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쥐비알 ㅣ 동문선 현대신서 113
알렉상드르 자르댕 지음, 김남주 옮김 / 동문선 / 2002년 3월
평점 :
사는 게 다 그런 거지, 이제 네 나이 서른을 넘고 마흔을 넘어 누군가의 남편, 아내라는 이름, 그리고 아비, 어미 된 자의 무게를 낙타의 등짐처럼 지고 타박타박 걸어가다 보니, 많은 것을 포기하고 버려도 아무렇지 않은 듯 딱딱하고 바싹 마른 빵 같은 일상을 질기게 씹으며 견뎌 내는 게 삶이라는 걸 알겠지? 인생은 결코 '네 멋대로' 할 수도 없고 해서도 안 되는 것이라서 '사느라고 어쩔 수 없이 진 빚'들을 세상에 갚아 나가는 것 -- 그게 산다는 일이라는 걸 이제는 인정할 수밖에 없지..... 요즘 이렇게 말하곤 하는 너의 곁에 슬쩍 밀어넣어 주고 싶은 책이 하나 있다. 긴 설명 따위 없이 그저 만나게 해주고 싶은 사람이 하나 있다.
아니, 그런 게 삶이라고? 그런 게, 설마, 네가 살고 싶은 삶이었던 건 아니겠지? 여기, 산다는 건 바로 '자기 자신이 되는 것'이라고 온몸으로 외친 사람, 어느 한 순간도, 일상의 단 한 조각도 자기 자신이 아닌 것으로 채워질까봐 소스라치게 경계하며 경탄할 만큼 자기 자신에게 충실했던 이 사람을 한번 만나 보라고. 어느새 뻣뻣하고 무미건조하게, 신념 따위와 무관하게 흔들림 없이, 혼자 있어도 덤덤하고 부담 없이 무난한 어른이 되어 버린 너는 그 책장을 덮을 때쯤에는 내게 또는 너에게 이렇게 묻고 있을지 모른다. 자기 자신이 되는 것을, 아마도 우리가 이 세상에 와서 풀어야 할 유일한 숙제일 그것, 바로 나 자신으로 사는 것을 우리는 왜 그토록 두려워하고 머뭇거리며 주저하며 살고 있는 걸까.
"짐짓 경박한 체할 때조차도, 아니 그런 때일수록 본질적인 삶을 누리는 데 몰두했던 사람... 그에게 있어서 산다는 것은 자신을 완벽히 표현하고, 자신의 진실을 거리낌없이 주장하는 것을 의미했다. 사람은 지상에 적응하기 위해 자신의 일부를 포기하는 법이다. 하지만 그는 모순 투성이인 자기 본성을 단 1그램 잘라낸다는 생각만으로도 파랗게 질렸으리라."
그토록 자신의 갈망과 모순에 완벽하게 접근한 사람, 그렇게 오만하게 존재의 위험을 무릅쓰며 자신에게 충실하려고 한 사람이 바로 '쥐비알'이란 애칭으로 불리는 파스칼 자르댕이다. 이 책을 쓴 '쥐비알'의 아들 알렉상드르 자르댕의 설명에 따르면, '쥐비알'은 코알라, 맥( ), 얼룩말, 긴팔원숭이간의 잡종이라고 할 수 있는 특이한 동물이라고 한다. 이 희귀한 동물은 감정 이입에 있어서 특별한 능력이 있어서 상대의 감정을 즉각 알아차리고 환희이든 슬픔이든 더할 수 없이 진하게 그것에 동화되는 '감정의 바로미터'인가 하면, 다른 한편 즐겁게 웃을 줄 아는 유일한 동물이다.
"쥐비알에게는 고단한 인생을 매순간이 마지막인 것처럼 절실하게 살아낼 줄 아는 재능이 있다. 그의 일상은 있음 직하지 않은 일로 가득 차 있었다. 상충되는 행동이야말로 그의 특기였다...... 초대받은 만찬이 지루하게 느껴진다면? 아버지는 거리낌없이 지루하다고 말하고 여주인의 손에 입을 맞춘 다음 자리를 떴다. 원하는 여자가 유뷰녀라면? 그녀의 남편에게 알려지는 것에 아랑곳없이 바로 그날 밤 그 여자를 납치하기 위해 부부가 살고 있는 집의 담을 넘었다."
재기발랄하고 유머 넘치고 시끌벅적한 한바탕 모험의 연속인 듯한 쥐비알의 삶을 관통하고 있는 축은 바로 자신의 본성을 밑바닥까지 탐사하고 싶은 욕망이 아니었나 싶다. 그는 필사적으로 자기 자신으로 살아 있고 싶어했고, 사람을 마취시키는 일상 속에 매몰되는 것을 무엇보다도 두려워했던 것 같다. 언뜻 돈 키호테와 닮은 듯 보이는 충동적이고 무모한, 그래서 종종 사람들의 상식과 이해 수준을 넘어서는 그의 행동들은 어쩌면 자기 안의 광기를 믿어 주려는 용기이며 끊임없이 '자기 자신보다 위대한 그 무엇'이 되고 싶다는 욕구에 충실한 결과였는지 모른다. 그의 유쾌하고 낙천적인 믿음 뒤에 지울 수 없는 그림자처럼 삶에 대한 깊은 절망과 운명에 무릎 꿇지 않으려는 안간힘이 깔려 있음을 본다. 쥐비알은 '자기 자신을 따르는 것'이야말로 운명이 부과하는 절망에 대한 하나의 치유책, 하나의 해결책이라는 걸 알고 있었던 것이다.
다시 너에게.
쥐비알을 만나는 동안 네 안에서 졸고 있는 온갖 충동적인 인물들이 되살아나기를, 삶의 순간 순간에 감탄할 수 있는 역량이 영영 사라진 게 아니라는 걸 확인 받기를, 스스로의 모순들이 불러일으키는 아찔함을 받아들이게 되기를, 다른 이들로부터 판단 당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따위 내던져 버릴 수 있기를, 경박하지 않으면서도 가볍게 살 줄 알게 되기를, 그리하여 지혜로워진 끝에 마침내 충동적이 될 수 있기를, 무엇보다 스스로의 심연을 건너는 일이 너에게 오직 진정한 기쁨임을 깨닫게 되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