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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의 집 ㅣ 문학과지성 시인선 78
최승자 지음 / 문학과지성사 / 1989년 5월
평점 :
어제 문득, 최승자 시집을 다시 읽기 시작했다. 이유는 모르겠다. 아마 뭔가 이유가, 아니 어떤 引力의 근거라 할 만한 것이 있을 것이다. 내가 의식하지 못하는 채로 존재하는. 미처 다 알지 못하는 마음의 발길이 이끄는 대로 나는 최승자의 세 번째 시집 <기억의 집>을 읽어 간다(이 시집은 1989년에 '문학과지성 시인선' 78번째 시집으로 나왔다). 시인의 발자국을 따라 그 길을 느릿느릿 따라가 보는데 어느덧 몸이 찌르르 아파 오고, 나는 슬며시 자리에 드러눕는다.
그녀는 잠과 죽음 속에서 산다. 아니, 잠과 죽음이 곧 그녀의 삶이다.
그녀가 사는 시간들은 "흐르는 잠과 하품과 구역질의 시간들"이다. "졸리워 졸리워 오늘도 나는/ 내 무덤을 미리 파고" 있는 시간들을 산다. 그 "시간의 사막 한가운데서/ 죽음이 홀로 나를 꿈꾸고 있다."고, "꿈꾸기 가장 편리한 나는/ 무덤 속의 나"라고 시인은 말한다. 그 시간 속에서는 늘 죽음이 그의 "주위를 물결처럼 공기처럼/ 어둠처럼 맴돌며/ 급소를 노리고 있다."
"그대들이 나를 찾을 때/ 나는 잠들어 있을 것이다.
그대들이 살아 헤매며/ 이 세계의 모든 문들을 두드릴 때/ 나는 무덤의 따뜻한 실내에 있을 것이다."
간혹 잠결에 무엇인가 그녀의 꼬리를 물기도 한다.
"내가 더 이상 나를 죽일 수 없을 때/ 내가 더 이상 나를 죽일 수 없는 곳에서/ 혹 내가 피어나리라.
이 미끄러짐 끝에 확인이 있을까./ 삶의 확인 아니면 죽음의 확인이"
그녀는 무덤 같은 자기 방에서 누워 있거나 벽을 응시한다.
그 방의 내부는 그 "방의 내부 속에 닫혀 있다."
그녀가 그리는 방의 풍경. "불을 켜도 골방의 내부는 어둡고/ 어두운 가운데 죽음만이 홀로/ 심장의 불을 켜들고/ 환히 녹으며 타오른다." 죽음이 켜든 그 환한 불빛을 바라보며 누군가가 외친다. "각성하라!/ 타오르는 죽음 곁에/ 깜깜히 누운 삶이여!"
그녀가 "몸 눕히는 곳 어디서나/ 슬픔은 반짝인다./ 하늘의 별처럼/ 地上의 똥처럼." 그녀는 "슬픔의 소화기관을 갖고 있지 못"해서 "슬픔을 먹는 대로 곧바로 토해 버린다."
그렇게 토해내진 슬픔들이 벽에 얼룩을 남기고 습기를 퍼뜨리고 부식의 균을 증식시킨 탓일까. 그녀의 방을 이루고 있는 벽이 미세하게 흔들린다. "자세히 보면 고요히 흔들리는 벽,/ 더 자세히 보면 고요히 갈라지는 벽"....... 그래서, 시인은 자신이 바라보는 세계가 "벽이 꾸는 꿈"이라고 생각한다.
그렇게 고요히 흔들리는 벽 안에서 그녀는 자신의 병을 응시한다("내가 응시하고 있는 나를 응시할 뿐"). 어쩌면 그렇게 고요히 흔들리고 갈라지는 벽이 그녀의 병인지도 모를 일.
"어떤 아침에는, 이 세계가/ 치유할 수 없이 깊이 병들어 있다는 생각.
또 어떤 아침에는, 내가 이 세계와/ 화해할 수 없을 만큼 깊이 병들어 있다는 생각."
그런 자각 뒤에 그녀는 자신의 방문을 더 꼭꼭 잠그며, 허술한 틈을 경계한다.
"잘못하면 자칭 詩가 쏟아질 것 같아서/ 나는 모든 틈을 잠그고/ 나 자신을 잠근다.
(극소량의 詩를 토해내고 싶어하는/ 귀신이 내 안에 살고 있다.)"
그녀는 허술한 틈 사이로 시를 마구 토해낼지도 모르는 자신을 경계하고 단속한다. 그렇게 내뱉어진 시들은 가짜 희망이라는 것을 알고 있기에.
"말하기 싫다./ 말하기 싫다는/ 말을 나는 말한다.
(희망은 감옥이다.)"
때로 그녀가 제 몸을 뉘어놓은 그 방의 창이 붉게 물든다.
"봐, 봐, 저 붉은 노을 좀 봐.
죽을동 살동 온 유리창에 피칠을 하며/ 누군가 나 대신 죽어가고 있잖아."
그녀는 인큐베이터 같은 방 안에서 세상을 물끄러미 내다보고 있다.
"심혈을 기울여 해가 지고/ 심혈을 기울여 한 사람이 죽고/ 심혈을 기울여 지구가 돈다, 돌 때,/ 나는 인큐베이터 안에서 세계를 내다보고"
그녀의 그 무심한 듯한 응시에는 세계에 지금 막 당도한 죽음이 나 대신 죽어가는 누군가의 것이자 내 것이라는 엄정한 인식이 깔려 있다.
"그렇다, 가혹하다./ 누가 이렇게 내 피를 빨아먹는 건지.
-- 그러나 나는 안다./ 내가 내 피를 빨아먹었다는 것을,/ 빨아먹다 죽는다는 것을.
그러나 또 나는 안다./ 내가 언제나 나이듯/ 내가 언제나 남의 남이라는 것을."
이 세계의 문법을 "매번 배우지만 매번 잊어버"리는 그녀는 자신의 삶이 "성공한 실패들의 집적"이자 "무의미의 집대성의 神殿"이라고 단언한다.
'허약한 난간'과 '허약한 삶의 규율들'에 기대어 지어진 자신의 방에 누워 그녀는 종종 희구한다.
"아- 영원한 단식만이 있다면./ 아- 영원한 無의 커튼만이 흔들리고 있다면.
(그러나 그보다는 차라리/ 빨리 나를 죽여주십시오.)"
그녀가 지어 올린 '기억의 집'에서 울려 나오는 마지막 기도......
"잠시만 기다려다오.
내가 이 잔을 다 비울 때까지/ 내가 꿈속에서 다시 한번만 돌아누울 때까지/ 내가 내 시야를 스스로 거둘 때까지.
잠시만 기다려다오,
죽음이여/ 잠시만,/ 영원히."
그런 기도 소리가 그레고리안 성가처럼 울려 퍼지는 최승자의 <기억의 집>에 들어갔다가, 나는 오래 빠져 나오지 못하고 그 유령 같은 자리에 눕고 만다. 아프다고 말하지는 않겠다. 아프다,고 쉽게 발음하는 내가 얼굴 없는 초상처럼 낯설고 아득하다. 여기는 길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