딱히 내 몸이 고단할 이유가 없는데, 이사랍시고 다른 이들의 몸(힘)을 빌려 짐을 꾸리고 풀고 이리저리 짐을 부려놓으라고 나는 말로만 다 때웠을 뿐인데, 그리고 창고 속에 밀어 넣은 크고 작은 상자들과 잡동사니 속에 무엇이 어떻게 자리잡고 있는지 아직 모르는 채 '엄두가 안 나'라고 중얼거리고 있을 뿐인데, 어제부터 몸이 한없이 나른해지고 졸음이 폭풍처럼 몰려든다. 그래서 이것저것 치우고 정리하는 중에 자주 졸거나 아예 잠시 하던 일 밀어놓고  잔다. 낮잠도 자고, 밤잠도 잔다.
 
이사의 여파가 남아 있는, 그리고 아직 내 몸이 길들여지지 않은, 어딘가 낯설고 버성거리는 느낌의 새 집에서 처음으로 누구도 찾아올 일 없는 조용한 오후를 보낸다. 소파에 두 다리를 쭉 펴고 자리잡고 앉아 DVD를 플레이시킨다. <스페니쉬 아파트먼트>.
낯선 도시에서 일 년의 시간을 보내는 청춘. 그것이 이 영화의 모든 것이다. 낯선 도시. 일 년이라는 시간. 그리고 청춘. 그건 어쩌면 꿈꾸지만 지금 내게 멀리 있는, 누리고 싶으나 누릴 수 없는 모든 것이기도 하다.

 



 

 

 

 

 

 

 

 

 

 

 

 

 

 

 

 

 

낯선 도시 바르셀로나에서 거처를 구하는 파리 출신의 청년 자비에. 하나의 냉장고 안에서  칸칸이 각자의 영역을 구분하듯이 공동 생활과 혼자만의 영역의 경계선이 아슬아슬하게 지켜지는 가운데, 자비에와 유럽 각국에서 온 그의 룸메이트들은 1년간의 '청춘의 성장통'을 함께 겪는다. 바르셀로나의 구질구질한 뒷골목과 경탄스러운 가우디의 건축 예술이 하나의 화면 속에 녹아 들어있는 것처럼, 이 영화는 이질스럽고 차별되는 것들의 놀라운 조화의 묘미를 보여준다. 그건 아직 견고한 편견과 닫힌 가치관과 상처받기를 두려워하는 자의식이란 벽돌로 자기 성을 구축하지 않은 미완성의 세계, '계속 길을 걷고 있기에' 흔들리는 청춘들의 잠재력인지 모른다.
1년간의 '낯선 도시 체류'를 마치고 다시 파리로 돌아온 자비에는 너무도 낯익은, 그러나 전과는 어딘가 달라진 몽마르뜨르 거리를 걸으며 눈물을 찔끔거린다. 거리를 지나던 관광객 하나가 그런 그의 얼굴을 카메라에 담는다. 지금까지 자기만의 시선으로 세상을 관찰하던 자비에는 이제 자신 역시 다른 사람의 눈에는 쇼윈도 안의 한 사물처럼, 거리 풍경의 한 조각으로 비쳐질 수 있다는 걸 깨닫는다. 그의 정체성의 외연이 한층 더 넓어진 것일까. 그의 마지막 독백. “어디에도 내 모습은 없어요. 모두를 합친 게 내 모습이에요. 그저 나는 혼란에 빠진 유럽인일 뿐….”


 

 

 

 

 

 

 

 

 

몇 해 전, 처음 유럽이란 대륙으로 여행을 갔을 때 내 머리를 내리치던 충격을 기억한다. 그야말로 세상은 넓고, 그 세상을 살아가는 길은 다양하고 다채로웠다! 내가 태어나 자란 사회가 내게 가르치고 보여준 길 말고도 세상에는 인생을 '제 방식대로' 즐기며 누리며 살 수 있는 길이 얼마나 많은지를 도처에서 마주치고는, 나는 그때마다 묻곤 했다. 내 인생이 지금처럼 빼도 박도 못하게 완전히 틀 지어지기 전에 이런 '다른 길'들이 있다는 걸 알았더라면 나는 지금과 다른 삶을 살지 않았을까. 답은 물론... 이었으나, 현실적으로 무용한 질문이었을 뿐. 그때 이미 나는 '짧은 여행'은 가능하지만, 미지의 열린 길 위를 계속 걸어가는 '낯선 도시에서의 생활'이나 '모험적 시도'는 허용되지 않는 자리에 서 있었다.
그러므로 <스페니쉬 아파트먼트>를 보며 내가 부러워한 건, 이국적 풍경과 그 생활상이 아니라, 청춘 군상의 유쾌하고 귀여운 사랑과 연애 행각이 아니라, 국경 개념이 무너져 버린 유럽 젊은이들의 경계 없는 문화 체험이 아니라, 바로 그들의 결정되지 않은 미래, 아직 아무 것으로도 규정되거나 갇혀 버리지 않은 그 불안정함과 흔들림, 그 끝을 알지 못한 채 계속 걸어가야 하는 노정(路程)의 열려 있음이었다.
   
인상적인 대목 하나. 자비에가 바르셀로나에 도착하던 날, 공항에서 만나게 된 의사 부부. 신경과 전문의인 남자는 자비에에게 자신이 하는 일을 설명하며[대뇌피질, 변연계, 해마 등의 용어들 등장]  재미있는 예시를 하나 든다:
이중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이 사고로 기억에 손상을 입게 되면, 한 가지 언어는 살아남고 다른 한 가지 언어는 기억에서 사라져 버린다. 그때 살아 남는 것은 역시 모국어. 그 뒤 자비에는 일종의 스트레스로 꿈을 꾸게 되는데, 그 꿈속에서 그는 모국어인 '프랑스어'를 잊어버리고 만다. 그에게 남은 것은 현실에서는 더듬거리던 스페인어.
나처럼 한 가지 언어밖에 구사할 줄 모르는 사람은 기억 손상은 크든 작든 곧 언어 손상, 아니 언어 상실과 연결되고 마는 걸까.  단일 언어는 단일한 사고와 단일한 현실밖에 파생시키지 못한다. 내가 가진 유일한 언어, 한 가지 패턴의 삶.......'코리안 아파트먼트'라는 상징.


 
영화는 끝났지만, 나는 다시 낯선 현실로 돌아오는 데 머뭇거린다. 그때 현관 벨이 울린다. 어제 온라인 쇼핑몰에서 주문한 물건을 전달하러 온 택배회사 직원이다. 포장 상자 안에 든 것은 샤워 커튼과 수건 몇 장[필요한 건 샤워 커튼뿐이었으나 배송비를 물지 않기 위해 장바구니에 수건 몇 장을 채워 넣었다]. 내가 잃어버리지 않아야 할 현실의 자리! 나에겐 모국어 아닌 다른 언어가, 대체 언어가 없다. 정신 차리고 나는 현관 문을 닫는다. 

 

Al Stewart - The News From Spa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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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없는 이 안 2004-10-17 02: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머릿속에 있는 여러 언어들이 사이좋게 조금씩 뭉개지는 게 아니라 하나만 사라진다는 것이 너무 희한해요. 언어의 뿌리는 각각의 기억 회로로 분리되어 있나 보군요. 스트레스로 꿈에 등장하는 모국어 상실이라니, 좀 끔찍하기도. 전달하지 못한다는 것도 공포일걸요...

로드무비 2004-10-17 15: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배송비를 물지 않기 위해 쓸데없는 물건을 살 때가 많아요.
배송비를 두서너 배 상회하는......
라일락와인님도 그러하시다니 이렇게 반가울 수가......
스페니쉬 아파트먼트 저도 참 재밌게 봤어요.
바람 피우는 현장 갑자기 들이닥친 그 애인에게 안 들키게 하려고
친구들이 합심하여 달리는 장면에선 미친듯이 웃다가 눈물이 찔끔.

에레혼 2004-10-17 18: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안님, 저도 그 대목이 참 신기하더라구요, 모국어라는 건 태어나면서 유전자에 각인되는 걸까요? 제2의 언어가 학습을 통해 습득되는 거라면...... 나를 전달할 수 없다는 것, 소통의 수단을 잃어버린다는 건 존재 자체를 위협하는 굉장한 두려움일 것 같아요..... 가끔 '나'라는 사람을 있는 그대로 이해받지 못하는 상태나 잠시의 소통 부재만으로도 힘들어하고 아파하는 걸 보면......

로드무비님, 온라인 쇼핑몰에서 그 배송비 체계로 인해 획득하게 되는 추가 주문량이 아마 제법 쏠쏠할 것 같아요, 사람들마다 거의 그런 데 약한 심리를 갖고 있으니까......
배송료 무는 게 공돈 나가는 것 같아 '배보다 배꼽이 더 커지는 식의' 쇼핑 습관을 갖고 있다는 공통점 말고도, 저도 님처럼 '스토아정글'을 자주 애용한답니다. 깜찍한 아이디어 상품들 구경하는 재미도 괜찮고 해서.....근데, 요즘 이름이 바뀌었죠? dvx인가, 입에 잘 안 붙어요......
 

 

잊고, 기억하고

에른스트 얀들


 

나는 나를 나 위에 앉힌다

나는 나를 비운다

나는 나를 헹구어 나 속으로 집어 넣는다

나는 나를 쏟고 흘린다

나는 나를 잊는다

나는 나를 기억한다

나는 나를 얻는다

나는 나를 마무리짓는다

나는 나를 꼬여 나 속으로 넣는다

나는 나를 지치게 한다

나는 나를 잊는다

나는 나를 기억한다

 


 

 

 

 

 

 

 

 

 

 

 

 

 

Jim Ferguson - I Get Along Without You Very Wel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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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IANO MAN / BILLY JOEL

 


It's nine o'clock on a Saturday
The regular crowd shuffles in
There's an old man sitting next to me
Makin' love to his tonic and gin

He says, "Son, can you play me a memory?
I'm not really sure how it goes
But it's sad and it's sweet and I knew it complete
When I wore a younger man's clothes"

La la la, le le la
La la, le le la la la

Chorus:
Sing us a song, you're the piano man
Sing us a song tonight
Well, we're all in the mood for a melody
And you've got us feelin' alright

Now John at the bar is a friend of mine
He gets me my drinks for free
And he's quick with a joke or to light up your smoke
But there's someplace that he'd rather be
He says, "Bill, I believe this is killing me."
As the smile ran away from his face
"Well I'm sure that I could be a movie star
If I could get out of this place"

Oh, la la la, de de da
La la, le le la da da

Now Paul is a real estate novelist
Who never had time for a wife
And he's talkin' with Davy who's still in the navy
And probably will be for life

And the waitress is practicing politics
As the businessmen slowly get stoned
Yes, they're sharing a drink they call loneliness
But it's better than drinkin' alone

Chorus

It's a pretty good crowd for a Saturday
And the manager gives me a smile
'Cause he knows that it's me they've been comin' to see
To forget about life for a while
And the piano, it sounds like a carnival
And the microphone smells like a beer
And they sit at the bar and put bread in my jar
And say, "Man, what are you doin' here?"

Oh, la la la, de de da
La la, de de da da da

Chorus

지금은 토요일 밤 9시예요
단골 손님들이 섞여 들어오고
내 옆에는 진토닉을 즐기고 있는
한 노인이 앉아 있어요

그 노인이 말하기를,
"이봐 청년, 노래 한 곡 연주해 주지 그래?
어떻게 부르는지 잘 모르지만
슬프고 감미로운 노래야.
내가 젊었을 땐 그 노랠
전부 알았었는데..."

후렴
노래 한 곡 불러줘요
당신은 피아노맨이잖아요
오늘밤 우리한테 노래 한 곡 불러줘요
우린 모두 노래가 듣고 싶어요
당신은 우릴 기분 좋게 해주잖아요

바에 있는 존은 내 친구죠
나한테 공짜로
술을 한잔 갖다 줬어요.
그는 농담도 잘 받아들이고
알아서 담배불도 붙여주죠.
하지만 그는 여기가 아닌
다른 곳에 있어야 했어요
"여기서 정말 미칠 것 같애"
그가 이렇게 말할 때
그의 얼굴에선
미소가 사라졌어요
"여기서 벗어날 수만 있다면
난 분명히 영화배우가
될 수 있었을텐데..."

폴은 부동산의 새역사를 쓰는 갑부죠
그는 부인과 같이 지내는
시간이 별로 없었죠.
지금 데이비와 얘길 하고 있어요
데이비는 아직 해군이고
아마 평생 그럴지도 모르죠

그리고 웨이트리스는
사업가가 조금씩 술에 취하자,
돈을 울궈 내려고 하는군요
맞아요, 모두들 함께
외로움이라고들 부르는
술을 마시고 있어요
하지만, 혼자 마시는 것보단 그게 낫죠.

후렴 반복

토요일 치곤 손님이 많군요
매니저가 날 보고 미소를 짓는군요.
손님들이 날 보러
여기에 온다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이죠.
잠시라도 삶을 잊기 위해서.
피아노 소리는
마치 축제 분위기 같고,
마이크는 맥주 냄새가 나요.
사람들은 바에 앉아
내 항아리에 돈을 넣어줘요
그리고 말하죠.
"이봐, 당신 여기서
뭐하고 있는거야?"

후렴 반복

 

 

이 노래는 빌리 조엘이 가수로서 성공하기 이전에 만든 곡이라고 한다.
아마추어 복서, 록가수, 페인트공 생활... 이런 저런 일들을 하면서 방황하던 시기의 산물.
딱히 되는 일도 없고, 그렇다고 꿈꾸기를 멈추지도 않는... 젊음의 한가운데에 들어와 있지만 그 젊음을 있는 대로 숨쉬고 음미하지 못하는 모순의 시절.


일주일의 노동을 끝내고 주말 밤, 선술집.
하나 둘, 삶에 지친 사람들이 모여든다.
노인은 추억을 끄집어 내고
젊은이는 꿈을 꾼다.
"내가 이곳에서 벗어 날 수 있다면 무비 스타가 될 수 있었을 텐데.."
그러나 가정법은 어디까지나 가정법에 그치는 것.

각기 하나씩의 꿈을 풀어 놓는다.
또 누군가는 자신의 꿈을 챙긴다.
서로 각기 다른 방향을 쳐다보고 풀어진 눈으로 혼잣말을 하고 있을 뿐...
그러나 각기 혼자서, 또 같이 '그들은 고독을 나눠 마신다.'
혼자 마시는 것보다는 낫겠지...라며.

그리고 그 취기와 시끌벅적함 속에 내게 마지막에 들려오는 질문은
"당신은 여기서 뭐하고 있는가?"

이 노래가 학교 앞 카페나 거리에서 한창 흘러나오던  그 시절엔, 저 질문이 화살처럼 내 안으로 날아와 아프게 박히는 대신 내 귓등을  무심코 지나쳐 날아갔었다. 그 시절에는 한 순간 한 순간, 그것이 혼란과 無爲와  자기 모순으로 뒤범벅된 순간이라 할지라도, 늘 내가 지향하고 있는 어딘가를 향해 가고 있다고 느꼈으며,  내 삶에서 '내 것이라고 할 만한' 중요한 것들은 내 의지로 선택하거나 결정할 수 있다고 순진하게 믿고 있었던 것이다.

세월은 흘렀고, 나는 많은 길을 걸어왔다. 

이제 토요일 밤 선술집에서 던져진 저 질문은 가볍고 무심하게 나를 비껴 가지 않고 곧장 내 심장을 향해 날아와 꽂힌다.

 

나, 지금, 여기서 뭐하고 있는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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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인장 2004-10-16 18: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렇군요... 이 노래의 가사가 이런 것이었군요... 술의 이름은 외로움이었군요... 그래서 저는 술을 마실 때마다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고 싶었던 거군요... 그래서 제가 전화를 걸 때마다 그들은 모두 부재중이었던 거군요...
내가 가진 레코드판 중에서 가장 깨끗했던 빌리 조엘의 음반... 전 그걸 닦을 때가 참 좋았더랬어요. 그렇지만 이 노래의 가사는 알지 못했지요...

숨은아이 2004-10-16 18: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Sing us a song, you're the piano man" 부분을 들으면 뭔가 ... 하면서 노래를 따라 부르고 싶어져요. ^^

에레혼 2004-10-17 00: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선인장님, 저와 닮은 취중 습관을 갖고 있군요, 전 맨송맨송한 상태일 때는 전화로 수다 떠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는데, 그래서 긴요한 용건이 있을 때말고는 제 쪽에서 먼저 통화를 시도하는 적이 없는데, 취기가 있을 때는 왜 그리도 전화로 누군가와 말을 나누고 싶어지는지...... 그게 다 그 술을 마신 탓이었나봐요, '외로움이라고 부르는 술'..... 이제 주종을 좀 바꿔야 할까봐요...

숨은아이님, 노래말의 분위기와는 사뭇 다르게 멜로디가 경쾌해서 저절로 흥얼거리게 되지요, 기분도 그렇고 한데 '피아노맨'하고 같이 불러 주죠, 뭐^^

새벽별님은 영어가 좀 되시는군요, 이 노래를 출근하면서 자연스럽게 흥얼거릴 정도라면... 좀 전에 집어가시면서 "앗, 찌찌뽕!" 외치셨나요?^^
 
 전출처 : 담유 > 돌아온 탕아를 위해 씌어진 20세기의 위대한 비가

 

'순간'에 사로잡힌 사람. 착란도 하나의 사실을 알게 되면서 '찰나'에 미혹되어버린 사람. 찰나에 미혹되면서 서사가 지워져버린 사람. 그래서 매순간 불안한 사람. 그런 사람에게 《말테의 수기》를 권하고 싶다. 말테가 고백한 다음과 같은 말을 들려주고 싶다. "나는 보는 법을 배우고 있다. 왜 그런지는 모르지만 모든 것이 내 안 깊숙이 들어와서, 여느 때 같으면 끝이었던 곳에 머물지 않고 더 깊은 곳으로 들어간다. 지금까지는 모르고 있었던 내면을 지금 나는 가지고 있다. 이제 모든 것이 그 속으로 들어간다. 거기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나는 모른다."


보는 법을 새로 배울 수밖에 없는 사람에게 남겨진 삶이란 단절과 분열, 몰락의 형식이 아니고 무엇일까. 그러나 시간을 건너뛰는 법을 알아차린 사람만이 추억과 미래를 교통시키며 현실을 재창조해나갈 수 있다. 릴케는 바라보는 것만이, 정면을 응시하고 그 너머의 본질을 꿰뚫어보는 것만이 시간을 건너뛸 수 있는―도처에 무수히 널린 죽음을 극복할 수 있는―충실한 길이라고 오늘 우리에게 전한다.



도시의 한켠에서 죽음을 맞닥뜨리다


스물여덟 살의 덴마크 시골 청년 말테가 대도시 파리에 도착한 지 3주가 흘렀다. 살기 위해 사람들이 몰려오는 도시. 그러나 실상은 사람들이 죽어가고 있는 도시. 그는 떠나온 사람들에게 이곳의 소식을 전하고 싶다. 편지를 쓰려고 책상 앞에 앉는다. 그러나 도시에서 보낸 3주가 마치 몇 년은 지나가버린 듯한 부피감으로 다가온다. 그는 변해버린 것이다. 그가 변해버렸다면 이제 그가 알고 있었던 사람은 낯선 타인이나 다름없다. 타인에게 편지를 쓸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렇다면 말테는 이제 누구에게 편지를 써야 할까.


그는 시간을 건너뛸 수밖에 없다. 그는 자신의 내면에게 말을 건다. 내면에게 말을 거는 행위는 추억을 호출하는 일과 같다. 죽음을 맞닥뜨린 도시에서 그는 그의 기억 속 미답지로 남아 있는 여러 죽음의 얼굴을 호출한다. 그의 고향에서는 죽음이 병원 영안실에서 대량 생산되는 죽음과 달랐다. 거기에서는 죽음이 옷을 입고 있었다.


그의 할아버지 시종관 브리게는 두 달 동안 요란하게 죽어갔다. 유서 깊은 저택, 이 방 저 방 옮겨 다니며 사람들에게 웃어라, 이야기하라, 유희하라, 조용히 하라고 요구하고 때로는 호령하면서 남들과 다른 자신만의 힘든 죽음을 받아들였다. 말테에게 할아버지의 죽음은 삶의 또 다른 모습이었다. 적어도 도시에 속해 있기 전까지 말테에게 죽음은 누구에게나 고유한 삶의 한 형식이었다. "남자들은 갑옷 깊숙이 죽음을 지니고 있었"고 "아주 늙어서 자그맣게 오그라든 여자들은 무대처럼 엄청나게 큰 침대에 누워 모든 가족과 하인과 개가 지켜보는 앞에서 분별 있고 주인다운 죽음을 맞았다." 그러나 그들은 '죽어갔고' 말테의 집안은 몰락했다. 그는 고향을 떠날 수밖에 없었으며, 이제 그의 유년은 어디에도 없다. 그러나 말테는 그들을 다시 삶 속으로 불러들이는 방법을 이곳, 죽음이 도처에 널린 도시에서 알아차린다.



쓰지 않으면 안 된다


파리의 허름한 여관방, 밤마다 불을 밝히고 글을 쓰는 예술가 말테. 보는 법을 새로이 배우고 있는 그는 두려움과 공포에 맞서 무엇인가를 하지 않으면 안 된다. 먼 길을 걸어온 것처럼 피곤을 느끼는 그는 이제 아는 사람도 없고 가진 것도 없다. 집도, 물려받은 물건도, 개도 없는 삶에 몸서리가 처진다. 추억이라도 있으면 좋을 텐데, 탄식만이 그의 친구다. 그러나 그는 알고 있다. 그의 유년은 추억 속에 있고 추억은 땅 속에 묻혀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라는 것을. 그 모든 추억에 다시 다다르기 위해서는 나이를 먹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나이 먹는 일을 사랑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시를 쓰는 행위는 그에게 나이를 먹는 일과 같다. 시는 그에게 감정이 아니라 경험이기 때문이다. 시를 쓰기 위해서는 오랫동안 기다려야 한다. 평생을, 가능하다면 오래 살아서 삶의 의미와 달콤함을 모아야 한다. 그러나 추억을 가지고 있는 것만으로는 안 된다. 추억이 많아지면 그것을 잊어버려야 한다. 그리고 인내심을 가지고 추억이 다시 솟아오르기를 기다려야 한다. "추억이 우리 몸 속에서 피가 되고 눈짓이 되고 몸짓이 되어 이름을 잃어버리고, 우리와 더 이상 구분할 수 없게 될 때에 비로소 아주 드물게 그 추억의 한가운데에서 시의 첫 단어가 솟아올라 걸어나오게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도시의 작은 방에 앉아 어떠한 대가를 치르더라도 글을 쓰지 않으면 안 된다고 말테는 생각하고 있다. 수많은 진보와 발명, 문화와 종교를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표면에만 머물러 있는 인간 삶의 본질을 바라보기 위해 쓰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하는 그는, 그것만이 그의 마지막이 되리라는 것을 알아차린다. 고독과 불안과 공포 앞에서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란 정면으로 그것을 바라보는 일 뿐. 바라본다는 것, 그것은 말테에게 현실을 회피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에 맞섬을 뜻한다.



돌아온 탕아, 그리고 사랑


현실에 맞서는 이는 한번쯤 현실에서 튕겨나가지 않으면 안 된다. 한번쯤 튕겨나갔다 돌아와야만 한다. 그래야만 현실을 직시할 수 있다. 그러나 사랑을 기대해서는 안 된다. 사랑받기를 기대하는 이는 현실의 편안한 품속에서 정체되기를 바라는 이와 같다. 그때의 사랑은 반쪽짜리, 불구의 그것이다. 진정한 사랑은 소유하지 않는 사랑, 사랑 받기를 바라지 않는 그것이다. 아낌없이 주는 어머니의 사랑이, 조건 없이 기다리는 여인의 사랑이 그 어떤 사랑보다 위대한 까닭은 바로 이 때문이다.


집을 떠나 먼 길을 헤매던 탕아가 어느 날 불현듯 집으로 돌아와 집안 식구들의 발밑에 몸을 던진다. 그것은 사랑을 갈구하는 모습일까, 사랑해주지 말기를 간청하는 몸짓일까. 분명한 것은 그는 이제 사랑하기에는 몹시 어려운 존재가 되어버렸다는 사실이다. 그는 신만이 그를 사랑할 수 있음을 느낀다. 그러나 신은 아직 그를 사랑하려 하지 않는다. 이로써 비극이 시작된다. 그러나 사랑받기를 원하지 않는 자는 그 비극을 넘어설 수 있다. "사랑받는 것은 불타오르는 것이다. 그러나 사랑하는 것은 마르지 않는 기름으로 타오르며 빛을 내는 것이다. 사랑받는 것은 무상하지만, 사랑하는 것은 영원하다."


돌아온 탕아, 그가 곧 말테이고 릴케이다. 아무것도 소유하지 않은 그래서 아무것도 아닌 그들만이 인간 실존의 비극을 끌어안을 수 있다. 순간순간에 깃들이는 사랑을 몸소 실천할 수 있는 그들만이 바로 시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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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유 2004-10-16 13: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착란도 하나의 사실을 알게 되면서-->착란도 하나의 사실이라는 것을 알게 되면서>
빠진 구절도 있고 해서 겸사겸사 들렀습니다. 라일릭와인이라는 아호 혹은 구절을 어디선가 본 듯싶은데, 기억이 나질 않는군요. 그래서 기다리는 중이랍니다, 기억을...:)

에레혼 2004-10-16 16: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후님의 리뷰 덕분에 오늘 책장에서 다시 <말테의 수기>를 꺼내 뒤적거려 봅니다. 몇 군데 밑줄 친 부분이 이 글과 겹쳐져 있더군요......

라일락와인에 대한 기시감 혹은 희미한 흔적이라...... 같은 제목의 노래에서 비롯된 게 아니라면, 그 기억의 실마리를 제게도 슬쩍 던져 주시기를...... 어느 길 모퉁이 또는 좁은 골목에서의 흔적인지 저도 궁금하네요
 

 잡담 개명. 추천: 0 I 2004-10-15 01:36

개이름...이 아니고... 닉을 바꿨다.

로드무비님과 라일락와인님 닉넴이 내 닉넴에 비해 압도적으로 멋있어보여서...

그 이름들과 공통점이 있는 이름으로 바꿨다. 짜잔~~

마이페이퍼 링크 주소 : http://www.aladin.co.kr/foryou/mypaper/551614
     
라일락와인(mail) 2004-10-15 08:36
정말 베리 스트롱한 이름이군요!!
개명[개 이름이 아닌!^^]을 축하 드려요!
이제 딸기도 아니고, 스트로베리도 아니고, 딸기밭도 아니고, 스트로베리 필드도 아닌, 삐삐롱스타킹을 닮은 스트롱베리님!

우리, '로라리' 모임이라도 하나 결성해야 하는 거 아닌가요?
['로'드무비 - '라'일락와인 - 스트롱베'리'] ㅎㅎㅎ
아님 두음법칙을 적용시켜 '니나노' 모임으로 하든가요
아 좋다, 멋지다!

 

 

오늘 아침 딸기님, 아니 '스트롱베리'님 방에서 나눈 재밌는 잡담 한 마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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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10-15 16:01   URL
비밀 댓글입니다.

에레혼 2004-10-15 16: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귓속말 시스템은 왜 발신자만 가능한 거죠? 수신자도 귓속말로 응답하고 싶을 때가 있는데......


어쨌든 ****님, 미워할래요!
흥, 저의 오토바이 배달 실력을 못 믿으시는 거죠?
재색 겸비한(!!) 저를 받아들이기가 그리도 부담스러우셨나요?
님 만나러 간다고 야사시한 스카프도 골라 놨더니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