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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는 두 가지 큰 저울이 있다.
하나는 '옳은 것과 그른 것(是非)'이라는 저울이고, 하나는 '이익과 손해(利害)'라는 저울이다.
이 두 가지 큰 저울에서 네 가지 등급이 생겨난다.
옳은 것을 지키면서 이익도 얻는 것이 제일 고급이다.
그 다음은 옳은 것을 지키다가 해를 입는 것이고,
그 다음이 그른 것을 추구하여 이익을 얻는 것이다.
최하급이 그른 것을 추구하다가 해를 입는 것이다."


-- 정약용 지음, 박무영 옮김, <뜬 세상의 아름다움>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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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이 어지럽고 안절부절못하니, 몸도 따라 무겁고 찌뿌드드해,
오랜만에 집앞 공원길을 40분쯤 달리고 들어왔다
하늘에는 별들이 총총 빛나고 있었다


세상이 어수선하고 시끄러워도 '내일은 또 내일이 태양이 뜰 터'이고,
우리들의 삶도 또 그렇게 흘러가겠지
이런 날, 책읽기가 다 무슨 소용이랴 싶어 마음은 여기저기를 어지럽게 서성이는데,
그래도 마음을 주저앉혀 정약용의 <여유당전서>의 한 대목을 읽는다.

"내 병을 내가 스스로 안다. 용감하되 무모하고, 善을 좋아하되 가릴 줄 모른다.
마음이 내키면 곧장 실천해서 회의하거나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만둘 수도 있는 일이지만 마음에 흔연히 감동되는 바가 있으면 그만두지 않는다.
할 만하지 않아도 마음에 꺼림칙하여 상쾌하지 않으면 절대로 그만두지를 못한다.
이런 까닭에 어려 몽매할 때는 이단으로 치달리면서도 의심하지 않았고,
자라서는 과거에 빠져 뒤도 돌아보지 않았으며,
삼십 대에는 기왕의 일들을 깊이 후회하면서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이러니 한없이 선을 좋아했어도 비방은 유독 많이 받았다.
아아, 그 또한 운명인가?
성격이다. 내가 어찌 감히 운명이라 말하겠는가?
老子의 말에 보니 "망설이기를(與) 겨울에 시내 건너듯, 겁내기를(猶) 사방 이웃을 두려워하듯 한다."라 했다.
아아, 이 두 마디가 내 병에 약이 아니겠는가?
대개 겨울에 시내를 건너는 자는 추위가 뼈마디를 쑤시니 매우 부득이하지 않으면 건너지 않는 법이고,
사방의 이웃을 두려워하는 자는 이웃의 선이 언제나 자기 가까이있으니 비록 매우 부득이한 경우라도 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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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능하다면 자기가 소설을 읽고 있다는 사실조차 잊게 만드는 것이다.
한 문장으로 이루어진 문단은 글보다 말에 더 가까운 것이다. 그것은 좋은 글이다.
글쓰기는 유혹이다. 좋은 말솜씨도 역시 유혹의 일부분이다.

플롯은 좋은 작가들의 마지막 수단이고, 얼간이들의 첫번째 선택이라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플롯에서 태어난 이야기는 인위적이고 부자연스러운 느낌을 주게마련이다.
나는 플롯보다 직관에 많이 의존하는 편인데, 그것은 내 작품들이 대개 줄거리보다는 상황을 바탕으로 전개되는 덕분이다.

어떤 사람은 모든 소설이 실은 한 사람에게 보내는 편지라고 말했다.
나도 그 말을 믿는다. 모든 소설가에게는 반드시 한 명의 가상 독자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소설을 쓰는 동안에 작가들은 이따금씩 이런 생각을 하게 마련이다.
'그 독자는 이 부분을 읽으면서 어떤 생각을 할까?'"


-- 스티븐 킹, <유혹하는 글쓰기>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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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10-23 22:27   URL
비밀 댓글입니다.

에레혼 2004-10-24 20: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님, 어젯밤 주인 없는 방에 들어오셔서 찬찬히 묵은 글들을 다 넘겨 보고 가셨네요. 부끄럽고 좀 민망한 느낌도 들지만, 어쨌든 고맙습니다. 어떤 공감의 매혹이 작용한 덕분이겠지요.
나중에 님이 말한 그런 교환의 기회가 있기를 저도 기대해 봅니다. 저도 그런 식의 글쓰기, 글읽기가 더 끌리더군요.
앞으로, 종종, 자주 만나요, 우리...... 님의 방에서도 차 한잔 하고 싶습니다.
 
거미여인의 키스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37
마누엘 푸익 지음, 송병선 옮김 / 민음사 / 200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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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미여인의 키스>

(마누엘 푸익 원작, 송병선 옮김, 민음사)

(헥토르 바벤코 감독)

 

 

삶이라는 이 난해하고 부조리한 과정을 한두 마디 말로 표현하라고 한다면(이렇게 과감하고도 허황된 요구를 과연 누가 할 수 있으랴만....), 내게 가장 먼저 떠오르는 말은 '관계'와 '영향'이다. 이 세상에 내던져진 우리는 누구도 혼자 살아갈 수 없으며, 이루 다 헤아릴 수 없는 멀고 가까운 관계 속에서 미처 다 감지하지 못하는 크고 작은 영향들을 주고받으며 살아가고 있다.
누군가와 만나고 헤어지고, 누군가를 좋아하거나 미워하면서, 일상의 삶이 기우뚱거릴 만큼 누군가를 그리워하거나 때로는 아주 무심하게 그냥 지나치면서, 어떻게든 누군가의 삶과 겹쳐지려 애쓰거나 아니면 누군가를 자기 삶에서 지워 버리려 애쓰면서, 누군가를 알고 있다고 믿지만 실은 알지 못한 채, 또는 자신은 의식하지 못한 사이 누군가와의 보이지 않는 관계망 속에 일찍부터 들어가 있으면서, 그렇게 우리는 자기 앞의 삶을 살아가고 있다.
그래서, 한 사람이 다른 누군가를 만나 어떤 관계를 이루고 어떤 영향을 주고 받았느냐가 어쩌면 그 삶의 궤적 전부일지도 모른다. 나는 때때로 '영향(影響)'이란 말의 의미를 되새겨 보곤 하는데, 그 말이 가리키는 그대로 '그림자'와 '메아리'― 바로 그것이 관계라는 것의 본질을 놀랍도록 명쾌하게 꿰뚫고 있기 때문이다.


나와 그가 만난다. 시간이 흐르면서 무언가가 조금씩 달라진다. 둘은, 둘의 사이는 변화한다. 내가 그의 그림자가 된다. 그가 나의 메아리가 되어 울린다. 둘은 서로 만나기 전과는 다른 사람이 된다...... 세상 속에서 산다는 것은, 사람과 사람의 만남이란 결국 그런 것이 아닐까.    

여기 두 남자, 아니 두 사람이 있다.
비좁고 음습한 감방, 낭만적이고 감성적인 동성애자와 혁명을 꿈꾸는 냉소적인 정치범. 이 둘은 서로 다른 세계관과 가치관을 지니고 서로 너무도 다른 성격과 방식으로 살아 왔고, 그 '다름'은 감방이라는 이 좁은 공간 안에서 자연히 부딪히게 된다. 경멸과 혐오와 차별과 몰이해...... 그 부딪힘은 '갇혀 있는 현실'을 잊기 위해 시작된 다섯 편의 영화 이야기가 전개되는 가운데 진행된다. 그리고, 마지막 영화 이야기가 끝날 즈음 두 사람은 어느덧 서로에게 잊을 수 없는 그림자가 되고 서로의 삶에 깊은 메아리를 울리게 된다.

마누엘 푸익의 <거미여인의 키스>는 부에노스아이레스의 한 교도소에 수감되어 있는 두 죄수의 대화로 구성되어 있다. 두 사람의 대화만으로 끌고 나가는 한 권의 책, 무척 흥미롭고 뜻밖에도 이야기가 풍부하다.
 
발렌틴(라울 줄리아)은 기자 출신으로 게릴라 활동을 하다가 검거된 정치범이며, 또 다른 한 명은 미성년자 보호법 위반으로 구속된 몰리나라는 동성애자이다. 몰리나(울리엄 허트)는 교도소 쪽으로부터 발렌틴의 조직에 대한 정보를 입수해 알려주면 석방해 주겠노라는 제안을 받는다.
감성적인 몰리나는 감옥 생활의 따분함을 잊기 위해 그가 보았던 영화를 발렌틴에게 이야기한다. 헐리우드 영화에 빠진 순진한 동성애자와 단호한 좌파 행동가의 거리가 쉽사리 좁혀질 리 없다. 처음에 몰리나는 나치 치하에서 적을 사랑하는 여가수의 이야기를 발렌틴에게 들려준다. 그리고 발렌틴은 마르크시즘에 입각하여 그 영화에 대한 평을 한다.

"이건 더럽고 추잡한 나치 영화란 말이야!"
"아니야, 더럽고 추잡한 것은 바로 너지, 영화가 그런 것이 아니야."(81쪽)

현실의 고통을 잊고 싶은 몽상가와 현실을 직시하려는 투사의 팽팽한 관계는 소설 속 영화 이야기를 통해 조금씩 누그러지고 변화한다. 몰리나와 발렌틴은 생각과 감성의 차이를 계속 드러내지만, 어느 시점부터 두 사람의 언어엔 촉촉한 기운이 번진다. 모두 여섯 편의 영화 이야기를 들려주는 사이 서서히 둘은 서로의 그림자가 되고 메아리가 된다.

두 사람의 대화 가운데 무척 인상적이었던 대목 하나. 자신이 생각하는 '남자다움'에 대해서 나누는 두 사람의 견해는 이렇게 서로 다르면서도 아름답다. 

― 몰리나 : "남자에게 가장 근사한 점은 멋지게 생기고 힘이 센 거야. 힘이 세다고 과시하지 않지만, 자신있게 나아가는 그런 태도지...... 자기가 뭘 원하고 있으며 어떤 방향으로 가고 있는지 잘 아는 사람이야. 물론 전혀 겁내지 않고."
― 발렌틴 : "그 누구에게 허풍 떨지 않는 것...... 심지어 권력을 쥐고 있더라도. 아니, 남자가 된다는 것은 그 이상의 무엇이야. 그건 명령이나 팁 따위로 그 누구도 깎아 내리지 않는 것이지.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은 ....... 네 옆에 있는 누구에게나 자신이 열등한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느끼게 해주고, 또 마음 상하지 않게 하는 것이지." (89 - 91쪽)

혁명 투사로부터 인간의 존엄성과 자기 존중의 자세를 배우는 몽상가. 그리고, 처음에는 마음을 열고 받아들이지 않았던 동성애자로부터 진정한 사랑의 자세와 인간애를 배우는 혁명 투사. 그리하여 두 사람은 마침내 '몸으로' 서로를 받아들이고 하나가 된다. 그 육체적 합일의 순간이 막 지나고 나서 나누는 두 사람의 대화는 그 어떤 연인의 사랑의 장면보다도 아름답고도 슬프다.

"또 어떤 느낌이 들었는지 알아, 발렌틴? 아주 짧은 순간이었지만...... 아주 짧았지만, 내가 여기에 있다는 느낌이 들지 않았어...... 여기도 아니고 밖도 아닌 것 같은 그 어떤 느낌......"
"........."
"나는 없고....... 너 혼자만 있는 것 같았어."
"............"
"내가 아닌 것 같았어. 지금 난...... 네가 된 것 같아." (289쪽)

결국 몰리나가 교도소의 제안을 받아들여 고뇌와 갈등 속에서 석방하게 되면서, 둘은 작별을 나누게 된다. 

"내 생각 많이 할 거야?"
"너한테 많은 것을 배웠어...... 몰리나......."
"발렌틴, 너한테 한 가지 약속할게. 널 떠올릴 때마다, 난 행복할 거야. 네가 나한테 가르친 대로 말이야."
"그리고 한 가지 더 약속해 줘....... 다른 사람이 널 무시하지 않도록 행동하고, 아무도 널 함부로 다루게 하지 말고, 착취당하지도 말아. 그 누구도 사람을 착취할 권리는 없어." (344쪽)

꽃은 봉오리로 바쳐져도 헛된 희생은 아니라고 했던가. 투사로부터 인간의 존엄성을 배운 몽상가는 헌신이라는 이름의 사랑에 마침표를 찍는다. 발렌틴의 전갈을 동료에게 전하려던 몰리나는 거리에서 총격을 당하고, 전기 고문을 받은 발렌틴은 교도소 의무실에서 몰리나라는 거미여인을 꿈꾸면서, 몰리나가 이야기한 영화를 자신의 영화로 만들면서 이 이야기는 끝을 맺는다. 동성애자는 혁명가에게 정치적 메시지를 전하러 달려가다 죽어 가고, 혁명가는 사랑을 깨달으며 죽어가는, 다시 말해 사랑이 혁명이 되고 혁명이 사랑이 되는 경이로운 역설과 화해의 드라마.......

"나는 성에 있어서 음성적이고 터부시되는 모든 것을 탈신비화하기 위해  글을 쓴다"고 한 마누엘 푸익 영화 감독이 되려다 실패한 사람이다. 1932년 아르헨티나에서 태어난 푸익은 6살 때부터 극장에 출근하다시피 한 헐리우드 키드였고 실험영화에 심취한 적이 있으며 조감독도 거쳤으나, 결국 감독으로 이름을 남기진 못했다.  대신 소설을 썼는데, 아이러니하게도 그의 소설은 영화보다 더욱 영화적이었다. 왕가위 감독은 자신의 <아비정전>과 <해피투게더>가 푸익의 <상심의 탱고>에서 영감을 얻은 것이라고 밝힌 바 있다. 1976년에 첫 출간된 소설 <거미여인의 키스>는 푸익의 대표작이며, 그의 이름을 라틴 아메리카 문학의 거장 마르케스와 보르헤스와 같은 반열에 올려놓은 걸작이다.

<거미여인의 키스>는 1985년 헥토르 바벤코 감독의 영화로 일반인에게 더 친숙하게 다가왔지만, 원작의 풍부하고 섬세한 울림을 뛰어넘지는 못하는 것 같다.
영화에서 몰리나가 이야기하는 기억 속의 영화는 황색 톤으로 그려지고, 현실 속의 감옥은 푸른색으로 채워진다. 환상으로서 영화와 폭력만 남은 환멸의 시대가 극명하게 대비되고 있는 셈이다. 핵토르 바벤코 감독이 지휘한 '갇힌 자유인'의 노래는 끝까지 부드럽고 크게 울린다. 윌리엄 허트는 감성적인 동성애자 몰리나 역을 맡아 빼어난 연기로 아카데미와 칸느 영화제에서 남우 주연상을 받았다.

 무엇보다 마누엘 푸익의 <거미여인의 키스>는 가슴을 적시는 빼어난 연애 소설이다.  몰리나가 "맹세컨대 내 영혼은 모두 당신의 것이고, 내 생각과 삶도 당신의 것입니다.  마치 이 고통처럼..."이라고 '내 편지'라는 곡을 노래할 때, 두 사람의 사랑엔 어떤 이물질이 끼어들 틈도 보이지 않는다. 몰리나의 애절한 노래와 죽음은 동성애에 대한 어떤 변호보다 깊이 우리의 마음을 움직인다.


<거미여인의 키스>에 대해 시인 황인숙은 이런 시를 썼다.

"몰리나의 사랑이 불쾌하지 않은 건 몰리나가 아름다운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는 육체를 벽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몰리나의 가슴은 평화와 우아함과 미소로 가득했다. 몰리나는 진정한 여성이며 진정한 인간이었다. 나는 이 기묘한 사랑 이야기를 들으며 한 편의 판토마임을 생각했다."


나는 몰리나의 사랑의 자세에 대해 이런 군말을 덧붙인다.

"사랑하는 방식이 그 사람의 존재하는 방식이다"라고. 이 시대는 한 사람의 아이덴티티를 다양한 잣대로 규정 짓는다. 가령 당신이 소유하는 것이 당신을 말해 준다고 한다. 또, 당신이 보는 것, 당신이 읽는 것, 당신이 만나는 사람이 당신을 말해 준다고도 한다. 그러나, 나는 그 어떤 잣대보다도 이것을 믿고 싶다. "당신이 사랑하는 방식이 당신이 존재하는 방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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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09-07 10:00   URL
비밀 댓글입니다.

에레혼 2004-09-07 18: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님
제 것이 될 수 없는 과찬의 말에 잠시 멈칫거렸습니다.
제 서재의 품격과는 상관없이, 앞으로도 님의 '고혹적인' 발걸음이 계속 이어지기를 바래요.
제 방은 아직 어수선하고 산만하지만, 가끔 들러서 쉬다 가시기를.... 마음 풀어놓고 쉬기에는 너무 깔끔하고 완벽하게 정돈된 곳보다는, 좀 어질러져 있는 허접한 구석 공간이 더 나을 때가 있잖아요......
문득 <베로니카의 이중 생활>이란 영화가 떠올랐어요, 님에게서 그런 느낌을 받게 되는 건 무슨 까닭인지......

내가없는 이 안 2004-09-17 23: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님의 덧붙인 말이 적확하군요. 사랑하는 방식이 존재하는 방식이라니... 오래전 영화로만 접한 작품인데 옆으로 미뤄만 둬왔던 이 책을 님의 리뷰가 읽으라고 종용하는 듯하네요. ^^

에레혼 2004-09-18 09: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랑하는 방식이 존재하는 방식이란 말... 그 정언과 맞닥뜨리는 순간들이 종종 있지요.
그 말을 믿으면서도, 그 말을 실천하며 살기란 쉽지 않네요.

브리즈 2004-10-27 00: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소설도 영화도 상당한 울림을 주었던 기억이 납니다. 특히, 영화 속 몰리나 역을 연기한 윌리엄 허트는 최고라는 말이 아깝지 않다는 생각입니다. 뒤늦긴 했지만, 잘 읽었습니다. ^^..

에레혼 2004-10-27 01: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브리즈님, 제 방에서 뵈니 반갑습니다......

제 생각에는 영화도 수작이었지만, 원작의 깊이랄까 시각을 충분히 담아 내지는 못한 것 같아요, 두 장르 간의 본질적 거리 때문일 수도 있겠지만.
전 윌리엄 허트의 열연만큼이나, 마누엘 푸익의 길고 긴 각주들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처음에는 그 각주의 분량이 버겁게 느껴졌지만, 읽어 갈수록 아주 쫀득쫀득한 묘미가 있더라구요.

딸기 2004-12-21 00: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땡스 투...입니다

runic 2006-04-29 00: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재작년에 쓰신 리뷰군요. 느닷없이 제게 잊을 수 없는 대사가 생각나서 남깁니다. 영화에서 윌리엄 허트가 이런 말을 하지요. "행복할 때 가장 좋은 건 다시는 불행하지 않을 것 같다는 느낌이야" 책에도 이 대사가 있는지 모르겠네요. 좋은 리뷰 잘 봤습니다.
 
솔라리스 그리폰 북스 7
스타니스와프 렘 지음, 강수백 옮김 / 시공사 / 1996년 6월
평점 :
절판


<솔라리스>

(스타니스와프 렘 원작, 강수백 옮김, 시공사 그리폰 북스 007)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 감독)

 


그럴 때가 있다. 내가 지금 여기 이렇게 '분명하게' 존재하고 있는데도, 이렇게 무언가를 먹고 보고 느끼고 생각하고 잠자고 사람들과 얘기하고 있는 이 순간이 비현실이고, 진짜 나 자신은 어딘가 다른 곳에 가 있는 듯한 느낌이 들 때. 여기 있는 나를 물끄러미 지켜보고 있거나, 그런 나를 기억하는 또 다른 내가 있는 듯한 느낌이 들 때. 그럴 때 나는 생각한다. 우리는 확실하고 유일한 하나의 삶 속에서만 살고 있는 게 아닌지도 모른다고. 두 겹, 세 겹, 때로는 몇 겹의 삶을 동시에 살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고. 우리는 일상이라는 분명해 보이는 현실을 살면서, 기억이라는 이름의 길을 따라 하염없이 걷기도 하고, 아직 살아 보지 않은 시간을 마치 '산 것처럼' 살고 있기도 하다. 거기에는 내가 아는 나와 내가 아직 발견하지 못한 나와 내가 잊고 싶어하는 나와 언젠가 한번은 만나 보기를 꿈꾸는 나가 함께 살고 있다.
SF란 장르는 바로 이런 데서 출발했는지도 모를 일이다. 여러 겹의 삶이 동시에 가능하다는 생각, 우리가 '현실'이라고 부르는 꼭 지금 여기만이 아닌 다른 세계가 동시에 가능하리라는 상상과 믿음에서...... 그리고, 어쩌면 세계란, 우주란 실은 우리 자신도 이해하지 못한 채 우리가 기억하고 상상하는 바로 그런 모습일지도 모를 일이다. 우리의 기억이 만들어 내는 세계... 내가 알고 있는 것이 시작이자 끝인 세계... 진정으로 이해하지 못하는 한 소통도, 현존도 없는 세계... 그러나 '이해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결국은 본질적으로 '이해한다'는 것이 부질없는 허공의 개념인 그런 세계. 
   
스타니스와프 렘의 원작 소설을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가 영화로 만든 <솔라리스>는 바로 그런 세계의 밑그림에서 탄생한 우주의 한 공간이다.
붉은 태양과 푸른 태양, 두 개의 태양 주위를 복잡한 궤도를 그리며 돌고 있는, 바다로 뒤덮인 행성 솔라리스. 조사 결과 그 바다는 스스로 생각하는 힘을 가진 자율적인 세계인 것으로 판명된다. '생각하는 바다' '현자의 바다' 또는 '자폐증적 바다'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바다에 둘러싸인 행성 솔라리스의 신비를 캐기 위해 지구에서 파견된 우주 심리학자 크리스 켈빈.
솔라리스에 도착한 켈빈은 여기에 먼저 와 있던 두 과학자를 만난다. 스나토우와 사르토리우스 두 사람이며, 물리학자 기바리안은 이미 자살한 후였다. 도착한 직후부터 이상한 일들을 겪으면서 켈빈은 행성 솔라리스의 '생각하는 바다'에 대해서 체험하게 된다. 솔라리스의 바다는 인간 의식의 가장 깊숙한 내면에 감추어진 기억을 읽어내고, 그 이미지를 구체화해서 다시 그 기억의 주체에게로 되돌려 보낸다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켈빈이 만나게 된 것은 10년 전에 세상을 떠난 자신의 아내 레야(타르코프스키의 영화에서는 '하리'라는 이름으로 바뀌었다). 켈빈의 기억에서 재생된 아내 레야는 아련한 추억의 입자처럼 허망하면서도 꿈결처럼 아름답다. 실제로 그녀는 말 그대로 켈빈의 꿈이기도 하다. 솔라리스의 '생각하는 바다'가 자료로 삼은 건 바로 켈빈의 기억과 욕망과 죄의식이었으니까. 10년 전, 레야는 켈빈과 한바탕 다툼 끝에 그만 홧김에 그가 실험하려고 냉장고에 넣어 두었던 약품을 먹고 자살해 버렸다.

"그녀는 내가 마지막으로 보았던 모습 그대로였다. 그때는 열 아홉 살의 소녀였다. 살아 있다면 지금은 스물 아홉 살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당연한 일이지만 죽은 자는 영원한 젊음을 유지하는 것이다."( 76쪽)

지금 켈빈 앞에 나타난 이 여자는 진짜 레야가 아니라 레야의 복제물이다. 그것도 레야의 기억이 아니라 켈빈의 기억이 만들어 낸..... 자신의 기억이 만들어 낸 존재와 사랑하게 되면, 그 사랑은 실재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까. 기억의 복제물에게 느끼는 사랑은 예전에 실존했던 인물, 과거에 자신이 사랑했던 '진짜 그 사람'에 대한 배반이자 불륜은 아닐까.

"이게...... 나일까요?"
내 입술이 그녀의 이름을 소리 없이 불렀고, 그녀는 나를 대신해서 질문했다.
"레야라고요? 하지만...... 난 레야가 아니에요. 그럼 난 누구죠? 그리고 당신, 당신은 누구예요?"
...................
"당신은 여기 있어. 당신은 존재하고 있어. 내겐 그것만으로도 충분해."
긴 침묵이 흘렀다. 그는 고개를 떨구고 속삭이듯이 말했다.
"당신은 나를 레야라고 부르지만...... 나는 내가 당신이 예전에 사랑했던 여자가 아니라는 걸 알아요." (201- 203쪽)

솔라리스의 레야는 진짜 레야의 복제물이 아니라 켈빈이 '기억하고 있는' 레야를 재구성한 것이다. 그래서, '자신의 기억을 갖고 있지 않은' 그녀는 이렇게 말한다.

"마치 뭔가를 잊어버린 것 같은 기분이 들어요. 기억나는 건 당신일 뿐이고 그 외에는......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아요."(83쪽)


내가 나인 것은 '나의 기억' 때문일까. 내가 나라고 알고 있고, 그렇게 받아들이고 있는 기억이 나라는 존재를 만드는 것일까. 나의 육체가 소멸해도 나의 기억을 다른 육체에 옮겨 놓으면 내 정체성은 유지되는 것일까. 켈빈의 기억을 통해 다시 물질화된 레야처럼......

이런 '기억과 존재'의 상관 관계에 대한 질문과 함께 <솔라리스>는 우리와 다른 세계에 대한 '이해와 소통'이란 주제에 대해서도 질문을 던지고 있다. 우리에게 다른 세계란 무엇일까.

"그건 마치 해독 불가능한 언어로 씌어진 책으로 꽉 찬 도서관 안에서 헤매는 것과 마찬가지야.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하고 기껏해야 책표지 색깔이나 바라보는 주제에!" (226쪽)

"우리는 모든 별과 행성에 이름을 붙였지만, 그러나 그 모두가 처음부터 자기 이름을 가지고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것, 그리고 이 행성의 바다는 "우리와는 다른 방법으로 '보고' 있다는 것을, 우리가 서로의 존재를 보는 것처럼 우리를 지각하고 있는 건 아니라는 것"을 이해하게 된 것이다. (251쪽)

이처럼 원작 소설 <솔라리스>는 인간과 미지의 외계 존재와의 커뮤니케이션의 단절에 대해서 얘기하고 있다. 이 우주에는 인간이 아무리 애써 봐도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존재가 있을 수 있고, 그러한 현실은 이 광막한 우주에서 인간이 얼마나 작고 미약한 존재인가를 깨닫게 해줄 것이라는 얘기다. 렘은 소설에서 묻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우주의 척도로 볼 때 단지 고독한 군중의 일부인 것은 아닐까?"라고.
이런 소설의 시각을 타르코프스키는 자기 식으로 해석해서 펼쳐 보여준다. 영화는 완전한 이해와 소통이 불가능한 단절을 인간에게 가장 소중한 것을 상실한 데 대한 아픔으로 승화시켰다. 인간에게 가장 소중한 것, 바로 사랑을 얘기하고 있는 것이다. 켈빈을 비롯한 솔라리스의 우주인들은 지구를 멀리 떠나 온 광막한 우주에서 비로소 잊고 지냈던 양심과 죄의식과 수치심을 되찾게 된다. 켈빈은 양심의 고통을 통해 인간의 영혼을 살리는 가장 중요한 힘인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을 회복하고 새롭게 태어나 지구로 돌아온다.
 
"우리가 원하는 건 인간 이외의 그 어느 것도 아니야. 지구 이외의 다른 세계 같은 건 필요 없어. 다만 우리를 비출 거울이 필요한 것뿐이야. 다른 세계 같은 건 어떻게 다뤄야 하는지도 모르고 있어. 우리에겐 지구 하나만으로도 충분하니까. 그렇지만 그 지구만으로는 뭔가 불충분한 것같이 느끼지. 그래서 우주에서 이상향을 찾아보려고 하는 거야. 우리는 지구 문명보다 더 완전하고 우수한 문명을 가진 세계를 찾아 우주로 나가지만, 실제로는 우리의 미개했던 과거의 연장선상에 있는 존재를 찾아 헤매고 있는 거야." (105쪽)

영화는 처음으로 다시 돌아온다. 켈빈은 집을 향해 걸어간다.
그리고 창문 너머로 안을 들여다본다. 그 안에 아버지가 보인다. 두 사람은 서로 창문 사이로 마주 본다. 집에서 천천히 나온 아버지 앞에 켈빈은 무릎을 꿇고 앉아 아버지를 감싸 안는다. 그때 카메라는 빠르게 하늘로 날아오르고, 두 사람은 하나의 작은 점이 되고, 이제 지구는 우주의 광활한 바다에 떠 있는 작은 섬, 하나의 작은 행성일 뿐이다.
 
 SF는 은유와 상징의 언어이다. 알 수 없는 거대한 우주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 같지만 실은 '현실'을 말하고 있다. 솔라리스를 방문해 자신의 기억과 잠재 의식의 상처와 싸우고 돌아오는 크리스 켈빈의 존재는 바로 우리 자신의 모습이다. 매순간 타자와 관계 맺으며 살아가는 인간의 존재 조건을 보여주는. 자신의 궤도를 돌다 가끔씩 같은 궤도를 지나는 또 다른 행성과 조우하는 밤하늘의 별들처럼, 불확실하고 막막한 '타자'라는 거대한 우주에 몸을 던질 수밖에 없는 운명을 가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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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리즈 2004-11-15 22: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원작인 소설은 읽지 않았지만, 타르코프스키의 영화 "솔라리스"는 혼란과 매혹을 동시에 전해줬던 작품이었습니다. 대학 때 영문 자막이 달린 비디오로 본 후 DVD를 통해 제대로 영화를 본 것도 불과 1, 2년 전이네요.

영화와 소설을 동시에 들여다보는 일.. 참 재미있는 일이지만, 수고도 만만찮을 것 같습니다. 저같이 게으른 사람에겐 말이죠. ^^..
 
피아노 치는 여자 - 2004 노벨문학상
엘프리데 옐리네크 지음, 이병애 옮김 / 문학동네 / 1997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피아니스트>

 (원작 엘프리데 옐리네크 , <피아노 치는 여자>, 이병애 옮김, 문학동네)

(미카엘 하네케 감독, 이자벨 위페르 주연)
)

 

 

닫힌 세계, 출구 없는 공간, 지금보다 조금도 더 나아질 것 없는 미래 안에서 사는, 결혼하지 않은 여자는 자신의 욕망과 관능과 생에 대한 사랑을 어떻게 풀어내야 할까. 마음의 감옥, 정신적 폐허에 갇혀 있는 사람은 자신을 가두고 있는 그 방의 문을 어떻게 열고 나와야 할까.
  미카엘 하네케 감독이 만든 영화 <피아니스트>는 이런 물음을 그 배경음으로 깔고 있다.

  이 영화의 원작은 언제나 논쟁적인 작품을 발표해 온 오스트리아 작가 엘프리데 옐리네크의 소설 <피아노 치는 여자>이다. <피아노 치는 여자>는 음악과 독문학, 연극학을 전공한 옐리네크 자신의 자서전적인 성격이 강한 소설이며, 프로이드와 라캉의 심리 분석적인 틀로도 분석할 수 있는 작품이다. 주인공 에리카처럼 옐리네크도 자신을 피아니스트로 만들려고 했던 어머니를 증오했다고 한다.

  피아노 치는 여자, 에리카의 삶에서 미소를, 윤기를, 관능을, 감각을 빼앗아간 건 무엇일까. 영화는 그걸 냉혹하고도 건조한 시선―이미 <퍼니 게임>으로 우리에게 오래도록 잊지 못할 충격을 안겨 준 바 있는 미카엘 하네케답게―으로 우리 앞에 펼쳐 보여준다. 우리, 그 여자의 삶을 따라가 보자.(여기서 굵은 글씨체는 건조하고도 격정적인 옐리네크의 표현, 소설의 문체를 그대로 옮겨 온 것이다.)
 
  오스트리아 빈 음악원 피아노 교수인 에리카는 어머니와 둘이 산다. 어머니는 마흔이 다 된 딸의 귀가 시간을 일일이 체크해서 정해진 시간표에서 조금이라도 어긋나면 득달같이 전화를 해대고, 옷 하나 사는 것도, 옷차림도 일일이 간섭한다. 어머니에게 딸은 모든 것이다. 하나밖에 없는 딸이자, 지금은 자기 곁에 없는 남편이자, 연인이자, 말벗이자, 함께 밥을 먹는 식구이자, 질투와 시기의 대상이자, 자기 삶의 약탈자이다. 그 딸과 어머니는 매일 밤 한 침대(커다란 부부 침대!)에서 나란히 잔다. 에리카의 집은 어머니의 사랑으로 충만한, 잔인한 잿빛 나라이다. 이 닫혀 있는 집에서 에리카는 하나의 공식을 유추해 낸다. 즉 그렇게 오랜 세월을 어머니에게 종속되어 살아온 자신이 이후에 결코 한 남자에게 종속될 수는 없다는 그런 공식이다.
  에리카는 집을 나설 때마다 버버리 코트로 몸을 감싸고 장갑을 낀다. 그녀의 맨손이 세상과 악수하는 건 오직 피아노를 치는 순간에만 허용된다. 에리카의 얼굴에서는 마치 장갑 낀 그녀의 손처럼 표정을 읽을 수 없다. 표정이 지워져 있는 냉랭한 얼굴의 그녀가 학교에서 집으로 가는 길에 들르곤 하는 또 다른 닫힌 세계들. 
  포르노 비디오 가게의 밀폐된 방안에서 남녀의 성기가 클로즈업된 화면을 보며 쓰레기통에서 정액 묻은 휴지를 집어들어 냄새를 음미하는 에리카. 그녀는 보여지는 대상이 아니라 훔쳐보는 주체이다. 어두컴컴한 자동차 극장에서 연인들의 카 섹스를 훔쳐보며 참을 수 없는 요의를 느끼고 배설하는 에리카. 그것은 음악과는 거리가 먼 느낌, 오직 몸 속에 꽉 차 있는 걸 뜨겁게 오래도록 쏟아내고자 하는 방뇨이다.
  어머니가 저녁을 차리는 동안 욕실에 들어가 거울로 자신의 음부를 들여다보며 아버지가 쓰던 면도칼로 다리 안쪽 살을 저며 내는 에리카. 그녀의 취미는 자신의 몸을 자르는 것이다. 그녀는 온통 피투성이가 되어 자신이 무엇을 잘랐는지 알아볼 수 없다. 그녀 자신의 육체였지만 이 육체는 그녀에게 무섭도록 생소하다.  배설과 배출이 혼동되는 무채색의 닫혀 있는 이 세계. 소통 없는 공간. 여기가 에리카가 사는 세계이다.     
  그런 그녀 앞에 훔쳐보기만 하는 존재가 아닌 진짜 살아 있는 남자, 젊고 잘생긴 제자 클레머가 등장한다. 그는 에리카가 다른 여자들처럼 자신의 부드러운 키스와 달콤한 속삭임에 취할 것이라 믿는다. 마침내 찾아온 격정의 시간, 클레머는 에리카를 바닥에 눕혀 그녀의 몸을 정복하려 하지만 에리카는 클레머를 애무하다 멈추고 자신의 말에 복종할 것을 요구한다.  에리카는 자신이 원하는 종속의 형태를 편지에 써서 클레머에게 요구한다. "사슬에 묶은 채 나를 여러 시간 동안 쓰러뜨려 두고, 내 몸의 모든 곳을 때리고 밟고 채찍질하는 거야!" 에리카는 말하지 않고 글로 적는다. 그녀가 그의 아래에서 완전히 사라지거나 소멸되기를 원한다고. 자신을 묶고 때리고 입을 틀어막고 물어뜯으라고. 이제부터는 "네가 명령해!"라고. "나를 고통스러운 상태로 몇 시간이고 헐떡이게 놔둬서, 그러는 사이에 내가 전혀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되고, 완전히 나 자신과만 그리고 내 안에서만 존재하게 해 줘."
  클레머는 한때 자신에게 성적 환상을 불러일으켰던 이 여자가 이제 더없이 끔찍해진다. 빨리 그녀 곁을 떠나고 싶다. 그러나, 혐오감과 모멸감에 난폭해진 클레머는 다시 에리카를 찾아온다. 에리카는 자신이 간절히 원했으나 결코 실현되지 않기를 바랐던(그녀는 클레머가 자기를 정말 사랑하기 때문에 이 모든 일을 행하지 않기를 바라고 있다) 소망을 처참하게 이룬다. "이게 바로 네가 원했던 거야!" 잔혹하게 펼쳐지는 클레머의 폭력과 강간. 그는 끝내 이해하지 못했던 것이다. 에리카가 거부한 것은 '사랑'이 아니라 기존의 '사랑의 방식'이라는 것을. 자신과 그녀, 두 사람의 언어가 다르다는 것을.

  자, 여기까지 에리카의 길을 따라온 당신... 이 여자를 비난하고 싶은가. 이 여자가 혐오스러운가. 이 여자로부터 도망치고 싶은가. 혼란스러운가. 아니면, 이 여자 때문에 아픈가. 극심한 통증을 느끼는가. 자신이 제 몸에 꽂은 칼로 입은 상처를 감싸안고 '집으로' 걸어가는 이 여자의 그 피 흘리는 어깨를, 천천히 피가 식어 가고 있는 심장을, 당신은 어떤 눈으로 바라보고 있는가. 당신의 그 시선이 바로 지금 당신이 세상에 서 있는 방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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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없는 이 안 2004-09-17 23: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런 영화, 막상 보고 나면 할 이야기는 무척 많은데 정작 보게 되기까지는 많은 시간이 걸려요. 전요... 굳이 편안한 영화를 원하는 건 아니지만, 마음이 지나치게 다칠 것 같은 영화는 결국 보게 되면서도 안 본다는 말을 공공연히 하게 되지요. 이 영화의 리뷰는 님의 훌륭한 글까지 벌써 여러 글들을 보면서 속으로 또 한번 덧칠하네요. 그래도 안 봐, 하면서요. 끝내 안 보게 될까요? ^^

에레혼 2004-09-18 09: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내가 없는 이 안님, 그래도 끝내 안 보실 건가요?^^
님의 안에는 이미 이 여자 에리카가 들어가 있을 것 같은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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