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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아노 치는 여자 - 2004 노벨문학상
엘프리데 옐리네크 지음, 이병애 옮김 / 문학동네 / 1997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피아니스트>
(원작 엘프리데 옐리네크 , <피아노 치는 여자>, 이병애 옮김, 문학동네)
(미카엘 하네케 감독, 이자벨 위페르 주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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닫힌 세계, 출구 없는 공간, 지금보다 조금도 더 나아질 것 없는 미래 안에서 사는, 결혼하지 않은 여자는 자신의 욕망과 관능과 생에 대한 사랑을 어떻게 풀어내야 할까. 마음의 감옥, 정신적 폐허에 갇혀 있는 사람은 자신을 가두고 있는 그 방의 문을 어떻게 열고 나와야 할까.
미카엘 하네케 감독이 만든 영화 <피아니스트>는 이런 물음을 그 배경음으로 깔고 있다.
이 영화의 원작은 언제나 논쟁적인 작품을 발표해 온 오스트리아 작가 엘프리데 옐리네크의 소설 <피아노 치는 여자>이다. <피아노 치는 여자>는 음악과 독문학, 연극학을 전공한 옐리네크 자신의 자서전적인 성격이 강한 소설이며, 프로이드와 라캉의 심리 분석적인 틀로도 분석할 수 있는 작품이다. 주인공 에리카처럼 옐리네크도 자신을 피아니스트로 만들려고 했던 어머니를 증오했다고 한다.
피아노 치는 여자, 에리카의 삶에서 미소를, 윤기를, 관능을, 감각을 빼앗아간 건 무엇일까. 영화는 그걸 냉혹하고도 건조한 시선―이미 <퍼니 게임>으로 우리에게 오래도록 잊지 못할 충격을 안겨 준 바 있는 미카엘 하네케답게―으로 우리 앞에 펼쳐 보여준다. 우리, 그 여자의 삶을 따라가 보자.(여기서 굵은 글씨체는 건조하고도 격정적인 옐리네크의 표현, 소설의 문체를 그대로 옮겨 온 것이다.)
오스트리아 빈 음악원 피아노 교수인 에리카는 어머니와 둘이 산다. 어머니는 마흔이 다 된 딸의 귀가 시간을 일일이 체크해서 정해진 시간표에서 조금이라도 어긋나면 득달같이 전화를 해대고, 옷 하나 사는 것도, 옷차림도 일일이 간섭한다. 어머니에게 딸은 모든 것이다. 하나밖에 없는 딸이자, 지금은 자기 곁에 없는 남편이자, 연인이자, 말벗이자, 함께 밥을 먹는 식구이자, 질투와 시기의 대상이자, 자기 삶의 약탈자이다. 그 딸과 어머니는 매일 밤 한 침대(커다란 부부 침대!)에서 나란히 잔다. 에리카의 집은 어머니의 사랑으로 충만한, 잔인한 잿빛 나라이다. 이 닫혀 있는 집에서 에리카는 하나의 공식을 유추해 낸다. 즉 그렇게 오랜 세월을 어머니에게 종속되어 살아온 자신이 이후에 결코 한 남자에게 종속될 수는 없다는 그런 공식이다.
에리카는 집을 나설 때마다 버버리 코트로 몸을 감싸고 장갑을 낀다. 그녀의 맨손이 세상과 악수하는 건 오직 피아노를 치는 순간에만 허용된다. 에리카의 얼굴에서는 마치 장갑 낀 그녀의 손처럼 표정을 읽을 수 없다. 표정이 지워져 있는 냉랭한 얼굴의 그녀가 학교에서 집으로 가는 길에 들르곤 하는 또 다른 닫힌 세계들.
포르노 비디오 가게의 밀폐된 방안에서 남녀의 성기가 클로즈업된 화면을 보며 쓰레기통에서 정액 묻은 휴지를 집어들어 냄새를 음미하는 에리카. 그녀는 보여지는 대상이 아니라 훔쳐보는 주체이다. 어두컴컴한 자동차 극장에서 연인들의 카 섹스를 훔쳐보며 참을 수 없는 요의를 느끼고 배설하는 에리카. 그것은 음악과는 거리가 먼 느낌, 오직 몸 속에 꽉 차 있는 걸 뜨겁게 오래도록 쏟아내고자 하는 방뇨이다.
어머니가 저녁을 차리는 동안 욕실에 들어가 거울로 자신의 음부를 들여다보며 아버지가 쓰던 면도칼로 다리 안쪽 살을 저며 내는 에리카. 그녀의 취미는 자신의 몸을 자르는 것이다. 그녀는 온통 피투성이가 되어 자신이 무엇을 잘랐는지 알아볼 수 없다. 그녀 자신의 육체였지만 이 육체는 그녀에게 무섭도록 생소하다. 배설과 배출이 혼동되는 무채색의 닫혀 있는 이 세계. 소통 없는 공간. 여기가 에리카가 사는 세계이다.
그런 그녀 앞에 훔쳐보기만 하는 존재가 아닌 진짜 살아 있는 남자, 젊고 잘생긴 제자 클레머가 등장한다. 그는 에리카가 다른 여자들처럼 자신의 부드러운 키스와 달콤한 속삭임에 취할 것이라 믿는다. 마침내 찾아온 격정의 시간, 클레머는 에리카를 바닥에 눕혀 그녀의 몸을 정복하려 하지만 에리카는 클레머를 애무하다 멈추고 자신의 말에 복종할 것을 요구한다. 에리카는 자신이 원하는 종속의 형태를 편지에 써서 클레머에게 요구한다. "사슬에 묶은 채 나를 여러 시간 동안 쓰러뜨려 두고, 내 몸의 모든 곳을 때리고 밟고 채찍질하는 거야!" 에리카는 말하지 않고 글로 적는다. 그녀가 그의 아래에서 완전히 사라지거나 소멸되기를 원한다고. 자신을 묶고 때리고 입을 틀어막고 물어뜯으라고. 이제부터는 "네가 명령해!"라고. "나를 고통스러운 상태로 몇 시간이고 헐떡이게 놔둬서, 그러는 사이에 내가 전혀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되고, 완전히 나 자신과만 그리고 내 안에서만 존재하게 해 줘."
클레머는 한때 자신에게 성적 환상을 불러일으켰던 이 여자가 이제 더없이 끔찍해진다. 빨리 그녀 곁을 떠나고 싶다. 그러나, 혐오감과 모멸감에 난폭해진 클레머는 다시 에리카를 찾아온다. 에리카는 자신이 간절히 원했으나 결코 실현되지 않기를 바랐던(그녀는 클레머가 자기를 정말 사랑하기 때문에 이 모든 일을 행하지 않기를 바라고 있다) 소망을 처참하게 이룬다. "이게 바로 네가 원했던 거야!" 잔혹하게 펼쳐지는 클레머의 폭력과 강간. 그는 끝내 이해하지 못했던 것이다. 에리카가 거부한 것은 '사랑'이 아니라 기존의 '사랑의 방식'이라는 것을. 자신과 그녀, 두 사람의 언어가 다르다는 것을.
자, 여기까지 에리카의 길을 따라온 당신... 이 여자를 비난하고 싶은가. 이 여자가 혐오스러운가. 이 여자로부터 도망치고 싶은가. 혼란스러운가. 아니면, 이 여자 때문에 아픈가. 극심한 통증을 느끼는가. 자신이 제 몸에 꽂은 칼로 입은 상처를 감싸안고 '집으로' 걸어가는 이 여자의 그 피 흘리는 어깨를, 천천히 피가 식어 가고 있는 심장을, 당신은 어떤 눈으로 바라보고 있는가. 당신의 그 시선이 바로 지금 당신이 세상에 서 있는 방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