에 잠겨 있게 한다. 그러나 그의 주인공들은 그 술 속에만 안주하여 환상의 세계에서 서식하지만은 않는다. 그것이 황순원 소설의 한 특징이다. 그의 주인공들은 가능한 한 그 취해서 떨리는 상태에서 벗어나려고 애를 쓴다. 절제를 행하는 것이다.
황순원 소설의 주인공들의 적절한 절제는 그가 서구 문물의 세례를 비교적 발리 받은 서북지방 출신(1915년 평안남도 대동군에서 태어남)이라는 것과 그의 부친이 기독교 학교의 교직자라는 것에서 연유한다고 추측할 수 있다.
그의 선조들의 합리적인 생활과 정신력은 불의를 그대로 용인할 수 없다는 프로테스탄적 세계관과 결부되어 그의 환상 속으로의 도피를 가로막는다. 황순원이 '떨림'을 기조로 한 환상적 낭만의 세계에 칩거하려고 애를 쓰면서도 결국 거기에만 머물러 있지 못한 것은 그러한 불의에 대한 고통스러운 저항감 때문이다. 황순원 소설이 아름다움을 동경하면서도 세태 묘사나 예민한 현실 감각에서 연유하는 위기감을 항상 동반하고 있는 것도 그것과 무관하지 않다.
현실 속에서 삶을 유지하면서 순수하고 아름다운 것을 어떻게 지킬 수 있을까?
황순원은 여러 가지 방안을 제시한다.
첫째, 어찌 됐든 인간에게는 순수하고 아름다운 것이 숨겨져 있다고 믿는 일
"저기 있는 천사의 날개보다도 더 희었어. 그걸 우리가 모두 달고 있었어. 너두 나두" (<인간접목>)
둘째, 좌절을 폭넓게 수락하고 감당한다.
"모르겠어요…… 어쨌든 제가 이 일을 마지막까지 감당해야 한다는 것 외에는……" (<나무들 비탈에 서다>)
셋째, 좌절에서 오는 고독을 참고 견디며, 그럴수록 더욱 부딪친다.
"어쨌든 인간이 소외당한 자기 자신을 도루 찾으려면 각자에 주어진 외로움을 우선 참고 견뎌 나가는 데서부터 시작해야 할 꺼야" (<일월>)
이렇게 해서 낭만주의자의 떨림은 후기의 좌절감을 거쳐 '구원의 미학'에 이른다. 황순원 자신이 가장 힘주어 그리고 있는 것이 항상 순수성과 아름다움을 지키려고 애를 쓴 인물이라는 것은 그런 의미에서 관찰돼야 한다. 그리고 그들 대부분이 죽는다는 것도 주목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황순원이 평생 자신의 창작 세계에서 주요한 표현의 매개로 '술'을 곳곳에 배치시켜 두고 있는 까닭에 대해, <일월>의 두 인물의 입을 빌어 이런 대답을 찾고 싶다.
"지금 전 다른 사람 아닌 나하구 같이 있어요. 바루 내 방에서 내가 나하구 같이 있단 말예요. 그러니까 조금두 외로울 리 없죠. 아까 인철씬 저더러 외로워 보인다구 하셨지? 그건 천만의 말씀. 언제나 내가 나하구 같이 있는 이상 외로울 수 없어요."
"인간이 소외당한 자기 자신을 도루 찾으려면 우선 각자에 주어진 외로움을 참고 견뎌 나가는 데서부터 시작해야 할 꺼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