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녀의 한국 이름은 '이중아' 또는 '이정아'이다. 그녀 자신은, 그리고 지금 그녀와 같이 살고 있는 남자는 그녀의 이름을 '이중아'라고 알고 있고, 그렇게 말하고 부른다.
작가 인정옥은 이 이름에 중층적인 의미와 상징을 입히고 싶었을 것이라고 짐작한다.
그녀는 아일랜드인도, 한국인도 아닌, '이중의 삶'을, '이중의 시간'을, '이중의 육체의 기억'을 가지고 있다. 아일랜드에서의 삶이 몇 발의 총성으로 산산이 흩어져 버리고 난 뒤 한국으로 오는 첫 비행기 안에서, 그녀는 옆자리의 남자에게 묻는다. "내가 어느 나라 사람으로 보여요?"
그녀는 자신이 세상에 어떻게 받아들여질지, 자신의 존재의 뿌리가 어디에 있는지, 그 뿌리를 어디로 내려 뻗어야 할지, 알 수 없어서 혼란스럽고 두렵다. 자신이 누구인지 알지 못하는 것도 고통스럽지만, 자신이 누구인지를 '더 이상 가릴 데 없이 환한 햇빛 아래' 직시하는 것도 두려운 일이다.
그녀는 서울 시청 앞 광장 한 구석, 채 굳지 않은 시멘트 바닥 위에 자신의 발자국을 남긴다. 이제 그 발자국은 흔들림 없이, 지워짐 없이, 견고한 흔적으로 거기 남아 있을 것이다. 그 순간 그 자리에 그녀가 '존재하고 있었음'을 분명하게 증명해 줄 것이다. 그 발자국 옆에 한 남자가 자신의 발자국을 남긴다. 여자가 당혹해 할까봐, 세상이 그녀의 행동을 이해하지 못할까봐 우려해서였다. 그때 여자는 자기 옆에 같이 발자국을 찍어 준 남자에게 말한다. "당신, 참 착해요."

또 다른 한 남자가 있다. 배운 것 없고, 기댈 데 없고 희망도 미래도 없는 백수 건달. 어느 날 3류 에로 영화배우를 만나 그녀의 집에 얹혀 살게 된다. 여자는 자신의 '몸으로' 남자를 먹여 살려 줄 테니, 대신 그의 '마음으로' 자기 눈물을 받아 달라고 한다. 남자는 여자의 좌절과 상심과 외로움을, 희망 없는 미래를, 짐 많은 가장의 부담을, 그 축축한 습기를 비어 있는 마음의 습자지로 흡수해 준다. 자기 딸이 벌어오는 돈으로 먹고 사는 식구가 한 입 늘어났지만, 여자의 부모들은 그 남자를 보고 말한다. "쟤, 참 착해, 그지?"
그녀, 이중아는 또 다른 남자를 만난다. 그에게 자꾸 마음이 간다. 그녀는 그 남자가 자신의 마음에 집을 짓고 있는가 보다, 고 말한다. 자신의 마음에 이해하지 못할 그 무엇이 물들어 가고 있음을 숨김없이 털어놓으며, 그녀는 함께 사는 남자에게 말한다. "나, 나쁜 년이지?"
그 무언가에 도발된 마음의 흐름, 자기 안에 어떤 감정의 스며듦과 번짐에 민감하게 몰두해 있을 때, 한 대상을 향한 욕망과 갈망에 거침없이 솔직할 때, 바로 온전히 자기 자신에게만 집중해 있을 때, 사람들은 그런 마음의 움직임을 '착하다'라고 얘기하지 않는다. 사람들이 '착하다'라고 얘기하는 것은, 자기 마음보다 상대방의 마음을 먼저 헤아려 주거나 자기 마음이 '제 맘대로' 달려가는 것을 자제하거나 다스릴 수 있을 때에 한한다.
나는 사람들이 더 이상 착해지지 않았으면 좋겠다. 착한 사람들보다 진짜 자기 자신으로 사는 사람들이 더 많아지면 좋겠다. 그런 세상이 더 숨쉬기가 편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