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갈대 > 이윤기의 <장미의 이름> 번역에 대한 소회

기획특집 - 한국의 번역문학

나는 다시 태어나도……

이 윤 기


"다시 태어나도 이 길을 가겠다."

사람들은 깊이 생각해보지도 않고 흔히들 잘 이런다. 그 길에 대한 정보를 가장 많이 가지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 길이야말로 가장 잘 알고 있는 길, 잘 알고 있어서 수나롭게 갈 수 있을 것으로 보이는 길이기 때문일 것이다. 사람들에게는 자기가 가진 정보를 '선(善)'으로 규정하는 버릇이 있는 것 같다. 가진 정보를 선으로 규정해야 그 정보의 소유 주체 역시 '선'에 가까워질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사람들이 "다시 태어나도 이 길을 가겠다"라고 하는 것은 다른 길은 잘 모르기 때문, 혹은 자기가 알고 있는 것 너머의 세상은 '선'으로 용인하고 싶지 않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많은 아내들이 "그거야 댁의 사정이지", 하고 반응할지도 모르는데도 불구하고 많은 남편들은 "나는 다시 태어나도 당신만을 사랑하리라"를 노래한다. 누가 나에게, 다시 태어나도 번역가의 길을 가겠느냐고 묻는다면, 나는 이렇게 대답하겠다.

"좀 생각해 봅시다."

나는 틀림없이『장미의 이름』과『푸코의 진자』를 번역하던 1984년의 기나긴 여름과 1990년의 기나긴 겨울을, 다시는 떠올리고 싶지 않은 그 여름과 겨울을 자동적으로 떠올릴 것이다. 나는 이 두 책을 번역한 뒤 많은 독자들로부터 "잘 읽었다"는 격려를 받았다. 이 두 책 덕분에 나는 꽤 유식해지기도 했다. 하지만 그 갑절의 격려와 교양을 보증한다고 해도 두 책과 비슷한 책과의 악연을 되풀이하게 될 것 같지 않다. 그렇다면 사람들은, 별로 보람을 느끼지 못하는 모양인데, 무엇 때문에 그렇게 악전고투했느냐고 물을 것이다. 나 자신과의 약속 때문이었다. 나는 순전히, 움베르토 에코를 뚫어내고야 말겠다는 나 자신과의 약속 때문에 두 책과 싸웠다. 악몽은 그 뒤로도 오래 계속된다. 아직 끝나지 않았다.

『장미의 이름』과 『푸코의 진자』 악몽은 1992년까지 계속되었다. 1992년 나는 미국 미시간 주립대학교의 객원교수 아파트에 살고 있었다. 객원교수 아파트는, 세계 107개국에서 온 학자들이 살고 있는 인종 전시장, 혹은 학자 전시장 같은 곳이었다. 나는 꽤 많은 학자들을 찾아다녔다. 움베르토 에코의 음흉한 계략이 백일하에 드러나기 시작했다. 나는 미국에서 이 두 책을 처음부터 다시 번역했다. 작은 보람이 없지는 않았다.

1995년 6월 2일, 나는 『푸코의 진자』를 다시 번역한 원고를 들고(정확하게 말하면, 개역판 원고가 든 컴퓨터는 가방에 넣고, 만일의 경우에 대비해서 그 원고를 복사한 플로피 디스켓은 주머니에 넣고) 미국에서 서울로 돌아오다가 재미있는 일을 겪었다.

목에 군번 줄이 감겨 있어서 주한 미군임에 분명해 보이는, 20대 초반의 한 청년이 내 옆자리에서 공교롭게도, 부피가 베개만한 영어판 페이퍼백 『푸코의 진자』를 읽고 있었다. 나는 기회를 보아 그에게, 책이 재미 있느냐고 물어보았다. 청년은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었다. 왜 그러냐니까, 도대체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고 했다. 나는 어떤 대목이 그러냐고 물었다. 그랬더니 대뜸 책을 펼쳐 보이면서, 제 1장의 히브리어 해제를 비롯, 번역도 안된 채 생짜로 실려 있는 라틴어, 스페인어, 포르투갈어, 이탈리아어, 프랑스어, 독일어 문장을 일일이 손가락질해 보이면서 해제가 본문과 어떤 관련이 있는지 모르겠고, 외국어가 섞여 들어 문맥의 의미 놓치기가 다반사라는 것이다. 나는 우쭐해지지 않을 수가 없어서 그에게, 일일이 그 해제의 의미와 본문과의 관련성을 설명해 주고, 본문에 나오는 외국어 문장도, 그가 도움을 청할 때마다 영어로 번역해 주었다. 교환교수 아파트에서 갈고 닦은, 눈물 겨운 실력이었다. 청년이 별 희한한 인간을 다 본다는 눈을 하고, 도대체 뭐하는 사람이냐고 물었다. 하기야 두 책에 대해 집중적으로 연구한 세월 없이 그렇게 좔좔 풀어낼 수 있었다면 그것 참 대단한 실력이었겠다. 나는 실토했다. 사실은, 『푸코의 진자』 한국어판 역자인데, 난들 잘 처음부터 알았겠느냐, 지난 반년 동안 유태인, 포르투갈인, 스페인인, 이탈리아인, 독일인, 프랑스인을 찾아다니면서 졸라서 배운 덕분에 그 의미를 알게 되었다…… 『푸코의 진자』 때문에 지난 반 년간 죽다가 살았다는 나의 고백을 듣고서야 청년은 속으로, 그러면 그렇지, 하는 눈치를 보였다. 미국인 문학도 하나 기죽이는 정도의 소득…… 조금 슬펐다.

1984년에 『장미의 이름』을 번역했다. 하지만 출판하겠다는 회사가 없어서 원고가 2년을 겉돌았다. '열린책들'이 출간했는데 반응이 너무 좋아서 오금이 저렸다. 실수했으면 어쩌나 싶었다. 그래서, 1992년 미국에서 원고를 다시 손보았다. 미국과 일본에서 나온 『장미의 이름』 관련 서적을 구입, 약 5백개에 이르는 각주도 달아, 같은 해 개역판을 내었다. 오금 저린 구석이 없지 않았지만, 잡초 없는 뜰이 어디 있으랴, 하면서 스스로 위로하면서 8년을 보냈다.

2000년 3월, 무려 60쪽에 달하는 원고 봉투를 받았다. 철학을 전공한 강유원 박사의, '『장미의 이름』읽기'라는 제목이 달린 원고였다. 박사는 철학개론 시간에 학생들에게 『장미의 이름』을 바르게 읽어 주면서 이 소설이 지니고 있는 철학적 의미를 가르쳤던 모양인데, 바로 그 때의 메모를 내게 보내준 것이다. 매우 부끄러웠다. 메모는 무려 3백여 군데의 부적절한 번역, 빠져 있는 부분 및 삭제해야 할 부분을 지적해주고 있었다. 강 박사의 지적은 정확하고도 친절했다. 나는 철학 전공자가 아니어서 작가 에코의 해박한 중세학(中世學) 및 철학을 다 이해할 수 없었다. 어렴풋이 이해했다고 하더라도 에코가 옮겨주는 무수한 개념을 철학사에서 찾아내는 일이 나에게는 불가능에 가까웠다. 그래서 독자의 이해를 돕기 위해 원서에 없는 말을 덧붙인 일도 없지 않다. 그 해 6월 말부터 7월 초까지 강박사의 지적을 검토하고, 3백가지 지적 중 2백60군데를 바르게 손을 보았다. 그리고는 강박사에게 전화를 걸어, 부끄러웠다고 고백하고, 그의 지적을 새 책에 반영해도 좋다는 양해를 얻었다. 끝났다고? 나는 끝나지 않았다고 믿는다. "다시 태어나도 이 길을 가겠다"는 말, 나는 함부로 못하겠다. 하지만 이 일을 어쩔고. 산고가 다 잊혀졌는지 슬슬 또 임신이 하고 싶어진다.



* 이윤기 : 소설가, 번역가. 1947년생. 소설 『나비넥타이』『두물머리』, 역서 『장미의 이름』『푸코의 진자』『양들의 침묵』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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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갈대 > 『장미의 이름』요약&해석(펌)

1077년 그레고리 7세는 교회의 세속화를 막기 위해 황제와 성직자 서임권을 놓고 투쟁을 벌였다. 그 여파로 황제 하인리히4세(1050-1106)는 파문을 당했고 이를 카노사의 굴욕이라 한다. 카노사의 굴욕 이후 곧 십자군원정 (1096-)이 시작되었고 당시의 교황권은 절정에 이르렀다. 그러나 약 200년 동안이나 계속되었던 십자군 원정이 실패로 돌아가자 유럽에는 많은 변화가 있었다. 가장 큰 변화로는 교황권의 약화와 봉건제의 붕괴가 있겠다. 약해진 교황 보나파키우스 8세와 필립 4세와의 대립으로 아비뇽 유수(1309-1377)가 있었다. 지방에서는 봉건제의 붕괴로 여러가지 이단학파가 일어나 민중을 선동하기 시작했으며 성직자들은 양치기로서의 임무를 충실히 시행하지 못했다.
또한 십자군 원정의 실패로 인해 아랍문화에 대한 재인식이 시작되었다. 아랍과의 만남은 상업, 과학의 발달에 뿐만 아니라 문화적인 면에서 특히 큰 변화를 가져왔는데 아우구스티누스 이후로 플라톤에 의해 밀려났던 아리스토텔레스의 서적들이 번역되었고, 플라톤의 철학으로 해결할 수 없었던 신학의 많은 문제들을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을 통해서 보안하게 되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으로 신학을 다시 구성한 철학자이자 신학자는 바로 토마스 아퀴나스였다.
그는 도미니쿠스의 영향을 받은 도미니크수도회의 수도사였으며 알베르투스 마그누스 밑에서 신학을 공부하고 다시 파리에서 계속 수학하여 1257년 신학으로 학위 및 교수 자격을 받았다.
당시의 파리대학에서는 아리스토텔레스에 대한 맹렬한 공부가 진행되고 있었던 듯 하다. 아리스토텔레스 (Aristoteles)는 인간에게는 두가지 종류의 탁월성이 존재하는데 그 하나는 성품의 탁월성이고 다른 하나는 지적 탁월성이라 하여 다시 지적 탁월성을 순수 이론적 지혜와 실천적 지혜로 나눈다. 순수 이론적 지혜(Sophia)는 신적 탁월성 즉, 우주의 제 1원리를 추구할 수 있는 힘을 이야기 하는데 이는 이성으로 신적인 것을 연구할 수 있다는 도미니크회의 신학적 성격에 영향을 준다.
즉 아리스토틀은 이성의 힘을 강조하게 되는데, 아퀴나스는 여기다가 신의 은혜의 빛을 더한다. 아우구스티누스가 계시와 선험을 강조하는 사람이었다면 아퀴나스는 다분히 경험적이며 귀납법적인 사람이었다.
당시의 상황을 크게 본다면 바로 플라톤에서 아리스토틀에게로, 아우구스티누스에서 토마스 아퀴나스로, 신비주의에서 이성주의에로 사상의 흐름이 넘어가는 속에서의 갈등과 지상의 권력과 천상의 권력을 가진 두 파벌의 갈등, 그리고 그 속에서 겪게 되는 나와 자아와 타인과의 갈등이라 하겠다.
1314년 프랑크푸르트의 다섯 독일 제후들이 바이에른의 루드비히를 신성로마제국의 최고 통치자로 선출하고 때를 같이하여 라인의 영주와 쾰른의 대주교가 프리드리히를 선출했다. 2년 후 1316년 아비뇽에서 요한 22세가 교황의 자리에 앉았다. 몇년 후 1322년 루드비히가 프리드리히를 거세하자 황제가 둘일 때보다는 하나일 때를 더욱 두려워한 교황 요한이 루드비히를 파문하게 된다.
그해 5월 체제나 사람 미켈레의 주도 아래 열린 페루지아 소형제회 총회에서는 "완전한 삶의 본(本)인 그리스도와 그분이 사신 삶의 길을 따르면서 사도들은 재산이나 봉물을 공동으로 소유하지 않았다"고 말하면서 그리스도의 청빈을 주장하고 나선다.
몇달 후 12월 교황 요한 22세가 사도헌장 <아드 콘디토렘 카노눔>을 반포하며 "페루지아 총회에서 언급한 '사용'은 곧 '소유'라고 주장한다. 또 이듬해 11월 12일 <쿰 인테르 논눌로스(Cum inter nonnullos)>를 제정하여 프란체스코수도회를 이단으로 몰게 된다. 얼마 후 1324년 5월 22일 바이에른의 루드비히 황제가 <작센 하우젠 선언>을 반포하여 요한 22세를 이단으로 페루지아 총회를 지지하게 된다. 이유인즉 지상적인 권력을 가진 루드비히가 천상적인 권력을 가진 교황 요한 22세를 공격할 구실을 프란체스코 수도회에서 제공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때는 루드비히와 프리드리히가 제휴한 후 루드비히가 이탈리아로 내려와 밀라노에서 대관하게 된 해인 주후 1327년 11월 말경이었다. 페루지아 총회 이후 아비뇽으로 소환명령을 받은 체제나의 미켈레가 신변의 위험을 느끼자 한가지 복안을 마련하기에 이른다.
즉, 교황측 사절과 황제의 사절이 한 곳에 모여 사전에 협상하는 자리를 만들어 이를 통하여 양자의 실세를 서로 인정하고, 차후의 협상을 통해 이탈리아인이 프랑스로 들어갈 경우에는 교황측으로부터 신변 안전의 보장을 받
아 내자는 것이었다. 이 첫 모임을 주선하기 위해 선발된 사람이 바로 황제 루드비히의 직속 신하이자 아드소의 아버지와 친구사이었던 바스커빌의 윌리엄 수도사였다. 윌리엄 수도사는 프란체스코 수도회의 수도사로서 일찌기 파리에서 유학하며 로저베이컨의 사사를 받은 명석한 수도사로서 오히려 도미니칸에 가까운 자였다.
그는 여러 곳을 물색한 결과 프란체스코 수도회의 사람들에게 피난처를 제공할 뿐더러 황제와 교황의 사이에서 중재자 역할을 하고 있던 베네딕트 수도회의 한 수도원을 선정하게 된다.
아드소와 그의 스승 바스커빌의 윌리엄이 황제측 사절단과 교황측 사절단이 회합을 갖기 며칠 전에 먼저 문제의 수도원에 도달하게 된다. 그 후로의 내용은 대
충 이러하다.

#제 1 일
아드소와 윌리암이 수도원에 당도하고 원장으로부터 채식사 아델모의 죽음과 이에 대한 해결을 윌리암에게 부탁한다. 원래의 경우 교황측 사절이 협상 회의장으로 쓰는 수도원 원장의 사법권에 영향을 받게 되어 있지만 사전에 교황청이 제시한 제안 즉, 프랑스 왕실 궁병대와 그 지휘관은 어떤 형태가 되었든, 교황청 사절단 전원의 생명에 위험을 가할 수 있는 자에 대하여, 폭력 행위를 통하여 사절단의 행동이나 의견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모든 자에 대하여 사법권을 갖게 되어 있었다.
따라서 이러한 살인사건이 교황측 사절단이 당도하기 이전에 해결되지 않게 된다면 수도원장의 사법권은 교황측 왕실 궁병대로 넘어가게 되어 있는 셈이었다.

#제 2 일
그리스어 번역가 베난티오의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알리나르도 노인의 암시를 통해서 장서관 내력과 미궁 같은 장서관으로 들어가는 방법을 알게 되어 한밤을 틈타 장서관의 미궁으로 들어가나 미궁 안에서 길을 잃고 방황하게 된다.

#제 3 일
보조사서 베렝가리오의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아드소는 살바토레로부터 그의 과거를 듣는다. 윌리엄 수도사는 아드소에게 이단의 흐름과 교회에서의 평신도의 역할, 그리고 보편적인 법칙에의 접근 가능성에 대한 자신의 의혹을 고백한다. 윌리엄은 다음과 같이 말함으로써 자신의 생각을 아드소에게 이야기한다.
"문제는, 이단이 먼저 생기고 나중에 단순한 평신도들이 여기에 가세한다고(그리고 파멸한다고) 믿는 데 있을 듯 하다. 사실은 단순한 평신도라는 조건이 선행하고 이 조건
에서 이단이 생기는 것인데 말이다. 서로 헐뜯고 싸우는 데만 관심할 뿐, 수양견과 목동은 양떼를 돌보지 않는다. 그래서 양떼의 일부는 밖으로 버려진다."
"그래서 성 프란체스코께서는 일찍이 이것을 아시고 먼저 그들에게로 가시어 그들과 더불어 살기로 하신 것이다." "대 이단 전쟁은 오로지, 문둥이는 문둥이로 소외시킬 것을 요구한다."
아퀴나스에 의하면 선을 식별하는 지식이 의지를 결정하기에 올바른 지식이 없이는 의지가 바른 길을 선택할 수 있는 자유를 갖지 못한다. 그렇다면 이들 양들은 수양견과 목동들의 관심에서 소외되었기에 그들에게는 이단과 정교를 선택할 수 있는 자유가 없었다라는 것이다. 단지 귀찮은 존재일 뿐.
한편 우베르티노는 아드소에게 돌치노 이야기를 들려 준다. 아드소는 혼자 장서관에 들어가 돌치노 이야기를 생각하면서 책을 읽는다. 돌치노에 관한 이야기였다. 그
책의 내용은 아드소로 하여금 깊은 생각에 잠기게 한다. "화형주에서 돌치노는 어떻게 죽어 갔던가? 순교자처럼 의연하게 죽어 갔던가, 아니면 저주받은 자로서 비
참하게 죽어 갔던가?"
"돌치노는 실제로 자신을 순교자로 믿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무엇이 돌치노로 하여금 그렇게 믿게 만들었을까?"
아드소는 어떤 처녀를 만난다. 아름답되 피에 굶주린 천사 같은 처녀를... 아드소가 그녀와 밤을 지내면서 생각했던 내용은 사뭇 강한 이미지를 던져주고 있다. '죄를 짓고 있다는 생각은 도무지 들지 않았다.' '악마의 올가미 때문인지 하늘의 은혜 덕분인지 모르겠지만, 나를 움직이는 격정과 대항할 힘이 없어졌음을 깨달았다.' '이것을 모두 합하여 사랑이라고 이르는 것인 모양이라고 생각했다. 사랑의 정점에서는 백주에 악마를 만나고 있는 느낌이 들기도 했다. 그러나 바로 그 순간에 나는, 양심의 가책이라는 것 자체가 악마적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함께 했다.'
왜 아드소는 그렇게 생각했을까? 그는 과연 육체의 정욕을 탐하여 진리를 잃어버린 것이었을까? 그가 백주
에 악마를 만나고 있는 느낌을 가진 것은 양심의 말소리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율법과 회칙에 의해, 억제당한 습관적 외침이었을까? 그렇다면 양심의 가책이라는
것 자체가 악마적일지 모른다는 생각은 또 무엇 때문일까?

#제 4 일
윌리엄 수도사와 세베리노는 베렝가리오의 시신을 검사하다가, 익사체에게서는 보기 드물게 혀가 까맣게 변색해 있는 것을 발견한다. 윌리엄 수도사가 살바토레
와 레미지오를 유도 신문, 그들이 돌치노의 추종자였었다는 과거를 실토하게 한다.
아드소는 사랑의 고통으로 몸부림 친다. 이윽고 두 사절단이 수도원에 도착하게 되고, 살바토레는 엉뚱한 짓을 하다가 발각되어 베르나르 기의 문초를 받는다. 아
드소가 그리워하던 여자는 마녀로 체포된다.

#제 5 일
그리스도의 청빈에 대해 양 진영의 사절이 갑론을박하다가 급기야는 이전투구를 벌이기에 이른다. 세베리노는 윌리엄 수도사에게 이상한 서책 이야기를 한다.
세베리노의 시체가 발견되고 다시 서책은 미궁 속으로 빠져들고 만다. 이단심문이 진행되고 레미지오는 절규한다. "우리는 평화와 행복이 모두에게 두루 미치는, 보다 나은 새 세상을 바랐습니다. 우리는 당신네들의 탐욕이 불러 일으킨 전쟁을 줄이고자 했습니다."
돌치노파 신도들은 그들 나름대로의 진리에 대한 신념과 옳은 일에 대한 정담함이 있었다. 우베르티노가 망명 도생하고, 베노는 보조 사서로 변신한다.

#제 6 일
장서관 사서 말라키아가 죽고 윌리엄은 아드소의 흘러가는 말 속에서 힌트를 얻어 급기야 <피니스 아프리카에>로 들어가는 방법을 알아낸다.

#제 7 일
<피니스 아프리카에>에서 호르헤 노인과 만나게 되고 사건의 진상이 밝혀진다.
"희극을 논하고 웃음을 찬양한 서책은 얼마든지 있소. 왜 하필이면 이 서책이 유포되는 것을 그렇게 두려워하게 되었던가요?"라는 윌리암의 물음에 호르헤는
이렇게 대답한다.
"그것은 바로 아리스토텔레스라는 철학자가 이 서책의 저자였기 때문이오. 아리스토틀의 서책은 하나같이 기독교가 수세기에 걸쳐 축적했던 지식의 일부를 먹어 들어갔소."
"웃음이라고 하는 것은 허약함, 부패, 우리 육신의 어리석음을 드러내는 것에 지나지 않아요. 웃음이란 농부의 여흥, 주정뱅이에게나 가당한 것이오... 여기에는 웃음이 맡는 일 몫이 왜곡되어 있어요. 이 서책에, 웃음은 예술로 과대평가되어 있고,식자들의 마음이 열리는 세상의 문으로 과장되어 있어요. 이것이 철학이나 부정한 신학의 대상이 된대서야 어디 말이나 되는 노릇입니까?"

당시의 아리스토틀의 입지는 비록 그가 이교도였었지만 성인의 위치에까지 이르러 있었다. 따라서 그의 서책은 웃음을 정당화 시킬 수 있을 만큼 충분한 권위를 가지고 있었다. 그가 죽음으로써 이 서책을 감추려고 했던 이유는 아우구스티누스적 신학을 바탕으로 하여 거의 10여세기 동안 명예를 지켜왔으며 또한 자신의 가치관을 정립시켜 준 베네딕트 수도회에 대한 미련과 고집에 의해서 였을까, 이러한 지나친 믿음 즉, 광신은 어디에서 온 것일까?
이는 지적 혹은 이성적인 면과 영적인 면의 균형의 붕괴에서 온 것이 아닐까?
아드소는 그의 뒷말에서 그의 스승 윌리엄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자 이렇게 말한다.
"아, 바라건대 하느님께서 그분의 영혼을 수습하시되, 지적인 허영에 못 이겨 그분이 지으신 허물을 용서하시기를..."
이 말을 할 때 쯤에는 이미 아드소는 경험을 단순히 따르지만은 않았다라는 사실을 설명해주고 있다. 오컴이 말했듯이 이성으로 신앙을 설명할 수 없음을 아드소는 알고 있었던 것일까?
단순한 지식에로의 탐구에서 신앙에로의 복귀를 암시하고 있는 말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장미의 이름 이렇게 썼다◇◇◇◇◇◇

Posted by 유경은



여러분은 모두 『장미의 이름』을 읽으신 바 있습니다. 읽는 과정에서 혹시 작가 움베르트 에코 Umberto Eco의 저작의도를 궁금해하신 적이 없으십니까? 제가 우연히 접한 이 책 ( 原題 : )을 통해 여러분이 『장미의 이름』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었으면 합니다. (정리는 작자의 말을 그대로 옮기겠습니다)



▶ 제목과 의미

내 소설의 제목은, 쓰여질 당시에는 『수도원의 범죄사건』이었다. 그러나 나는 이 제목을 파기했다. 그 까닭은 독자들의 관심을 미스테리 자체에만 쏠리게 할 가능성이 농후하고, 독자들이 액션으로 갇그찬 약간은 황당 무계한 책으로 오해하고 책을 살까 두려웠기 때문이었다. 사실 나는 이 책의 제목을 『멜크의 아드소』라고 하고 싶었다. 결국 아드소가 화자 노릇을 하고 있기 때문에, 상당히 중립적인 데가 있는 이 제목이 썩 좋아 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출판업자들은 고유 명사로 된 책 제목을 좋아하지 않는다.

내 소설의 제목을 『장미의 이름』으로 하자는 아이디어는 실로 우연히 내 머리에 떠올랐다. 이렇게 부르고자 하고 보니 그렇게 마음에 들 수 없었는데 그 까닭은 라고 하는 것이 대단히 상징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장미의 상징적 의미는 그 정확히 의미하는 바가 잘 헤아려지지 않을 정도로 풍부하다. 단테의 라고 할 때, 이라고 할 때, 라고 할 때의 장미, 라고 할 때, 라고 할 때, 할 때의 장미…… 이런 것들만 보아도 알 수 있다. 그런데 이 제목이 내가 예상했던 대로 독자들의 주의를 산만하게 했다. 그래서 독자들은 하나의 해석만을 선택할 수 없었다. 혹 이 작품의 결론에 해당하는 시구에 대한 唯名論的 독서가 가능한 독자라도 맨 끝에 가서야, 나름의 수많은 해석 중에서 하나의 해석을 선택할 수 있다. 따라서 나의 결론은 이렇다. 제목은 독자를 헷갈리게 하는 것이어야 하지, 독자를 조직하는 것이어서는 안된다.



▶ 당연히, 중세

내가 이 소설을 쓴 것은 나에게 열망이 있었기 때문이다. 내가 믿기로, 이야기를 시작하는 이유로는 이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인간은 천성적으로 이야기를 좋아하는 동물이다. 나는, 한 수도사를 독살한다는 막역한 아이디어에 자극을 받고 1978년에 이 이야기를 쓰기 시작했다.
나는 , 소설 쓰기는 이렇게 시작되는 것이라고 믿는다. 나머지는 쓰여지는 과정에서 붙은 살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수도사를 독살한다는 아이디어는 1975년의 메모에서 이미 불특정 수도원의 수도사 명단을 작성했던 기록이 발견되는 것으로 보아, 그보다 훨씬 전에 내 머리 속을 맴돌았음에 분명하다. 그것뿐이다. 이 소설을 시작하면서 나는 우선, 20년 전 우연히,위스망(작가)에 대한 열정 때문에 세느 강변의 고서점에서 산 오르필라의 『독물논고』를 읽었다. 그러나 거기에 나오는 독물로 만족할 수 없었던 나는 생물학자인 내 친구에게, 특정한 속성(가령 손을 대면 피부로 흡수된다든다 하는)을 지닌 약이 없느냐고 물어보았다. 그러나 친구의 편지는, 받는 자리에서 찢어 버렸다. 그의 편지는 표면적으로는 내 겨냥에 합당한 독약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통보하는 답신이었으나 읽기에 따라서는 나와 함께 교수대로 가는 것으 거절하는 답신일 수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처음에 나는 당시의 수도원에 상주하는 수도사를 생각하고 있었다(처음에 내가 생각한 것은, 좌익신문을 읽을 만한 탐정 수도사였다. 이탈리아에는 좌익에도 또 좌익이 있다). 그러나 수도원이 되었든 수녀원이 되었든, 그 분위기는 생각만 해도 바로 무수한 중세적인 기억이 먼저 떠오른다. 그래서 나는 오래된 문서처을 뒤적여보았다. 나는 冬眠中인 중세학자가 아니던가(나는 1956년에 중세의 미학에 관한 책을, 1969년에는 같은 주제로 수백 페이지 짜리 책을 출판했고, 1962년에는 몇 편의 에세이를 산발적으로 발표하다가 제임스 조이스 연구와 때를 같이 해서 중세 전통 연구로 되돌아섰으며, 1972년에는 《요한의 묵시록》과, 리에바나 사람 베아토에 의한 주석서 해명의 방대한 연구에 몰두했으니만치 중세 문제라면 준비 운동은 충분하게 되어 있었던 셈이다). 나는 1952년부터 모아온 - 원래의 목적은 다소 막연한 것, 말하자면 중세 괴수사(怪獸史), 중세 분석 백과, 혹은 서명 목록론(書名目錄論) 같은 것을 쓰는 데 있었다 - 엄청나게 방대한 자료(파일카드, 복사물, 노트 등)을 뒤적였다.
그런데 어느 때부터인가 나는, 중세가 내 나날의 꿈인 바에야, 바로 그 시대를 배경으로 하는 소설을 쓸 수도 있지 않겠느냐는 생각을 하기 시작한 것이다.



▶ 가면

나는 중세에 쓰자고 결심하는데 그치지 않고, 중세 쓰기로 결심했다. 말하자면 그 시대 연대기 작가의 입을 통하여 중세라는 에서 이야기를 풀어나가기로 결심한 것이다. 내가 곧 話者인 수련사였다. 이로써 나는 장벽의 반대편에서 지나간 시대의 화자들을 바라볼 수 있었다. 그러나 이야기를 풀어나가면서 나는 당혹하고 말았다. 나는 얼떨결에 조명 아래로 노출되면서, 조금 전까지만 하더라도 공범자 노릇을 가장하고 있다가 조명을 받는 바람에 신분이 드러난 연극비평가가 되어 버린 기분이었다.

나는 중세의 리듬과 중세적 순진성에 익숙해지기 위해 끊임없이 중세의 연대기를 읽고 또 읽었다. 많은 경우 중세의 연대기 작가들은 내가 해야 할 말을 대신해주곤 했다. 그런 글들을 읽으면서 나는 나 자신이 의혹에서 해방되는 기분을 맛보아다. 나는, 이라고 했다. 은 아니었다. 그런데 이런 읽기 과정에서 나는, 작가들이면 누구나 알고 있는 아주 중요한 사실(그래서 우리에게 누누히 일러왔던 것)을 재발견했다. 그것은, 책이라고 하는 것은 끊임없이 다른 책을 언급하고 있다는 것, 이야기라고 하는 것은 끊임없이 이미 세상에 유포된 다른 이야기를 언급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그렇다면 내 이야기는, 잃어버렸다가 발견된 원고 이야기(당연한 일이지만 이것 역시 인용의 꼴을 하고 있다)에서 시작되기만 하면 될 터이다. 그래서 나는 바로 서문에 착수하면서 나 자신의 記述을 액자의 제4레벨에, 말하자면 세 화자의 이야기를 뚫고 들어가야 이를 수 있는 레벨에 두기로 했다. 그러니까 나는, 아드소가 썼다고 마비용이 주장했고, 마비용이 썼다고 발레가 주장하는 바를 쓰게 되는 것이다.



▶ 우주적인 사건으로서의 소설

소설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는 소설의 세계를 구축하는 작업이다. 이렇게 소설의 세계를 구축해 놓으면 언어는 거기에서 필연적으로 따라온다. , 즉 인 것이다.

소설의 집필을 시작한 첫 해를 나는 바로 이 소설의 세계를 구축하는 작업에 바쳤다. 중세자료가 소장되어 있는 도서관에서 발견될 수 있는 방대한 서명목록을 뒤적거리는 일도 거기에 포함된다. 이어서 나는 등장 인물이 될 만한 무수한 사람들의 인명과 성격의 자료까지 준비했다. 물론 이들 중의 상당수는 소설에서 제외되었다. 말하자면 나는, 소설에는 등장하지 않는 주변의 수도사들에 관한 자료까지 마련해야 했던 것이다. 독자들은 그들이 누군지 알 필요가 없다. 그러나 나는 알고 있어야 한다. 소설의 등장 인물에 관한 연구가 도시와 그 정밀함을 겨룰 수 있어야 한다고 했던 게 누구던가? 그렇다. 소설은, 심지어는, 도시의 설계도와는 겨룰 수 있어야 한다. 그래서 나 역시, 수도원의 각 건물을 제대로 배치하기 위해, 각 건물간의 거리를 정하고, 심지어는 나선형 계단의 계단 수를 정하기 위해 건축학 연구에
몰두했는가 하면 건축 백과 같은 책에 나오는 사진과 바닥 그림을 일일이 조사했다. 언젠가 나는 영화 감독 마르코 페레리로부터, 내 소설에 나오는 대화의 길이는 대화에 허용된 시간과 정확하게 일치하더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그럴 수밖에 없다. 가령 두 사람이 식품 저장고에서 회랑까지 걸어가면서 이야기를 나누게 될 경우, 나는 대화의 길이와 시간의 길이를 정확하게 계산하면서 말을 하게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목적지에 이를만한 시각에 그들의 대화도 끝나는 것이다.

내가 창조한 소설 세계의 가장 중요한 한 요소는 역사이다. 내가 중세의 연대기를 읽고 또 읽은 까닭이 여기에 있다. 중세의 연대기를 읽으면서 나는 모름지기 소설이라고 하는 것은 애초에는 작가의 머리 속에 없던 것, 가령 청빈을 둘러싼 논쟁, 소형제회 수도사들에 대한 심문관의 敵意 같은 것들도 소설 안으로 껴안아 들일 수 있어야 한다는 걸 깨달았다.

한가지 예를 들어보자. 이 책에는 왜 14세기의 소형제회 수도사가 등장하는가? 중세 소설을 쓸 생각이었다면 12세기나 13세기를 무대로 써야 마땅할 것이 아닌가? 실제로 나는 14세기보다는 12세기나 13세기에 관해서 더 많이 알고 있다. 그러나 나에게는 관찰력이 예민하고, 정황을 해석하는데 탁월한 안목을 지닌 조사관(가급적이면 영국인으로)이 하나 필요했다. 그런데 이러한 조사관은 프란체스코 수도회에, 그것도 로저 베이컨 이후에나 있을 수 있다. 뿐만 아니라 기호 해석에 관한 진보적인 이론은 오캄의 윌리엄 이후에나 볼 수 있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오캄 사람 윌리엄의 추종자가 필요했다. 물론, 기로 해석의 이론은 그 전에도 있기는 했다. 그러나 그 시대의 기호 이론이나 기호 해석은 기회의 상징성 해석에 머무는 것인데가가 다분히 기호에서 인식이나 관념을 읽는 쪽으로 기울어지는 경향이 있었다.
그래서 나는 부득이 이야기의 무대를 14세기로 잡지 않을 수 없었다. 이렇게 해놓고 보니 이번에는 쓰는 일이 쉽지 않았다. 12세기나 13세기에서와는 달리 14세기라는 시대에서는 내行步가 쉽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나는 14세기에 관한, 보다 정교한 독서를 통하여 14세기의 프란체스코 수도사라면 설사 영국이라고 하더라고, 오캄 사람 위릴엄의 친구이거나 추종이거나 知人이기만해도 청빈에 관한 논쟁에는 끼여들지 않고는 못 배기리라는 것을 알아내었다. (처음에는 내게 오캄의 윌리엄 자신을 조사관으로 삼을 생각도 없지 않았다. 그러나 나는, 이 위대한 박학 나으리에게는 인간미가 없는 것 같아서 이 계획을 중도에 그만두기로했다.)

왜 이 소설의 시간적인 무대는 1327년 11월 말이 되고 있는가? 이유는 간단하다. 12월이 되면 체제나의 미켈레는 아비뇽에 가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역사 소설에서의 소설적 소도구 배치가 어려운 까닭이 여기에 있다. 소설에 나오는 수도원의 계단 숫자 같은 것은 작가가 마음대로 정할 수 있지만 가령 미켈레의 움직임 같은 것은 실재인 역사적 고간 안에 이미 결정되어 있다. 따라서 이런 종류의 소설에서는 되도록 이 움직임에 근사하게 맞추어주지 않으면 안 된다. )
그렇다고 해도 11월 초순이나 중순은 조 이르다. 게다가 나는 수도원의 불목하니들로 하여금 돼지를 잡게 해야 했다. 왜? 이유는 간단하다. 그래야 피 항아리에 시체를 거꾸로 처박을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왜 시체가 피 항아리에 거꾸로 처박히는 일이 일어나야 하는가? 그 이유는, 《요한의 묵시록》에 따르면, 두 번째 나팔이 울리면 그런 일이 일어나게 되어 있기 때문이다……. 나로서는, 《요한의 묵시록》은 기존하는 세계의 일부이기 때문에 바꿀 수 없었던 것이다. 게다가 수많은 질문을 통해서 나는, 당시의 수도원에서는, 날씨가 추어지지 않으면 돼지를 잡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아내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더라
도 11월은 너무 이르다. 그래서 나는 수도원을 산중에다 배치했다. 처음부터 눈 이야기가 나오는 까닭도 거기에 있다. 이런 고충이 없었더라면 내 이야기의 무대는 폼포사나 콩퀘스 같은 평야 지대가 되었을 것이다.

미궁에 관한 것을 짚고 넘어가고 싶다.
내가 귀동냥으로 알고 있는 모든 미궁(내게는 미궁에 관한, 산타르칸젤리의 연구서가 있다)은 옥외의 미궁이다. 내가 아는 미궁은 모두 지독하게 복잡하고 그 구조상 와선과 곡절이 대단히 많다. 그러나 내게는 옥내의 미궁이 필요햇다 (옥외 장서관이라는 것이 도무지 가능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내게 필요한 미궁은 너무 복잡하면 안되었다. 길이 너무 복잡하고 방이 너무 많으면 공기의 소통이 안 될 터이고 공기의 소통이 안 되면 화재로 전소될 가능성이 그만큼 떨어지기 때문이다 (결국 내 계획에 따르면 장서관은 결국 전소하게 되고 잇었다. 이것은 우주론적-역사론적 귀결이다. 중세에는, 성당이나 수도원은, 불이 붙었다 하면 부싯깃처럼 탔다. 화재가 없는 중세를 상상한다는 것은 화염에 쌓인 채 떨어지는
전투기가 나오지 않는 2차 대전 영화를 상상하는 것만큼이나 힘드는 일이다). 결국 두세 달에 걸쳐 적당한 조건을 갖춘 미궁을 만든 나는, 여기에다 몇 개의 환기구를 배치하여 공기를 충분하게 공급하게 만듦으로써 대화재로 전소될 수 있게 했다.



▶ 누가 말하는가?

내 앞에는 문제가 산적해 있었다. 내게는 밀폐된 공간, 말하자면 고밀도 우주가 필요했다.
공간을 효과적으로 밀폐하기 위해서는, 내가 보기에는 단일한 장소는 물론이고 단일한 시간이 필요한 것 같았다 (어차피 단일한 행동이라는 것은 도무지 가능해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선정된 것이 베네딕트 회 수도원이었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베네딕트 회 수도원의 삶의 모습은 전례 시간에 따라 좌우된다.

대화의 문제가 특히 내게는 까다로웠지만, 내 경우, 모든 대화는 아드소에 의해 회고되기때문에, 모든 대화에다 아드소가 자신의 견해를 개입시키는 것이 분명하기 때문에 이 문제의 해결은 비교적 쉬웠다.

그런데 대화는 나에게 엉뚱한 문제를 던졌다. 중세의 대화가 과연 어떤 것이냐 하는 문제였다. 책을 쓰면서 나는 내 책에 나오는 대화가, 긴 와 아리아로 이루어진 경가극(輕歌劇) 구조로 쓰여지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아리아(가령 교회의 출입구에 대한 묘사)는 중세의 장중한 수사법을 모방한 것으로, 그 전형이 될만한 문장은 이루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이 있다. 하지만 대화는 어떤가? 나는 일정한 대목에 이르자 대화는 아가다 크리스티의 대화, 아리아는 수제나 생 베르나르를 모방한 것으로 보이지나 않을까 걱정스러웠다. 중세의 소설, 에 쓰여진 작품들을 정독한 뒤에야 나는, 중세의 話法에 관한 한 초라하나마 면허증이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인지 여전히 중세 사람들에게는 생소하지
않았을 터인 화법이나 시적인 용어를 섬기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 문제는 상당히 오랜 기간 나를 괴롭혔다. 그러나 나는 지금도 아리아와 레치타티보 사이의 音域을 바꾸는 문제를 해결한 것으로는 보이지 않는다.
또 다른 문제는, 목소리의 포장, 혹은 화자가 나타낼 견해의 포장과 관련된 문제이다. 나는, 이 소설의 가 다른 사람의 언어를 빌어 이 이야기를 하고있다는 걸 분명히 인식하고 있엇다. 물론 에서도 나는 아드소의 언어는, 비록 문헌학상으로만 기능하기는 하지만(하지만 이걸 누가 믿을 것인가) 적어도 다른 두 사람(즉 미비용과 발레 수도사)에 의해 여과된 것이었다는 사실을 밝힌 바도 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아드소의 일인칭 기술이 문제를 제기했다. 잘 아시다시피 아드소는 나이 여든에 이르러 열 여덟 살 때 겪은 일을 기술하고 있다. 그렇다면 정작 말을 하고 있는 사람은 누구인가? 여든 살이 된 아드소인가?
아니면 열 여덟 살인 아드소인가? 물론 둘 다 말을 하고 있다. 그런데 이게 기술적으로 까다로웠다. 그래서 나는 속임수를 쓰지 않을 수 없었다. 즉, 젊은 시절에 보고 느낀 것을 회상하는 대목에서 끊임없이 늙은 아드소를 등장시킨 것이다.

아드소는 나에게 대단히 중요했다. 처음부터 나는 한 사춘기 소년의 입을 통해 이야기(그 미스테리, 정치적, 신학적 사건, 심지어는 이러한 사건이 지니는 이중적인 의미까지)를 하게 하고 싶었다. 이때 내가 말하는 사춘기 소년은 문제의 사건을 경험하고 이것을 사진처럼 그려낼 수는 있되, 그 사건의 진정한 의미는 이해하지 못해야 한다(늙어서는, 곧 자기 스승도 가르쳐 준 적이 없는 적멸에 들기 때문에 끝내 이것을 이해하지 못해야 한다). 말하자면 나는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의 언어를 통해 독자들에게 이것을 이해하도록 만들고 싶었던 것이다.



▶ 암시적인 看過

아드소의 화법은 , 혹은 , 혹은 이라고 불리는 수사학적인 방법에 그 바탕을 두고 있다. 투더 왕조 시대의 다음과 같은 문장이 좋은 본보기가 될 듯하다.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할 경우를 생각해보자. 이 때 화자는, 다른사람이 다 알고 있는 것이니까 굳이 말할 것도 없다는 투로 이야기하고 있다. 그러나 실제로 이 화자는 정확하게 바로 그 뇌물 이야기를 하고 있다. 아드소도 이 방법을 자주 쓰고 있다. 아드소도 이 방법을 자주 쓰고 있다. 그는, 당시에는 익히 알려져 있던 어떤 사람이나 사물에 대해 말할 때마다 이 방법을 쓰고는 한다. 아드소의 독자들, 즉 14세기 말의 독일인들은 아드소가 말하는 사람들이나 사건에 관해 알 턱
이 없을 터인데도 불구하고 (14세기 초의 이탈리아 사람들 일이거나 이탈리아에서 일어난 사건일 것이므로) 아드소는 서슴없이 , 그것도 훈계조로 논의하고는 한다(어떤 사건을 기술할 때마다 백과 사전적인 관념을 서슴없이 끌어들이는 것은 중세 연대기 작가들에게 공통된 스타일이다).



▶ 독자

글을 쓸 때는 누구나 독자 생각을 한다.
소설의 경우 작품이 완성되면 텍스트와 독자 사이에는 대화의 채널이 이루어진다(여기에서 저자는 제외된다). 집필 단계에는 두 가지의 대화가 존재한다. 하나는 텍스트와, 이미 쓰여진 다른 텍스트와의 대화(책이라고 하는 것은 다른 책을 통해서, 다른 책의 주변에서만 쓰여질 수 있는 것이다), 또 하나는 저자와 그 저자의 모범 독자와의 대화이다.

저자는 책을 쓸 때 마음 속에 어떤 경험적인 독자를 상정하고 쓴다. 근대 소설을 확립한 리처드슨, 필딩, 디포우 같은 작가들(출판업자와 자기네 마누라를 위해서 쓴)도 그렇게 썼다.
그러나 그들만 그랫던 것은 아니다. 조이스 역시, 불면증에 시달리는 이상적인 독자를 상상하면서 소설을 썼다. 작가가 자기 작품을 기다리고 있는 대중을 위해서 쓰건, 돈을 위해서 쓰건, 아니면 새로운 독자를 만들기 위해서 쓰건, 글쓰기라는 것을 곧 텍스트를 통하여 자기나름의 독자를 확보하는 작업이다.
한 독자가 소설의 처음 백 페이지하고 하는 잠재적인 난관을 극복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를 지니는가? 그것은 다름이 아닌, 거기에 이어지는 것을 읽어낼 만한 힘을 지닌다는 뜻이다. 따라서 작가가 소설의 冒頭에다 백 페이지의 잠재적인 난관을 매설하는 것은 자기의 독자층을 조직하는 작업이지 다른 것이 아니다.

그러면 내가 소설을 쓰면서 바라던 독자는 어떤 사람들일까? 물론, 나의 장난에 함께 놀아나 줄 공범자이다. 나는 철저하게 중세적이고자 했고, 지금 이 시대를 사는 것처럼 중세를 살고자 했다(중세를 사는 것처럼 이 시대를 살고자 했다는 것과 마찬가지 의미를 지닌다).
그러나 동시에 나는 최선을 다해 하나의 독자 유형을 창조하고자 했다. 일단 통과의례 끝마치고 나면 나의 (내가 만든 텍스트의 밥이라는 편이 더 낫겠다)이 되는 독자, 텍스트가 주는 것 이외에는 더 이상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 독자를 창조하고자 했다. 텍스트라고 하는 것은, 독자들에게 변모의 경험을 뜻한다. 독잗르은, 섹스가 있고, 마지막 대목에서 범인이 드러나고, 그러면서도 액션이 철철 넘치는 범죄 소설의 구성을 원한다. 그러나 이런 소설을 원하면서도 동시에, 산송장과 악몽 같은 미궁, 범죄에 대한 죄없는 회오 같은 것으로 이루어진 낡아빠진 범죄 소설을 읽었다는 사실 자체를 창피하게 여긴다. 그래? 그렇다면 라틴 식 고전으 선사할 수밖에? 여자는 등장하지도 않는 소설, 신학이 난무하고, 그랑 귀뇰 극장의 단골 단막극처럼 몇 갤런의 피가 쏟아지는 소설을 쓸 수도 있다. 그러면 독자들은, 고 할 것이다. 그러나 바로 이렇게 생각하는 순간 독자
들은 내 것이 되어야 한다. 내 것이 되어, 세상의 질서를 아무짝에도 쓸데 없게 만들어 버리는 하느님의 無所不在와 전지 전능에 스릴을 느끼게 된다. 그런 다음에는 눈치 빠른 독자들은, 내가 독자들을 어떻게 이런 덫 쪽으로 유인해 왔는가를 깨닫게 된다. 왜? 나는 단계단계마다, 틈날 때마다 독자들에게 조심스럽게, 내가 독자들을 파멸로 이끌로 있다고 경고했기때문이다. 악마와의 계약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가 악마의 조건을 다 알기 전에는 절대로 악마와의 계약에 서명ㅎ지 않는다는 점이다. 악마의 조건을 모르는 사람이 어떻게 지옥에 떨어지는 징벌을 당할 리가 있겠는가?
독자들로 하여금, 우리를 전율하게 할 만한 일(말하자면 형이상학적인 전율을 느끼게 할 만한 일)을 기쁨으로 받아들일 수 있게 하고 싶었기 때문에 나는(무수한 플롯 중에서) 가장 형이상학적이고 철학적인 구조, 즉 탐정소서의 구조를 선택하지 않을 수 없었다.



▶ 역사소설

이런 의미에서 나는 역사소설을 쓰고자 했다. 우베르티노와 미켈레가 역사적인 실재 인물이고, 그들의 행위나 말이 역사와 거의 일치하기 때문에 내가 역사소설을 쓰고자 했던 것이 아니다. 윌리엄 같은 가공인물이, 그런 시대에서는 마땅히 해야 할 말을 해야 했고, 실제로 하고 있기 때문에 그랬던 것이다.

내가 이러한 목적에 얼마나 충실햇는지는 나도 잘 모르겠다. 내가 비록 후대 저자들(가령 비트겐시타인 같은)의 말을 슬쩍 끌어와 그 시대 사람의 말인 양 인용하고는 했지만 그렇다고 이런 목적을 도외시했다고는 보지 않는다. 나는 이런 인용의 주체를 내세울 때마다, 등장인물이 대단히 현대적인 중세인이 아니라, 중세적인 사고방식을 가진 현대인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나는 오히려 나 자신에게, 가공 인물들에게 전적으로 중세적인 사고 체계의 단편을 모아, 중세인들도 자기네 것으로 알아 보지 못할 정도로 정교한 개념을 만들어 내는 능력을 부여한 것이나 아닐까 자문하고는 한다. 그러나 나는 역사 소설도 마땅히 이런 일을
해야 한다고 믿는다. 과거를, 장차 올 것의 원인으로만 파악할 것이 아니라, 이러한 원인이 결과를 지어 내는 과정도 추적해 볼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만일에 나의 등장 인물이 두 가지의 중세적 관념체계에 견주어 보다 현대적인 세 번째의 관념 체계를 형성시키고 있다면, 그는 문화가 한 일을 그대로 하고 있는 셈이다. 만일에, 그렇게 헌신적인 사람의 발언을 써 낸 작가가 없었다면(공포와 이로써 당할 치욕이 두려워),산만하게나마 생각이라도 해 봐야 한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어쨋든, 이 책의 출판과 관련해서 참으로 내가 고소한 즐거움을 느꼈던 것은, 나는 정확하게 14세기의 텍스트를 인용하고 있는데도 이따금씩 독자나 비평가들이 나의 등장 인물이 지나치게 현대적이라고 지적하는 점이다.
물론 독자들은 참으로 탁월한 중세적 감각으로 그려진 대목이라고 하는데도 불구하고, 나는 부당하게 현대적이라고 보는 대목도 있다. 중요한 것은, 중세에 관한 한, 대부분의 경우는 부패를 떠올리지만, 우리 모두의 생각이 다르다는 것이다. 오로지 우리 같은 시대의 修道者들만 진실을 알고 있다. 그러나 그것을 언표하면 화형대에 걸릴지도 모르는, 대단히 위험한 진실이다.






◇◇◇◇◇◇◇<<장미의 이름>>◇◇◇◇◇◇◇


움베르트 에코의 소설을 영상으로 펼쳐놓은 영화 '장미의 이름'을 보았다. 이 영화를 보면서 다양한 방식으로의 해석이 가능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이 글에서는 이 다양한 접근을 철학적으로 시도하고자 한다. 여기서 시도할 철학적 접근은 '[1.이 영화에서 두드러진 보편 논쟁.] [2.호르헤 신부의 행동에 한 니체적 접근.] [3.영화의 내용에 대한 맑스적 접근.] [4.호르헤 신부와 윌리암 신부의 행동을 제약하는 이데올로기에 대한 라캉-알튀세르적 접근.]'의 순서로 이루어질 것이다. 쓰는 이의 배경 지식이 부족한 관계로 그리 깊은 논의는 전개되지는 못할 것 같다는 말을 미리 해둔다.


1.보편 논쟁에 관하여

영화의 내용에서 보면 가장 주된 대립의 축은 기존 성직자를 대변하는 호르헤 신부를 중심으로 하는 베네딕트파와 교회 내부의 개혁 세력을 대표하는 윌리암 신부를 중심으로 하는 후란씨스코파의 대립이다. 이들 사이의 대립은 직접적인 물리력을 사용하는 대립 대신에 철학적.신학적 논쟁을 통해서 전개된다. 이것의 논쟁의 사이에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서 희극론이 끼어들고 있는 것이 이 영화의 내용이다.

베네딕트파에서 말하고 있는 단면들은 다음과 같은 것을 통해 드러난다. 식사 때 한 수도사가 '묻기 전에는 대답하면 안 된다. 웃어서는 안 된다. 품위를 떨어뜨리면 안 된다.'라는 말을 한 것. 또 호르헤 신부가 윌리암 신부와의 논쟁에서 '웃음을 두려움을 없애며 이것은 악마에 대한 두려움까지 없애는데 이것 없이는 신에 대한 믿음이 없어진다'고 말하며 아리스토텔레스의 희극론에 대해서 비판하는 장면 등등. 반면에 후란씨스코파는 반대로 아리스토텔레스의 영향을 받아 신앙에서 이성을 강조하며 웃음을 받아들인다.

이러한 대립의 양상은 다만 철학적 논쟁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다. 철학적 논쟁에서의 후란씨스코파가 승리한다는 것은 기존의 교회 권위가 무너진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에 베네딕트파는 끝까지 이 논쟁에서 양보하지 않을 수밖에 없다. 즉 기존 교회의 부패를 비판하며 성직자의 청렴을 주장하는 후란씨스코파의 주장은 그것이 현실적이든 철학적이든 기존의 모든 교회 권력을 쥐고 이득을 보고 있는 주류 세력인 베네딕트파로서는 용납할 수 없는 것이다. 이것은 후란씨스코파의 단기적 기간의 관점에서 패배를 어느 정도 예상하게 해 준다. 하지만 장기적 관점에서 본다면 역사의 수레 바퀴가 정방향으로 나아간다면 후란씨스코파의 승리는 확실하다고 할 수 있다.

이런 대립은 실제 역사상에서도 나타났는데 그것이 바로 보편 논쟁이다. 실재론과 유명론의 논쟁이 바로 그것이다. 중세 초반의 교회의 철학은 아우구스티누스의 이른바 신플라톤주의였다. 즉 플라톤의 이데아의 자리에 신을 갖다 놓은 것인데, 이것은 신이라는 보편이 존재하며 개별자들은 모두 이 신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실재론적 주장이었다. "universaliis ante res" 즉 보편이 앞선다라는 주장으로 요약되는 실재론자들의 입장은 교회의 주류 세력으로서 자리잡고 있었던 것이다.

이에 반해 아리스토텔레스의 영향을 받아 나타난 중세 주류 철학을 해체하는 역할을 했던 또 다른 입장이 바로 유명론이다. 유명론은 "universalis post res" 즉 보편이 뒤따른다라고하여 잘못하면 신의 개념을 붕괴시킬 수도 있는 위험한(?) 주장을 하게 된다. 보편이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고 다만 이름뿐이라는 그들의 주장이 받아들여진다면 신이라는 것도 개념에 불과하게 될지도 모르니까. 이러한 주장은 로스켈리우스와 아벨라르두스를 거쳐 윌리암 오컴에까지 이어져 중세 주류 철학에 대해 상당한 위협을 가했다. 이 영화에서 후란씨스코파의 윌리암 신부의 이름이 '윌리암 오컴'이라는 유명론자의 이름과 같은 것도 우연이 아닌 듯.

결국 역사에서도 아퀴나스가 변형시키기는 했지만 실재론적 입장이 중세 기간 동안에는 유지되었고, 중세가 끝나면서 유명론의 입장이 경험주의로 나아간다는 것은 이 영화의 결말에 대한 일종의 예상을 가능하게 한다. 결국 유명론이 승리한다는 것은 인간의 자유가 넓혀지는 방향으로 역사가 진행한다는 암시가 아닐까하는 생각이 든다.


2.니체적 접근

니체라는 사람은 근대 철학을 해체하는 데 일조한 사람이다.

중세가 끝난 이후에 근대로 접어들면서 철학의 내용을 가득 채운 것은 신의 손아귀에서 벗어나는 일이었다. 그러면서 시작된 것이 데카르트의 그 유명한 말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이다. 이제 근대에서는 이성을 가진 인간 주체에 대해 탐구하기 시작했고 그 주체가 과연 중세에는 신의 이름으로 보장되었던 진리라는 것을 터득할 수 있는가하는 것이 중심 과제로 떠올랐다. 데카르트에서 시작하여 로크, 버클리, 흄, 칸트, 피히테, 헤겔 등이 다 같은 문제를 다른 방식으로 파고 들어갔던 것이다.

니체는 여기서 이러한 문제 의식에서 벗어난다. 그는 다른 근대 철학자들처럼 진리를 찾고 그것의 확실함을 보장하는 길을 가는 대신 왜 진리를 찾으려고 하는가하는 진리 의지를 탐구하기 시작했다. "진리는 없고 진리의지만 있다."라는 말이 그의 문제 의식을 잘 정리하는 말인 듯. 내가 찾고 있는 것은 진리가 아니라 진리라는 환상에 대한 유혹이고, 내가 추구하고 있는 진리에 다른 거짓된 지식을 복종시켜야 한다는 의지로의 유혹이며, 또한 거짓으로부터 사수되어야 한다는 착각으로의 유혹이며, 이걸 사수하기 위해선 다른 거짓을 전파하는 자들과 결연히 싸워야 한다는 신념으로의 유혹이라는 것이다.

호르헤 신부는 니체의 이런 문제 의식에 너무나 잘 부합하는 대상이다. 그는 희극이라는 것을 결코 용납할 수 없었던 사람이었고 이런 거짓된 지식에 대해 자신이 진리라고 생각하는 것들을 지켜야 한다는 진리 의지를 강하게 지녔던 인물이다. 그는 이 진리 의지를 가지고 진리라는 이름으로 거짓 지식을 익히려는 사람들을 죽음으로 몰아넣고 나중에는 자신의 진리가 무너지려고 하자 진리를 왜곡시킬 수 있는 문제의 희극론 책과 함께 자신을 불살라 버린다. 무서운 진리 의지를 지닌 인물이다.


3.맑스적 접근

이 영화를 맑스적으로 읽는다면 어떻게 될까?

맑스주의가 항상 피억압 기층 민중과의 접근을 시도하고 있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개인적으로는 이 영화에서 상대적으로 크게 부각되지 않은 돌치노파에 주목하고 싶다.

이 영화에서 베네딕트파는 물론이고 후란씨스코파조차도 중세의 한계에서 자유롭지 못함을 보여주고 있다. 즉 그들은 성직자들의 청렴은 강조하여 중세 교회의 개혁에 대한 가능성을 열어 주기는 하지만 세속에 대한 개입은 시도하지 않고 있다. 봉건 영주에 의해 착취받고 있었던 농민들에 대한 문제에 대해서는 관심을 두고 있지 않는 것이다. 또한 후에 돌치노파 수도승이 종교 재판을 받을 때 윌리암 신부가 그를 적극적으로 변호하지 못했던 것은 그들이 중세의 한계 속에서 머무르고 있다는 것을 극단적으로 보여준다. (물론 그 한계를 벗어나지 못했던 그들의 당시 상황에 대한 고려는 있어야 하겠다.)

반면 돌치노파의 수도승들은 스스로 부자들의 적임을 자칭하며 종교라는 것을 통해 일종의 혁명(?)을 꿈꾸는 사람들이다. 만약 이들의 주장대로 된다면 후란씨스코파의 영향보다도 더 큰 파장을 일으켜 중세 사회의 붕괴가 필연적이게 될 것이다. 이에 교황을 중심으로 하는 교회의 권위는 후란씨스코파보다는 돌치노파를 제 1차 제거 대상으로 삼고 이에 대한 종교적 숙청을 감행하려 한 것이다.

돌치노파에 대하여 감독이 제시하고 있는 것 중 다음 두 가지가 인상에 남는다.

첫째는 돌치노파 수도승이 화형 당하고 있을 때 화재가 발생하자 농민들이 돌을 들어 군인들에 대항해 그 수도승을 구하는 장면이다. 현대를 사는 지금 후란씨스코파의 주장들은 받아들여지고 있지만 돌치노파의 주장은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다. 아직도 피억압 계층은 자본주의 사회 속에서 중세와는 다른 방식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 영화에서 이 장면을 보고 노동자와 지식인 사이의 연대와 투쟁 가능성을 본다면 지나친 상상일까?

둘째는 마지막 장면에서 윌리암의 제자였던 앗소의 독백이 기억에 남는다. 앗소의 입을 빌어 감독은 스승이 너무 이론적인 것에만 머물렀다고 하며 비판한다. 물론 그 비판이 너무나 짧아서 인위적이다라는 생각이 들기는 하지만 이를 통해 감독의 의도도 돌치노파에로의 접근이 아니었을까 한다.

하여간 맑스주의자가 영화를 만들었다면 돌치노파에 대한 강조가 더해졌을 것이다.


4.라캉-알튀세르의 이데올로기론을 통한 접근(구조주의적 접근)

라캉과 알튀세르 사이의 이데올로기론에는 나중에 둘 사이의 철학적 결별이 있듯이 차이가 있긴 하지만 여기에서는 공통적인 모습을 중심으로 살펴본 후에 라캉식의 해석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알튀세르적인 해석을 통해 호르헤 신부와 윌리암 신부의 행동의 차이를 유발한 것이 무엇인가를 지적하고자 한다.

이 영화에서 호르헤 신부와 윌리암 신부 둘 사이의 공통점은 둘 다 그들의 행동을 추동하는 그 무언가가 있다는 점이다. 호르헤 신부는 왜 죽음을 택했는가? 윌리암 신부는 왜 떠돌이 생활을 택하게 되었는가? 물론 앞에서와 같이 니체식으로 진리의지로 파악할 수도 있다. 하지만 왜 그 진리 의지는 생기게 되었는가? 이를 이해하기 위해 이데올로기론을 도입하는 것이 좋을 듯하다. 즉 그 두 사람은 어떤 이데올로기에 의해 그런 행동을 자신의 참모습으로 인식하였기 때문이다.

라캉의 이론을 이데올로기론이라고 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깊은 연관은 있는 것 같다. 라캉은 언어를 통하여 주체의 형성 및 무의식,욕망의 형성을 설명하였다. 아마도 호르헤 신부와 윌리암 신부는 자신의 행동을 하면서 그것이 확고한 자신으로부터 나온 것이라고 믿을지도 모른다. 진리를 지키려는 또 새로운 진리를 발견하려는 그런 행동을 확고한 자신의 모습으로 보았을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는 그런 과감한 행동이 생겨나기란 어려울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라캉은 이 상황을 보고 이렇게 말할 것이다. 그런 그들의 행동은 타자에 의해 구조화된 것이라고. 즉 그들의 행동은 확고한 그들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라 타자라는 것에 의하여 구조화되어 있는 주체를 통하여 오인/승인되어 이루어진 것이다. 그들이 행동한 것이 아니라 타자라는 것이 그들을 통해 행동한 것이라는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그들은 구조에 의한 희생물(?)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라캉식의 해석에 약간의 난점이 발생하는데 그것은 타자라는 것을 언어를 중심으로 하는 기표에 중점을 두었기 때문에, 과연 언어가 이런 구조화를 완벽하게 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가 하나이고 다른 하나는 언어라는 단일한 타자에서 어떻게 서로 다른 주체(행동)이 나오는가 하는 문제이다.

이 지점에서 알튀세르의 이데올로기론을 빌어와야 할 것 같다. 알튀세르는 타자로서 라캉의 언어 대신에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를 두었다. 앞에서도 보았지만 호르헤 신부와 윌리암 신부의 대립이 단순히 언어에 의한 것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거기에는 교회 권력이라는 국가 장치에 대한 문제가 오히려 더 본질적으로 깔려 있다. 따라서 타자는 보다 유물론적으로 해석해야 두 신부의 행동의 절실함이 더욱 잘 이해될 수 있을 것 같다.

또한 라캉은 타자를 하나로 지정할 뿐만 아니라 주체화 과정인 호명도 단일한 과정으로 설명하였는데 이걸 가지고서는 두 신부 사이에 발생하는 행동과 관점의 차이를 이해할 수가 없다. 하지만 알튀세르의 이데올로기론을 빌어온다면 이 문제에 대한 어느 정도의 해명이 가능할 것 같다. 알튀세르는 이데올로기에 의해 단일한 주체가 생성된다는 생각을 거부하였다. 그는 다음 두 가지 상황을 제시했다. 하나는 이데올로기 내부에 갈등이 존재한다는 사실이고, 복수의 이데올로기를 통해 불려진 복수의 주체 사이에서 갈등이 있다는 사실이 다른 하나이다. 이런 생각을 받아들인다면 두 신부 사이의 차이는 규명될 수 있다. 두 신부는 갈등적 이데올로기와 호명된 주체 사이에서 어떤 주체를 선택할까 하는 자유를 가지게 되고 그 속에서 하나의 주체를 택하여 그것을 확고한 주체로 설정하고 행동하는 것이다.

특히 윌리암 신부의 선택을 보면 이는 더욱 확고하게 드러난다. 윌리암 신부는 원래 이단 심문관으로서 몇 가지 가능한 선택을 할 수 있었다. 교회의 종파로 도식화한다면 베네딕트파, 후란씨스코파, 돌치노파 중 하나를 선택할 수 있었다. 즉 그는 다수의 갈등적 이데올로기와 주체 사이에서 선택할 수 있었다. 그는 그 중 하나를 선택하고 죽을 때까지(아마도 그랬을 것이다. 호르헤 신부가 그랬던 것처럼) 자신의 주체를 확고하다고 믿고 행동하며 살았다.


이상 '장미의 이름'을 다양한 철학적 입장을 통해 접근해 보았다. 이런 다양한 접근이 이 영화의 이해를 폭넓게 할 수 있게 할 것이다. 글을 쓰면서 각 철학자들의 입장을 왜곡시키지 않았나 하는 걱정을 남겨둔 채 글을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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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이레님께 항상 좋은 꿈만 꾸시라고...

비누발바닥님께 언제나 영원한 촛불을...

찬타님께 귀여운 인형을...

털짱님께 털이 몽땅 뽑혀 날라가는 초강력 기계를... 에어컨 아닙니다...

sa1t님 힘내시라고...

chika님께 내년 여름에도 함께 해요...

그리고 모든 알라디너분들께 기억력 3초라 다 기억을 못하는 점 사과드리며

제 사랑을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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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은 가벼운 책을 함께 묻어달라고 할껍니다.

무덤 안에서까지 가슴 위에 무거운 것을 올리고 싶지는 않아요.

그럼 조그마한 문고판들이 제격일텐데,

딱히 떠오르는 책은 없네요.

제가 좋아하는 추리소설을 같이 넣으면 명부에서도 경기 일으킬 것 같고,

음, 이책으로 할래요. [젊은 시인에게 보내는 편지]

대학 때 술마시고 돌아오는 차 안에서 읽은 책인데,

당신은 자기의 밖을 내다보고 계십니다.

그러나 이제는 무엇보다도 그러지 말아야 할 때가 되었습니다.

누구도 충고를 해주거나 당신을 도와줄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그럴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단 한가지 방법밖에는 없습니다.

자기 자신 속으로 침잠하십시오. 그리고 그 쓰고 싶다는 욕구가

당신의 가슴 깊숙한 곳에서부터 뿌리를 뻗어나오고 있는 지를 알아보시고

만일 쓰는 일을 그만 둘 경우에는 차라리 죽기라도 하겠는 지

스스로 물어보십시오.

그렇게 릴케를 잘 알지도 못하는 데

이 구절만큼 가슴을 때린 구절은 없었습니다.

아직까지는 이 책을 무덤 안에 가지고 들어가고 싶습니다.

아, 그런데 저 납골당에 들어갈 계획인데, 그럼 태워야하나요?

그렇다면 많이 가지고 가도 될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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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09-21 13:13   URL
비밀 댓글입니다.
 

아침 출근(?) 두시까지 하는 출근을 아침 출근이라 할 수 있을까요?

하여간 출근하는 길에 엄마와 시장의 한 가게에서 파는 생선조림백반을 먹자고 합의를 했습니다.

열심히 걸어가서 먹고 돌아오는 길에 너무 추웠습니다.

제가 비가오길래 후덥지근할 줄 알고 니트 망사티를 입고 나간 것이 화근이었지요.

엄마에게 학원 열쇠를 맡기고 돌아와서 옷을 갈아입습니다.

그리고 그 틈을 타 알라딘에 들어왔습니다. 음. 점점 서재 폐인이 된 것 같습니다.

옷을 갈아입고 나가야하는데 얼었던 몸이 녹기 시작했나봅니다. 노곤합니다.

정말 출근하기 싫습니다.

위대한 철학자 가필드가 말했습니다.

세상에서 제일 싫은 건 월요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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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우맘 2004-09-20 15: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으흐흐흐....점점 폐인의 수렁으로 빠져들고 있는....소요님....^^

아영엄마 2004-09-20 16: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소요님, 저도 둘째 데리러 나갈 때 반바지, 반팔 티 입고 나갔다가 덜덜덜 떨면서 기다렸습니다. 으~ 무지 추워요!! 애들은 감기에 걸렸는지 코를 훌쩍~ 이궁...

_ 2004-09-20 17: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끄응, 그래도 주말에 처져 있던 알라딘은 월요일날 가장 활기찬거 같더군요 ^^

soyo12 2004-09-21 00: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진우맘님 /ㅋㅋ 저는 점점 진우맘님의 이쁜 직원이 되어가는 것 같습니다.
아영 엄마님 / 저도 지금 별로 몸이 안 좋아요. 갈아입고 간 옷도 그리 성공작은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버드나무님 / 확실히 그렇지요. 일요일날 집에서만 있는 외로운 저는 절대 이해 못합니다.^.~

soyo12 2004-09-21 01: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그러시구나. 저와 같은 직종이시구나,
한번은 제가 출근하는 걸 보고 저희 아파트 경비 아저씨께서는 노래방에서 근무하냐고 물어보시던데. ^.^;; 다행히 지금 몸 상태는 감기는 안 걸릴 것 같습니다. 하지만 추워서 무섭습니다.^.~

starrysky 2004-09-21 03: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감기 걸리심 아니되어요. 따끈한 거 드시고 따뜻한 이불 덮으시고 푹~ 주무시면 감기도 물러갈 겁니다.
비 온 후에 기온이 뚝 떨어져서 내일 아침에는 더 춥다고 하니까 옷 도톰하게 입고 나가세요. ^^