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하는 것은 언어이지 저자가 아니다.
글쓰기의 공간은 답사하는 것이지 꿰뚫는 것이 아니다. 글쓰기는 끝없이 의미를 상정하지만, 그러나 그것은 언제나 의미를 증발하기 위해서이다. 글쓰기 의미를 체계적으로 비워 나간다.
독자의 탄생은 저자의 죽음이라는 대가를 치러야 한다
-- 롤랑 바르트, <텍스트의 즐거움>( 김희영 옮김, 東文選) 중에서
내가 제외된 이미지들은 모두 잔인하다. 그러나 때로 내가 이미지에 사로잡히기도 한다(역전). 그 사람을 다른 사람과 함께 남겨놓고 떠나야 하는 카페의 테라스로부터 멀어지면서, 나는 등이 구부정한 채 홀로 황폐한 거리를 걸어가는 자`신`의` 모`습`을` 본`다`. 나의 제외됨을 이미지로 전환시키는 것이다. 내 부재가 거울에서처럼 반사된 이 이미지는 서`글`픈` 이미지이다.
-- 롤랑 바르트, <사랑의 단상>(김희영 옮김, 문학과지성사), '이미지' 중에서
"휴가 중에 나는 7시에 일어난다. 내려가 문을 열고, 차를 끓이며, 창문을 열고 마당에서 기다리고 있는 작은 새들을 위하여 빵을 잘게 부수어주고, 세수하고, 작업실 책상 위의 먼지를 털고, 재떨이의 재를 비우고. 장미꽃 한 송이를 따며, 7시 반의 뉴스를 듣는다.
8시가 되면 어머니가 내려오실 차례이다. 나는 그녀와 함께 아침 식사로 반숙 계란 두 개와 구운 빵 둥근 한쪽을 먹고, 설탕을 넣지 않은 블랙커피를 마신다.
8시 15분에 나는 <쉬드-웨스트Sud-West> 신문을 사러 동네에 간다. 나는 C. 부인에게 '좋은 날씨입니다' '날이 흐리군요' 등의 말을 건넨다. 그런 후에 나는 일을 시작한다.
9시 반에는 우편배달원이 지나간다('울적한 날씨입니다' '오늘은 참으로 좋은 날씨입니다' 등). 잠시 후에 빵을 가득 실은 소형 트럭을 타고 빵집 여자의 딸이 돌아온다(그녀는 공부를 한 여자이기 때문에 날씨 이야기와 같은 진부한 인사를 나눌 여지가 없다).
10시 반 정각에 나는 블랙커피를 마시고 하루의 첫 궐련을 피운다.
오후 1시 우리들은 점심을 먹는다.
1시 반부터 2시 반 사이에는 낮잠을 잔다.
그후에 나는 우물쭈물하고 마는 시간을 맞는다. 거의 일할 기분이 나지 않는 시간인 것이다. 때로는 잠시 그림을 그려보든지, 약국에 아스피린을 사러 가든지, 뜰의 구석진 곳에서 종이를 태우든지, 작은 책상이나 정리대, 카드 정리함을 만들든가 한다.
이럭저럭 하는 사이에 4시가 되고, 재차 나는 일을 시작한다.
5시 15분에 차를 마신다.
7시경에 일을 끝낸다. 마당에 물을 뿌리고(날씨가 좋을 경우), 피아노를 친다.
저녁식사 후에는 텔레비전 감상 시간이다. 만약 그날의 프로그램이 신통치 않을 때에는 내 책상으로 돌아와 메모장들을 정리하면서 음악을 듣는다.
나는 10시에 잠자리에 들며 두 권의 책을 연이어 잠깐 읽는다. 그 중 한 쪽은 매우 문학적인 언어들에 의해 씌어진 작품(라마르틴느Lamartine의 <속내 이야기Confidences>, 공쿠르Goncourt 형제의 <일기Journal> 등)이며, 다른 한쪽은 추리소설(차라리 옛날 것)이나 유행에 뒤떨어진 영국 소설, 혹은 졸라 작품이다."
- 이 모든 행위는 아무런 흥미를 끌지 못한다. 훨씬 그 이상이다: 당신은 자신이 어느 계급에 속해 있는가를 두드러지게 표시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 표지를 사용하여 하나의 문학적인 속내 이야기를 만들고 있다. 그런 '부박함'은 더 이상 받아들여지지도 않는다. 당신은 환상적으로 자기를 '작가'로서 구성하고 있다. 혹은 더 나쁘게 이야기하자면, 당신은 당신 자신을 '구성하고' 있는 것이다.
-- 롤랑 바르트, <롤랑 바르트가 쓴 롤랑바르트>(이상빈 옮김, 강)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